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칼럼 · 카툰에세이/칼럼·사설

[김주완의 문화칼럼 1] 그리운 낙동강[칠곡신문 : 2008.07.08.] / 김주완

김주완 2008. 7. 8. 15:28

<김주완의 문화칼럼> 그리운 낙동강

2008년 07월 08일(화) 16:04 [칠곡신문]

 

"유일하게 직류하는 왜관은 낙동강의 중심"

 

 

↑↑ 김주완 교수
칠곡 왜관 출생
왜관초등(47회)/순심중(17회)
시인/철학박사/대구한의대 교수(현)
구상문학관 시창작교실 지도강사(현)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지도교수(현)
대한철학회장/한국동서철학회장/새한철학회장

 

강을 바라보며


나는 나를 보며
남은 날을 살고 싶다


1949년 봄, 나는 낙동강변의 소읍 왜관리에서 태어나 청년기까지 살았다. 집에서 강까지는 불과 백 미터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성장기의 배경은 낙동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낙동강에는 유아기가 없다. 한국전쟁 최대의 격전지로서의 낙동강에 대한 기억이 없고 황학산을 넘고 다부재를 넘어 피란에 나섰던 기억도 없다. 따라서 내 머리 속에 남아있는 낙동강에 대한 기억은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말까지의 약 15년간이다.

1950년대의 낙동강에는 해마다 홍수가 났다. 인도교로 물 구경을 나가보면 거품이 둥둥 떠가는 누런 강물이 강둑을 넘실거리며 세차게 흘러갔다. 수박도 돼지도 떠내려 오고 초가지붕 위에 걸터앉은 사람들도 떠내려 왔다. 건장한 사내들은 장대를 들고 돼지와 가재도구들을 건져 올렸다. 홍수가 지나간 뒤의 한여름 밤에는 형님과 멱을 감으러 강으로 나갔다. 스멀스멀 모래가 내려 앉아 사람을 빨아들이는 소(沼)가 강바닥 어디엔가 있다는 할머니의 말이 떠오르면 강에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어머니는 겨울에도 강에 나가 빨래를 했다. 날빨래도 하고 삶은 빨래도 하였다. 나는 웅크리고 앉아 빨갛게 얼어서 부어오르는 어머니의 손등을 안타까워했다.

1960년대 초중반, 중고등학교 시절엔 친구들과 아랫게 선창가를 자주 서성였다. 강심을 건너 양쪽 강안을 오가는 나룻배는 가슴 설레게 정겨웠다. 역시 강가에 위치한 석적읍 중리의 친구 집에도 놀러갔고 간혹 자고 오기도 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돌망치 등의 구석기 중기 유물이 나온 곳이다. 70만년에서 1만년 전까지의 까마득한 시절부터 우리의 조상이 살았던 곳에서 내가 맡은 것은 군불로 때는 솔가지의 구수한 냄새였다.

1960년대 후반의 겨울 강은 낭만의 강이었다. 꽝꽝 얼어붙은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매서운 추위가 멈춰 선 강가에서 어느 여대생의 피겨스케이트 끈을 나는 추운 줄도 모르고 정성스레 매어 주곤 했다. 그 여대생이 지금의 아내가 되어 있다. 그땐 얼음판 멀리 나있는 숨구멍이 무서웠다. 거기로 미끄러져 빠지면 두꺼운 얼음을 깨고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 매달려 객지를 전전하던 지난 37년간 나는 늘 왜관을 그리워했고 꿈에서만 낙동강을 만나곤 했다. 낙동강은 압록강 다음 가는 한국 제2의 강이다. 1,300리 낙동강은 길게 누워 굽이굽이 흐른다. 그러나 석적읍 포남리에서 왜관읍 금남리에 이르는 강줄기는 유일하게 남북으로 곧게 흐르는 구간이다. 낙동강의 중심은 바로 이곳이라 할 수 있다. 천하장사가 낙동강을 번쩍 낚아챈다면 거머쥘 수 있는 손잡이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이승을 떠나시고 선영만 남아있는 왜관이지만 ‘귀거래사(歸去來辭)’라도 부르며 돌아가고 싶다. 기거할 단칸방이라도 구하여 강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 물을 보는 것은 마음을 보는 일이다. 나는 나를 보며 남은 날을 살고 싶은 것이다. /sophia194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