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문> 2018년 여름호(통권 98호)_[신작시특집]_근곡* 선생의 달빛 조상(彫像) 외 2편 / 김주완
김주완
1949년 경북 왜관 출생. 1984 「현대시학」 등단. 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그늘의 정체」, 「주역 서문을 읽다」 외. 카툰에세이집 「짧으면서도 긴 사랑 이야기」. 저서 「미와 예술」,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외.
근곡* 선생의 달빛 조상(彫像)/김주완
낙동강은 동쪽으로 흐르고
하늘에는 뭉게구름 인다
바람 불면 일어서는 억새풀,
흘러 낮은 곳에 처한 자는 강을 섬기고
땅에 발 딛고 하늘을 머리에 인
모 심고 밭 가꾸는 사람이 참 사람이라
하늘 아래 하늘이 되는데
하늘수박 익는 천봉산
후한 자락의 근곡 선생이
다함없이 높은 고을
상주(尙州)를 꺼내 닦는 새벽
은척동학교당의 교인들은 줄지어 길 나서고
북천에는 감꽃 떨어진다
흐르는 강물 위로
여름 내내 뚝 뚝 땡감 떨어진다
* 근곡(槿谷) : 시인 박찬선(朴贊善) 선생의 아호.
아나키스트 김성국 교수/김주완
살아있는 것은 모두가 잡종*이었다
잡종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저쪽과 이쪽을 모두 친구로 삼고 싶어
너도 자유, 나도 자유였던 처음
떠나온 곳을 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주어진 것이 빈손뿐이던 출항은 설레었다
살아 있음은 경건하고
개인은 자연에서 왔으므로 자유이며 하늘이라
사람을 사랑하여 사름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닷가에서 바다를 보며 바다가 되고 싶었던 사람
해적처럼 붉고 더운 피를 가진 자유의 수행자가 있었다
35세 연상의 허유** 선생이 대단하다, 존경한다 했던
높고 먼 시선을 가진 오롯이 키 큰 사람 하나
부름에 응답하는 푸른 사람은
선혈 같은 동백꽃이 되어 밤새도록 피었다
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해방의 바다를 꿈꾸며
바람을 가르며 잘라 온 한 떨기 수평선을
입춘 무렵이면 펼치고 또 펼쳤다
마침내 소리가 되어 먼 들판을 가로질러
눈물겹게 다가오는 것은 모두가 잡종이었다
세계의 빛이 모이는 남쪽 바닷가
잡종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의 길을 가면서 잡종을 핵심 키워드로 내세우고 있는 김성국(1947~ )은 신국판 932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독보적인 저서「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이학사, 2015.12.)으로 제62회 대한민국학술원상(2017)을 수상하였다.
** 현대 한국의 제1세대 철학자이자 아나키스트였던 하기락(1912~1997) 교수의 아호. 아나키스트로서의 그의 사상과 삶을 조명한 김춘수의 시 「허유(虛有) 선생의 토르소」, 「제18번 비가(悲歌)」 등이 있다.
목자스럽다/김주완
내방가사를 필사하던 어머니는 한 번씩 어린 나를 건너다보며 ‘목자스럽다’고 하였다. 어림짐작으로 말귀를 열면서 나는 따라 웃었다, 마주 앉아 두루마리 종이를 조금씩 풀어 어머니의 붓길을 열던 한나절 내내, 나의 못난 얼굴을 놀리는 말인지 대견해하는 말인지 헷갈렸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여자아이들이 깨금발로 돌을 차면서 놀이판에서 노는 민속놀이를 목자놀이라 한다. 이때 사용하는 납작하고 매끈한 돌이 목자이다, 코가 낮은 내 얼굴이 검고 납작한 돌 같다고 하여 어머니는 ‘목자스럽다’고 하였을까
기독교에서는 신자가 양이고 성직자가 목자(牧者)이다, 양은 위험 앞에 노출되고 목자는 양을 인도하여 위험에서 벗어나게 한다, 목자를 따르는 양만이 구원되는 섭리, 내게서 어머니가 성직자의 모습을 보았을까, 그럴 리가 없다
목자득국(木子得國)은 고려 말 유행한 동요*이다. 지은이와 노랫말이 전하지 않는다, 목자(木子)는 이(李)자를 파자한 말, 장차 이씨 성을 가진 이가 임금이 된다는 뜻, 그러니까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예언한 노래 제목이다, 어린 내게서 어머니는 대의를 보았을까, 만무한 일
목자는 ‘못난 사람’의 사투리일 것 같다는 생각, ‘모과’의 다른 말일 수도 있다는 것, 기분 나쁘지 않은 느낌의 처음이 옳았다는 것, 칠십에 나는 겨우 알았다
* 고려사 : 우왕 14년(1388).
[시작 노트]
시작(詩作)이라는 고행/김주완
1.
<시가 내게로 왔다.> 나는 이 말에 거부감을 가진다. 시인은 피동적이고 시가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냥 기다리는 존재인가? 단순히 기다리고 있다가 시가 오면 그때 비로소 그것을 문자로 옮겨서 시를 쓰는 도구적 존재에 불과한 자가 시인인가? 그렇다면 글씨를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시인이 된다. 왜냐하면 시가 그에게로 오기만 한다면 시를 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아니다. ‘시가 온다’는 말이 ‘시적 영감의 생성’을 의미하는 줄은 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명제는 시인을 너무 가볍고 너무 부족한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 된다.
나는 시인의 능동성과 주체성과 고유성을 강조하고 싶다. 참다운 시인이라면 시가 오기를(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를 찾아가서(영감을 떠올려서) 시를 포획해야 한다. 떠오르지 않으면 떠올려서 시를 쓴다는 말이다. 오는 시를 경건하게 영접하는 수용성이 아니라 시를 향해 자신을 기투하여 주도적으로 시를 낚아채는 자발성이 시인의 본성이라는 말이다. 시인은 자존감이 강하다. 시인은 전무후무한 최고의 시를 쓰고자 한다. 남이 쓴 비유를 따라가지 않고 기시감이 있는 문장을 과감히 도려낸다. 시인은 언어를 관용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구사한다. 우주만물의 근원적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며 일체의 속박이나 부자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시를 창작하고자 한다. 시인을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시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본래적으로 철학자이며 아나키스트이다. 표절은 자존심의 손상이며 시인의 자기살해이다. 다른 시인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시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참된 시인이 가지는 기본적인 의지이다. 여기서 시인의 고유성이 나온다.
시인은 단독자로서의 우주이다. 개별 시인은 고독의 성채에서 독존적으로 존재하지만 시의 발표와 유통을 통해서 역사의 흐름을 넘어서게 되며 세계는 물론 우주와 소통하는 병존적 존재가 된다. 개별 시인이 쓰는 시는 한편으로는 미미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그 속에 우주적 연민을 담고 있는 유일무이한 예술품이다. 한 편의 시를 확대하면 세계가 되고 세계를 축소하면 한 편의 시가 된다. 시인은 그의 시를 읽는 세계 내의 당대인은 물론 미래인에게 자기의 시 정신을 무제한으로 나누어 주는 위대한 증여자이다.
2.
<시야 놀자.> <시와 논다.> 나는 이 말에도 거부감을 가진다. 고통스럽게 시를 창작하는 것 보다 즐겁게 시를 창작하는 것이 더 좋다는 말쯤이라면 동의할 수 있다. 그것도 제한적인 동의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것의 탄생에는 재미보다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기 때문이다. 이즈음의 세태를 보면 <시와 논다>는 명제가 마치 금과옥조처럼 쓰이고 있다.
‘시와 노는 일’은 독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독자는 부담 없이 재미있고 즐겁게 시를 읽으면 된다. 재미없으면 읽지 않을 권리도 독자에게는 있다. 그러나 시인은 시와 노는 자가 아니다. 독자가 시와 놀 수 있도록 놀이마당(독서)과 놀이거리(시)를 만들어 주는 자가 시인이다.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더 재미있어 할까,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더 감동을 받을까?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더 진지하게 삶을 반추하고 역사적 진실을 바라보며 자연의 비의를 깨치게 될까? 시인이 뇌리에서 떠나보내지 않고 밤낮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독자는 다만 느낌으로 시를 읽지만 시인은 독자의 느낌을 어느 방향으로 불러일으킬지를 염두에 두고 차가운 계산을 하면서 시를 짓는다. 유능한 코미디언은 자신은 웃지 않으면서 관객을 웃긴다.
H. G. 가다머의 미학이론에서 ‘놀이’ 개념이 등장하기는 한다. 그는 “존재방식에 있어서 놀이와 예술작품은 유사성을 가진다”고 한다. 예술경험(창작과 감상)이라는 측면에서 놀이와 예술작품은 재미와 매력을 가진다. 감상자는 재미와 매력 때문에 예술경험(감상)을 한다. 창작자(시인)도 퇴고나 윤문의 과정에서 자기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이때는 작품과 논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자기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재미와 매력을 느끼기 보다는 재미와 매력이 과연 있는가 하는 자기검열에 열중할 것이다. 창작과 감상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가다머의 놀이 개념은 ‘논다’라는 의미보다는 ‘운동성과 유동성’을 의미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예술작품의 존재상태는 놀이이고 존재방식은 표현이다.” 시인은 고통으로 놀고 독자는 재미로 논다.
3.
<시작(詩作)은 고행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힘든 길이다. 시작은 집을 짓듯이 <시는 짓는 일>이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집이 내게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집을 지을 때, 하기 싫은데 억지로 짓는 것 보다는 재미있게 짓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집은 재미로만 지어서는 안 된다. 진지하고 신중하게, 차근차근 견고하게 지어야 하는 것이 집이다. 재미 보다는 경건하게 지어야 하는 것이 집 짓기이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미학이나 예술철학을 몰라도 된다. 스스로 터득한 자신만의 고유한 창작기법으로 작품을 창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이 드는 고행이지만 고행이기에 또한 보람과 긍지가 동반하는 일이 시작인 것이다. 고행 없는 걸작의 탄생도 있을 수 있다. 고행은 시작의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필요조건이다.
4.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를 썼다. 5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대학 강단에서 퇴직하여 노년을 시작에 전념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처음부터 시를 쓰기 위하여 철학을 전공했다. 시를 중심에 놓고 미학과 예술철학을 공부했다. 시가 무엇인지에 대한 오랫동안의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다. 시를 모를 때는 무작정 잘도 썼는데 시를 알고서는 시 쓰기가 두려워졌다. 끝을 바라볼 수도 가늠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시는 허막한 우주 그 자체이다. 시도 철학도 내가 이룬 것은 미미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가는 데까지 가는 것뿐이다. 좌표계의 일정한 구간을 흐르는 점처럼 이만큼 온 것에 감사하면서 남은 생이 끝날 때까지 놓치지 않고 시를 붙들고 가는 것이다. 성과에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욕심은 부질없다고 생각한다. 성과는 나의 바람과 무관하고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욕심뿐이다. 흔한 말로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능력껏 쓰고 스스로 게으르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쉽지 않을 것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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