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철학연구] 제46집, 대한철학회, 1990.07.25, 169~190쪽.에 수록되었음.
H. G. 가다머의 놀이와 예술작품
김주완(대구한의대)
1. 들어가며
1960년에 출판된 가다머(Hans Georg Gadamer)의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 : Grundzüge einer Philosophischen Hermeneutik)은 “20세기의 기념비적인 작품1)이라고 리차드·E·팔머는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저작의 출판에 따라 해석학 이론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고, 딜타이의 정신과학을 위한 방법론의 기초로서의 해석학 개념이 극복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전의 방법론적 해석학이 가다머에 의해 철학적 해석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하이덱거에 뿌리를 둔 가다머 이론의 기본적 입장은 근대미학의 주관주의적 위험성에 대한 비판과 현대의 방법론 위주의 과학기술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가다머의 논지는 예술경험·역사의식·언어 등에 대한 그 이전의 철학사상을 주도면밀하게 비판적으로 분석하는데 치중한다. 다시 말해서 현대미학 및 역사적 이해이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진리와 방법』의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진리와 방법』 제1편이 그의 미학이론이 된다.
가다머에 의하면, 미학은 해석학에서 시작되어야 한다.2) 왜냐하면, 모든 예술작품은 이해를 요구하는 어떤 다른 텍스트와 같이 이해되어져야 하며,3) 해석학이란 본래 이해의 문제를 근본바탕으로 삼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이해는 인식이 아니라 경험이며, 예술경험을 통해서 진리는 드러난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전승과 전통의 지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고, 이해도 그러한 경험의 하나이기 때문에 예술은 바로 경험인 것이다.
예술경험은 인간의 다양한 세계경험중의 하나이며, 해석학적 경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진리는 방법일반에 의해서는 도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적 진리개념으로 비자연과학적 진리경험을 설명하고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가다머는 “요컨대 해석학적 현상은 원래 방법문제가 아니다.”4) “해석학적 관심은, 학문적 방법의 통제영역을 능가하는 진리 경험을 그것이 만나지는 어느 곳에서나 찾으며, 그것의 고유한 적합성을 묻는데 있다”5)고 한다.
다시 말해서, 철학적 경험, 예술적 경험, 역사적 경험 등은 자연과학적 통제영역을 넘어서는 경험방식들로서 바로 경험 그 자체에서 진리가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 때 이해는 객관대상에 마주 서있는 인간의 주관적 과정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있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방식이 된다. 이해의 본질은 조작이나 규제에 있지 않고, 참여와 개방에 있으며 지식이 아니라 경험에 있으며, 방법론이 아니라 대화론에 있다. 이해는 더 이상 인간의 인식행위가 아니라, 인간 속에서 일어나는 존재론적 사건이다.6)
이와 같이 가다머는 근대미학의 주관주의를 비판하면서 예술작품의 존재론을 정초하고 그 해석학적 의미를 밝힌다. 따라서 이 논문은, 먼저 진리경험과 방법문제를 밝힌 후, 근대미학의 주조였던 미의식의 추상화에 대한 비판, 즉 예술에 있어서의 진리문제를 살펴보고, 존재론적 미학의 정초로서 “놀이”(Spiel)의 실재성을 규명한 다음,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을 해명하는 순서를 취하고자 한다.
2. 진리경험과 방법문제
데카르트 이래로 방법은, 진리 그리고 지성과 사실의 일치라는 의미에서, 즉 사실과 명제의 일치라는 의미에서 진리에 이르는 왕도를 뜻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검증가능성은 지식주장의 척도가 되었고, 이 지식주장은 방법을 고수하여 확보할 수 있는 확실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7) 이는 칸트와 헤겔로 이어져 방법의 절대화를 주장하는 독단적 형이상학으로 구축되어 과학주의의 한계 안에 머물고 있었다.8) 가다머는, 우리의 세계경험은 과학주의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하므로써, 즉 과학적 방법만으로는 검증될 수 없는 진리의 가능성을 철학, 예술, 역사의 경험에서 입증해 보이므로써 근대 과학주의의 한계를 넘어선다.
가다머에 따르면, 자연과학의 귀납적 방법을 가지고는 사회·역사적 세계경험을 학문으로 높일 수 없다.9) 역사의 영역에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실천법칙 즉 명령들 아래 자유의지가 종속하므로 역사인식은 자연과학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10) 다만, 자연과학 아래 놓여지는 것으로 알아왔던 정신과학들은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진리 속에 존재한다11)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신과학을 방법주의의 강요에서 해방시키는 가다머 철학이 바로 “영향사 해석학(Hermeneutik der Wirkungsgeschichte)이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전개하는 자신의 해석학을, 정신과학의 방법론이 아니라, 정신과학의 방법적 자기의식을 넘어서서 진리 속에 들어있는 바의 것과 우리의 세계경험에 결합하는 바의 것을 이해시키고자 하는 시도12)라고 한다. 진리경험의 방식은 다양하며, 그것은 영향사적구조(영향사 의식)를 가진다. 전자가 진리의 소여적 측면이라면 후자는 진리의 전승적 측면이다.13) ‘영향사 의식’이란 우리의 행위와 사고가 역사적 전승과 그것의 영향에 귀속된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을 말함이다.14) 다시 말하면 모든 지식은 전통의 영향이 그대로 수용되고 있는 역사적 상황에서 생겨난다.15)는 것이다.
심지어 과학에 있어서도 이러한 면은 편향적인 탐구방향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 결과들의 과학성 여부조차도 의문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과학은 그 주제내용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며, 그 주제내용과 관련하여 판단될 수 있을 뿐이다. 과학이 자기의 정당한 활동영역-객관화될 수 있는 대상의 영역-을 넘어설 때, 또한 모든 진리를 조달해 주는 역할의 영역에 대해서 과학이 추월을 하는 경우에 해석학적 의식(Hermeneutik Bewußtsein)은, 과학적 방법들이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인 물음과 탐구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방법이 진리를 규제해서는 안 된다. 주관은 자기가 진리의 사건 속에 이미 항상 들어가 있는 것을 기술해야만 한다. 주관은 방법적인 선입견을 의식화하고 근원성이 다시 드러나도록 해야만 한다. 여기서 주관은 규제하는 이성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이성이다.16) 진리란 방법론적으로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귀착된다.17) 진리에 접근하는 길은 인간의 주관의도가 지배적이 되는 방법론의 길이 아니라, 만나는 사실에 관해 질문하는 반응을 통한 길, 곧 변증법의 길이다.18)
다시 말해서 진리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방식은 방법에 대한 반대립으로 나타나고 인간개체의 이해방법을 사전 조종하는 방법론의 경향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변증법의 길에서는 질문하는 주관은 더 이상 규제하고 지배하고 주도하는 자아가 아니라, 사실(Sache)에 의해서 질문을 받고, 그것에 응답하는 존재이다.19) 엄격히 말한다면, 방법은 새로운 진리를 계시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방법에 이미 확실하게 나타난 진리에 버금가는 것들을 정확하게 표출시켜 줄 뿐이다. 이와 같이 가다머의 ‘변증법적 사고’는 규제하는 선험적인 자아의 구조나 방법론적인 자아의 구조가 아니라, 역사적 전통 속에서 부단히 진리의 사실에 의해 질문 받으면서, 그 진리를 밝히기 위해서 응답하는 인간 현존재의 이해구조가 된다.20)
이리하여 가다머가 설정한 문제, 즉 “세계경험의 총체 속에서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가?”21)는 그의 해석학을 현존재의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세계 경험의 총체에 관한 이해의 시도라고 보았을 때, 바로 가다머 이론의 전 체계내에서 해명될 수밖에 없다.
그의 저서의 제목인 『진리와 방법』은 이러한 의미에서 역설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방법은 진리를 보장하는 길이 아니며, 반대로 진리는 방법적 사고를 멀리한다.22)
3. 예술의 진리문제
근대미학의 형식주의와 주관주의와 천재(天才)미학은 가다머 미학에서의 비판대상이다. 다시 말해서 가다머는 근대미학의 추상화를 비판23)하면서, 예술은 인식이고 예술경험(Erfahrung der Kunst)은 존재의 진리 속으로 변전(Verwandlung)하는 것이라는 그 자신의 결론으로 이끌어 간다.
가다머는 과학적 방법으로는 검증될 수 없는 진리의 가능성을 예술경험을 통하여 입증한다. 예술경험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의식(美意識)의 비판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24) 미의식(Ästhetische Bewußtsein)이란 미적 가치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다.25) 그것은 미적 감정이라고도 말해질 수 있다. 예술의 삼요항을 창작-작품-감상이라고 했을 때, 창작과 감상은 인간에 의하여 성립하는 작용(행위)이고 작품은 인간에 대하여 존재하는 대상이다. 여기서 작용이란 인간의 심리작용을 말함이고, 따라서 감상심리나 창작심리가 미의식이다. 이러한 미의식은 작품이라는 객체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주체의 체험으로서 이는 바로 미적체험(Ästhetische Erlebnis)26)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존재하는 객관대상으로서의 작품보다 체험하는 주관이 강조된다.
근대미학이 입각하고 있는 주체??객체라는 이분법의 주관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은 데카르트에서 그 연원이 찾아진다. 이는 모든 지식을 주관적 자명성에 기초하려는 경향이다.27) 데카르트에 있어서 진리는 주관과 객관의 일치인 바, 다시 말해서 단순히 아는 자와 앎의 대상 사이의 일치에 대한 주체의 이성적 확실성이다.28) 모든 존재는 의식의 주관??객관이라는 양극 및 의식의 대상들이라는 관점에서만 보여진다. 이러한 주관론적 방법론이 만연되어 있는 근대미학의 미의식에 의하면, 미적대상을 감상하는 주체는 텅 비어있는 의식으로써 지각을 받아들이고 순수감각형식을 어느 정도 즐기기까지 한다.29) 따라서 미적체험은 실용적·실천적 영역에서 고립되고, 형식에 대한 공허한 반응에 머물게 된다.
이러한 근대미학의 주관주의와 형식주의와 천재미학은 칸트에서 성숙해진 것이다. 칸트의 ‘취미판단’(Geschmacksurteil)은 미적판단으로서 주관의 쾌·불쾌의 감정과 관련되는 것이다.30) 취미란 ‘미를 판정하는 능력’31)이며,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은가를 판별한다는 것은 표상을 구상력에 의해서 주관의 감정에 관련시키는 것이다. 취미판단이 주관의 감정에 관련하는 한, 그것은 인식판단이 아니라 미적(직감적) 판단이다. 따라서 취미판단은 ‘그 규정근거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판단’32)이다. 칸트미학의 전체계는 바로 이러한 취미의 개념으로 귀착한다 : 취미란 것은 대상을 구상력의 자유로운 합법칙성과 관련하여 판정하는 능력이다.33) 이것이 칸트의 미적 판단력의 분석론 제1장에 대한 총주(總註)이다. 다시 말해서 칸트미학으 주요개념들은 ①성질 ②분량 ③관계 ④양상의 각 계기에 있어서 ①무관심성 ②보편성 ③합목적성의 형식 ④필연성 등이다. 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취미판단은 모든 사람들이 형식의 경험으로부터 당연히 도출해내는 무관심적·보편적·필연적 판단이다.34) 이러한 취미판단은 감상(심리)작용을 말하는 것이고, 바로 ‘미의식’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미의식은, 예술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주관주의 형이상학에 기초한 반성적인 구성이다. 가다머는 칸트미학이 판단력을 취미판단으로 간주함으로써, 주관주의에 빠진 것을 지적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칸트는 취미라는 분야에서 비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취미에 대하여 모든 인식의미(Erkenntnisbedeutung)를 인정하지 않았다. 칸트에 있어 취미란 일반의미(Gemeinsinn)를 환원시키는 주관적 원리이다. 취미 속에서는 아름답다고 판단되는 대상들이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 속의 쾌의 감정이 선천적으로 그러한 대상들에 일치된다는 것만이 주장되고 있다.35) 이러한 미의식의 개념에 있어서는, 대상존재로서의 예술작품과 심리적 존재로서의 미의식은 대립의 관계에 있게 된다. 미의식은 강조되고 미적존재는 경시되는 이러한 경우에는, 또한 미의 법칙들이 중시되며, 현실성의 한계는 경시된다. 이러할 때 미의식은, 예술작품 자체의 세계를 위해 타당한 것이 아니라, 체험된 중심으로서의 의식 자신의 내부에 있는 측정기준에 의해서 타당한 예술을 구별해낸다. 우리가 미적체험을 하므로써 어떤 존재를 ‘예술작품’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그것은 미의식에 의거한 미적추상에 다름 아니다.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것이 바로 미의식이며 또한 그 추상이다.
요컨대 추상성은 미의식의 자기체험에서 성취되는 것이다.36) 미의식에서 나타나는 미적구별은 대상으로서의 예술작품과는 다른 하나의 현존재를 창조하게 된다. 예술작품은 그 속에 ‘미적인 것’과 ‘非미적인 것’뿐만 아니라 ‘어떤 다른 것’까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상된 미의식에서의 구별은 미의식이 ‘미적’이라고 받아들인 것만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예술작품은 이러한 미적구별을 통하여 예술작품 자기 자신이 속하는 장소와 세계를 잃어버리고 미의식내에 속하게 된다.37)
이러한 미의식의 추상화는 순수미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지양한다.38) 여기서 ‘순수미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예술작품의 잡다한 내용을 사상해 버리고 난 뒤에 남은 “형식”을 말한다. 칸트가 미를 설명함에 있어 “합목적성의 형식”39)이라고 한 것이나, “미란 형식에만 관계하는 것”40)이라고 한 형식이 바로 그것이다. 예술에 관한 이와 같은 견해는 다분히 인식론적이다. 왜냐하면 예술품을 미적의식의 구성물로 이해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할 때 미학은 “순수형식”내지 “체험의 표현”에 기초하게 되고 “주관주의적 사고방식” 속에 머물게 된다.
이와 대립하여, 가다머는 예술을 인식론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분석한다.41) 예술작품과 조우하는 경험은 작품의 형식을 주관의 쾌와 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라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눈뜸의 지평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외형적 형식들에 대한 감각적 즐거움으로 명하니 입 벌리고 서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기를 그치고 그것을 하나의 세계로 보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예술작품이란 단지 감성적 지각이 아니라 지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 자신의 세계의 지평과 자기이해는 넓어지고, 따라서 우리는 마치 처음인것 처럼 새로운 빛 안에서 세계를 보게 된다.42) 예술작품과의 만남에 있어서 우리는 낯선 우주에 들어가 우리 자신이나 비미적(非美的)인 요소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43) 예술작품의 경험은 포괄적인 것이고, 고유한 자기이해의 통일성과 연속성 안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세계내에서 예술품을 만나고 개별적인 예술품 속에서 세계를 만나는 한,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를 이해하는 것을 배우게 되며, 우리 현존재의 연속성에서 체험의 불연속성과 정확성을 지양하게 된다. 미와 예술에 대하여 획득해야할 타당한 입각점은 역사적 현실성과의 일치이다. 추상화된 미의식에서의 미적체험의 의미 등은 자기이해의 연속성과 통일성에 대한 인간실존의 요구 앞에서는 성립할 수 없다. 미적경험(Ästhetische Erfahrung)은 자기이해의 한 방식이다. 모든 자기이해는 그러나 거기에서 이해되어지는 바의 다른 어떤 것으로 실행되고, 이러한 다른 것의 통일과 동일성을 포함하고 있다.44)
‘이해한다’는 것은 의미적인 것들과의 관련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어떤 절대적인 음악을 들을 때조차도 우리는 그 음악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그것은 우리에 대해서 예술적인 형성체로서 거기에 존재한다. 따라서 순수미에서 얘기될 수 있는 단순한 봄과 단순한 들음은 현상을 예술적으로 환원하는 독단적인 추상들이다.45) 예술작품의 이해란 대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을 방법적으로 절단하거나 분절함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도 아니고, 형식을 내용으로부터 별리시킴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46)
이와 같이 가다머는 종래의 시각인 형식??내용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다시 말해서 예술작품의 내용만을 강조한 극단의 입장인 유물론적 방향의 예술론이나, 형식만을 강조하는 입장으로서의 순수예술론 양자 모두를 부정하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가다머에 의하면, 예술의 구체적인 내용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미 예술작품 안에서 형식과 의미의 통일로 묶여있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미적체험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것은 내용도 아니고 형식도 아니며, 이미지와 형식 속으로 완전히 매개(Vermittlung)된 의미된 사물이며 역동적인 세계이다.47)
또한 가다머는 “천재개념은 현실적으로 적당한가?”48)라고 물음으로써 칸트의 천재미학 비판에 나선다. 칸트에 의하면, 천재란 예술에 규칙을 부여하는 재능으로서, (1)독창성 (2)산물의 범형성(範型性) (3)자연스러운 규칙의 부여 (4)자연이 지정하는 규칙의 수용 등으로 특징지어진다.49) 다시 말해서 천재의 산물은 모방에 의해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모방할 수 있는 것이 되고, 예술의 산물은 만들려진 것이지만 자연스럽게 보일 때만 아름답다는 것이며, 그러한 예술의 생산은 천재의 고유하고 독특한 재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50) 이러한 칸트의 천재개념은 개인의 의식으로 한정되어 있고, 여기에 역사적 지평이나 사회성에 대한 고려나 언급은 전혀 있지 않다.
가다머는 창작하는 천재성을 ‘몽유병자의 무의식성에 대한 표상’51)이라고 하며 거짓된 낭만으로 보인다고 한다. 천재개념은 근본적으로 관찰자로부터 구상되는바, 창조적인 정신에서가 아니라 판단하는 정신에서 생기는 것이다. 관찰자에게 하나의 경이로움으로써 표현되는 바의 것이 천재적인 영감을 통해서 창조의 놀라움으로 반영된다. 천재개념은 선험적 기능에 다름 아니다.52) 가다머는 예술작품이란 천재의 생산품이 아니라, 다른 수공업품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예술작품이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모든 완성품은 그것의 목적성취의 척도가 있다. 완성품이란, 만들려져야 하는 바의 용도를 통해서 규정되고, 규정된 목적에 합당할 때 생산품은 완결된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전혀 사용을 위하여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그러한 목적의 완성품을 위한 척도를 얻지 못한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그 자체적으로 완결되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의 형성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3) 미적인 대상은 홀로 거기에 서 있고, 사람이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절대적인 불연속이다.54) 이리하여 가다머는, 하나의 예술작품은 천재의 생산물이 아니라, 다른 형성체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닌 것으로서 다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미적 현존재의 존재규정은 인간실존의 해석학적 연속성의 외부에서 동일한 것을 세우는 바의 것이다.55)
요컨대 가다머에 있어, 예술은 감상이 아니라 이해이고, 예술작품은 감성적 지각대상이 아니라 지식이고 인식이며, 예술경험은 진리인식 경험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경험은 현실세계를 떠나는 주관의 공허한 활동이 아니라, 전형적인 해석학적 경험인 것이다. 가다머는 경험의 개념을 보다 넓게 파악하므로써 예술작품에 대한 것도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다. 예술경험은 특별한 종류의 인식방식이다. 그것은 감성적 인식, 감각소여로부터 자연에 대한 인식을 세우는 바의 그 소여들을 학문에게 매개하는 인식과 분명히 구별되고, 도덕적 이성인식과도 구별되는, 따라서 모든 개념적 인식 일반과도 구별되는 것이다. 예술경험이란 바로 진리의 매개자라 불리는 바의 인식방식인 것이다.56) 따라서, 예술경험은 미적 형성체의 소유물로 위조화(僞造化)되어서도 안되고 또한 미적 형성체 속의 고유한 주장(존재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 바의 진리주장 : 필자주)이 무효화(無效化)되어서도 안된다.57) 예술의 존재는 결코 미의식의 대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적태도는 의식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그 이상으로 전도되기 때문이다.58) 미적 경험에 들어선 자의 미적 태도는 존재가 개시하는 새로운 진리를 만나게 되고, 따라서 자기이해가 넓어지게 되므로, 예술의 존재는 미의식의 대상이 아니라 통일성과 연속성으로 확대되는 세계이해의 지평인 것이다.
가다머는, 예술언어와의 모든 만남(Begegung, 遭遇)이 미완성의 생기(Geschehen, 生起)와 이 생기의 한 부분과의 만남인 한에 있어서 바로 이 점에 광범한 해석학적 결론이 놓여있다59)고 한다. ‘나타남의 존재로 이행’(Seinsvorganges der Darstellung)하는 하나의 부분이 예술존재이고, 이러한 예술존재는 놀이로서 놀이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귀속한다.60) 따라서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은 놀이개념의 분석을 통해서 밝혀질 수 있게 된다.
4. 놀이의 실재성 : 존재론적 미학의 정초
가다머에 의하면, 놀이(Spiel)는 실재하는 것이다. 놀이자가 놀이에 참여하든지 않든지 간에 놀이자체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감상자가 예술작품을 감상하든지 않든지 간에 예술작품이 존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술감상은 일종의 놀이 참여이다”라는 표현도 가능하겠다. 이와 같이 예술작품과 놀이 사이의 유추에 착안한 가다머는,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길잡이로서 놀이의 존재방식을 해명하고 있다.
근대미학의 주관주의적 입장에서는, 놀이를 인간주체의 행동으로 본다.61) 예술작품 앞에서 실존적 자기세계를 탈피한 인간주체에게 쾌의 감정을 주는 놀이의 한 종류가 예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이 주체가 되고 다른 모든 것은 대상으로 된다. 예술작품은 인간이 보아줄 때만 비로소 예술작품이 되는 것이다.
가다머는 놀이개념에 있어서 이러한 주관주의적 의미를 배제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놀이는 창조하는 자 또는 즐기는 자의 행동(Verhältnis)62)이나 기분도 아니고 놀이에 활동하는 주체성(Subjektivität)의 자유도 아니라, 예술작품 자체의 존재방식이다.63) 놀이는 놀이자에게 있어 진지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놀이자는 놀이하게 된다. 그러나 놀이자체에는 고유하고 신성한 진지성이 있다. 놀이자가 놀이 속에 몰두한다면 놀이가 가지고 있는 목적을 달성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놀이의 흥은 깨어지고 만다. 놀이가 무엇인지, 그가 행하는 것이 단지 놀이라는 것을 놀이자는 잘 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무엇을 아는지를 모른다.64)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놀이자체를 말하는 것이고 놀이의 존재방식으로서의 놀이를 말하는 것이다. 놀이자가 놀이의 내용과 놀이의 방법을 알고, 실제로 그러한 방법에 따라 놀이를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단지 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가 알더라도, 고유하게 놀이 그 자체인 바의 것, 예컨대 놀이자가 놀이를 하든지 않든지 간에 놀이가 있다는 것이나, 놀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 놀이자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 등의 놀이자체의 존재방식까지는 놀이자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놀이는 놀이자의 의식과는 독립해서 자기의 고유한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놀이와 놀이자를 구분해 놓고 보면, 자칫 놀이와 놀이자는 대립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놀이는 주체에 대항하는 대상도 아니고65) 주관에 대립된 객관도 아니다.66) 놀이는, 주체성의 어떠한 대자존재도 주제에 적합한 지평을 제한하지 않는 곳에 고유하게 존재하고, 그 자신이 심심풀이로 행동하는 어떠한 주관도 없는 곳에 고유하게 존재한다.67) 그것은 놀이자가 그 속에 들어가려고 하는 존재의 자기규정적 동작이다.68) 그러므로 놀이에 대한 놀이자의 참여가 아니라, 놀이자체가 이 논의의 참된 주제가 된다.
주관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놀이는 주체의 행동으로서 자기가 들어가려고 하고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 사용되는 자유로운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놀이자체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놀이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놀이란 그것이 발생하는 것처럼 단순한 놀이이지만 일단 그것이 놀이로 진행되는 동안은 그것이 주인이다. 놀이의 매력은 우리를 매혹하고 우리를 그 안으로 유인한다. 놀이는 놀이자에 대해 실로 주인인 것이다. 놀이는 그 자체 하나의 고유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69) 이 정신은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분위기나 정신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놀이자는 어떤 놀이를 할 것인가는 자기가 선택하지만, 일단 선택하고 나면 그를 통해 놀이가 발생되는 폐쇄세계 안으로 그는 들어간다. 놀이가 타성을 가지고 그 자체를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 놀이는 놀리워질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놀이는 놀이자의 의식이나 행동 속에서 그의 존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놀이자의 의식이나 행동을 그의 영역 속으로 끌어 들여서 그의 정신으로 가득 채운다.70) 놀이의 주체는 놀이자가 아니라, 단지 놀이자를 통하여 놀이가 설명될 뿐이다.71)
가다머는 놀이의 본질을 설명함에 있어서 역동성을 이야기한다. ‘놀이’ 혹은 ‘유희’라는 말이 그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미는 ‘움직임’이다. ‘논다는 것’은 정지해 있음이 아니고 어떻게든지 간에 ‘움직이고 있음’이다. 가다머에 의하면 ‘놀이’(유동 혹은 유희 : Spiel)라는 단어의 근원적인 의미는 ‘춤’(Tanz)이다.72) 빛의 유동, 파도의 넘실거림, 관절의 운동 등의 움직임은 여기 저기(Hin und Her)서 나타나고 있다. 운동은 그저 하나의 운동일 뿐, 운동 그 자체가 어떤 목적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놀이의 운동은 어떤 최종적인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반복 속에서 그 자체가 새로워진다. 말하자면 놀이운동 그 자체에는 기체(Substrat : 基體)가 없는 것이고, 놀이는 운동 그 자체의 수행일 뿐이다.73) 따라서 놀이의 존재방식은 놀면서 행위 하는 주관의 놀이진행에 있지 않고, 오히려 어떤 것이 놀고 있다고 하는 매개적 의미(mediale Sinn)에 있다. 따라서 놀이의 고유한 주체는 놀이자의 주체성이 아니라 놀이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놀이’는 ‘놀이되는 것’이고, 놀이의 본래적 주체는 놀이자가 아니라 놀이자체이다.74) 이와 같이 ‘놀이자의 의식에 대해 놀이의 우위성(Primat des Spiels gegenüber dem Bewußtsein des Spielenden)을 강조하는 가다머의 논지는, 주관주의적인 근대미학이 ’놀이는 인간주체의 행동이다‘라고 하므로써 빠져 있었던 “놀이의 이해”를 “놀이의 존재론적 이해”로 전환시킨 것이라 하겠다.
가다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놀이의 존재방식은 자기표현75) 이라는 데까지 이른다. 가다머에 의하면, 역동성으로서의 놀이의 존재방식은 자연의 운동형식에 접근해 있고, 따라서 인간의 놀이는 자연적인 과정이다.76) 다시 말하면, 자연은 목적 없이, 의도나 노력도 없이 언제나 스스로 새로운 놀이(움직임)이고, 따라서 끊임없는 자기표현이다. 이 자기표현은 자연의 보편적인 존재외견이다.77) 이와같이 놀이의 의미는 자연이기 때문에, 인간의 놀이 또한 순수한 자기표현이 된다. 이리하여 놀이는 실제로 자기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국한되고, 놀이의 존재방식은 자기표현(Selbstdarstellung)이 된다.78) 그러나 놀이는 질서정연한 운동의 단순한 자기표현이 아니라, 더 이상의 그 무엇에 대한 표현이라고, 가다머는 말한다. ‘더 이상의 그 무엇’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놀이는 놀이자에게는 ‘그를 능가하는 현실’(eine ihn übertreffende Wirklichkeit)로 경험되고, 관객에게는 ‘그를 위한 설명’(Darstellung für den Zuschauer)으로서 즉 ‘구경거리’(Shauspiel)로 나타나는79) 바의 그것이다.
놀이의 이유는 단지 노는 자에게 놀이경험을 주고 놀이의 정신을 부여하는 데 있지 않고, 놀이 속에 의도된 ‘능가하는 현실’을 매개하는 데 있다. 놀이의 이 능가하는 현실 속에서 놀이의 구조와 정신이 소통되어진다.80)
가다머에 있어, 놀이는 자율성의 개념을 가지며, 놀이 자체존재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으며, 현실을 능가하는 그 무엇에 대한 자기표현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현실을 능가하는 그 무엇이란 바로 존재의 진리를 말함이다.
5. 예술작품의 존재방식
가다머에 따르면, 인간의 놀이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완성이 ‘존재하는 예술’(예술작품 : 필자주)이다. 놀이가 예술로 되는 이러한 방향전환을 ‘형성체로의 변전’(Verwandlung ins Gebilde)이라고 부른다.81) 변전(Vewandlung)은 변화(Veränderung)와는 다른 것이다. 변화(Veränderung)는 변화된 것이 역시 동일한 것으로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변하며 어떤 것은 변화중에 있는 그러한 것을 말한다. 범주적으로 보면 변화는 질의 영역, 즉 실체의 우연성에 속한다. 이에 반해 변전(Verwandlung)은 어떤 것이 한꺼번에 전체로서 다른 것이 되며, 새로운 것이 그것의 참된 존재이며, 그 이전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그러한 변화이다.82) 그리하여 ‘형성체로의 변전’에는 전에 존재했던 것은 더 이상 없고, 예술의 놀이에 있어서 스스로 표현되어 ‘지금 있는 것’은 이제 불변하는 진실(das bleibende Wahre)이 된다.83) ‘지금 있는 것’이 ‘존재’로서의 예술작품이다. 다시 말해서 형성체로의 변전은 참된 존재에로의 변전이며, 형성체란 다름 아닌 예술작품이므로, 예술작품은 참된 존재이며 그 자체가 진리로 된다.
변전을 통하여 형성체(예술작품 : 필자주)가 만들어지고 나면, 놀이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다만 그들로부터 놀이된 것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놀이자 뿐만이 아니라 세계, 즉 그 속에서 우리가 우리로서 고유하게 살아가는 세계이다.84) 다시 말해서 일상세계는 사라지고 작품세계만이 남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사라지는 것으로서의 일상 세계는 형상화된 형성체의 소재로서의 일상세계이며, 그것은 변전(작품화 : 필자주)한 순간의 작가의 총체적 세계이다. 변전을 통하여 옮겨진 세계, 작품세계는 하나의 단순한 세계가 아니다. 이 세계는 그 자체 폐쇄된 세계이며, 자기자신 안에 척도가 있는 자기충족적인 세계이다.85) 따라서 외부세계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해서 이 세계는 측정될 수가 없다. 작품은 오로지 작품 그 자체로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작품은 일단 완성되고 나면 더 이상 창작자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가 깨닫고 있지 못한 통찰들을 구현해 줌으로써 작품자체가 그 존재를 지니고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완전히 변전된 세계로서의 예술작품은 그들 속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들어낸다. 그들이 스스로 끄집어내고 밝히는 ‘지금 있는 것’은 변전을 통하지 않았다면 은폐되고 유리되었을 그러한 것들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작품은, 끊임없는 되찾기(stets Einlösung)이고, 순수한 수행(reine Erfüllung)이며 자기자신 속에 목적을 지닌 현세태(Energeia), 즉 형상이다.86)
예술작품은 이제, 경험하는 주관에 대립하여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작품은 경험자를 변화시키는 경험이 된다는 점에서 고유한 존재를 가진다. 예술경험의 주체는 예술을 경험하는 사람의 주관성이 아니라 예술작품 자체인 것이다.87)
여기서 우리는 놀이와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이 동일한 것임을 보게된다. 그것은, 놀이의 주체는 놀이자가 아니라 놀이자체이고,88) 마찬가지로 예술경험의 주체는 예술경험자의 주관성이 아니라 예술작품자체라는89) 대목에서이다. 따라서, ‘놀이는 형성체(예술작품)이고, 형성체는 또한 놀이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놀이는 형성체이다’라는 말에서의 ‘놀이’는 ‘놀이된 것’이라는 데 의존하여 있고, ‘형성체는 또한 놀이이다’라는 말에서의 ‘형성체’는 ‘그때그때 놀이가 이루어질 때만 완전한 존재로 된다’는 데 의존하여 있다. 그러나 가다머는, 우리가 미적 구별(미적인 것과 非미적인 것, 혹은 형식과 내용 등)의 추상화에 마주서는 데는 이같은 양측면의 공속성(Zusammengehörigkeit beider seiten)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90)
예술작품 속에 있는 진리는 저절로 드러나는가? 놀이는 어떻게 그의 정신과 본질을 현실화하는가? 만약 예술작품의 진리가 저절로 드러나고, 놀이의 정신과 본질 또한 저절로 현실화한다고 하면, 이는 지나치게 신비주의로 흘러든 것이 된다. 가다머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매개(Vermittlung)91)개념을 도입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형성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자체가 ‘의미로 가득찬 전체’(Sinnganze)로 나타나는 바의 것이다. 형성체는 자체존재도 아니고, 우연적 매개(akzidentellen Vermittlung) 속에서 만나지고(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매개존재를 통하여’(through being communicated) 그 고유한 존재를 획득하는 것이다.92) 매개존재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놀이자와 창작자 혹은 감상자를 말한다. 그것도 모든 놀이자와 창작자와 감상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경험을 하고있는 창작자와 감상자를 의미한다. 가다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연(연극공연 : 필자 주)의 다양이나 혹은 이러한 형성체의 현실화는 놀이자의 이해로 되돌아간다. ??또한 그것은 생각한 바대로의 주관성 속에 폐쇄된 채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Da) 실현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이해의 주관적 다양성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흡사 기대의 다양 속에 그 자체 놓여지는 작품들의 존재가능이 문제로 된다.93)
이리하여 가다머의 매개(Vermittlung)개념은 두 가지 측면으로 파악된다. 하나는 ‘변전’으로서의 ‘매개’이며, 다른 하나는 ‘현실화’로서의 ‘매개’이다. 먼저 앞의 측면을 살펴보면, 형성체는 의미로 가득찬 전체이며 그 자체 진리로서 고유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형성체로의 변전’은 ‘새로운 존재에로의 매개’이며, 새로운 존재는 내용과 형식이 완전히 통합된 의미세계이다. 그러므로 ‘매개’는 ‘총체적 매개’(Totale Vermittlung)가 되고, ‘변전’은 바로 ‘총체적 매개’인 것이다. 뒤의 측면에서는, 형성체는 그가 지닌 바의 진리를 드러냄에 있어서 비미적(非美的)인 것은 숨기고 미적인 것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아니 처음부터 예술존재는 미적(美的)·비미적(非美的)인 구별이 없다고 가다머는 주장한다. 따라서 미적 무차별화, 즉 예술존재의 통일성과 연속성으로 확대되는 세계이해는 존재가 개시(開示)하는 새로운 진리로서 형성체가 지닌 바의 진리 전체인 것이다. 그르므로 진리의 ‘현실화’ 역시 ‘총체적 매개’인 것이다. 가다머에 따르면, 매개는 작품자체의 이념에 따르는 하나의 총체이며, 총체적 매개는 매개가 매개자체로서 지양되는 것을 의미한다.94)
‘매개가 매개자체로서 지양된다’는 말은 매개되는 요소들 자신이 서로서로 중화되어 새로운 것으로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매개’는 다른 말로 하면 ‘재창조’(Reproduktion)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재창조란, 서사시적 낭독이나 서정시적 낭독만으로써 진행되는 것이 아닌 연극과 음악의 경우와 같이, 예술작품이 주제적으로 재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작품을 통하여 작품 스스로 표현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95)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와 만나게 되는 것을 접근성격(Zugangscharakter)과 해후성격(Begegnungscharakter)이라고 한다.
예술작품의 접근성격과 해후성격은 주제적(thematisch)인 것이 아니라 작품자체에서 총체적으로 파악되는 바의 것이다. 연극의 경우, 배우의 대사만이 관객에게(주제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무대와 조명과 효과음 등 공연되는 연극 전체가 관객에게 매개되고 관객은 연극을 총체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음악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청중은 악보상의 음의 변동을 단순히(주제적으로) 따라 듣는 것이 아니고 연주되는 음악전체를 총체적으로 경험한다. 이러한 공연과 연극은 단지 작가의 의식 속에 진행되는 주제의 복사나 해석이 아니라, 하나의 놀이로서의 창조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연극과 음악은 그때그때 공연되거나 연주되는 사건자체로서 구성된다. 따라서 모든 예술작품은 작품자체로만 구성되고, 그 때마다의 놀이과정을 통해서 총체적으로 나타난다. 이리하여 예술작품은, 언제나 작품자체 안에 현재(Da)하여 있는 것96)이다. 작품이 이러한 자기자신의 기능 속에 성립하는 한, 작품은 어느 시대에서나 동시적으로 존재한다.97) 박물관 안이나 화랑 안에 있는 작품일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타당성을 가지며 그 자체의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숙련가가 재현할 수 있게 하는 그 본래적 기능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환경이 변화하여도, 작품자체의 통일성은 그와 같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예술작품의 동시성이 문제로 된다. 예술작품은 놀이이며, 그 고유한 존재는 표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또한 표현 속에서 형성체의 통일성과 동일성이 나온다.98) 예술작품의 통일성과 동일성이란, 반복되는 표현 속에서 예술작품이 아무리 변화되고 왜곡되어도(통일체로서의 : 필자 주) 작품 그 자체는(동일하게 : 필자주) 남는다는 것을 의미한다.99) 표현은 동일한 것의 반복(Wiederholung)의 성격을 가지며 근원적으로 작품자체에 속한다. 예컨대 100년전의 작품이 오늘날에 와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과거의 작품은 해석에 있어서 현재의 빛 속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때 작품은 단지 과거적인 것으로서 단순한 주관적 회상의 대상이 아니다. 여기서의 이해는 창조적 사건으로 생기하는 것이므로, 과거의 지평과 현재의 지평이 변증법적으로 매개되는 것이다.100)
이것이 바로 ‘동시성의 매개’(Vermittlung der Gleichzeitigkeit)이다.101) 동시성이란, 어떤 작품에 대해서 10년전에 느꼈던 감흥을 지금도 동일하게 느낀다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시성이란 미적의식의 공시성(Simultaneität)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성이란, ‘우리에게 나타나는 유일한 것이, 그 근원이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 나타남에 있어 완전히 현재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동시성은 의식에 대한 소여방식이 아니라 의식에 대한 과제이며, 의식에게 요구되는 수행의 과제이다.102) 그러므로 동시성은 언제나 예술작품의 존재에 대하여 나오고, ‘지금 옆에 있음’(Dabeisein, 동반존재)의 본질을 구성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스스로를 참여시키는 예술작품은 바로 ‘우리 옆에 지금 있는 존재’이며, 그 나타남(표현)은 완전히 현대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과거성이 온전히 현재의 지평 속에 매개되는 것은 말한다.103) 가다머는 이것을 ‘모든 매개는 총체적인 현재성 속에서 지양된다’104)고 한다.
이러한 동시성의 존재근거로서의 표현에 있어, 미적 존재의 의존성은 자발적 의미규정(놀이참관자의 주관성 : 필자주)의 어떤 필요나 결핍도 의미하지 않는다. 표현은 미적존재에 있어 고유한 본질에 속하고, 관객은 우리가 미적이라고 부르는 놀이자체의 본질계기인 것이다.105) 그러면 미적존재의 이러한 시간성은 어디에 있다할 것인가? 표현됨(Dargestelltwerden)으로서 그의 존재를 가지는 미적존재의 특이한 시간성은, 자립적으로 현상하고 눈에 뜨이게 현상하는 묘사(Wiedergabe)의 경우들에서 현존하게 된다106)고 가다머는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미적 존재의 시간성은 표현의 과정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6. 맺으며
가다머 미학이론의 전 체계에서 살펴보았을 때 중요개념은 “놀이”와 “놀이자”이다. 놀이의 전개과정 속에서 놀이는 다시 구체적·개별적 놀이와 놀이일반으로 구분되고 있다. 우리는 그의 ‘놀이일반’을 ‘예술일반’으로, ‘구체적·개별적 놀이’를 ‘구체적 장르의 개별예술’ 내지는 ‘그것들의 작품’으로 치환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놀이자’는 ‘창작자’또는 ‘감상자’로 치환 할 수 있고, 특별히 연극과 음악 등의 경우에서는 ‘놀이자’는 ‘배우’나 ‘연주가’로, ‘놀이 참관자’는 ‘관객’이나 ‘청중’으로 치환할 수 있는 것이다.
가다머에 있어, 예술작품의 존재상태는 놀이(Spiel)이고,107) 존재방식은 표현(Darstellung)이다.108) 소박하게 말한다면, 창작자는 창작놀이의 놀이자이고 감상자는 감상놀이의 놀이자라 하겠다. 창작자의 놀이표현은 작품으로의 변전이고, 감상자의 놀이에서 표현되는 것은 작품이 드러내는 진리로서, 감상자는 총체적으로 매개되는 이러한 진리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다. 다시 말해서, 예술은 인식이고 예술작품의 경험은 이러한 인식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다머의 논지에서 보여지는 것은, 창작과 감상의 중간 항에 작품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창작??작품??감상이라는 삼요항을 전제하는 미학일반으로부터 가다머도 크게 벗어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가다머 미학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작품의 존재이다. 예술놀이의 주체는 예술자체이고 예술작품이지, 놀이자나 놀이참관자의 주관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가다머 미학은 존재론적 지반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작품구조에 대한 대상분석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이해와 해석이라는 대상으로서의 심리작용분석에 전념하고 있다. 물론 전승된 작품의 존재에 초점을 맞추되, 작품자체의 내부분석이라기 보다는 작품의 생산과 수용에 있어서의 역사성과 예술경험의 진리성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근대미학에서 개념적 인식이 부정되었던 미의식을 비판하고, 예술의 경험에서 진리가 인식된다고 하므로써 미학의 전회를 가져오고 새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같이 객관주의적인 입장에 서면서도, 철저히 미적대상의 구조를 현상학적 방법으로 분석한 N. 하르트만과는 다른 방향을 가다머는 취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논의의 소지는 있겠지만 N. 하르트만의 미학을 ‘철학적 미학’이라고 한다면, 가다머의 미학은 오히려 ‘예술적 미학’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한다. 이는 가다머의 미학이론이 신비평(New Criticism)의 정신과 유사하다는 데서도 또한 그러하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해석학이란 본래 ‘이해’와 ‘해석’의 문제이고, 그것이 예술에 적용될 때 바로 ‘창작’ 또는 ‘감상’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가다머 미학의 독창성은 예술작품과 놀이를 유비로써 설명하고, 자율성과 개방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구조의 대표적 모델로서 놀이를 상정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가다머의 업적을 리차드. E. 팔머는 두 가지로 정리한다.109) 첫째는, 예술작품을 정적으로가 아니라 동적으로 파악하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미의식으로 대변될 수 있는 주체중심의 근대미학을 부적합한 것으로 비판하며 예술경험의 주체를 인간의 주관에서 예술작품 자신의 객관으로 돌리므로써 존재론적 미학이론 중에서도 특이한 방향을 개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다머 미학은 관념성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사회적인 의미를 결여했다는 비판도 있기는 하다. 사회실천성의 결여라는 문제에서 출발하는 하버마스와의 논쟁이 우리의 흥미를 끌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가다머의 독특한 해석학적 미학이론의 개관적 접근이라는 이 논문의 의도에서는 거기까지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조심스럽게 언급하여 본다면, 가다머 미학은 작품의 형식에 치중하는 순수예술과 그 내용에 치중하는 실천예술의 중간자적 위치에서 내용과 형식의 통일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순수??실천의 양극단의 종합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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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ichard. E. Palmer 지음, 최성학 옮김, 『해석학 강의』, 1988, 서울: 도서출판 라브리, 181쪽. (여기서는 요아킴 봐크(Joachim Wach)의 「이해」(Das verstehen)와 에밀리오 베티(Emilio Betti)의 「일반해석론」(Theoria generale della interpretazione)을 20세기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하고,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을 이에 비교될만한 저술이라고 하고 있다.
2) Hans-Georg Gadamer, Wahrheit und Methode(Grundzüge einer philosophischen Hermeneutik) (이하 WuM으로 약기함), 5 Auflage (durchgeschen und erweitert), J. C. B. Mohr(paul siebeck) Tübingen, 1986, S. 170.
3) ebd.
4) WuM, S. 1.
5) ebd.
6) 김영한 저, 『하이덱거에서 리꾀르까지』(현대 철학적 해석학과 신학적 해석학), 1987, 서울: 박영사, 276쪽.
7) Josef Bleicher 저, 권순홍 옮김, 『현대해석학』, 1983, 서울: 도서출판 한마당, 133쪽.
8) 같은 책, 135쪽 참조.
9) WuM, S. 10.
10) WuM, S. 14.
11) ebd.
12) WuM, S. 3.
13) 김영한 저, 위의 책, 237쪽.
14) WuM, S. 346.
15) 죠셉·블라이허 저, 권순홍 옮김, 위의 책, 136쪽.
16) 김영한 저, 위의 책, 240쪽.
17) 리차드. E. 팔머 지음, 최성학 옮김, 위의 책, 184쪽.
18) 김영한 저, 위의 책, 241쪽.
19) 같은 책, 같은 쪽.
20) 같은 책, 같은 쪽.
21) Hans-Georg Gadamer, Truth and Method, The Crossroad publishing Company, New-York, 1982, p. x vⅲ
22) 김영한 저, 위의 책, 236쪽. / 리차드·E·팔머 지음, 최성학 옮김, 위의 책, 182쪽.
23) WuM, S. 94~106.
24) WuM, S. 105.
25) 김문환, 『미학의 이해』, 서울: 문예출판사, 1989, 112쪽.
26) 가다머는 ‘Ästhetische Erlebnis’와 ‘Erfahrung der Kunst’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전자는 근대미학에서의 체험하는 주관의 미의식을 가리키고, 후자는 해석학적 경험의 하나로써의 예술경험을 가리킨다.
사람에 따라서는 전자를 ‘미학경험’으로, 후자를 ‘예술경험’으로 번역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 논문에서는 전자를 ‘미적체험’으로, 후자를 ‘예술경험’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기로 한다. 따라서 ‘Ästhetische’는 ‘미적’으로, ‘Erlebnis’는 ‘체험으로’, ‘Erfahrung’은 ‘경험’으로 옮겨진다.
27) 리차드. E. 팔머 지음, 최성학 옮김, 위의 책, 187쪽.
28) 같은 책, 161쪽.
29) 같은 책, 187쪽.
30) Immanuel Kant, Kritik der Urteilskraft(이하 KdU로 약기함), (Der philosophisen Bibliothek Band 39), Herausgegeben Von Karl Vorländer, 7 Auflage, 1924, S. 4. 참조.
31) ebd.
32) ebd.
33) KdU, S. 69.
34) George Dickie 저, 오병남·황유경 공역, 『미학입문』, 서울: 서광사, 1986, 43쪽 참조.
35) WuM, S. 49.
36) WuM, S. 91. 참조.
37) WuM, S. 93. 참조.
38) WuM, S. 94.
39) KdU, S. 61.
40) KdU, S. 38.
41) 김영한 저, 위의 책, 244쪽.
42) 리차드. E. 팔머 지음, 최성학 옮김, 위의 책, 187-188.
43) 김영한 저, 위의 책, 244쪽.
44) WuM, S. 102. 참조.
45) WuM, S. 97.
46) 리차드. E. 팔머 지음, 최성학 옮김, 위의 책, 189쪽.
47) 같은 책, 190쪽.
48) WuM, S. 98.
49) KdU, S. 182-183. 참조.
50) 이렇게 볼 때, 칸트 미학의 두 축은 “취미”와 “천재”이다. “취미”는 “미의 판정능력”으로서 감상의 영역이고, “천재”는 “생산능력”으로서 창작의 영역이 된다. 그러나 “예술작품”이라는 대상자체에 대한 분석은 어디에도 없다. 생산도 작용이고 감상도 작용이므로 칸트미학은 작용분석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51) WuM, S. 98.
52) WuM, S. 99. 참조.
53) WuM, S. 100.
54) WuM, S. 101.
55) ebd.
56) WuM, S. 103.
57) WuM, S. 105.
58) WuM, S. 121.
59) WuM, S. 105.
60) WuM, S. 122.
61) 리차드, E. 팔머 지음, 최성학 옮김, 위의 책, 192쪽 참조.
62) ‘Verhältnis’에 대한 번역어로 김영한교수는 ‘행동’을 취하고 있다. 이는 매우 적절한 번역어라고 하겠으므로 본 논문에서는 이에 따르기로 한다.
63) WuM, S. 107.
64) WuM, S. 108. 참조.
65) 리차드. E. 팔머 지음, 최성학 옮김, 위의 책, 193쪽.
66) WuM, S. 108.
67) ebd.
68) 리차드, E. 팔머 지음, 최성학 옮김, 위의 책, 193쪽.
69) WuM, S. 113.
70) WuM, S. 115.
71) WuM, S. 108.
72) WuM, S. 109.
73) vgl. ebd.
74) WuM, S. 112.
75) WuM, S. 113.
76) WuM, 111쪽.
77) WuM, S. 113.
78) ebd.
79) WuM, S. 115.
80) 김영한 저, 위의 책, 249쪽.
81) WuM, S. 116.
82) ebd.
* 김영한 교수는 그의 저서 『하이덱거에서 리꾀르까지』에 수록한 논문 “가다머의 영향사 해석학”에서 ‘Veränderung’을 ‘변화’로, ‘Verwandlung’을 ‘변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에서의 ‘변형’은 ‘모양을 바꿈’이란 뜻이고, ‘변화’라는 말 역시 ‘성질이나 모양이 변하여 다르게 됨’이란 뜻이다. ‘모양이 달라짐’이란 의미에서 ‘변형’은 ‘변화’에 포섭된다. 그러므로 ‘Verwandlung’에 대한 ‘변형’이란 번역은 적절하지 못하다 하겠다.
‘Verwandlung’에 대한 번역어로서 우선 ‘변이’(變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변해서 달라짐’이란 글자상의 의미로 보았을 때는 상당히 접근하는 말인 것 같으나, 생물학에서는 ‘돌연변이’와 ‘우연변이’를 같은 말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변이’는 ‘우연성’을 내포한 말로써, 오히려 ‘변화’와 동의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역시 부적절하다.
가다머의 논지에 따라서 보았을 때, ‘Veränderung’을 ‘변화’라고 번역함은 타당하나, ‘Verwandlung’에 대해 적절한 우리말은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 논문에서는 부득이 잠정적으로, ‘변하여 달라짐’이란 뜻에서 ‘Verwandlung’을 ‘변전’(變轉)으로 옮겨 쓰고자 한다.
83) WuM, S. 117.
84) ebd.
85) ebd.
86) WuM, S. 118.
87) WuM, S. 108.
88) WuM, S. 112.
89) WuM, S. 108.
90) WuM, S. 122.
91) ‘Vermittlung’은 보통 ‘중재’(仲裁)로 번역되고 있으나, ‘화해’ 또는 ‘조정’의 의미보다는 ‘중간에서 상호관계를 맺어준다’는 의미가 더 강하므로 ‘매개’(媒介)라고 번역하여 쓴다.
92) WuM, S. 123.
93) ebd.
94) WuM, S. 125.
95) ebd.
96) WuM, S. 125.
97) WuM, S. 127.
98) WuM, S. 127.
99) ebd.
100) 김영한 저, 위의 책, 250쪽.
101) WuM, S. 132.
102) ebd.
103) 김영한 저, 위의 책, 251쪽.
104) WuM, S. 132.
105) WuM, S. 133.
106) WuM, S. 139.
107) WuM, S. 127.
108) WuM, S. 142.
109) 리차드. E. 팔머 지음, 최성학 옮김, 위의 책, 19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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