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사/대한철학회 『철학연구』지령 100호 특별부록]
보람ㆍ재미ㆍ걱정
김주완(33대 회장)
대한철학회 학술지 『哲學硏究』에 내가 논문을 싣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이다. 처음엔 책임실적을 만들기 위해서 싣는 정도였다. 차츰 논문 투고 횟수가 늘어났지만 나는 여전히 학회 운영에는 미온적으로만 참여하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나도 모르게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는 나 자신이 발견되지 않는가. 실로 그것은 내 자의가 아니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학술적으로 학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학회 활동은 학술적인 면 보다는 오히려 경영적인 측면에 치중되어 있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학회 활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법인 설립을 준비하면서부터이다. 1994년 말, 평소에 가까이 모시던 최종두 회장으로부터 대한철학회 발전기금을 유치하게 되었다. 기금 6천만 원과 학회운영비 1천만 원을 출연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 출연금에 대한 영수증 처리를 위해서는 법인 설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7천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당시 30평형대 아파트 한 채의 실거래가격에 버금가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 분은 철학이라는 학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분이었다. 철학에 애정을 가진 분도 아니었고 철학을 동경하는 분도 아니었다. 오로지 나와의 관계에서 거금을 쾌척하신 것이다. 그때도 고마웠고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아직 그 분에게 은혜를 갚지 못하고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학회에 관여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본다. 이런 저런 일들이 참 많았다. 강단에서 은퇴할 시기를 가늠하고 있는 지금, 그 동안을 돌이켜 보면 나의 학회 활동은 ‘보람’과 ‘재미’와 ‘걱정’으로 요약되는 것 같다.
1) 보람
첫 번째 보람은 역시 학회의 법인화 작업이다. 1994년 봄부터 시작한 일이 1995년 1월 17일에 마무리 되었다. 대구광역시교육청으로부터 사단법인 대한철학회 설립허가가 나온 날이 바로 1995년 1월 17일이다. 법인화가 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나 국내의 전국규모 철학회로서는 처음으로 법인화 되었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앞으로 기업이나 독지가들이 출연을 해 주었을 때 법인세법 상의 손비처리를 할 수 있는 영수증을 정식으로 발행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또 한 가지, 법인의 기본재산에서 나오는 이자수입으로 매년 학회운영경비를 일정부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이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작업과정에서 나는 이남원, 문성학, 이윤복, 장윤수, 유철 교수1) 등과 함께 일했다. 우리는 그 때 매주 1~2회씩은 만났고 하계방학엔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에 임시로 열어놓은 학회 사무실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였다. 사무실 창문들을 활짝 연 후에 바닥에 물을 뿌리고 새로 구입한 선풍기를 틀어 놓으면 그 여름의 무더위도 오히려 우리에겐 쾌적하기만 했다. 장윤수 교수는 대구광역시 교육청 관련 업무를 전담하였고 이윤복 교수는 법원 등기관련 업무를 전담하였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법인의 기본 틀을 잡는 사무 처리와 서류정비에 주력하였다. 설립당초 임원은 영남권, 충청권, 호남권 원로교수님들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이분들의 임원취임 서류와 인감도장을 날인 받기 위하여 당일에 자가운전으로 대전과 광주를 한달음에 다녀오기도 했다. 운전은 문성학 교수가 하였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말발이 센 사람이다. 운전을 하면서도 그만이 가진 초광속 순발력에서 나오는 재담을 계속 쏟아놓는 정력을 과시하였다. 동승했던 나와 이윤복 교수는 한편으로는 기가 죽고 다른 편으로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르는 최면상태 속에 혼곤히 빠져 있기만 했다. 이 일을 하는 기간 동안 우리가 얻은 가장 소중한 것은 상호간의 친분을 두터이 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서로를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깊은 정이 들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경북대학교 철학과 동문 선후배 사이라는 태생적 접착력이 크게 작용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두 번째의 보람은 1997년 5월 30일에서 6월 1일까지 부산대학교에서 개최된 국제학술대회였다. 이 행사는 김위성 교수님(부산대)이 27대 회장으로 취임한 1996년 6월부터 기획되어 추진된 행사였다. 이 시기에 나는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었고 김도종 교수님(원광대)이 연구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김위성 회장님은 호탕하면서도 대범한 성품이었고 김도종 교수님은 기획력과 추진력이 뛰어난 분이었다. 김도종 교수님이 작성한 ‘통일문제’를 주제로 한 <학회지 60집 발행기념 국제 학술대회 개최 계획서>를 가지고 우리는 국회의원회관 박관용 의원 집무실을 방문하여 지원을 요청하였다. 박관용 의원은 김위성 회장님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박관용 의원이 다리를 놓아주어 우리는 통일부를 찾아갔고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통일부의 후원을 얻어내게 되었다. 1996년 겨울에서 다음해 봄 사이, 국회의원회관과 통일부를 찾아다닐 때 김위성 회장님은 부산에서 비행기를 타고 상경하셨고 나는 대구에서 밤 열차를 타고 올라갔으며 김도종 교수님은 전주에서 영업용 택시를 타고 달려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과 경비를 아끼기 위하여 하루 전쯤에 상경하여 숙박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내었다. 모두들 자기 주머니를 털어 출장비로 썼다. 국회의원회관 앞과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우리는 새벽에 만나 상의를 하고 서류를 점검한 뒤, 시간에 맞추어 면담을 하곤 했다. 처음 계획서상의 소요 예산액은 49,800,000원이었으며 이 중에서 4천만 원을 정부지원액으로 요청하였다. 이 돈을 지원받게 되면 절약해서 쓰고 적어도 1천만원이나 2천만 원은 학회재산으로 편입시킬 작정이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통일부에서 현금으로 지원한 것이 아니고 특별 담당관이 파견되어 모든 경비를 카드로 결제하고 발표자 사례비는 개인통장으로 입금시켜 버리는 바람에 학회재산으로는 단돈 10원도 편입시키지 못했다. 대회보 인쇄비는 통일부에서 출판사와 직접 계약하였다. 우리는 헛꿈만 꾸고 만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행사(대주제:통일시대의 철학)는 성공리에 치러졌다. 국회의원 두 분(박관용 의원, 이상희 의원)의 기조연설과 주제발표가 있었고, 당시 전라북도지사였던 유종근 박사도 주제발표를 해 주었다. 중국에서 3명의 학자가 입국하여 발표에 참여하였고 국내학자 30명 이상이 발표와 논평에 참여하였으며 지정종합토론자로 참여한 사람만 무려 20여명에 달했다. 행사의 실질적 준비는 부산대학교에서 모두 하였다. 동래 온천장의 명물 ‘허심청’에서의 리셉션은 성대하였고 객실도 훌륭하였으며 다음날 아침의 온천욕은 일품으로서 아직까지 잊지 못하는 기억이 되고 있다. 말 그대로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님들이 일사불란하게 힘을 합해 철저히 준비함으로써 완벽한 <‘97 대한철학회 국제학술대회>가 되었던 것이다. 김위성 회장님과 부산대학교 교수님들에 대한 감사는 아무리 드려도 여전히 부족할 뿐이다.
행사기간 중 연일 부산지역의 언론과 방송에서 이 대회를 소개하였고, 행사 첫째 날 저녁에는 국제신문에서 대규모의 좌담회를 개최해 주었고 6월 2일(월)자 27면에 특집전단기사로 보도해 주었다. 이 좌담회에는 김강일 교수(중국 연변대 정치학부)와 김도종 교수(대한철학회 연구위원장, 원광대), 그리고 내(대한철학회 편집위원장, 경산대)가 참여하였다. 사회철학 전공자로서 전국적 명성을 가진 부산대학교의 박준건 교수가 사회를 맡아 매끄럽고 심도 있게 좌담회를 이끌어 나갔다.
행사의 실제 총 경비는 2천 8백만 원 정도가 집행되었다. 당시의 화폐가치로서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부산대학교 측에서 동분서주하여 직접 스폰서 받은 금액이 4백여만 원, 통일부에서 지출한 돈이 나머지인 2천 4백만 원 정도 되었다. 대한철학회 창립 이래 최대 규모의 행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위성 회장님의 능력과 김도종 연구위원장님의 노고는 대한철학회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김도종 교수님은 연령적으로는 나보다 몇 년 아래였지만, 업무처리 능력이나 과감한 추진력이나 탁월한 학문적 역량과 사람을 감싸 안는 포용력에서는 나보다 몇 수 위였다. 그 분의 거인적 풍모 앞에서 나는 지금도 자꾸 위축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째의 보람은, 1997년 2월 6일 창립회장이신 허유 하기락 교수님이 타계하셨을 때 장례를 대한철학회장으로 모셨던 일과, 그로부터 5년 4개월 후인 2002년 6월 8일에 그분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는 학덕비를 건립한 일이다. 이 두 가지 일의 진행에서 나는 실무를 맡아 참여했다. 실무란 공(功) 보다는 과(過)가 돌아오기 마련이고 시간은 빼앗기고 몸만 고되기 마련이지만, 나는 이 일들을 참으로 즐겁고 보람차게 하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하기락 교수님의 마지막 제자로서 그 분에게 입은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학회의 일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은 도리를 어떻게 다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대한철학회에도 신세를 지고 있는 셈이 된다.
마지막으로, 보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기억에 남기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은 내가 33대 대한철학회장을 맡아 나의 재직학교인 경산대학교(현 대구한의대학교)에서 2003년 5월 17일에서 5월 18일까지 [학회 창립 40주년 기념 2003 봄 학술대회]를 개최한 일이다. 이 행사의 학술적인 성공여부는 차치하고, 첫 날의 만찬에 우리 대한철학회 역대 회장님들과 지역 원로 철학자님들을 초청하여 괜찮은 식당에 모신 일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싶다. 거동이 불편하시거나 노약하신 분들은 승용차를 보내어 모셔왔다. 파안대소하며 좋아하시던 그분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23대 회장을 역임하신 백승균 교수님2)(나의 박사논문 지도교수님)과 14대 회장을 역임하신 하영석 교수님3)(나의 학부 은사님)은 그 자리에서 ‘기특하고 고맙다’는 내용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나누셨다. “하학장님 이런 대접을 받는 것도 오늘이 끝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앞으로 누가 또 이렇게 챙겨 주겠습니까.” “그렇지요. 백총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나는 그날 오신 역대 회장님들과 지역 원로 철학자님들께 작으나마 특별한 선물도 마련하여 전해 올렸다. 그 때 그분들께 드린 선물 중의 하나는, 나의 재직대학 부속 한방병원에 특별히 의뢰하여 제조한 ‘고귀환’으로서 일명 고성능 한방 비아그라로 불리는 보약이었다. 연세가 아주 높으신 역대 회장님 한 분은 나중에 “그 약 좋더라, 더 구할 수 없느냐?”고 연락을 해 오셔서 다시 구해 드린 기억도 있다.
이 행사에는, 나의 은사이신 하기락 교수님과 함께 우리 학회를 창립하신 분으로서 7대 회장을 역임하셨고 현재도 수석 자문위원으로 계시는 민동근 교수님이 멀리서 특별히 참석하여 주셨다. 민동근 교수님은 이 행사뿐만이 아니라 우리 학회의 모든 행사에 지금까지 빠짐없이 참석하신다. 직접 참여하여 만드신 우리 학회에 대한 식지 않는 애정 때문이실 것이다. 큰 키에 깨끗하고 멋있게 늙으신 노학자이자 노신사이신 그 분의 모습을 뵈면 저절로 선망(羨望)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런 분이 노익장 하시면서 지금껏 후학들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것은 한국철학계의 홍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그 어른을 그날 밤 우리 대학 인근에 있는 ‘상대온천관광호텔’로 모셨고 다음날 출발하실 때는 약간의 여비를 억지로 주머니에 넣어 드렸다.
그 날 참석하지 못한 분들께는 개별적으로 서신을 쓴 후, 기념품들을 동봉하여 나중에 우송하여 드렸다. 그 서신중의 한 통은 제30대 회장이셨던 김득만 교수님에게 보낸 것으로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존경하는 김 득 만 회장님
지난 5월 17일 대한철학회 봄 학회는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김 회장님께서 참석하실 수 있었다면 더욱 성황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보내 주신 축전은 감사히 받자왔으며, 총회 석상에서 소개하였습니다.
발표 논문집과 당일 원로철학자 및 역대 회장님들을 위해 준비해 놓았던 기념품들을 동봉합니다.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만 아쉬운 마음의 표현으로 우송하는 것이니 기쁘게 거두어 주십시오. 고귀환은 우리 대학 부속병원에서 제조한 것으로 일명 ‘한방 비아그라’로 불리는 약입니다. 1일 1회 1정 복용이 알맞다고 합니다.
요양 중이시라는 소식은 진작 접했습니다만
아직껏, 찾아뵙고 문안 한번 드리지 못해 송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무쪼록 속히 쾌차하시어
환한 얼굴로 다시 뵈올 날을 기대하며,
가내 화평을 기원 드립니다.
2003. 5. 20.
경산대학교 김 주 완 드림
이 행사를 위하여 아낌없이 경비를 협찬해 주신 형설출판사 장지국 사장님과 김&송 성형외과 김덕영 원장님께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 번 감사를 올린다.
또 한 가지 이 행사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종합토론이 끝나고 <제1회 대한철학회학술상 시상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 상은, 28대 김길락 회장님과 32대 김도종 회장님이 임기를 마치고 이임하시면서 각각 200만원씩 학술상 기금을 기탁하신 것이 모태가 되어 신설된 것이었다. 32대 회장 이후, 대한철학회 회장직을 이임하는 분들은 빠짐없이 학술상 기금 200만원씩을 기탁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제1회 대한철학회학술상이 이때부터 주어진 것이다. 매년 심사경비 100만원이 지출되고 학술상 상금 100만원이 수여되도록 되어 있다. 학술상 심사규정에 따라 심사위원회는 매년 한시적으로 구성되어 전권을 가지고 수상대상자를 선정한다. 당시 제1회 수상자로는 고려대학교의 김종국 박사가 선정되었다. 수상대상자가 최종적으로 선정된 후에야 회장에게 보고된다.
그만큼 대한철학회는 민주화되어 있는 것이다. 회장이 특별하게 해야 할 일이 따로 없는 학회가 대한철학회이다. 각종 위원회 중심으로 학회 업무가 운영되며, 미리 편성된 예산의 범위 안에서 지출이 이루어진다. 특별한 기획행사가 있을 때는 특별예산을 따로 편성하여 집행한다. 따라서 대한철학회에서는 회장이 자의적으로 전권을 휘두를 여지가 아예 없다. 그렇게 되도록 제도화 해 온 것이다. 위원장들은 소신을 가지고 임기 중에 맡은 일을 해 나갈 수 있다.
2) 재미
학회 일은 재미있었다. 아니, 일이 재미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나 일을 끝내고 난 후에 사람들과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며 노닥거리는(담소하던?) 것이 재미있었다. 다른 대학들의 사정을 듣는 것도 유익하였다. 주로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식사나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고,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학회를 다녀오면서 전국의 유명한 관광지나 명승지를 둘러본 일들이다. 노래방에 가서 흐드러지게 풀어제끼고 논적도 몇 번인가 있다.
94년 12월 30일에는 대구의 앞산순환도로변에 있는 레스토랑 ‘르네상스’에서 학회의 법인화 추진에 참여한 몇몇이 모여서 조촐한 연말주석을 가진 적이 있다. 우리는 그때 법인설립신청 서류를 대구광역시 교육청에 이미 접수시켜 놓고 설립허가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큰일을 끝낸 후의 매우 홀가분한 기분으로 우리는 호기롭게 술잔을 기울였다. 생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우울한 분위기를 줄줄 흘리는 여자 가수가 통기타 반주에 실어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사람들은 술에 취하고 노래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했다. 우리는 그 여자 가수에게 칵테일을 한 잔 보냈다. 나중에는 우리 좌석으로 초청하여 술잔을 같이 나누기도 했다. 그때의 흥에 겨워서 나는 졸시 한 편을 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르네상스에 가면 / 가수 김시내가 있다 / 그녀의 노래를 듣다 보면 / 어느새 / 신화의 숲 가운데 서게 된다 / (중략) / 우리들 마른 / 육신과 영혼의 도식 사이로 / 서늘한 우울이 흐른다 / 그녀의 원근법이 에워싼 숲 그늘로 / 춤 추는 여린 손가락의 / 주술이 거느리는 힘의 거리만큼 / 수풀떠들썩팔랑나비는 / 지금 / 부르르 감전되고 있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주문 같이 / 잔잔한 그녀의 표정과 / 설운 노래에 사로잡힌 밤 깊은 시간 / 쾌적한 예속이 낯설지 않은 것은 / 저만큼 위험을 벗어놓고 넘어온 / 여기는 / 유년의 숲 속이기 때문이다 / 그녀가 다가오고 / 우리가 그녀 속으로 들어가는 / 원근법의 신화가 지배하는 / 르네상스에 가면 / 꿈 같은 / 가수 김시내가 있다 / 주문 같은 그녀의 노래가 있다
― 김주완, 「르네상스에 가면」 중에서 ―
물론 이 시는 시적으로 견고하지도 않고 나 자신도 만족스럽지 않은 시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시를 썼다는 이유로 그 후 나는 문성학 교수로부터 여러 해 동안 놀림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은 고통이었고 고역이었다. “시가 대단한 줄 알았는데 별 것 아니네. ‘집에 가면 마누라가 있다’, ‘강의실에 가면 학생들이 있다’, ‘뒷간에 가면 구더기가 있다’…. 나도 이제 시를 쓸 수 있겠다. 김주완 선배, 어디 가서 시 쓴다는 말 하지 마소” 문성학 교수의 야유는 대개 그런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문성학 교수가 밉지 않았다. 그의 야유 속에는 언제나 은근한 인정과 의리의 소와 고명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봄학회는 회장 교에서, 가을학회는 대학을 떠나 자연 속에서 개최한 적이 있다. 1995년 11월 11일에는 지리산 심원계곡, 속칭 ‘하늘아래 첫 동네’에서 가을학회를 하였다. 26대 이강조(경북대) 회장님 시절이었다. 서울, 대전, 전주, 광주, 부산, 대구에서 원로 교수님들이 많이 참석하신 성공적인 행사였다. 저녁식사 후에는 캠파이어가 있었다. 나중에 29대 회장을 역임하시게 되는 성진기(전남대) 회장님이 숙소 마당에 캠파이어를 준비해 놓고 사람들을 불러내신 것이다. 점잖은 철학교수님들이 지리산의 가을밤에 묻혀 술잔을 나누며 노래까지 돌렸던 비사가 만들어진 날이다. 이날 김도종(32대 회장/원광대) 교수님은 동료교수와 대학원생들을 한 무리 이끌고 봉고버스 편으로 들이닥쳐서 머릿수로 좌중을 압도하기도 하였다. 이남원, 이윤복, 조수동 교수 등 주류파는 밤을 새워 술을 마셨고, 당시만 해도 사이다 한 잔으로 자리를 끝까지 지켰던 문성학 교수(지금은 소주 2~3잔의 주량으로 발전하여 있음)의 독보적 재담과 웃음소리가 지리산의 뿌리를 아침까지 뒤흔들었다.
1996년 10월 5일에는 김도종 교수님의 주선으로 변산반도에 있는 원광대학교 임해수련원에서 가을학회를 하였다. 이때는 하기락 선생님과 한단석 선생님이 특별히 참석하셨다. 한단석 선생님은 이때만 해도 고급차로 분류되었던 검정색 그랜저를 운전기사에게 운전을 시켜서 멋있게 도착하셨다. 하기락 선생님은 4개월 후에 타계하시게 되지만, 이때만 해도 워낙 정정하셔서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식사도 많이 하셨고 잠도 잘 주무셨다. 아무도 깨지 않은 다음날 새벽에 임수무 교수님(계명대)을 살며시 불러내어 나와 둘이서 해수온천을 다녀왔다. 처음 경험하는 해수온천이라 피부가 따가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별로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일정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변산반도의 해안도로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시켜 먹은 왕새우 소금구이의 맛은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아마 10여명 이상이 들어가서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만큼 배불리 먹었던 것 같다.
1997년 11월 1일에서 2일까지 전라북도 자연학습원(무주 소재)에서 가진 추계학술발표대회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호남과 경남 일원 관광을 했다. 구례 장터에 들러 제첩국과 은어튀김도 먹었고 그림 같은 섬진강변을 달려서 피아골도 들렸다. 1999년 6월 21일, 전남대학교에서 개최된 춘계학술대회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무작정 해인사로 들어가 하룻밤을 자고 오기도 하였다. 조수동 교수(대구한의대)가 워낙 지리에 밝아 우리는 언제나 그의 안내에 따라 다녔고 그가 들려주는 유래와 해설에 귀를 기울였다. 그 후 몇 차례 그러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조수동 교수는 공간지각능력이 뛰어난 분이다. 전국 어디를 가든지 길을 잃거나 둘러가는 일이 없었다. 불교철학 전공자답게 뛰어난 논리력과 체계적 사고력이 언제나 돋보이는 조수동 교수는 체제 비판적 체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타고난 반골이었다. 철학자다운 지조가 돋보이는 참 철학자였다. 학문도 생활도 몸집도 흐트러짐이 없는 분이었다.
충청ㆍ호남ㆍ영남지역을 번갈아 가면서 개최하는 학술대회와 확대간부회의를 다니면서, 혹은 학회 업무로 대구에서 회의를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주로 어울린 사람들은 이남원 교수(부산대), 문성학 교수(경북대), 이윤복 교수(진주산업대), 조수동 교수(대구한의대), 장윤수 교수(대구교대) 등이었고 최근에는 아시아대학교의 김영필 교수, 신라대학교의 류의근 교수, 경북대학교의 문장수 교수, 김석수 교수, 임종진 교수와 대구교대의 배상식 교수 등이 합류하였다. 이윤복 교수, 장윤수 교수, 배상식 교수는 오래 동안 학회의 실무를 총괄하면서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이다. 모든 분들이 학문적으로도 확실한 자기 위치를 굳히고 있는 분들이지만, 학회 일에서는 더더욱 중요한 역할들을 하고 있는 분들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분들이 가지고 있는 높은 인격과 진한 휴머니즘, 그리고 학자적 양심과 지조에 존경과 애정을 보낸다. 한동안 만나지 못하면 근황이 궁금하고 얼굴이라고 한번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생긴다. 우정을 바탕으로 한 신뢰의 그물망이 우리를 엮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들과 만나면 언제나 술자리가 벌어진다. 질탕하고 퇴폐적인 술자리가 아니라 소박하고 인정이 넘치는 술자리이다. 서민적인 식당에서 안주 한 두 접시에 주로 소주를 마신다.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나이지만 분위기가 좋고 사람들이 좋아서 콜라 한 잔을 따라 놓고 나는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2차를 갈 때면 이들은 으레 나를 배려하여 해방시켜 준다. 못 이기는 체 하면서 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이들의 캐릭터와 정체성을 필설로 모두 옮길 수는 없다. 다만 몇 분만 언급한다.
김영필 교수는 키가 훤칠한 신사이다. 키가 있고 몸매가 있어 아무 옷이든 잘 어울리고 멋이 난다. 머리카락을 치켜 올리며 바람처럼 휘적휘적 걷는 걸음걸이가 일품이다. 노래방에서의 노래 솜씨는 가히 프로급이라고 한다. 일 처리도 그렇게 시원시원하게 한다. 재직하고 있는 대학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부총장으로서 난관을 잘 타개해 나간 분이다.
이남원 교수는 칸트 학자이면서도 동양적 멋을 지닌 분이다. 술을 즐긴다. 천천히 마시면서 오래 즐긴다. 그에게는 술이 반려자이고 연인이다. 그러므로 그의 내부에서는 두보와 이백과 같은 시경(詩境)이 언제나 풍겨져 나온다. 점잖고 너그럽고 어진 사람이지만 그래도 절도가 있고 일의 처리에는 정확성이 있다. 식사를 시작하면 술 마시기가 끝났다는 신호가 된다. 우리 중에 컴퓨터를 가장 먼저 익힌 사람이고 첨단 기기에도 잘 적응한다. 인자함 속에 거처하는 위엄이 은근히 다른 사람들을 압도한다. 문장이 깔끔하고 논리성과 체계성이 뛰어난 논문을 쓰되 양보다 질에 치중한다. 번역 실력이 대단하다고 정평이 나 있다. 속말로 그는 양반이다. 겸손할 줄 아는 실력자이다.
이윤복 교수는 의리의 대명사이다. 강원도 출신이라 억세게 든든하고 믿음이 간다. 하영석 교수님의 문하에서 이남원, 문성학 교수와 함께 칸트를 전공한 3인방으로서, 직계선배인 그들 두 사람에게 짓눌려 지낼 수밖에 없는 그는 비교적 늦게 전임교수가 되었다. 중등교원으로 근무하는 부인의 헌신적인 내조가 그로 하여금 긴 시간을 버티도록 해 주었다. 이윤복 교수는 오래 동안 학회의 재정관련 업무를 전담하였다. 순발력 있게 일하진 않았지만 한 치 빈틈이 없었고 숫자에 정확했다. 테니스로 단련된 그의 악력은 대단했다. 술이 취하면 “형님!” 하면서 내 손을 잡아 비튼다. 나는 찌그러지는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이 으스러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로 인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시 한편을 쓴 적이 있다.
12년째 시간강사를 하며 아직도 제도권 밖에서 방랑하고 있는 강원도 출신의 천재 철학자 L박사가 말했다.
―전 시대의 정보통제의 기법은 최소한의 정보제공에 있고 현 시대적인 그것은 최대한의 정보제공에 있다.―
한 때 우리는 궁핍의 시대를 살면서 먹을 것이 없어 생명을 줄인 적이 있었고, 이제 우리는 풍요의 시대를 살면서 참으로 먹어야 할 것을 찾지 못해 생명을 줄이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전 시대나 현 시대나 변함없는 한 가지는 포식자는 늘 포식자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배부른 돼지는 언제나 졸음에 겨웁고,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휑한 눈에서는 푸른 섬광이 문득문득 분출된다는 것― 그것이다.
― 김주완, 「자조」/ 철학자 이윤복, 전문 ―
류의근 교수는 이윤복 교수와 동기동창인데 훨씬 먼저 교수가 된 사람이다. 멀리 떨어진 부산에서 근무하고 있어 만날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지만, 만날 때마다 잔잔한 정이 전류처럼 통하는 사람이다. 학문이 깊은 만큼 속도 깊다. 인정과 도리를 아는 사람이다. 친화력이 돋보이면서도 할 말은 한다. 단정하고 말끔한 성격이다. 자신감으로 속이 가득 차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도록 해준다.
문장수 교수는 프랑스에서 학위를 하고 모과인 경북대학교 철학과에서 재직하고 있는 교수이다. 키가 너무 커서 조금은 구부정한 느낌을 주지만 수수하고 순수하다. 싱긋이 웃으면서 이야기 할 때의 표정은 단연 압권이다. 조심스러울 때면 으레 나오는 약간 어눌한 말투가 듣는 사람들에게 저절로 믿음이 가게 한다. 그는 좋아하지 않을래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학문도 사람도 진국이다.
배상식 교수는 우리 중에서 가장 젊은 교수이다. 외모도 심성도 단아하다. 90년대 말부터 학회 실무를 전담하였다. 대한철학회 학술상과 새한철학회 학술상을 모두 석권한 사람이다. 강사 생활에 매몰되어 있을 때 심한 스트레스로 몸이 많이 쇠약해졌지만 전임교수로 지위가 바뀐 지금은 완전히 회복된 것으로 안다. 다음 시대를 이끌어 가야 할 주역이다. 선배들 보다 더 훌륭한 학자로 성장하기를 우리는 모두 바라고 있다.
3) 걱정
철학이 죽어가고 있다. 아니 지방대학의 철학과가 빈사의 상태가 되어 있다. 어떤 대학들은 아예 철학과의 문을 닫아 버렸다. 시장경제 논리라는 괴물이 만들어낸 시대적 광기가 인문학의 몰락을 획책하고 있고, 그 거대한 물결 속에서 철학은 지금 익사하고 있는 것이다.
살기 위하여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 어제까지 철학자로 행세하던 전임교수들이 오늘은 철학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다른 전공을 기웃거리며 다시 석사과정을 시작하고 있다. 얼굴을 성형해서라도 교수 자리는 지키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으로는 더 이상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모두는 아니겠지만 일부는 배신자도 있다. 배신자는 자기의 행위를 배신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당한 사람은 ‘내 탓임’을 절감한다. 배신이란 궁극적으로 자기배신이기 때문이다.
학회의 실무를 담당할 인력들이 줄어들고 있다. 줄어든다기 보다 벌써부터 아예 찾을 수가 없다. 눈앞의 실익이 없는 일에 시간을 뺏기고 신경을 써는 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후속 세대의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것도 큰 이유가 된다. 그러나 비록 적기는 할망정 아직까지는 철학을 공부하는 다음 세대들이 남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은 학회를 외면하고 있다. 학회의 일을 기피하고 있다. 지금까지 학회의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들은 모두 전임교수로 취직이 되어 나갔는데…….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학회 일과 전임교수로의 진입은 상관성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학회 일에 살갑게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쓰는 중견교수도 많지 않다. 특정 학회가 죽든 살든 자신의 논문을 실을 지면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방 보다는 서울 쪽에 가서 활동하고 싶어 한다. 사고가 권력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목만 자꾸 자라는 해바라기가 되어 마침내 허약해진 목이 부러지고 말지라도 당장은 태양을 향해 달리고 싶은 것이다. 누가 그것을 나무랄 것이며, 누가 그들을 제지할 것인가?
이러한 나의 걱정은 다만 걱정일 뿐이지 대책도 없고 대안도 없다. 이와 같이 소용없는 걱정을 내가 하고 있다는 것은, 나의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에 다름 아니다.
4) 마무리
글을 쓰다 보니 1)보람 부문과 2)재미 부문의 분량이 많아졌고 3)걱정 부문의 분량이 가장 적어졌다. 그러나 분량과 소감이 반드시 정비례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심각한 걱정에는 우리가 다만 빠져들 뿐이지, 말로써 그것에 대하여 중언부언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한다면 학회 일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재미 부문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재미있으니까 짧은 기간이나마 깊이 빠져서 일을 할 수 있었고 지난 후에도 그것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싶은 것일 게다. 사람들과의 소중한 만남, 그들이 가진 장점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그들을 닮고자 했던 시간들, 내 기억 속에 남은 그들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들,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학자적 모습들, 그 모두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나의 귀중한 재산들이다.
재미라는 측면에서 가장 감사하고 싶은 사람이 문성학 교수이다. 그는 세상을 펄펄 날고 있는 불세출의 인물이다. 학문적 능력과 활력은 말할 것도 없고 날카로운 비판력과 번뜩이는 순발력, 불칼 같은 정의감과 넘쳐나는 재담은 100년에 한 사람이 나올까 말까 한 사람으로 그를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많은 선배와 동학, 그리고 후학들이 그를 외경시하거나 경원시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그를 표피적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그의 속에 있는 자정(慈情)의 속살은 연한 분홍빛임을 나는 안다.
문성학 교수여! 부디 늙지 말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청청하시라!
그를 주제로 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쓴 적이 있다.
뛰고 달리는 물줄기이다.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니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허섭스레기를 갈라내고 뒤엉킨 덤불들을 걷어내며 달린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정연하고 시원하며 밝아진다. 어둡고 어지러운 곳이 그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바람을 가르는 질주이다. 산처럼 일어나는 먼지는 저만치 뒤따라 느리게 온다. 사막 가운데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향하는 그는 낙타가 아니라 준마이다. 키가 커서 멀리 내다보는 눈망울이 서늘한 적토마이다. 뚫어야 할 것이 있는 자가 그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사유는 송곳이고 말(言)은 칼이다. 그 끝에 감도는 푸른빛은 전기적 파장을 날카롭게 방출한다. 살에 닿으면 살이 베이고 눈에 닿으면 눈이 먼다. 그러나 멀리서 보고 들으면 듣는 자는 신명이 난다. 재미가 있다. 여운이 길게 남는 얻을 것이 있다. 정신의 지주(支柱)를 세워야 하는 곳이 바로 그가 있어야 할 자리이다.
― 김주완, 「쾌도난마」/ 철학자 문성학, 전문 ―
장윤수 교수를 그리며 글을 마무리한다. 작은 거인 장윤수 교수, 그와 교분을 가지게 된 것을 나는 자랑으로 여긴다.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그는 빈틈이 없다. 외모도 단단하고 내면도 강건하다. 그 역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싶은 걸출한 소장학자이다. 나이로는 나보다 한참 아래지만 나는 그를 소홀히 생각할 수 없다. 그의 카리스마는 굵은 동아줄을 연상시킨다. 작은 키와 깡마른 몸집만 보고 그를 평가한다면 큰 코를 다칠 수 있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선비이자 신앙인이다. 그가 검도 고단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동양철학을 전공하여 일가를 이룰 정도인 그가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장윤수 교수여! 고맙고 미쁘고 아름다운 사람이여!
<2006.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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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분들에 대한 존칭 접미사는 생략한다. 나와는 워낙 절친하고 가까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존칭을 고집한다면 그분들이 오히려 불편해 할 수도 있다.
2) 백승균 교수님은 2006년 11월 현재, 칠순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동안(童顔)에 미소를 머금으시며 개인연구소 「운제 아카데미」에서 서울과 부산 등 전국에서 몰려드는 후학들을 맞아 오늘도 원전을 읽으시고 번역을 하시면서 쉼 없이 저술을 내어놓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백승균 교수님은 사단법인 넷향기(http://www.nethyangki.net/)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동영상 강의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으시다. 아름다운 모습과 주옥같은 말씀들을 인터넷을 통해서 무한 송출하신다. 향그로운 사이버 세상을 지향하여 올바른 가치관 회복운동을 전개하는 이 사이트에서 동영상 강의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은 모두가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저명인사들이다.
3) 하영석 교수님은 2006년 11월 현재, 심한 당뇨로 복막투석을 하시면서 자택에서 투병 중에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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