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역사회학회·해양사회학회 춘계 국제학술대회
[기조발표]
2019.05.17.금.13:40~14:00
부경대학교 장보고관 3층 리더십홀
해양시(詩) 「해무(海霧)」의 철학적-詩문학적 고찰
김주완
밝은 미래도 없고 어두운 미래도 없다. 밝은 미래는 기원이나 소망의 형식이고 어두운 미래는 체념이나 절망의 형식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다. 미래는 아직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의 형식은 무형식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내용은 무엇인가? 불확실성이다. ‘불확실성’을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는’ 무지(無知)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곧 무(無)로 수렴될 것이므로 불확실성은 ‘내용 없음’이 된다. 미래의 형식은 무형식이고 미래의 내용은 ‘내용 없음’이다. ‘형식 없는 내용은 공허하고 내용 없는 형식은 맹목이다’라는 칸트의 명제를 끌어 와 적용시킨다면 미래는 형식이 없으므로 내용이 공허하고 내용이 없다는 바로 그것이 형식이므로 맹목이다. 미래 그 자체(순수 미래)는 허공이고 맹목이다. 이리하여 미래 그 자체는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다. 다만 무색일 뿐이다. 만약 미래가 밝은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 것이고, 만약 미래가 어두운 것이라면 우리는 미래로 나가지 않으면 될 것이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미래는 안개 속에 있다. 미래는 알 수 없으며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비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의지를 미래에 기투하여 거기에 목적이라는 깃발을 내달고자 한다. 무언가로 채우고자 한다.
해무는 바다에 낀 안개이다. 세계를 바다라고 하면 세계의 미래는 안개 속에 있다.바다만이 바다가 아니라 바다는 도처에 있다. 마음 안에도 있고 마음 밖에도 있으며 시간 안에도 시간 밖에도, 공간 안에도 공간 밖에도 있다. 섬에 갇혀 섬을 육지라고 생각하며 관견(管見)에 묶인 권력의 눈에는 바다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해방을 꿈꾸는 자, 바다를 바다 본연의 바다로 보는 자의 눈에만 바다는 보인다. 그것이 바로 열린 마음이며 열린 세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미래는 공허하고 맹목이다. 공허하고 맹목이기에 인간이 무언가로 채우고자 하고 목적을 설정하여 세워 놓고자 한다. 선도 악도 어쩌면 여기서 성립한다. 진부한 상징이지만 선은 밝음으로 미래를 채우고자 하고 악은 어둠으로 현재를 채우고자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현재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떠한가?
엄밀하게 말했을 때 현재는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확정하기 어렵다.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은 현재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은 현재가 아니고 완성된 것은 금방 과거로 편입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현재는 없다. 다만 과거에서 미래로 넘어가는 논리적 건널목의 지점이 현재이다. 하르트만은 시간 선상에 있어서 “가능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필연적인 것”1이라고 한다. 이것은 존재 양상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가능성과 필연성은 과정에 있어서 그 현실성에 선행한다.”2는 것이다. 과거 시점에서 보았을 때 가능적으로 있던 지점이 현실이다. 현실이 있다고 했을 때 바로 그 현실은 바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모든 조건들이 필연적으로 합해진 것이다. 따라서 필연성이 현실성 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능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필연적이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현실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논리적 순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시간 차원 상의 한 지점이 현실이다. 그 현실을 하루로 보든 십년으로 보든 그것은 실사(實事)가 아닌 인간의 직관일 뿐이다. 우리가 편의적으로 말하고 있는 현실의 실체가 그러하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현실은 말하고 있는 지금의 실제나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랬을 때 현실의 색깔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현실은 불만족스럽고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 현실 속에 가능성과 필연성이 동시에 내재하여 있지만 그것이 불만족과 부조리를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 사람들은 명상이나 수양을 통해서 현실에 만족하고자 한다. 그것이야말로 현실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현실은 어둡다고 우리는 단정할 수 있다. 아나키즘의 상징 색이 검정인 것은 어쩌면 이와 무관하지 않다. 현실이 어둡기 때문에 사람들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하여 희망이라는 미래에 깃발을 내다 거는 것이다. 가능성과 필연성을 다가오는 현실(미래)에 기투(企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미래는 안개 속에 있다.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바다이다. 바다에는 자주 안개가 낀다. 바다는 수줍음을 타는 처녀와 같다. 그래서 해무로 자신을 가린다. 바다의 매력은 그러므로 더욱 배가된다. 장막 너머에 있으므로 바다는 몽환적이며 신비적이다. 바다를 미래라고 하면 미래가 갖는 정조는 수줍음이 되고 신비가 된다. 미래는 언제나 자신을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거기서 가능성을 본다. 아니 가능성을 덧씌운다. 바다를 가리어 덮고 있는 해무 위에 현실적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치환하여 겹쳐 덮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가능성은 환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깜깜한 현실의 빛이 되고 등불이 된다. 인간은 개방성으로서의 바다에 나가 미래를 향해 항해하지만 자주 해무에 맞닥뜨리고 해무에 갇혀 고립된다. 동료들이 떠나고 추종자들이 떠난 인간은 해무에 갇혀 고립되고 절대 고독에 갇혀 공포에 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엇인지도 모르는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정지해 있으면서도 정지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텅 빈 미래, 무엇인지도 모르는 미래 앞에 선 인간은 어떻게 생의 바다를 항해해야 하는가?
나는 여기서 졸시 「해무」를 중심으로 하여 세계와 인간의 삶을 암중모색할 것이다. 구속과 억압, 절대 고독과 고립의 삼엄한 공포 앞에 선 인간의 좌표를 탐색할 것이다. 이러한 탐색과 암중모색은 어눌한 구음(口吟)의 사로(思路)를 뒤뚱거리는 것이 운명이겠지만 다른 길은 없는 듯하다.
바다 아닌 곳, 안개 끼지 않은 앞길이 없다는 걸 알아
그럼…, 바다엔 늘 안개가 끼어 있지
기상 위성은 밤과 구름을 투시하여 지상으로 통신을 보내오지만
출항계에 찍히는 스탬프 그늘에는 늘 해신海神 부적이 숨어 있어
지금은 닻을 내리고 정박하는 수밖에 없지
지뢰처럼 터져 비산할 한 치 앞의 암초를 분별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조류潮流는 우리를 데리고 어디론가 갈 거야
바다 깊은 아래서 바람은 불고
좌초는 우리의 선택을 넘어서 있어
바다의 생애가 훈증 너머에 갇혀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지연紙鳶처럼 펄럭이며 따라오던 바닷새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수평선과 분분한 섬들이 사라지고 외로움의 그늘만 연기처럼 남았다
선수船首가 지워지고 사방 분간이 지워졌다, 자침磁針이 흔들리는 나침반
때 아닌 곳에서 우두커니 서 버린 시간
정적은 엄마가 보이지 않는 오후의 대청처럼 무서워
등대는 맑은 밤에나 소용에 닿는 불빛을 내지 달빛이나 별빛은 모두 솜이불 속으로 들어가 묻혀 버렸어 혹등고래의 혹 같은 돔을 뒤집어쓴 월드컵 경기장 백 미터 트랙에 땅강아지 한 마리 엎드려 있는지도 몰라 빗살처럼 하얀 수염의 방향을 잡아주던 북두칠성이 침몰했겠지 아무리 날아올라도 이미 그건 퇴화하는 날개일 뿐이야 해안은 이미 무너졌어
너의 옆엔 지금 너밖에 없어
우리가 너의 안개를 벗겨 줄 순 없어
안개 속에 내일이 있다는 건 시간을 건축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이야 네가 내일 살아 있다면 그것은 내일이 아니라 안개 낀 오늘인 거야 설령 내일이 실제로 있으면 뭐 해 네가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걸 안개 속의 항해잖아
정박에 안간힘을 쓸 필요는 없어
출근길의 지하철 승강장처럼 우리는 모두 떠밀려 가는 거야
기껏 오늘에서 오늘로 가는 거야, 거기서 돌아오는 거야
기도는 안개 너머로 날려 보내는 종이비행기 같아
축축이 젖어서 내려앉은 자존심이 입 다물고 소리 내는 복화술이야
해무로 밀봉된 바다에서는 모든 일이 다 부질없는 짓이지
봄꽃 한 송이 피는 일은 곧 봄꽃 한 송이 지는 일인 거지, 뭐
― 졸시 「해무」3 전문
바다 아닌 곳, 안개 끼지 않은 앞길이 없다는 걸 알아
묵은 개념이긴 하지만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현실적 존재’를 실존이라고 하자. 실존은 안다. 고뇌하는 실존은 세계가 곧 바다라는 것을 안다. 세상에 바다 아닌 곳은 없다. 불가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라 한다. 실존이 살아가는 터전은 풍랑이 거센 고난의 바다이다. 그것도 해무가 자욱이 끼어서 방향을 분간할 수 없는 바다이다. 앞길은 모두 안개 낀 바다이다. 안개 낀 바다는 무지(無知)의 바다이다. 삶은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고뇌하는 실존은 안다. 앞길에 안개가 끼어 있다는 것을 안다. 알면서 간다. 가지 않을 수 없어서 간다. 여기서 저기로 갈 수 있는 전제는 개방성이다. 안다는 것은 자유의 전제이다. 개방성으로서의 바다로 가는 길이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곧 자유의 확장성을 위한 출발점에 서는 것이 된다. “자유는 그것을 가진 자가 그것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때에만 현실적이다.”4
그럼…, 바다엔 늘 안개가 끼어 있지
기상 위성은 밤과 구름을 투시하여 지상으로 통신을 보내오지만
출항계에 찍히는 스탬프 그늘에는 늘 해신海神 부적이 숨어 있어
고뇌하는 실존은 현실을 인정하며 독백한다. 그것은 자위이자 허무한 자기 긍정이다.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투지를 불사르는 것이다. 생은 정지할 수 없는 전진이라는 것을 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전진한다. 넘치는 정보는 해무를 뚫고 넘어와 끊임없이 방향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적으로 신뢰가 가지도 않는다. 너무 많은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출항할 때마다 차라리 신을 선택하고 신에 의존하는 것이 낫다. 종교와 신앙의 현실적 의의이다. 신의 자비와 사랑의 힘으로 고난을 헤쳐 나가고자 한다. 때로는 미신과 무속의 미혹에 빠져들기도 한다. 해신은 해신이면서 해신 이상의 의지처이다. 부적은 부적이면서 동시에 부적 이상인 신념의 표지이다.
지금은 닻을 내리고 정박하는 수밖에 없지
지뢰처럼 터져 비산할 한 치 앞의 암초를 분별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조류潮流는 우리를 데리고 어디론가 갈 거야
바다 깊은 아래서 바람은 불고
좌초는 우리의 선택을 넘어서 있어
숨 가쁜 삶의 전진에서 실존은 잠시 머물러 정박한다. 숨 고르기이다. 미래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해무는 두텁고 실존은 지뢰와 암초를 분별할 수 없다. 제 자리에 정지해 있음은 충돌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다. 머무르다 보면 조금은 여유도 생긴다. 머무르고 있음을 스스로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은 잠시간의 유유자적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잠시간’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인생에 있어서 순간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바다 위에서 머무는 것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다. 머무는 것은 선박이지 바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박은 닻을 내리고 머물겠지만 조류는 그런 선박을 끌고 어디론가 조금씩 가고 있을 것이다. 조류는 흐름이며 경향이다. 바다 위에만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이는 것이 아니라 바다 아래서도 바람은 일어나고 그것은 바다 위로 해일을 만들어 휘몰아 갈 수 있다. 좌초는 실존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실존이 좌초에 선택될 뿐이다. 역사의 진전 과정은 그런 의미에서 실존을 넘어서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항해는 슬프게도 너무 소극적이고 피동적이며 비자주적이 아닌가?
바다의 생애가 훈증 너머에 갇혀 있다는 걸 알아야 해
비자주적이고 피동적인 것은 실존만이 아니다. 바다의 생애도 갇혀 있다.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안개 너머에서 바다는 그저 바다의 생애를 산다. 그는 선별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조건 없이 오는 대로 받아들이되 식별하지 못한 채 무엇인지도 모르고 받아들인다. 실존과 바다 사이에는 해무의 두터운 벽이 가로막고 있다. 실존은 실존대로 발 묶인 채 자기의 의사와는 달리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고 바다는 바다대로 안개를 덮어쓰고 다가오는 무엇을 무엇인지도 모르고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서 실존도 맹목이고 안개도 맹목이며 바다도 맹목이 된다. 삶과 삶의 현장과 복잡다단한 사태가 바로 맹목이며 따라서 미래조차 맹목으로 가로놓여 있다. 우리는 이것을 삶의 근원적 맹목성이라거나, 역사 그 자체가 가진 맹목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연紙鳶처럼 펄럭이며 따라오던 바닷새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수평선과 분분한 섬들이 사라지고 외로움의 그늘만 연기처럼 남았다
선수船首가 지워지고 사방 분간이 지워졌다, 자침磁針이 흔들리는 나침반
때 아닌 곳에서 우두커니 서 버린 시간
정적은 엄마가 보이지 않는 오후의 대청처럼 무서워
해무가 짙어진다. 너무 먼 바다로 흘러와 버렸다. 실에 매여 따라오던 동료들과 추종자들은 모두 사라졌다. 얼레에 감긴 연실은 누가 끊었을까. 해무 속에서는 이제 수평선과 섬들도 보이지 않는다. 해무의 두터운 벽 속에 실존은 혼자 남아 외로움에 묻혀 든다. 뱃머리와 고물이 보이지 않고 방향을 상실한 해무 속에서 시간마저 정지해 버렸다. 절대 정적이며 절대 적막이다. 얼굴과 턱밑까지 젖어드는 정적과 적막은 실존을 공포 속으로 몰아간다. 삶의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실존의 절대 고독이 마주보는 절대 공포이다. 오후의 낮잠을 자다가 일어난 대청마루에 엄마는 보이지 않고 빈 정적만이 가득했을 때 경악하는 하얀 공포이다. 해방을 찾아 나선 항해는 공포의 새로운 장막 속에 갇혀 버린다.
등대는 맑은 밤에나 소용에 닿는 불빛을 내지 달빛이나 별빛은 모두 솜이불 속으로 들어가 묻혀 버렸어 혹등고래의 혹 같은 돔을 뒤집어쓴 월드컵 경기장 백 미터 트랙에 땅강아지 한 마리 엎드려 있는지도 몰라 빗살처럼 하얀 수염의 방향을 잡아주던 북두칠성이 침몰했겠지 아무리 날아올라도 이미 그건 퇴화하는 날개일 뿐이야 해안은 이미 무너졌어
해무에 갇힌 실존에게 밤이 찾아온다. 어둠까지 덮여 사방은 더욱 깜깜하다. 등대가 그립다. 그러나 등대는 없다. 등대는 나아갈 길을 밝혀 주는 안내자이다. 그러나 그 불빛이 두터운 해무를 뚫고 먼 바다까지 비칠 수는 없음을 안다. 하늘의 등대라 할 수 있는 달빛이나 별빛도 찾을 수가 없다. 해무에 갇힌 검은 바다를 보면서 혹을 등에 맨 혹등고래를 떠올리고 혹등고래를 닮은 월드컵 경기장을 떠올린다. 세계의 함성이 바람처럼 지나간 경기장 트랙에 엎드려 있을 땅강아지 한 마리가 떠오르며 그것은 어느새 실존 자신과 동일시 된다. 땅강아지는 빗살 같은 하얀 수염으로 방향을 가늠한다. 그러나 땅강아지는 끝내 방향을 가늠하지 못한다. 북두칠성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날아오르지 못한 땅강아지의 날개에 힘이 빠진다. 도달해야 할 해안이 아득히 사라진다. 해안선은 파도에 무너지면서 자꾸 멀어진다.
너의 옆엔 지금 너밖에 없어
우리가 너의 안개를 벗겨 줄 순 없어
절대 고독이 된 실존은 외롭다. 옆에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 아무도 그를 대신해 줄 자가 없다. 실존을 가두고 있는 해무를 벗겨줄 자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 해무를 걷어내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홀로인 실존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실존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살아있다는 것은 상황의 연쇄 속에 있는 것”5이며 매 상황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6의 문제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여한다. 우리는 단지 선택만 할 수 있을 뿐이지 선택하지 않거나 그 상황을 피해 가거나 또는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여기서 실존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무너지려는 자기를 지탱해야 한다. 지탱한 이후에라야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실존은 자기 지탱을 위한 자기 위로를 한다.
안개 속에 내일이 있다는 건 시간을 건축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이야 네가 내일 살아 있다면 그것은 내일이 아니라 안개 낀 오늘인 거야 설령 내일이 실제로 있으면 뭐 해 네가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걸 안개 속의 항해잖아
우리는 앞의 도입부에서 현재(현실)는 없고 과거에서 미래로 건너가는 하나의 지점일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내일이 없고 오늘 뿐이라고 한다. 이는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현실이 없다고 한 앞의 진술은 철학적 논리이고 여기서의 내일은 없고 오늘만 있다는 것은 시적 논리이다. 시적 논리는 철학적 논리보다 유연하고 허용되는 범위가 넓다. 그것을 우리는 철학의 엄밀성과 시의 유연성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실사 시간과 직관 시간의 차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실존은 스스로를 위로한다. 내일을 환상이라고 한다. 내일이 있더라도 내일 또한 오늘처럼 해무가 끼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내일은 내일이 되면 더 이상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 되고 만다고 한다. 삶은 안개 속의 항해이기에 설령 내일이 있더라도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삶의 본질에 눈 뜬 초탈의 시각이며 마음을 비운 무심의 마음가짐이다. 이제 실존은 연연하지 않는다.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해방으로 들어섰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박에 안간힘을 쓸 필요는 없어
출근길의 지하철 승강장처럼 우리는 모두 떠밀려 가는 거야
실존은 현실을 인정하고 재확인한다. 굳이 정박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을 타이른다. 어차피 삶은 떠밀려 가는 것이라고 통찰한다. 세찬 흐름 속에서 떠밀려 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안다. 이제 초연해진 자유가 떠밀려 간다. “모든 자유는 본질적으로 일정한 한계 내에서의(혹은 일정한 전제 위에서의) 자유”7이기 때문이다.
기껏 오늘에서 오늘로 가는 거야, 거기서 돌아오는 거야
내일을 환상이라고 파악한 실존은 오늘의 중요성을 안다. 오늘이 순간이든 영원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항해는 오늘에서 오늘로 가는 것이며 회항 또한 오늘에서 오늘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우리는 오늘 살아 있고 오늘 죽는 것이다. 시간의 건축사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는 것이고 돌아오는 것이다.
기도는 안개 너머로 날려 보내는 종이비행기 같아
축축이 젖어서 내려앉은 자존심이 입 다물고 소리 내는 복화술이야
해무로 밀봉된 바다에서는 모든 일이 다 부질없는 짓이지
안개 너머로 날려 보내는 종이비행기는 금방 젖어서 떨어질 것인데 우리가 하는 기도가 그러하다고 실존은 말한다. 물기에 축축이 젖어서 무너지는 기도는 자신의 입으로는 차마 발화하지 못하는 자존심이다. 부질없는 짓을 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자존심이 허용하지 않는 일이다. 바다는 해무로 밀봉되었다. 단단히 붙여져 봉해진 속에서는 모든 행위가 부질없어진다. 절대 적막과 절대 고독의 갇힌 세계에서 실존은 궁극적으로 체념한다.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인정한다. 잠시 초연하던 자유가 초연에서 해방되어 다시 구속되고 체념한다.
봄꽃 한 송이 피는 일은 곧 봄꽃 한 송이 지는 일인 거지, 뭐
해양시 「해무」의 결구이다. 해무 앞에 선 실존의 무기력과 체념을 주조로 하여 길게 끌고 온 시적 분위기를 자조로 끝을 맺는다. 일단 그렇게 보자. 실존은 체념한다. 체념(諦念)은 사전상으로 두 가지 뜻을 가진다.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함’과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 그것이다. 우리는 단념함으로써 깨닫는다. 체념(諦念)은 체념(滯念)이고 체념(體念)이다. 단념하면서 깨닫는다는 것은 풀지 못하고 오랫동안 쌓인 생각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봄꽃 한 송이 피는 일은 봄꽃 한 송이 지는 일인 거지, 뭐’라고 하는 체념과 자조로 보이는 이 결구는 과연 체념과 자조이기만 할까? 우리는 ‘봄꽃’의 본질과 ‘피고 짐’의 본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봄꽃은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처음으로 피는 꽃이다. 꽃잎도 여리고 색깔도 연하지만 힘들게 성숙하고 마침내 열매 맺을 것이다. 물론 열매 맺지 못하고 지는 꽃도 있다. 그러나 진다는 의미에서는 열매 맺음과는 별도로 크게 다르지 않다. 피고 짐은 반대의 현상이면서 하나의 연관 선상에 있다. 핀 꽃이 짐으로써 열매 맺을 수 있고 열매 속에 간직한 씨앗으로서 다시 꽃을 피울 수 있다. 진 꽃이 거름이 되어 핀 꽃은 더욱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피는 일은 지는 일이고 지는 일은 곧 피는 일이다. 자연의 순환을 말함이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말함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결구는 체념과 자조라기 보다는 달관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체념과 달관은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이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왜 바다이며 왜 해무인가? 육지가 차안이라면 바다는 피안이다. 육지가 속박이라면 바다는 해방이다. 육지가 구속이라면 바다는 자유이다. 물론 바다도 거칠고 사나울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바다의 전부가 아닌 일부이며 깊은 바다가 아닌 바다의 표면이다. 바다에는 자주 해무가 끼고 우리의 항해를 방해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좌초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야 할 다음의 세계가 바다이다. 지혜로운 자가 물을 좋아하는 것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물의 이치’를 알기 때문이다. 순리인 물이 흘러 가장 낮은 바다에 모두 모인다. 낮은 곳에 처한다는 의미에서 바다가 가지는 또 하나의 덕목은 겸손이다. 격렬하고 사나울 때도 있지만 바다의 근원은 겸손이다.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해방’이라는 아나키즘의 양대 이념이 가장 부합하는 곳이 바다이다. 해무를 벗겨낸 바다의 실상은 무엇일까? 바다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다가 모든 것을 향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바다는 선택하지 않는다. 오는 대로 무엇이든 받아들인다. ‘억압 받고 핍박 받는 자는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구원할 것이니’-그것은 바다의 목소리일 수 있다. 개방성으로서의 바다는 아나키즘과 동질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가 잡종이라면 아나키즘도 잡종이다. 이미 아나키즘은 잡종이며, 잡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8한 김성국 교수의 혜안은 선각적이다. 선각자의 소명은 “닫혀진 세계를 사람들에게 다시 열어 주는 일”9이다. 인류의 조상은 어류라고 하는 진화론의 일부 주장처럼 사람들은 본래적으로 열린 바다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던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연에서 온 존재이며 자연은 곧 그 자체로 자유(所以然之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전 과정에서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육지처럼 솟아남으로써 마침내 본래적 인간의 자유는 바다처럼 멀리 밀려났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권력이 점령하고 있는 육지를 떠나서 본래적 자유인 바다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졸시 「해무」는 체념이 아니라 달관이며 포기가 아닌 도전의 은근한 각오를 주조로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한 사람의 개인은 꽃 한 송이 지는 일처럼 체념하고 절망하면서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꽃은 끊임없이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먼저 간 사람의 절망이 다음 사람의 희망이 되면서, 먼저 간 사람의 체념이 다음 사람의 불붙는 투지가 되면서, 못다 피운 꽃 한 송이는 쉬임없이 다시 피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쓸쓸한 절망의 어조로 끝난 결구는 순환과 새로운 도전의 개화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실존은 알면서 간다. 자유가 쉽게 쟁취되지 않는다는 것을, 해방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바다로 간다. 거기 해무가 도사리고 있을 것을 예감하면서 출항하고 해무와 맞닥뜨리면 절망하고 체념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전진한다. 실존은 “<어떤 것으로부터(von Etwas) 떠남>이 진정한 본래적 자유라는 것, 그것이 곧 가능성의 자유이며 무제한으로 개방되어 있음의 자유”10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가 가진 자유에 대한 의식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11는 N. 하르트만의 명제를 변용한다면 인간은 그가 가진 해방에 대한 의식만큼 해방될 수 있다. 해무가 두터울수록 해방은 더욱 가까이 와 있다. 바다로 나가는 선각자는 “위대한 것에 대한 새로운 헌신, 새로운 외경”12을 바치는 자이다.
- Nicolai Hartmann, Möglichkeit und Wirklichkeit(1938), 3.Aufl. Berlin 1966.(이하 MuW.로 약기함) S.239. [본문으로]
- Nicolai Hartmann, ebd. [본문으로]
- 계간 『철학과 현실』, 2012-여름호(93호), 서울:철학과 현실사, 2012.06.01. 2~3쪽.(권두시).// 김주완 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서울:문학의 전당, 2013.08.26. 38~40쪽.// 김성국,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서울:이학사, 2015.12.23. 891~892.(에필로그 인용) [본문으로]
- Nicolai Hartmann, Das Problem des geistigen Seins. Untersuchungen zur Grundlegung der Geschichtsphilosophie und der Geisteswissenschaften(1933), 3.Aufl. Berlin 1962.(이하 PdgS.로 약기함) S.7. [본문으로]
- Nicolai Hartmann, Ethik(1926), 4.Aufl. Berlin 1962.(이하 E.로 약기함) S.13. [본문으로]
- Nicolai Hartmann, ebd. S.1. [본문으로]
- 김주완,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서울:형설출판사, 1998.02.25. 290쪽. [본문으로]
- 김성국(2015),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 제62회 대한민국학술원상(2017) 수상 저서. [본문으로]
- Nicolai Hartmann, E. S.17. [본문으로]
- Nicolai Hartmann, MuW. S.256~257.참조. [본문으로]
- Nicolai Hartmann, PdgS. S.7. [본문으로]
- Nicolai Hartmann, E. S.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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