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하루
김주완
(시인, 철학박사, 전 대구한의대 교수)
<아름다운 하루를 살자>, 눈뜨자마자 이런 다짐을 루틴으로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역동적으로 살자', '순리적으로 살자' 이러한 다짐도 있을 수 있다. 전자는 동물적이고 후자는 식물적이다. '보람차게 살자', '신나게 살자' 이런 다짐은 의욕적이긴 하지만 진부하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 '남으로부터 피해를 입지도 말자' 이런 다짐은 도덕적이거나 전투적이다. 무릇 다짐이라는 다짐들에는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 힘이 많이 들어가면 어느새 인간은 사라지고 힘만 남는다.
<아름답게 살자>는 자기 다짐은 부드럽다. 도덕적이거나 전투적이지 않고 진부하지도 않다. <아름다운 하루>는 어떻게 살아야 만들어지는 것일까?
삶은 본질적으로 물질 반, 정신 반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으로서의 인간도 그러하다. 몸이 반이고 정신이 반이다. 그러나 삶을 실질적으로 끌고 가는 것은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다. 물질인 집에서 자고 일어나 물질인 아침 식사를 하고 물질인 자동차를 타고 출근을 한다. 직장에서 하는 일도 대부분이 물질과 관련이 있다. 직장인이 매달릴 수밖에 없는 성과지상주의는 대개 물질적 가치로의 환산에 의존한다. 그런데 물질은 물질이어서 스스로 작용하지도 못하고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지도 못한다. 물질적 가치의 창출을 위하여 동원되는 것이 정신이다. 정신은 묘안과 계책을 생각해 내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이론체계를 구축한다. 정신이 물질에 봉사하는 상황에서 물질의 노예가 된 정신은 스스로에게 가하는 채찍질로서 스스로의 다짐을 만든다. 따라서 인간이 의지하는 대부분의 다짐은 물질을 추구하는 다짐이 된다.
삶의 현장에서는 인간의 물질욕이 상호 충돌하여 갖가지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것을 조정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정의와 공정이다. 정의와 공정은 법률로서 규정될 수 있지만 그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정의와 공정의 보다 튼튼한 기반은 도덕이다. 도덕감이 마비된 시대라면 어떻게 될까? 법치가 자의성에 의존하여 증발된 현실이라면 어떻게 될까? 이기주의와 연고주의가 횡횡하는 사회라면 어떻게 될까? 통제되지 않는 힘이 무자비하게 지배하고 서열화되는 곳은 자연 상태의 정글이다. 정글에는 인격이 없다. 불행하게도 현대 한국 사회는 이와 같이 불길한 징후들이 농후하다. 표면적 정의와 이면적 부정의, 표면적 공정과 이면적 불공정이라는 이중 구조에 지금의 한국인은 조금씩 적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서 받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현실적 고통에 시들어가는 꽃송이가 우리들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물질의 노예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정신, 현실적 고통을 벗어나 정신이 정신의 주인이 되는 자주적 정신을 되찾기 위하여 필요한 방법 중의 하나가 <아름다움>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이다. 독일의 현대 철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그의 미학 이론을 전개하면서 <미적 소유의 법칙>을 말한다. ‘모든 대상은 아름다운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오로지 볼 줄 아는 사람의 소유’라는 것이다. 미적 소유는 물질적 소유의 반대편에 있다. 골목길 담장 위에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의 물질적 소유자는 그 집의 주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지나가던 행인이 장미꽃의 아름다움에 홀려서 하염없이 감상하고 있다면 그 장미꽃의 미적 주인은 바로 그 행인이다. 미적 소유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볼 줄 아는 사람,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만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소유하는 자는 심미감이 고양되어 정신의 해방과 자유, 그리고 행복감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아름다운 하루를 살자>고 다짐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물질이 아닌 정신으로서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세상에는 아름다움이 넘쳐난다. 진상을 부리는 사람도 가련하여 애틋하게 보이며, 보복운전으로 진로를 위협하는 무뢰한도 그가 가진 강박증이 떠올라 불쌍하게 보일 것이며, 직장 상사로부터 받는 편파적 대우에도 그의 협량에 대하여 동정심이 생길 것이다. ‘가련미’라고 하는 것이다. 동료가 입는 오래된 청바지에서는 신선한 푸름이 느껴질 것이며, 나를 헐뜯으려 돌아서서 나누는 주변인들의 뒷담화도 산들바람처럼 상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신선미’와 ‘여유미’라는 것이다. 내가 오늘 살아있지 않았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일들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고, 살아 있으니까 일어나는 이 모든 일들이 참으로 아름답지 아니한가.
혹자는 <성인이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 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인은 성인이 아니지만 그럴 수 있다. 성인이라면 저절로 그렇게 되겠지만, 우리는 성인이 아니기에,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고, 마음만 먹는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거기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하루를 살자>는 다짐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엔도르핀과 세로토닌, 도파민과 다이돌핀은 상대방의 뇌 속이 아니라, 바로 나의 뇌 속에서 생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쪽인 정신이 다른 반쪽인 물질을 지배할 수 있는, 일상의 전쟁 같은 상황을 건널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 이것이다. 하루 만큼씩만 살 수 있는 우리의 하루, 어차피 살아야 할 하루라면 아름다운 하루로 사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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