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시]
가셔도 가시지 않았으니
― 허유 하기락 선생님 영전에 ―
김주완
Ⅰ.
선생님!
허유 선생님!
때아닌 계절, 음력 섣달 그믐에
저리도 자욱한 국화 숲에 누워서
가시나이까,
정녕 가시나이까.
지리산 백무동 골짜기를 밟아 올라
저물녘에 벽소령을 옆으로 끼고
표표한 발걸음으로 홀로 이르시던
세석평전을 거기 그대로 두고
저만큼 천왕봉을 거기 그대로 두고
노동자 농민이 자주인 되는 날이
아직도 아득히 멀기만 한데
힘의 무게에 눌려 질식하는
저 가련한 산업민주화는 어찌하라고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와 “사회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가
서로 조화하여 21세기로 향하는
인류전체의 연대와 화평의 지침은 어찌하시고
가시나이까
선생님,
그리도 성큼성큼
정녕 가시나이까
허유 선생님!
Ⅱ.
선생님은 가셔도
그러나 가시지 않았으니,
대학의 도서관마다, 거리의 서점마다
연구실의 서가마다
삶의 무게를 지탱하는 지주로 남으시고
후학들의 가슴에 심어진 말씀으로 있으시니
돌아보면 사방에 선생님이 계십니다.
세우신 학문과 닦으신 실천이
높고 맑아 고결하셨으며
고결하였으므로 타협을 싫어하신 성품은
때로는 외로울 수밖에 없었고
더러는 주변에 담을 쌓기도 하였지만
눈 앞의 것보다 훨씬 먼 데까지 내다보는
지혜자의 순수한 모습은
마침내 대중을 끌어당겨
사상과 존재가 일치하는 진리보다
말과 사상이 일치하는 진실이
진정한 도덕적 가치임을 깨치게 하여
제각기 최선의 자기를 건설케 하였습니다.
없음으로서의 있음,
항시 비워둠으로서 가득함,
허(虛)의 현실 저편에 빛나는 유(有)의 이상을
바라보며 노력하는 것이 곧 인간의 천분임을
두 자 아호 허유(虛有)로 쓰시면서 가르치신
둔각을 깨뜨려 감싸안는 예각적인 교훈이
저희에게 대하여 있는 한
선생님은 가셔도
영원히 가시지 않았나이다.
Ⅲ.
이제 선생님 가시는 곳
경남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 늘밭,
거기는
당신의 눈 속에 흐리고 흐리던
역사가 빨아낸 자유의 빛깔도 돌아오고
앓는 공화국의 우울한 침묵도 걷혀지며
생전에 그리도 아끼고 사랑하시던
지리산 힘찬 준령
형제봉, 칠선봉, 촛대봉, 연하봉, 제석봉을
아침 저녁으로 마주하여 대하시고
먼저 떠난 문인, 철학자 그리고 아나키스트
맑고 맑은 지인들과 만나시어
시원하게 넘쳐나는 담소를 종일토록 나누실 곳이오니
허유 선생님!
여든 여섯 해의 풍상과
칡넝쿨처럼 질긴 이 땅의 속박은 벗어시고
늘밭에서 고이 영면하소서.
맑은 새벽 하늘
겨레와 철학과 자유를 지키는 별로 뜨셔서
남은 저희 오래 끌어 주소서.
※ 고 허유 하기락 박사 대한철학회장례 영결식장(1997. 2. 6. 대구시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낭독된 조시임
※ 대한철학회, 『철학연구』, 제64집, 1998. 2. 3. ⅸ-ⅺ.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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