[제1시집『구름꽃』(1986)]
딸 자현慈炫에게 / 김주완
1
내 너에게 무슨 말을 하랴, 느끼면서 느끼지 못하면서 한 울안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의 질긴 혈연이 아니냐, 아버지와 딸이 한 가지 언어로 살아가면서 이제껏 말이 통하질 않았구나, 서로를 너무 몰랐구나,
내 너를 아는 듯, 너 나를 아는 듯 했지만 사실은 서로서로 너무나 모르며 살아 왔구나, 열세 살, 아직은 어리다면 어린 네 나인데 오늘은 네가 더 커 보이고 버겁기만 하다, 삼엄한 의장대의 분열처럼 질서정연한 네 논리가 차라리 섬직하다, 푸른빛이 도는 굳어진 네 사고思考가 써늘하다, 벽돌로 쌓은 영어囹圄의 공간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아직은 연한 순으로 있어야 할 사랑과 순수의 고운 결로 있어야 할 네 마음이 아니더냐, 이것 아니면 저것, 저것 아니면 이것이라는 단순한 이원론, 분명한 흑백의 논리 그것은 작은 틀 속에 세계를 집어넣겠다는 착오 같은 것이다, 무모無謀 같은 것이다, 어제의 친구를 오늘의 적으로 치부한다는 건 우리가 경계해야 할 무서운 일이 아니더냐, 쌀톨만큼한 손해도 보지 않겠다는 추하고 사악한 이기심이 사랑과 증오의 두 얼굴로 끊임없이 우리를 변신시키더구나.
어려운 세상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나, 혼란한 주변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구나, 힘든 대소사大小事가 너의 방위기제를 주선했구나, 인습을 나느냐, 관습을 아느냐, 그들이 만든 노예제도를 아느냐, 도덕을 아느냐, 윤리를 아느냐, 철학이나 법률의 근본을 너는 아느냐, 죄가 무엇인지 벌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르는 구나.
2
순간의 진실이 모여 한 줄로 연결되면 영원의 진실이 될 것도 같은데 사실은 이가 그렇지를 못하구나, 직선의 최하 단위를 여러 개 연결하면 긴 직선이 된다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겠느냐, 순간의 충실과 충실한 영원은 언제나 무관계 할 뿐이로구나, 누구에게나 역할이란 게 있더구나, 위치라는 게 있더구나, 모두가 짐이 많고 무겁더구나, 각자가 짊어진 위치가 그렇고 역할이 또한 그렇더구나, 모든 역할과 모든 위치에 모두가 만점이면 참 좋겠구나, 살아오며 행行한 내 허물이 몇 단인지 내 수치가 몇 두름인지 내 가책이 몇 축인지 내 갈등의 분량이 몇 말이나 되는지 나는 네게 설명할 수가 없구나, 해명도 변명도 주장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동굴 같은 내 방에 따뜻한 어둠이 감싸 오는 밤이면 밤마다 귓전을 찾는 소리가 있다.
「너희의 율법으로 나를 심판치 말라! 심판치 말라!」
전신을 진동해 오는 성인聖人의 음성이구나, 따뜻한 몸으로 만져지는 빛깔 고운 노래로구나.
모든 상대적인 것 속에서 지켜야 할 절대 하나를 나는 아직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지겨운 여명이 고역의 여명이 저만큼 다가오고 있는데 꼭 네게 해야 할 말 한 마디 마련하지 못하고 아직 자리 잡지 못한 나는 서성이고만 있구나, 앞은 아득한데 탈진하고 있구나, 답답한 속만 끓이고 있구나, 저절로 애비를 알 때까지, 말 한 마디 없이도 그냥 가슴으로 모든 것을 알아차릴 때까지 내 하염없이 기다릴 밖에, 오늘은 할 말이 없구나, 아무것도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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