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문> 2020년 봄호(통권 105호) 수록
[신작시특집] 3편
위지악 이선기인울* /김주완
-음악
노년이 되면서 맑고 높은 음에서 눈물이 난다
청력을 잃은 음악가는 눈물의 높이에 음자리를 그렸을까
동굴 벽을 뚫고 나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어두운 바닥에 부딪쳐 온몸이 부서질 때 비로소 가늘고 맑은 소리가 된다 술대를 튕기면 떨어지는 소리 한 방울 튀어서 귀먹은 가슴에 들어서듯이
안에서 밖으로 베풀면 안은 비워지고 넓어져서 편안해진다 집 안에 빈 하늘이 있고 빈 땅이 있어 그 사이로 해가 들어온다 따뜻하고 곧고 하얀 햇살들이 빈 구석구석을 밝히고 덥힌다 오, 베풂과 들어섬의 성스러움이여
높고 구성진 소리는 귓속의 어둠을 밝히며 가슴의 동공을 후려친다 터져 나온 강물이 굽이치는 설움의 물결
최고의 말은 무언이다 의미가 빠져나간 소리, 어둠을 밀어내는 소리, 막힌 벽을 뚫는 소리는 변질되지 않은 한을 품고 있다 오롯한 최상의 말은 수사가 없이 흐르는 음형상, 자유로이 유동하는 음악, 맨 처음의 순한 소리의 즐거움이다
빈 소리는 노래가 되어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의미는 없고 소리만 있는 처음의 노래는 우우우 갑갑하고 답답한 마음을 뚫어 통로를 낸다
가장 가늘고 가장 맑고 가장 높은 그는
처음부터 부드러운 눈물이었고 서늘한 바람이었다
* 爲之樂 以宣其湮鬱 : 음악은 갑갑하고 답답한 가슴을 뚫어 준다. ― 한유,《원도原道》
충내형외지위미*/김주완
― 아름다움
차곡차곡 쌓이더니 천장까지 닿았습니다 그리운 눈물일까요 곱디고운 분노일까요 벽이란 벽은 모두 은밀한 속이 되었습니다 가득 차서 부풀면 밖으로 터져 나옵니다 혼비백산 노래도 꽃도 모두 찬란한 해방입니다 막히고 답답한 것이 터져 나오는 폭발입니다 붉은 소리로 얼굴을 부수고 나오는 큰 웃음을 보셨나요 들판 가운데 홀로 똑바로 선 늙은 회나무의 늦은 출타를 만나셨나요
* 充內形外之謂美 : 속이 충만하여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 장재, 《정몽》, <중정>
불학시 무이언*/김주완
― 시, 말, 시인
따라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남의 말을 따라 하고 남의 길을 따라 걷고 남의 달음박질을 따라 달음박질하면서 세상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의 복제판, 표절은 그럴 듯했지만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똑 같은 말, 똑 같은 얼굴, 똑 같은 생각을 하면서 모두는 여럿이 아닌 하나가 되어 갔다 어제는 내일, 주고받는 것은 네 것도 내 것도 아니었다 돌고 도는 돈처럼 유통이 오래 되면 될수록 너덜너덜 닳아 있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갈 때 아버지는 내게 시를 배우라고 했다 말을 얻으라고, 남의 말이 아닌 나의 말을 찾으라고 했다 자기만의 말다운 말을 할 때 자기만의 세상이 열린다고, 처음 이름 지어 부르는 것이 시라고 했다
내 뜻대로 이름 지어 부르면 사물들은 성큼성큼 이름 안으로 걸어 들어와 새것이 되었다 사람들의 말을 쓰되 사람들과는 다른 의미로 쓰기 시작하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넓은 세상 한가운데 말답게 말할 것이 있는 나는 내가 되고 반신(半神)**이 되었다
― 시인은 말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가 곧 말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존을 내세우지 않는다 스스로 자존이기 때문이다 참시인은 자유와 해방을 갈구하지 않는다 그와 그의 말이 곧 자유이고 해방이기 때문이다
* 不學詩 無以言 :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답게) 말할 것이 없다. ―《논어》, <계씨편>
** ‘말로서 새롭고 완전한 세계를 건설해 내는 시인들의 언어는 예언하는 언어이며, 그런 의미에서 시인들은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그 중간에 내던져져 있는 반신(半神)이다.’(M. 하이데거)
<시인 수첩>
시를 배우며 시와 함께 가는 길
시(詩)의 말(言)을 생각한다.
《논어》에서는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할 것이 없다>고 한다. <예(禮)를 배우지 않으면 인격이 바로 설 수 없다>고도 한다. 양자는 수양과 실천을 중요시한 동양적 사고의 바탕이다. 참된 선비들은 신독(愼獨)을 실천하여 홀로 있을 때에도 몸가짐과 언행을 삼갔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이다. 말도 마찬가지이다. 선비들은 홀로 있을 때 비속어를 쓰지 않고 품위 있는 말을 쓰려고 했을 것이다. 천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경직된 도덕적 형식주의에 불과할까?
사람들은 매일매일 말을 하면서 살아간다. 이때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가 된다. 소통의 다른 말이 유통이다. 그러나 유통은 교환이고 전달이고 분배이지 창조가 아니다. 창조된 것은 유통될 수 있지만 유통이 곧바로 창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할 것이 없다>고 하는 말은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답게 말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말답게 말하는 것>은 <창조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해서 <시의 말>이어야 하는가?
시의 말은 본질적으로 창조하는 말이다. 사물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서 명명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말로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창조하고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시인은 명명함으로써 대상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자이다. 물론 시인도 일상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전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새로운 의미로 사용한다. 시인이 시의 말로 불렀을 때 모래나 바위조차도 꽃이 되고 사랑이 되고 눈물이 된다. 신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지만 시인은 유(有)에서 유(有)를 창조한다. “말로서 새롭고 완전한 세계를 건설해 내는 시인들의 언어는 예언하는 언어이며, 그런 의미에서 시인들은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그 중간에 내던져져 있는 반신(半神)이다.’(M. 하이데거)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는 말>로서의 <시의 말>이야말로 <말답게 말하는 말>이다. 시인은 <말답게 말할 것이 있는 자이다.> 시는 신의 세계창조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창조의 근원이다. 인류의 영원한 전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문학의 중심이고 예술의 중핵이 된다.
전달의 용이성에 있어서 시보다 한 수 위인 것이 음악이다. 음악은 <소리의 즐거움>이다. 소리는 그 자체 감정을 가지고 있다. 시는 말과 문자라는 매개물을 통하여 전달되지만 소리는 매개물 없이 그 자체로 전달된다. 안온하거나 격정적이거나 비감하거나 기쁜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음악이며 그것은 사람들의 막히고 답답한 가슴을 뚫어 준다. 감동의 전달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예술이 음악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고 했다. 정형시의 외재율이나 자유시의 내재율은 시가 가진 음악성이다. 시와 음악은 모두 아름다움을 어머니로 공유한다. 아름다움에서 발원하여 아름다움으로 회귀하는 것이 예술이다. “언어 자체가 시이며, 모든 예술은 그 본질에 있어 시작(詩作)이다.(M. 하이데거)
시인은 말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가 곧 말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존을 내세우지 않는다. 스스로 자존이기 때문이다. 참시인은 자유와 해방을 갈구하지 않는다. 그와 그의 말이 곧 자유이고 해방이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바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를 배우며 시와 함께 가는 길>이다. <시를 배워 말할 것이 있는 삶을 사는 일>이다. “인간은 시인으로서 이 세상에 산다.”(M. 하이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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