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칠곡군 왜관읍 아곡리 산 71번지 선영
[전면]
의성인 아산장 김중원 부인 벽진인 이호기 합장
누룽국수 | |
장맛비 내리는 여름 저녁 때 중년의 어머니가 콩닥콩닥 누룽국수를 밀고 있다.
뒷밭에서 갓 따온 애호박 솜털이 마루 끝에서 저절로 뽀송뽀송 일어서고 있다.
투명한 모시 중우 적삼 바람처럼 입으신 옥골선풍 아버지가 추녀 밑에 뒷짐 지고 서서 깨어나는 남쪽하늘 건너다본다. |
짚불에 구워 뭉글뭉글 부풀어 오른 국수꼬랑지 하나씩 들고 입술 까매지도록 아삭아삭 베어 먹는 아이들 거기 있다.
물방울 거품 일으키며 흙을 싸안고 마당 끝으로 달리던 황토 작은 물줄기가 어느새 큰 도랑으로 성큼 나서고 있다.
둘째 아들 김주완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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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면]
김중원(金重源) : 1917년 5월 7일 월요일 생 / 1991년 6월 8일 토요일 졸
이호기(李浩基) : 1916년 2월 20일 일요일 생 / 1987년 1월 19일 월요일 졸
아버님(金重源)은 서기 1917년 5월 7일 월요일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반계리 315번지에서 아버지 영복(金銢福)님과 어머니 벽진 이씨(碧珍 李氏) 경후(慶厚)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형이었던 첫째 아들 임득(壬得)님은 3살(1911.10.31.~1913.3.15.) 나이로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실제로는 맏아들이셨다. 아버님이 처음 쓰신 관명(官名)은 활원(活源)이었고 다른 이름은 원택(源宅)이었으며 자(字)는 치명(致溟) 호(號)는 아산장(牙山莊)이셨다. 아버님은 시조이신 신라 경순왕자 의성군 석(錫) 할아버지로부터 31세손이며, 고려금자광록대부태자첨사(高麗金紫光祿大夫太子詹事) 의성군 중서성(中書省) 참지정사(參知政事) 용비(龍庇) 할아버지로부터 24세손이며, 고려문과가의대부(高麗文科嘉義大夫) 이태조원종공신(李太祖原從功臣)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문절공(文節公) 용초(用超) 할아버지로부터 19세손이며,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 관란제공(觀瀾齊公) 여권(汝權) 할아버지로부터 12세손이시며 직계이신 노회당(老悔堂) 정(桯) 할아버지로부터 4세손이시다. 어린 아버님이 두 살로 접어들던 1918년 역질(스페인 독감)로 할머니 함안 조씨(咸安 趙氏) 양선(陽仙)님과 아버지 영복(銢福)님이 하루 사이로 돌아가시자 홀어머니 경후(李慶厚)님과 역시 홀로 되신 할아버지 태기(泰基)님의 슬하에서 외로이 자라셨다. 4대 독자인 어린 아버님은, 할아버지, 어머니, 아들의 단 세 식구인 단출한 가정에서 바람 앞의 등불로 성장하셨다.
어머님(李浩基)은 1916년 2월 20일 일요일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명곡리(홈실)에서 아버지 벽진 이씨 완석정(浣石亭) 후인(後人) 우복(愚復)님과 어머니 김수(金洙)님의 4녀중 2녀로 태어나셨다. 어머님의 큰집은 벽진 이씨 완석정파 대종가이었으며 담을 사이에 두고 아랫집 윗집에서 사셨다. 어머님의 백부이신 종손이 25세에 사망하자 어머님의 사촌 오빠 종손인 이영기(李瀯基)님은 그 때 불과 3세의 어린 나이였던지라 종가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따라 어머님의 아버지 우복님이 형을 대신하여 종가 사랑채에 기거하면서 종가 일을 30년간 보살피고 불천위제사를 모셨으며 높은 학덕으로 후학 수 십 명을 양성하셨다. 어머님은 자라면서 손이 부족한 종가 일을 거들면서 살림을 배우셨다.
1932년 아버님이 16세 어머님이 17세가 되시던 해에 두 분은 결혼하셨다. 용모가 준수하신 아버님이 방에 들어서면 처가 식구들은 모두 방이 환해진다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결혼 후 어머님은 칠곡군 석적면 반계리에서 시집을 살고 젊은 아버님은 집을 떠나 수년 동안 성주군 초전면 명곡리 처갓집 종가 사랑채에 머물면서 빙장으로부터 한학과 서예를 사사하셨다. 식사는 앞집인 처가에 와서 하시고 생활은 안집인 종가에 가서 하셨다. 아들을 빙장에게 맡겨 놓은 아버님의 어머니(이경후)는 짠지와 같은 반찬을 자주 해서 사돈댁으로 보내셨다. 아버님이 가지셨던 대쪽 같은 선비의 지조와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강철 같은 의지와 소명의식, 불의에 맞서는 불칼 같은 성품은 그 때 형성되셨다. 아버님은 사서삼경에 통달하셨고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으셨다. 또한 서예는 높은 경지에 이르시어 여러 문중의 비석 글씨와 병풍 글씨 등을 남기셨다. 어머님은 한 배로 12남매를 출산하시어 6남매는 가슴에 묻고 남은 6남매를 정성과 자정으로 키우셨으며 마침내 집안을 번창하게 세우셨다. 넉넉지 못한 살림을 일구며 두 분은 자녀 교육에 평생을 헌신하셨다. 자녀에 대한 어머님의 염려와 배려에는 밤낮이 없었고 계절도 없었다. 늘 수심이 가득했던 어머님의 표정에 싸여 솜이불 같은 품 안에 묻혀 남은 6남매 자녀는 탈 없이 장성하였다. 그러한 덕분으로 아랫대는 관계 학계 교육계 사업계에 진출하여 제 몫을 다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주로 학계와 교육계에 종사하는 후손들이 많다. 손자 대에서는 서울법대 출신이 2명이나 나왔으며 연세대 법대 출신과 포항공대 출신이 각각 1명씩 나오기도 했다. 예술가와 사업가로 착실하게 성장해 가는 손자들도 있다.
어머님은 싸락눈 뿌리는 겨울날 오전 향년 72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그 후 4년간 아버님은 술을 벗 삼고 여행을 낙으로 삼아 외로운 노후를 보내시다가 장마가 다가오는 초여름 날 새벽 향년 75세를 일기로 어머님 곁으로 영원히 떠나 가셨다. 그날 이후 아버님과 어머님은 이곳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아곡리 선영에서 영겁을 하루 같이 대대손손 아랫대의 번영과 복락을 살피고 계신다.
[측면]
2006년 4월 한식일에 자녀 6남매 내외가 이 비석을 세우다
아 들 |
김 주 정 |
며느리 |
창녕 |
조 경 희 |
딸 |
주 숙 |
사 위 |
벽진 |
이 용 기 |
딸 |
주 옥 |
사 위 |
반남 |
박 충 언 |
아 들 |
주 완 |
며느리 |
창녕 |
조 경 환 |
아 들 |
주 동 |
며느리 |
진성 |
이 복 희 |
아 들 |
주 용 |
며느리 |
광주 |
이 남 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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