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보 사설)
<경산대신문 269호 사설 : 2002. 03. 05일자>
새봄, 새로 봄, 새로 염원함 / 김주완
새봄이다. 새봄이란 ‘새로 봄’을 의미한다. ‘새로 봄’은 ‘새롭게 봄’, ‘다시 봄’, ‘처음으로 봄’을 그 외연으로 거느리고 있다. ‘새로 봄’은 새 빛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봄빛은 새 빛이다. 새 빛 아래 새 생명이 약동하고 존재의 힘이 안으로부터 넘쳐서 흘러나온다. 봄은 계절의 출발점이기 전에 삶의 출발점이며 창조와 생성의 단초이자 희망의 시작점이다.
새봄에는 새 꽃들이 폭발적으로 개화한다. 겨울추위를 이겨낸 개나리꽃이 굳고 굳은 껍질을 잎보다 먼저 뚫고 나오고 벚꽃이 자욱하게 꽃망울을 터트린다.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꽃, 할미꽃이 앞다투어 들과 산을 수놓는다. 모두가 새 꽃이다. 지난해와 같은 모양이지만 지난해의 그 꽃들이 아니라 올해의 새 꽃들이다. 엄밀하게 진화론적으로 말한다면, 모양도 결코 같은 모양이 아니라 어쨌든 조금씩은 달라진 모양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여름에 열리게 될 서로 다른 새 열매들을 꿈꾸면서 이제 있는 힘을 다해 수정하고 성장할 것이다. 더 크고 더 굵고 더 아름다운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 그것들은 힘찬 생존의 레이스에 전념할 것이다.
캠퍼스의 봄은 새내기의 참신한 모습과 약간은 어색하기에 오히려 신선한 그들의 걸음걸이로부터 온다. 그들이 가진 잠재력은 수능점수와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가진 발전 가능성은 학부별 커트라인과 연동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어제의 고교시절은 훌훌 털어 버리고 명실공히 새 출발을 하여야 한다. 새내기들은 이 새봄에 모든 것을 새롭게 보아야 하고 새로운 환희와 희망을 가져야 하며 거기에 알맞은 자기목표를 세워야 한다. 지성의 엄숙한 책무와 태도를 또한 배우고 익혀야 한다.
새봄을 새봄답게 맞아야 할 필요는 경산대학교 캠퍼스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성이 반지성으로 변종되고 지도자가 공익보다는 사리사욕 채우기에 급급한 현실이 국가, 사회 전체에 만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국가, 사회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그러하다. 이 봄에는 전도된 가치를 제자리로, 제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새롭게 보는 것만으로 새로움이 저절로 성취되는 것은 아니라는데 있다. 새봄, 새 빛, 새 희망의 뒤에는 어둡고 퀴퀴하고 절망적인 그늘이 호시탐탐 선과 정의를 노리며 살쾡이처럼 도사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태초로부터 우리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양면성이라는 괴물에서 연유하는 그늘이다. 그 그늘을 걷어내었을 때에만 온전한 새봄, 새 빛, 새 희망이 우리의 것으로 된다. 여기에 살아있는 지성의 역할이 소명되고 있다. 소리내는 지성이야말로 실천적인 지성일 수 있으며, 평화와 상생과 권력의 위탁성을 아는 지도자만이 세상의 그늘을 걷어낼 수 있고, 행동하는 지성만이 권력에 대한 채찍이 될 수 있다.
위기 앞에서의 생존, 침체를 딛고 서는 발전은 진정한 지도력으로만 견인될 수 있다. 사술과 전쟁, 물신주의와 섹터주의는 소수의 생존을 위하여 전체생존을 절멸시키는 에이즈 균이다. 경산대학교도 국가, 사회도 그리고 세계도 이 새봄에 모든 것을 새로 보면서, 그리하여 평화적 상생과 지속적 복지의 길로 나아가기를 우리는 소망하면서 기원한다. 새봄을 새봄답게 맞자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다시 한번 만들어 내자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 염원의 핵심이다.
'산문 · 칼럼 · 카툰에세이 > 칼럼·사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럼] 직업훈련원으로 변한 대학[불교신문 2003.10.08]/김주완 (0) | 2003.10.08 |
---|---|
(학보 사설) 꿈꾸는 자는 아름답다[경산대신문: 2002.09.13]/김주완 (0) | 2002.09.13 |
[교수 칼럼] 2002 학부제 개편 논쟁의 끝[경산대신문 제258호]/김주완 (0) | 2001.05.08 |
(학보 사설)민주주의와 선거[경산대신문(1997,12,18 )] / 김주완 (0) | 2001.04.02 |
(학보 사설) 개혁 신드롬[경산대신문 : 1995.11.28.] / 김주완 (0) | 2001.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