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 시집 수록 시편/제1시집 구름꽃[1986]

지하다방 / 김주완

김주완 2011. 3. 1. 13:13


[제1시집『구름꽃』(1986)]



지하다방 / 김주완


늘 그렇듯이 계단을 내려가며 우리가 찾는 것은 안락이다, 늘 그랬듯이 밤의 가파른 길목에서 한 걸음 늦게 도착하는 곳은 생소한 늪이다, 안타까운 수렁이다, 인공의 자연 속에서 개나리가 휘어지고 벚꽃 같은 게 잔 불빛으로 반짝이고 하얀 칠을 한 인공의 나무 둥치가 팔을 벌리고 초록의 넝쿨 화초가 늘어지고 한 발 앞서 간 사람의 기억이 빠져 나가고 인공의 공간에 아까운 황초가 울고 있다, 맑은 눈물 흘리며 슬피 슬피 울고 있다,


젖어야 한다, 속아서 젖어야 한다, 어느 곳에도 비는 오지 않는데 우선은 신기루처럼 젖어야 한다, 무엇에건 젖어야 한다. 이 삭막한 밤을 적셔야 한다, 젖는 자만이 풍요할 수 있거니


들어야 한다, 자목련 연한 눈 하나 촉 틔우는 소리, 백길 밑 암반 속을 흘러가는 물길 소리, 저 마른갈대의 항아리 너머 걸어오는 하얀 셔츠의 기계가 내는 저민 절규, 같은 각도로 꺾이고 세워지는 고단한 목뼈의 굴절음 아프게 아프게 내는 소리, 감추는 소리, 감추는 건 아끼는 것이다, 아껴 감추는 건 아픈 것이다, 진실로 아끼는 건 감추는 것이다, 그걸 들어야 한다, 듣는 자만이 사랑할 수 있거니,


이 바다는 많은 얼굴들이 참 그리웠던 얼굴들이 곳곳에 모여 있는데 파도에 쓸리며 서로의 언어들로 수런거리는데 내게는 먼 이국의 마네킹으로 아득히 먼 곳 가면의 마네킹으로 행진 하는데 표류의 악몽 속에서 허덕이는 의식 하나 지금은 건져 올려야 한다,


언제나 한 걸음 늦게 허둥거리는 저 아픔의 밀물과 썰물, 속진한 눈물 하나 지금은 감싸야 한다, 숨 가쁜 그들의 시간 안에서 물결처럼 빠져나가 아린 속살 한 점 지금은 다독여야 한다, 낮은 불빛 아래 끝도 없이 흔들리는 벽시계의 얼굴테가 지금은 아득한 슬픔인데 달려도 달려도 안개 속, 부서져도 꿰뚫어야 한다, 깨어져도 부딪쳐야 한다, 이 광막한 바다 복판을,

 

 



'제1~7 시집 수록 시편 > 제1시집 구름꽃[1986]'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저나무 / 김주완  (0) 2011.03.01
꿈의 의미 / 김주완  (0) 2011.03.01
[해설] 존재 본래의 자리에의 그리움 / 이하석  (0) 2011.03.01
[후기] / 김주완  (0) 2011.03.01
[판권]  (0) 2011.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