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름, 속살을 보이다
구재기
똑바로 몸을 돌려
맨 처음 태어난 자리 그대로
바로 바라볼 수 있으랴
이름과 모양에 마음하는 일
한지韓紙에 물이 스며들듯
아무려면 말할 것 하나 없고
가진 것도 없으면, 온갖
작은 바람결에도 쫓기지 않는다
무얼 그리도 잇달아
간직하려고 애를 쓸 것인가
저 음흉한 담자색 꽃숭어리
찐득한 기름에 절여들 듯
본디 지니고 있는 생김이 저러하련가
꽃의 향기는
지나는 바람을 잡으려 하지만
빛 좋은 꽃숭어리,
그림자를 멀리 두려하지 않는다
그렇다, 향기 없다 하여도
꽃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깊고 그윽하더니
이리 사랑스럽고, 저리 곱살스러운
곱다란 꽃숭어리
이미 구속 되지 아니하고
한 번 더 눈을 돌리고 보면
푸른 가을하늘 밑의 시공에는
촉촉하니 혀끝으로 젖어드는
잘 익은 으름 하나
청초하고 해맑은 속살을 보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약력)
충남 서천 출생,《현대시학》1978년 천료. 시집『모시올 사이로 바람이』『목마르다』『제일로 작은 집』과 시선집『구름은 무게를 버리며 간다』등 20여 권. 충남문인협회장 및 충남시인협회장 역임. 신석초문학상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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