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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특강 원고] 낙동강 문학의 미래-(2020.09.12. 제70회 낙강시제)/김주완

김주완 2020. 10. 5.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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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특강 원고] 낙동강 문학의 미래-(2020.09.12. 제70회 낙강시제)

일시 : 2020.09.12.(토) 15:30

장소 : 낙동강문학관(경북 상주시 중동면 갱다불길 100

수록 : 제70회 낙강시제 시선집 <낙동강> 270쪽~288쪽

* COVID-19 방역 수칙을 준수하여 비대면 생방송으로 진행된 행사였습니다. *

 

낙동강 문학의 미래

 

김주완

〈목 차〉

Ⅰ. 논의의 전제와 한계

Ⅱ. 낙동강 문학이란?
Ⅲ. 한국의 문학관과 낙동강문학관
Ⅳ. 상주문학 ― 박찬선 ― 낙동강 문학
Ⅴ. 낙동강 문학의 미래
    ① 모이는 문학
    ② 흐르는 문학
    ③ 바다로 가는 문학
    ④ 상선(上善)을 추구하는 문학
    ⑤ 인공지능과의 관계
Ⅵ. 맺으며


          강은
          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강은
          오늘을 살면서
          미래를 산다.

 

          강은
          헤아릴 수 없는 집합이면서
          단일과 평등을 유지한다.

 

          강은
          스스로를 거울같이 비춰서
          모든 것의 제 모습을 비춘다.

 

          강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한다.

 

                     ―구상, 「강 16」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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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강 16」, 『구상연작시집』, 서울:시문학사, 오늘의 정예시인 시리즈ㆍ1, 1985.11.10. 31쪽.(이 시집에는 연작시 「그리스도 폴의 강」 60편과 「밭 일기」 60편이 수록되어 있다. 강 연작시는 그가 1953년부터 1974년까지 거주한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낙동강과 그 후 거주한 서울 여의도의 한강을 시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Ⅰ. 논의의 전제와 한계

 

<낙동강 문학>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개념이다. 그동안 문단이나 학계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은 개념이며 내포나 외연 또한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문학>이란 용어는 상주 문단에서 종종 언급되어 왔으며 문면 상으로는 2017년 박찬선이 처음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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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선, 낙동강, 문학을 열다, 낙동강, 2017 67회 낙강시제 시선집, 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 2017.9.9. 188~207.


박찬선은 「낙동강, 문학을 열다」라는 제목의 강연록에서 그의 해박한 문학적, 사학적, 한문학적, 철학적, 사회학적, 환경생태학적 지식과 정치한 필치로 상주 낙동강에서 666년 동안 이어져 온 <낙강시회>와 오늘날의 <상주문학>을 연결시키고 2020년 개관하는 <낙동강문학관>을 중심으로 하여 <낙동강 문학>의 장대한 개막과 통섭을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낙동강 문학이라는 개념은 이제 막 생성 중인 개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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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강시회는 상주의 낙동강에서 1196(고려 명종 26) 백운 이규보의 시회로부터 1862(조선 철종 13) 계당 류주목의 시회까지 666년 동안 51회의 시회가 있었다. 퇴강에서 경천대를 거쳐 관수루에 이르는 약 40리 구간(주로 도남서원, 경천대, 누정과 선상)에서 이루어졌다. 현존하는 공동시문집은 낙강범월시(洛江泛月詩:임술범월록의 별칭)가 있으며 낙강범월시는 강에 달 띄우고 뱃놀이를 겸한 시회를 통해 171년 동안 같은 공간에서 같은 제재(뱃놀이시회)로 대를 이으며 창작해 온 8회의 작품을 한 책자에 기록하여 도남서원에 갈무리해 온 시집이다. 도남서원은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선생을 봉안하고 있다. 박찬선은 한국문협경북지회장 재직 시인 200282~3일에 역대 51회의 낙강시회를 이어서 <낙강시제>로 개칭하여 재현하였으며 2020년 현재 제70회 낙강시제가 개최되고 있다.(박찬선, 낙동강, 문학을 열다, 194~196. 참조.)

 

낙동강 문학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몇 가지의 갈래가 있다.


1) 낙동강 유역에서 창작되는 문학이나 소비되는 문학을 낙동강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낙동강 유역이란 길게는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咸白山, 1,573m)에서 발원하여 영남지방의 중앙저지(中央低地)를 통하여 남해로 흘러드는 1,300리의 주변인 강원도,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경상남도,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등을 아우르는 지역을 지칭하게 된다. 이들 지역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지류는 반변천, 길안천, 내성천, 영강, 병성천, 위천, 감천, 금호강, 황강, 밀양강, 남강 등이다.

 

낙동강 유역을 짧게 보면 흔히들 ‘낙동강 칠백 리’라고 할 때의 낙동강, 그러니까 강다운 강으로 출발하는 상주로부터 부산까지의 낙동강 유역을 이른다. 김용호의 시에서도 낙동강은 칠백 리로 그려지고 있다.

 

          내 사랑의 강!
          낙동강아!
          칠백 리 굽이굽이 흐르는 네 품속에서
          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시작되었다.
                                       ―김용호, 「낙동강」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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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金容浩), 낙동강, 사해공론 四海公論, 1938. (일제의 핍박을 견디다 못하여 유랑의 길을 떠나는 민족의 참상과 애환을 노래한 197행의 장시)

 

2) 낙동강을 주제, 소재, 배경으로 하는 문학을 낙동강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는 작가의 거주지나 문학적 활동 지역이 세계 어느 곳이건 간에 낙동강 문학을 할 수 있다는 개방성과 확장성이 확보된다.

 

3) 이념(Idee)으로서의 낙동강 문학을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지역이든 주제든 간에 그리고 현재이든 미래이든 간에 낙동강 문학에서 추출될 수 있는 정신성이나 이념성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낙동강 문학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념으로서의 낙동강 문학의 유사 갈래로서, 서두에서 본 구상 시인의 시 「강 16」과 같이 일반적인 강을 소재나 주제로 한 시를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강의 본질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시일 것이기에 낙동강 문학뿐만 아니라 압록강 문학, 대동강 문학, 한강 문학, 금강 문학, 영산강 문학, 섬진강 문학 등이 모두 이념으로서의 강 문학에 포섭될 수 있다.

 

요컨대 낙동강 문학의 개념 규정이나 그 발단과 전개, 성과와 미래 전망에 대한 기성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이와 같이 논의의 지층이 전무한 상태에서는 비교 논의가 불가능하다. 아직 건설되지 않은 건물은 상상의 대상으로서만 가능적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논의되는 내용은 시론(試論)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견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반론의 제기도 가능하다. 그러한 반론이 있다면 거기에 대하여 다시 재반박하며 필자의 견해를 주장할 의사가 필자에게는 없다.

 

Ⅱ. 낙동강 문학이란?

 

낙동강은 가야와 신라 천 년간의 역사가 서려 있고, 조선시대에는 강을 동서로 하여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쌍벽을 이루면서 영남학파의 학맥이 만들어져 조선 유학을 주도하였으며, 또한 임진왜란과 6·25전쟁의 비극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낙동강은 오랜 세월 동안 영남인들의 삶의 젖줄이 되어왔다. 신라 향가의 본산인 경주가 이곳에 있고, 6·25전쟁 시에는 전국의 문인들이 대구에 모여 한국문학의 중심이 이곳에서 형성된 이력이 있으며 낙동강 칠백 리의 시발점이자 조선시대 경상감영이 있던 문학의 고장, 상주가 있다.

 

낙동강은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긴 강이다. 세계이든 국가이든 인류 문명이 큰 강의 유역에서 생성되고 발달한 것이라면 남한에 있는 한민족의 문명은 낙동강 유역에 가장 많이 존재할 것이다.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향가, 설화, 민요, 고시조, 고소설, 가사, 서간문 등은 물론 현대문학의 각 장르까지 가장 많이 생산되고 소비된 곳이 이곳일 것이다. 낙동강 유역에서 생산되거나 소비되는 문학을 협의의 낙동강 문학이라고 한다면 낙동강을 주제, 소재, 배경으로 하는 문학이나 이념으로서의 낙동강 문학은 광의에 있어서 낙동강 문학이 될 것이다. 광의의 낙동강 문학은 어쩌면 한국문학과 등치될 수 있거나, 최소한 한국문학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의에서는 ‘낙동강 문학’이라는 용어를 위에서 말한 낙동강 문학의 개념적 갈래들을 전부 합하여 총합적 개념으로 사용할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이 규정했을 때 ‘낙동강 문학’이라는 개념의 외연이 지나치게 광범할 수 있고 논의의 초점 또한 흐려질 수 있겠지만 밑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지금과 같은 단계에서는 이러한 방법이 부득이하다고 양해될 수 있을 것이다.

 

Ⅲ. 한국의 문학관과 낙동강문학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각 지역별로 문학관이 건립이 활성화되면서 낙동강 유역에도 많은 문학관이 들어섰다.

 

대구ㆍ경북에서는 칠곡 왜관의 구상문학관(2002년 개관)을 필두로 하여 안동의 이육사문학관(2004년 개관), 경주의 동리목월문학관(2006년 개관), 영양의 지훈문학관(2007년 개관), 김천의 백수문학관(2008년 개관), 포항의 흑구문학관(2012년 개관), 청송의 객주문학관(2014년 6월 개관), 대구의 대구문학관(2014년 10월 개관)과 264작은문학관(2016년 개관), 문경의 문경아리랑시조문학관(2018년 4월 개관), 영천의 노계문학관(2018년 6월 개관), 문경의 문경문학관(2018년 12월 개관), 의성의 최치원문학관(2019년 개관), 상주의 낙동강문학관(2020년 개관)이 속속 문을 열었다. 2021년 3월에는 영양의 이문열문학관이 개관 예정으로 있다. 대구에 겨우 2개의 문학관이 있는데 비해서 경북에는 무려 13개 문학관이 소재한다. 이것은, 현재의 문학인 수는 대구가 경북 보다 훨씬 더 많지만 1981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구와 경북이 분리되기 이전까지는 유수한 문학인이 지금의 경북에서 더 많이 배출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경북이 23개 시군임을 감안하면 거의 1.8개 시군에 1개씩의 문학관이 현재 시점에서 소재하고 있는 셈이 된다.

 

역시 낙동강 유역인 부산ㆍ울산ㆍ경남에서도 2000년대 이후에 17개 문학관이 개관되는데 부산 3개, 울산, 1개, 경남 13개의 문학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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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울산경남 지역의 문학관은, 요산문학관(부산), 이주홍문학관(부산), 추리문학관(부산), 오영수문학관(울산), 경남문학관(창원), 김달진문학관(창원), 창원시립마산문학관(창원), 이원수문학관(창원), 박재삼문학관(사천), 우포시조문학관(창녕), 지리산문학관(함양), , 한국시조문학관(진주), 청마문학관(통영), 한빛문학관(통영), 이병주문학관(하동), 평사리문학관(하동), 남해유배박물관(남해) 17개이다.(하동의 이병주문학관과 평사리문학관, 남해의 남해유배문학관은 행정구역상 경남이긴 하지만 섬진강 유역과 하구의 바다에 소재하므로 낙동강 유역의 문학관이라 하기는 힘든다.)

 

2020년 8월 현재, 사)한국문학관협회에 등록된 회원문학관은 87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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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관협회 회원문학관은 20208월 현재 서울 8, 강원도 10, 경기인천 10, 경상도 24, 전라도 17, 충청도 17, 제주도 1, 합계 87개이다.(자료:)한국문학관협회, http://www.munhakwan.com)

 

회원 문학관으로 등록하지 않은 문학관이 전국적으로 많이 있을 것으로 사료되어 적어도 현재의 전국 문학관 수는 100개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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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월 기준, 전국의 시구의 수는 228개이다. 전국의 문학관 수를 100개로 추정한다면 거의 2.3개 시구에 1개씩의 문학관이 있는 셈이 된다.

 

실제로 대구ㆍ경북의 13개 문학관 중 7개의 문학관이 현재 사)한국문학관협회 회원문학관으로 미등록 상태임을 보면 납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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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관협회의 회원문학관으로 등록되지 않은 대구경북의 문학관은 백수문학관, 흑구문학관, 객주문학관, 264작은문학관, 문경아리랑시조문학관, 노계문학관, 최치원문학관 등이다.(자료:)한국문학관협회, http://www.munhakwan.com)

 

이렇게 보았을 때 낙동강 유역 문학관은 대략적으로 28개로서 한국문학관의 30%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문학관의 종류는 ‘문인 개인을 기리는 문학관’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시인, 소설가, 아동문학가, 수필가, 평론가 등 문학의 장르별로 나눌 수 있겠는데 역시 시인이 가장 많다. 이 외에도 ‘지역을 내세운 문학관’, ‘문학적 주제나 작품 제목을 내건 문학관’, ‘산이나 강의 이름을 내건 문학관’, 기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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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을 내세운 낙동강 유역 문학관으로는 경남문학관, 창원시립마산문학관, 우포시조문학관, 문경문학관 등이 있다.

 

문학적 주제나 작품 제목을 내건 문학관으로는 객주문학관, 문경아리랑시조문학관, 추리문학관 등이 있다.

 

산이나 강의 이름을 내건 문학관으로는 지리산문학관, 낙동강문학관 등이 이에 속한다.

 

 

한국의 문학관을 둘로 대별하면 공립 문학관과 사립 문학관으로 나눌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건립한 공립 문학관이 사립 문학관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으며 이들 공립 문학관은 지자체에서 직영하거나 민간 위탁 운영하거나 둘 중의 한 가지 방법으로 운영되고 있다. 문학관의 운영은 대동소이하여 자료 전시, 공연, 강연ㆍ백일장, 문학 축제, 문학 강좌, 잡지 간행, 상주 작가 지원 등이 거의 전부이다. 대개의 문학관이 이들 중 한두 개를 연중행사로 거행하고 있다. 소수의 문학관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지만, 반면에 문만 열어 놓고 있는 개점휴업 상태의 문학관도 상당수 있는 실정이다. 2016년 문학진흥법이 제정되면서 설립 근거가 마련된 국립한국문학관은 각 지역마다 유치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며 여러 논란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서울 은평구 진관동 기자촌에 건립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착공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문학관은 계속해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구의 지속적인 감소로 생존이냐 소멸이냐 하는 위기에 처해 있는 지방의 지자체들은 지역 홍보와 관광객 유치 및 지역 활성화에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적은 예산으로 세울 수 있는 공립 문학관 사업에 치중할 것이며, 재력이 있는 문인 개인들은 자료의 보존과 개인적 욕구로 사립 문학관 건립에 힘을 쏟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비하여 「문학진흥법」에서는 이미 문학관 관련 조항을 두고 있으며 광역 자치단체별로 ‘문학관지역등록심의회’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갈수록 문학에 대한 선호도가 약화되는 현실과 작가에 대한 인지도나 위상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문학관의 실질적인 효용성이 얼마나 계속될지는 미지수라 할 수 있다. 모든 문학관이 작가의 생애와 작품 세계 및 관련 자료를 해석하고 보관하는 천편일률적인 방식이나 기능도 재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구상문학관과 낙동강문학관은 낙동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구상문학관은 대구ㆍ경북에서 최초로 개관한 문학관임에도 불구하고 칠곡군에서 직영하는 공립 문학관으로서 군정 역점 사업에서 후순위로 밀리게 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음으로서 후발 문학관들에 비해 많이 침체되어 있다. 낙동강문학관은 구상문학관 보다 18년 뒤에, 대구ㆍ경북에서는 열네 번째로 개관되는 문학관이다. 아래에서 살펴볼 상주문학의 단단한 토대가 근본을 받치고 있으며 특히 본격적인 <낙동강 문학의 개막>을 선언하고 있는 원로 시인 박찬선이 이곳 상주를 지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문학관이 민간위탁 운영으로 출발하면서 박찬선이 초대 문학관장을 맡게 됨으로써 명실공히 낙동강 문학의 원류로서 낙동강문학관은 이제 고고지성(呱呱之聲)을 크게 울리고 있다.

 

Ⅳ. 상주문학 ― 박찬선 ― 낙동강 문학

 

낙동강문학관이 소재하는 상주는 고래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적 삶의 곡진한 체취가 대대로 묻어 있는 곳이며 그것이 문학으로 승화한 명실상부한 문학의 도시이다.

 

상주는 기원전 7세기경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서 삼한시대에는 이 지역에 사벌국(沙伐國, 또는 沙伐梁國, 沙弗國)이라는 소국이 있었다. 그 후 3세기 중엽에는 신라의 세력권에 들어 사벌주·상주(上州)·상주(尙州) 등 신라의 행정구역이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상주목(尙州牧)·귀덕군절도사(歸德郡節度使)·안동대도호부 등으로 개칭되었다가 1018년(현종 9) 상주목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1392년(태조 1)에 경주로부터 관찰사영이 상주로 옮겨와 경상도의 정치·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중인 1596년(선조 29)에 관찰사영은 경상도의 중앙에 위치한 대구로 옮겨갔다. 상주의 별호는 상락(上洛)·상산(商山) 등이었다. 1896년에 도제가 실시되어 경상북도에 소속되었다.

 

 

상주는 낙동강 칠백 리가 시작되는 곳이다. 이곳에 낙동강문학관이 들어섰고 낙동강 문학의 장대한 개막과 통섭을 선언한 박찬선이 이곳에 있다. 낙동강 문학의 중심은 이곳 낙동강문학관이 될 것으로 보이고 낙동강 문학의 원류는 이곳 상주로 자리매김 될 것 같다.

 

낙동강문학관과 낙동강 문학의 원류가 될 상주문학의 실상을 박찬선은 다음과 같이 개관한다.

 

상주의 넓은 들과 기름진 땅에서는 예부터 농경문화가 꽃피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채련요(연밥 따는 노래)와 서보가 등의 격양가가 불리워졌으며 가슴 저미는 상주아리랑이 전해져 오고 있다. (중략) 상주의 문학은 설화로 발흥하였다. 최초의 한글소설인 채수의 『설공찬전』과 압록강 이남에는 내가 제일이라는 녹차 황오의 시, 갑장산 연악구악을 배경으로 한 연악문회록, 낙동강에 펼쳐진 낙강시회, 은척동학교당의 가사작품 등 상주문학은 다채로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박찬선, 「낙동강, 문학을 열다」, 『낙동강』, 2017 제67회 낙강시제 시선집, 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 2017.9.9. 188~189쪽.)

 

이어서 박찬선은 상주문학을 3기로 구분하고 제1기는 고려 말 최 씨의 무신정권 때 문장가들이 상주에 우거하여 집필에 전념한 서하 임춘, 백운 이규보의 활동기로 보고, 제2기는 연악문회록과 낙강시회가 이루어졌던 시기이며, 제3기는 현재의 상주문학 활동이라고 한다. 제1기에서 제3기를 연결시키는 중심적인 지점이 낙강시회이며 이를 계승한 낙강시제는 오늘날 상주문협이 치르고 있는 가장 큰 단위의 전국 축제라 할 수 있다. 박찬선은 현재의 상주문학 활동의 일례로서 2015년을 전후하여 출간된 상주 문인 33명의 개인 창작집 33권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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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21, 영시집 1, 유고 시집 4, 시조집 2, 수필집 1, 동시집 2, 소설집 2권 합계 33.(박찬선, 낙동강, 문학을 열다, 낙동강, 2017 67회 낙강시제 시선집, 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 2017.9.9. 198~201쪽 참조)

 

문학의 고장 상주는 걸출한 문인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현대에 와서는 상주 소재의 초ㆍ중ㆍ고ㆍ대학의 교원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문학을 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 문학을 하고 있다.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출향 문인들은 작금의 한국문단을 주름 잡으며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상주와는 멀어진 사람들이다.

 

상주의 별호는 상산(商山)이었다. 흰 눈썹과 흰 수염을 가진 네 사람의 은자, 상산사호(商山四皓) 같은 선비나 신선이 살만한 곳이다. 현재의 지명 상주(尙州)의 자의는 ‘높은 고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지대가 높은 것도 아니고 재정 자립도가 높은 것도 아니라 거기 사는 사람들의 인품이 높은 곳이다. 도덕적ㆍ문화적 수준이 높고 예술적 역량과 문학적 내공이 높은 곳이다. 이곳 상주에서 태어나 평생 동안 상주의 정신을 지키고, 상주의 문학을 가꾸며 살아온 교육자이자 철학자이며 원로 시인인 박찬선은 지금 낙동강 문학이라는 깃발을 들고 서 있다. 그는 지금 낙동강 문학의 효시로서의 자리에 서 있다.

 

필자는 다른 지면에서 상주와 낙동강과 박찬선의 시의 연관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 적이 있다.

 

근곡 박찬선 시인은 상주를 모시고 낙동강을 모시고 동학을 모신다. 상주와 낙동강과 동학-이는 시인이 외경의 대상으로 삼는 시적 주제이며 시의 삼발이다.(중략)
상주는 높은 것을 숭상하는 고을, 지향하는 정신이 높은 고을이다. 높은 것은 하늘이며 하늘이 곧 사람이다.(중략)
박찬선 시인은 시를 모시고 그의 시는 사람을 모신다. (중략) 사람이 시고 사람이 하늘이다. 그런 시를 쓰는 박찬선 시인은 시신(詩神)이다. 시의 신(神)이다. 시의 신은 모든 것을 모시고 맺힌 것을 풀며 의미 있는 것을 남긴다. 모두가 눈물이다.
                                                                                                                 ―졸고「사람을 모시는 신인(神人)의 시」 일부 (시집 해설, 박찬선 시집,우리도 사람입니다, 시인동네 시인선 068, 서울:문학의 전당, 2016.11.30., 12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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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봉산 아래 북천이 흘러 낙동강에 합류하니

산 아래 물이 솟았다 마르지 않는 물이 물을 만나고 강이 강을 만나는 곳에 높은 고을이 들어섰다 일러 상주라 했다 물은 천천히 가기 위하여 퇴강리에서 뒷걸음질을 쳤다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꿈꾸고 있었다 어두워서 잠들고 잠들면 꿈꾸었다 몽은 몽이라 높은 정신을 세워 천천히 밝히라 했다 바람이 되지 않으려면 외길로 홀로 가라 했다 사금파리같이 재주가 능한 사람들은 떼를 지어 먼 곳으로 흘러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몸을 맑게 하면서 근곡**이 끝까지 남았다 바쁘지 않게 게으르지 않게 시를 모셨다 천천히 삼가며 달 띄운 강의 문장을 가꾸었다 망우초 같은 시의 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지지 않는 꽃을 일러 천봉산 아래 시의 신인神人이 산다고 하였다 신인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았다 날이 갈수록 시에서 광채가 났다 이름이 눈부셨다

* 산수몽(山水蒙) : 주역 64괘 중의 4번째 괘인 몽괘의 괘상
** 근곡 : 시인 박찬선의 호
                                                                                                                         ―졸시「산수몽」* 전문 (낙동강, 2019 69회 낙강시제 시선집, 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 2019.9.27. 52.)

                                                                                                 

낙동강문학관과 낙동강 문학의 관계를 박찬선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낙동강문학관은 특정 시대와 한 사람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고려말에서부터 조선조를 꿰뚫는 장구한 기간에 그때마다 뜨겁게 생애를 마친 선비들을 모시는 문학의 전당이 될 것이다. 나아가 낙동강 문학을 정립하고 상주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결집체가 될 것이다. 동시에 새로운 강 문학 창출의 계기가 될 것이며 존귀한 생명의식을 고양하는 주체로 길이 남을 것이다. (『낙동강』, 2017 제67회 낙강시제 시선집, 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 2017.9.9. 198쪽.)

 

여기서 우리는 상주문학에 대한 박찬선의 자부심과 낙동강 문학 창출에 대한 소명의식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박찬선의 소망이면서 낙동강문학관이 가져야 할 당위이기도 하다. 글머리 시로 내세운 구상 시, 강의 구절, “강은/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강은 오늘을 살면서/미래를 산다.”와 같이 낙동강 문학은 과거이면서 현재이고 미래인 것이다.

 

Ⅴ. 낙동강 문학의 미래

 

미래에 대한 담론은 전망에 대한 담론이다. 전망의 방법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또는 존재론적이거나 당위론적이거나 둘 중의 그 어느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낙동강 문학의 미래에 대한 담론을 긍정적ㆍ당위론적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① 모이는 문학

 

현대는 분열과 갈등의 시대이다. 도덕과 질서와 정의가 무너지고 불신과 혐오와 당파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성장과 분배 사이의 악순환으로 극소수에 집중된 권력과 부는 마침내 권력독재, 자본독재로 고착화되며 선량한 시민들은 변두리로 내몰리고 있다.

 

척박한 토양이 문학에게는 옥토가 된다. 척박한 시대의 낙동강 문학은 모이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 개울이 모여 하천이 되고 하천이 흘러들어 강을 이루듯이 각자의 문학은 각자의 정체성을 가지되 문학의 자존과 창작의 자유를 고양하는 측면에서, 그리고 사람이 사물이 아니라 하늘이 되는 시대를 열기 위하여 낙동강 문학은 하나로 모이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정체성과 합일성이라 말하며 이 둘은 대척적인 것이 아니라 교호적인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이렇게 모이는 문학을 우리는 포괄성과 통섭성으로 말할 수 있다. 낙동강 문학이라는 이름 속에 여러 방향과 내용의 문학을 담는 것을 포괄성이라 한다면, 낙동강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독재가 민주로 건너가고 독점이 나눔으로 건너가고 위선이 진실로 건너가는 것을 통섭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낙동강 유역의 문학은 먼저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골목대장처럼 좁은 지역에서의 행세에 만족하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터놓고 교류하고 터놓고 합쳐져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문학, 사학, 철학, 미학, 사회학, 교육학 등과의 연계 및 학제 간 융합도 시도하여야 할 것이다. 모이는 문학의 방향 모색을 위해서는 낙동강 유역의 문학관이 참여하고 유수한 문인들이 참가하는 ‘낙동강 문학 포럼’의 결성과 운영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낙동강 문학 포럼’은 낙강시제 행사와 연계하여 개최함으로써 그 취지를 배가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② 흐르는 문학

 

낙동강 문학은 흐르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 물은 생명이고 생명의 유지는 흐름 위에서 가능하다. 흐름은 살아있음이고 정지는 죽음이다. 문인 개개인의 문학 세계는 흐름 속에서 발전하고 흐름 속에서 변모하고 흐름 속에서 완성된다. 문인 개개인의 발전과 문학적 완성이 문학 전체의 발전적 흐름을 담보하고 견인한다. 흐름은 개방성을 전제로 하고 새로운 문학 플랫폼 구축을 토대로 한다. 폐쇄된 곳에서는 흐를 수가 없으며 판이 없어도 흐를 수가 없다. 낙동강 문학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구축하고 누구든 이 판 위에서 자유로이 창작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야 한다.

 

문학적 개방성은 먼저 작가적 의식과 정신에서 출발한다. 창작은 본질적으로 자유이다. 창작의 자유는 “자율적일 뿐만 아니라 자족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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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ai Hartmann, Ästhetik(1953).2 Aufl.Berlin 1966. S.41.

 

적어도 이 측면에서는 작가는 신(神)의 위상으로 격상되며 작가 이외의 어떠한 신도 있을 수 없다. 하르트만은 작가적 자유의 독특한 위력을 “그가 원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그의 자유”라는 횔더린(Hölderlin)의 시구를 인용하여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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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ai Hartmann, Ästhetik(1953).2 Aufl.Berlin 1966. S.41.

 

작가의 자유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잠시 자신 속에 수태된 작품의 원형에 압박을 받는다. ‘써야 한다.’는 일종의 자기 압박이며 소명이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이것은 엄청나게 자기 자신을 압박한다. 그러나 작가는 비록 힘들지언정 마침내 작품을 완성함으로써 성취감은 물론 “훌륭한 자기해방”이라는 선물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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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ai Hartmann, Das Problem des geistigen Seins,Untersuchungen zur Grundlegung der Geschichtsphilosophie und der Geisteswissenschaften(1933),3 Aufl.Berlin 1962. S.543.

 

그러니까 작가는 무엇을 써도 되는 자유를 기본적으로 가지며, 자기해방의 자유를 추가적으로 가지는 셈이다. 다른 측면에서 말할 수도 있다. 강물은 흐른다. 물의 흐름을 자연이라 한다면 그것은 자유와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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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필연이기에 부자유이고 인간만이 자유이다. 이 명제는 옳다. 자연은 무의식적 존재이고 인간은 의식적 존재이다. 그런 한에서 자유는 자유에 대한 의식을 가진 인간만이 가진 천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물의 흐름은 누구의 강제도 아닌 저절로 그러함(자연)으로서 물의 외적 현상이며, 자유에 근거한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 또한 자유의 외적 현상으로서의 행위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곧 자유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창작은 본원적으로 무제한의 자유이다.

 

흐르는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 문학과 전문 문학, 순수 문학과 실천(이념) 문학의 구분이나 대립을 지양해야 한다. 논리학에서 본다면 구분은 기준의 산물이다.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서 갈래는 다르게 나누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두가 문학이라는 것이다. 흐르는 문학은 흐르는 내용을 갈라치고 구분하여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 그 자체를 지향한다. 흐르다 보면 섞이고 가라앉고 맑아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 자신의 가치를 가진다. 강은 흐를 때 강의 가치가 실현된다. 낙동강 문학이 흐르는 문학이 되는 데는 『낙동강 문학』이라는 제호의 잡지 발간도 하나의 좋은 방법일 것이다. 현재 발간되고 있는 낙강시제 시문집인 연간 『낙동강』을 『낙동강문학』으로 제호를 변경하여 반년 간, 계간, 월간으로 발전시키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잡지가 안정되고 권위가 생겼을 때가 되면 문단의 편 가르기나 작가나 작품의 귀족주의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③ 바다로 가는 문학

 

강은 흘러서 바다로 간다. 낙동강 문학은 대양으로 가야 한다. 대양의 다른 말이 세계무대이다. 아직까지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 한국적 현실을 자조하거나 체념할 것이 아니라 주저 없이 대양문학으로 진출함으로써 노벨문학상이 한국으로 찾아오는 그날을 앞당겨야 한다.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바다이다. 바다에는 자주 안개가 낀다. 바다는 수줍음을 타는 처녀와 같다. 그래서 해무로 자신을 가린다. 바다의 매력은 그러므로 더욱 배가된다. 장막 너머에 있으므로 바다는 몽환적이며 신비적이다. 바다를 미래라고 하면 미래가 갖는 정조는 수줍음이 되고 신비가 된다. 미래는 언제나 자신을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거기서 가능성을 본다. 아니 가능성을 덧씌운다. 바다를 가리어 덮고 있는 해무 위에 현실적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치환하여 겹쳐 덮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가능성은 환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깜깜한 현실의 빛이 되고 등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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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해양시() ‘해무(海霧)’의 철학적-문학적 고찰(2019년 지역사회학회해양사회학회 춘계 국제학술대회 기조강연), Proceedings 아시아 해양, 해양도시의 활로를 찾아서, 2019.5.17.()~18(), 부경대학교, 178.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바다로 나간다고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가지 않으면 아예 얻을 기회조차 잡아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다로 나가는 대양 문학은 “위대한 것에 대한 새로운 헌신, 새로운 외경”을 바치는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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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ai Hartmann, Ethik(1926),4 Aufl.Berlin 1962. S.17.

 

세계로 나가는 문학의 실현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번역문학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한국문학번역금고(1996년 설립)를 모체로 하여 2001년 출범한 한국문학번역원이 나름대로 번역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그 성과가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세계로 나가는 문학이 제대로 실현되려면 이제 국가가 직접 나서야 한다. 충분한 예산을 투입하여 국립번역원을 설립하고 충분한 인력과 조직을 갖춤으로서 번역문학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도록 해야 한다. 그늘에 방치되고 있는 재야의 고수들이 쓴 작품들을 활발하게 발굴하고 번역 사업에 끌어들여야 한다. 규모는 작겠지만 급한 대로 낙동강문학관 산하에 낙동강번역원의 운영도 검토해 볼만 하다. 세계로 나가는 문학의 실현을 위한 초보적 단계의 사업으로는 낙동강문학관에서 문학답사반의 운영과 세계 문학 여행반의 운영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단계로는 낙강시제의 세계화를 모색해 볼 만하다. 처음은 북한이나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 문인들을 초대하여 참가시키고 나아가서는 세계 전역으로 확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다.

 

④ 상선(上善)을 추구하는 문학

 

노자는 도(道)를 설명하면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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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所惡 故畿於道(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서로 다투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까운 것이다.)-노자 도덕경8.

 

최고선은 물과 같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도(道)와 같다는 말이다. 물을 수용하는 존재는 살고 물을 거부하는 존재는 죽는다. 물은 만물에게 자양분을 공급하여 생명을 유지하게 하지만 그 공적을 자랑하지 않는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 순리를 거역하지 않으며 가장 낮은 곳에 처하여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 바위가 있으면 끌어안고 흐르고 절벽이 있으면 주저 없이 뛰어내린다. 물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사랑한다. 따라서 최고선과 도와 물은 신심직행(信心直行)하는 문학인의 붓과 다르지 않다.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망설임 없이 글로 옮기는 사람이 곧 문학인이 아니던가.

 

낙동강 문학은 상선을 추구하는 문학이 되어야 하고 도(道)를 이루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 “도(道)는 소망이며 희망이다. 절망은 죽음으로 이어지지만 희망은 삶으로 나아간다. 도는 삶의 의미이다. 의미 있는 삶이야말로 참된 삶이며 참된 삶은 중단 없는 길(道) 위에 있다. 길의 의의는 길을 가는데 있다. 길이 있어 길을 가고 길이 끊어지면 길을 이어서 간다. 길의 끝에는 으레 목표가 있다. 길의 끝까지 갈 수 있다면 목표에 도달해서 좋은 것이고 가지 못한다면 가야할 곳이 아직 남아 있어 좋은 것이다. 길은 살아 있음을 증거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길 위에서 살아 있다. 길 위에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 길 위에 있는 자는 길 위에 있으므로 살아있는 것이다. 길이 끝나면 삶도 끝난다. 죽음은 길에서 내려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의 길이 끝나고 목표가 달성되면 다른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새 길을 나선다. 그런 의미에서 길은 정지성이 아닌 운동성이며 정적이 아니라 동적이다. 완료형이라기보다는 영원한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길이 길로 이어지는 연유이다. 길을 물으며 길을 가는 우리의 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길은 끝나지 않음으로서 살아있는 길이 된다. 길을 물으며 길을 찾는 일도 그러하다. 세상의 모든 일이 길 위에 있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길 위에서 길을 간다. 가다가 때때로 인간만이 길을 묻는다. 자기 점검이며 방향의 재탐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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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칼럼, 칠곡포럼-‘()’를 찾아 길을 나서다, 칠곡포럼 회보, 2019.4.15., 39.

 

글을 쓰는 사람들은 문명(文名)을 날리고 싶은 욕망이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인세만으로도 유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동경한다. 그러나 ‘배가 부르면 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궁핍 속에서 정신이 고양된다는 말이다.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유명해지기 위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그리 현명하지 않은 생각인 것 같다. 긴 흐름 위에서 인기는 짧고 작품은 길기 때문이다. 지금의 인기가 뒷날의 오욕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보다 좋은 작품, 시대를 뛰어넘어서 남을 수 있는 작품을 쓰는 일만이 문인에게는 최선이라고 할 것이다.

 

최고선을 추구하는 문학은 가치 지향의 문학이다. 가치론적으로 보았을 때 세상에 가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가치의 대립은 가치와 반가치의 대립이 아니라 가치와 가치의 대립이다. 거기서 갈등과 투쟁이 나온다. 존재의 가치 측면과 가치 측면의 대립 구도를 밝히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를 규명하고 그리는 것이 문학의 사명이다. 낙동강 문학이 상선을 추구하는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자유, 민주, 평등, 정의, 환경, 핵 등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어야 할 것이며 우리 시대의 화두라 할 수 있는 젠더 문학도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또한 동시에 탈근대 문학을 모색하고 실험해야 할 것이며 아나키즘 문학도 하나의 근본적 방향으로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남북 문단 문학을 넘어선 통일 문학도 주요한 부분이다. 나아가 미증유의 공포로 우리를 엄습하고 있는 세계사적 사건인 코로나19 이후의 문학, 포스트 COVID19 문학도 낙동강 문학의 흐름 속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낙동강 문학관이 우선적으로 할 수 있는 일로서, 낙강시제의 시 정신 확산 운동 전개, 낙동강 문학 운동 전개, 독자에 끌려가는 문학이 아니라 독자를 끌고 가는 문학(독자의 취향을 전도시키는 문학), 낙동강 문학 포럼을 통한 선언문 채택 등을 제안한다. 여기에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을 활용하는 방법이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다.

 

⑤ 인공지능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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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란 인간의 학습능력과 추론능력, 지각능력, 자연언어의 이해능력 등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실현한 기술이다. 인간의 지능으로 할 수 있는 사고, 학습, 자기 개발 등을 컴퓨터가 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컴퓨터 공학 및 정보기술의 한 분야로서, 컴퓨터가 인간의 지능적인 행동을 모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인공지능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과학의 다른 분야와 직간접으로 많은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현대에는 정보기술의 여러 분야에서 인공지능적 요소를 도입하여 그 분야의 문제 풀이에 활용하려는 시도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자연언어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 분야에서는 이미 자동번역과 같은 시스템을 실용화하며, 특히 연구가 더 진행되면 사람이 컴퓨터와 대화하며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되므로 컴퓨터 사용에 혁신적인 변화가 오게 될 것이다.

전문가시스템(expert system) 분야에서는 컴퓨터가 현재 인간이 하고 있는 여러 가지 전문적인 작업들(의사의 진단, 광물의 매장량 평가, 화합물의 구조 추정, 손해 배상 보험료의 판정 등)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여러 분야 가운데서도 가장 일찍 발전하였다.

컴퓨터가 TV 카메라를 통해 잡은 영상을 분석하여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거나,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문장으로 변환하는 것 등의 일은 매우 복잡하며, 인공지능적인 이론의 도입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영상 및 음성 인식은 문자 인식, 로봇 공학 등에 핵심적인 기술이다.

이론증명(theorem proving)은 수학적인 정리를 이미 알려진 사실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증명하는 과정으로서 인공지능의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는 필수적인 기술이며, 그 자체로도 많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신경망(neural net)은 비교적 근래에 등장한 것으로서 수학적 논리학이 아닌, 인간의 두뇌를 모방하여 수많은 간단한 처리기들의 네트워크로 구성된 신경망 구조를 상정하는 것이다.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6027&cid=40942&categoryId=32845)

 

IT기술의 눈부신 발달에 따라서 갈수록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 人工知能)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실생활에의 도입 범위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은 세계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지속적 발전을 거듭하는 AI가 언젠가는 창작의 영역까지 침범할 것이라고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연 그러할까?

 

필자는, AI가 진정한 의미의 사이버 도우미, 일상생활이나 작업의 도우미를 넘어서기는 힘들 것으로 본다. 문학적 창작은 고도의 정신적 작업이며 상상력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한다. AI는 입력된 자료와 그 응용 모듈을 넘어서는 것을 해낼 수 없다. SF(Science Fiction)에서는 AI가 상상력을 가지고 창의적 활동을 할 수 있으며 스스로의 자기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AI의 상상력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AI는 입력된 감정이나 정서를 조합하고 재생할 수는 있겠지만, 생물학적 유기체가 아니므로 정서나 감정을 스스로 생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신의 산물은 정신적이고 기계의 산물은 기계적이다. 인공지능은 정신의 산물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해 내는 일은 기계의 산물이다. 따라서 AI는 두 가지 입장을 가진다. 하나는 정신의 산물로서 정신이 입력한 자료와 그 응용 모듈 범위 내에서 어떤 일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그것은 기계의 산물이 된다. 다른 하나는 입력한 자료와 그 응용모듈을 넘어서서 인공지능이 자기 스스로 어떤 일을 처리해내는 것이다. 그러할 때 그것 또한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기계의 산물이 된다. 후자의 경우 그것이 가능한지도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 듯 하고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기계적 산물일 뿐이지 결코 정신의 산물이 될 수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인공지능은 문학창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한 수준 이하의 기계적 창작으로 한정된다. 유기적 생명을 가진 인간이 그의 독창적인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으로 만들어 내는 문학 창작은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AI가, 자연발생적 감정과 주체적인 자기의식을 가지고 고도의 정신활동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자긍심을 유지해도 좋을 것이다.

 

낙동강 문학을 AI에 접목하고 활용하는 방법은 AI의 발달 단계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의 과제로서의 그것은 창작자와 감상자의 입장에서, 각각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개발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AI를 통하여 4차원 가상공간을 실내에 구현하고 실재하는 낭송가처럼 AI가 시 낭송을 하면, 감상자는 그것이 실제의 풍경인 양 실감나게 느끼며 시를 감상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AI 발달의 초보적 단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다. AI의 시낭송은 자연인인 시낭송가의 낭송과는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낭송가의 낭송이 자연산이라면 AI의 시낭송은 양식(인공산)이다. 또 다른 예로서, 독자가 선택하는 대로 가상의 배우들에게 배역을 맡긴 후 거실에 앉은 채 한 편의 소설을 클릭하면 그 즉시 초고속으로 변환된 입체 영화를 그 자리에서 감상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Ⅵ. 맺으며

 

어느 시대, 어느 영역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문단에도 더러 아류가 있고 사이비도 있다. 강물에 불순물이 섞여 흐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또한 강물이다. 다른 영역과는 달리 문단에는 문학의 본질 특성상 충직한 작가들이 많다. 그들은 세간의 명리보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작품 창작에 몰두하고 전념한다. 그들에게 법열을 주는 것은 창작이지 세간의 명리가 아니다. 한국적 전통에서의 문인들은 유가적 출사보다 도가적 은둔이 더 잘 어울린다. 그래서 한국 문단에는 유독 재야의 고수들이 많다. 따라서 시인들은 저마다 자기의 시를 쓴다. 소설가들은 자기의 소설을 쓰고 평론가는 자기의 평론을 쓴다. 모든 작가가 자기의 작품을 쓴다. 다작이거나 과작이거나 간에 모두들 성실하다. 낙동강 문인들은 낙동강 문학을 하고 낙동강 시인들은 낙동강 시를 쓴다. 변할 수 없는 진리이고 변하지 않는 현존이다. 문학이 있고 시가 있는 이유이다. 강이 있고 바다가 있는 이유이다. 불순물은 흐르면서 자정된다. 하천이 모여 강을 이루고 강이 흘러 바다로 간다.

 

우리는 소망한다.
― 낙동강 문학의 미래는 세계문학으로 확산하고 세계문학의 미래는 낙동강 문학으로 수렴되기를
― 낙동강 문학은 핍진한 삶의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실존적 구원의 가장 높은 문학 정신을 건설하기를
― 낙동강문학관이 이름 그대로 낙동강 문학의 메카가 되고 낙강시제가 낙동강 문학의 척주가 되기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