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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학적 일생] 사소한 사건이 이끈 시인으로서의 일생-김주완

김주완 2018. 12. 15. 10:11


-경북문협 연간지 <경북문단> 2018 제35호(2018.12.15.발행) 406~456쪽 수록-




[나의 문학적 일생]

 

사소한 사건이 이끈 시인으로서의 일생

 

                                                                                                                                         김주완

 

프롤로그

 

사소한 사건이 한 생애를 이끈다. 멀리 가서 되돌아보면 이 사소한 사건운명적 사건으로 부각된다. 그리하여 운명은 사소하게 출발한다.

 

운명의 신과의 조우

 

1965년 가을, 운명의 신이 나를 찾아왔고 나는 경배하며 그의 종이 되었다. 사건의 전말은 간단하다. 대구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그 때, 나는 한글날 기념 교내 백일장에서 이라는 시로 입상을 했다. 차하였다. 장원과 차상은 산문이었던 것 같고 장원, 차상, 차하 각 한 명씩이었다. 국어과의 이유철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격찬을 하셨다. 1학년으로서 전교(24학급)에서 3등을 한 셈이니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전교 조회 때 단상에 올라가 상장(상장 스캔 첨부)과 상품을 받았다. 가슴 뭉클한 흥분은 오래 갔고 친구들 사이에선 문학도로 공인을 받게 되었다. 이 시는 같은 해 계간 경북문예가을 호에 수록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계간 경북문예가 어떤 잡지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1966119일자로 발행된 교지 달구5호에도 실렸다. 당시에는 주로 필경하여 등사한 유인물이 통용되던 시절이라 활판으로 찍혀져 나온 잡지에 작품이 실리고 배포된다는 것은 여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당선시를 다시 살핀다.

 

1.

사람이 가고

풀이 가고

나무가 가고 짐승이 가도

너만은 아스라한 영겁에 살아남았다.

오늘을 보고

어제를 보아

내일을 짐작해도

너는 말없이 보고만 있다.

그래서

우리의 할아버지는 너를 짐승도, 풀도

나무도 아닌 흙이라 이름하였다.

 

2.

죽어간 충신의 원혈이 젖어들고

봉오리진 젊은이들의 슬픈 핏방울이 스며들어도

너는 그저 묵묵히 삼켜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너는

고귀한 피의

방울, 방울들은

마귀로 변해 버린 나무 떼서리에겐

주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우리의 할아버진 너를 사람 아닌

흙이라 이름하였다.

 

3.

언젠가

포탄이 하늘을 수놓던 날,

쓰러진 낯선 병사가

살려고, 살려고 발악을 하다

푹 고개 숙여 죽어 간 것처럼

나도 언젠가

아우성치다 죽어 간다.

가치 잃은 두 눈은

굶주린 까막까치가 물어 가고

남겨진 살점들은

늑대가 뜯다, 뜯다 말면

나는 너에게 돌아간다.

네가 된다.

 

4.

할아버지가 그랬고

형님이 또 그랬듯 나는

너를 밟고 살아 왔고

또한 죽어 가고 있다.

살아선 나는 너를 밟고

죽어선 나는 또 사람에

밟힘을 당한다.

우린 너에게서 태어나

영원을 살기 위해

다시 너에게로 돌아가고,

죽어 가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 졸시 전문

 

교실 백일장으로서 주어진 50분의 시간 안에 쓴 시인데 제법 장시이다. 설계가 끝나고는 곧장 휘몰아 내리쓴 것 같다. 보조관념의 구사나 묘사와 비유가 조악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이 쓴 시치고는 제법 철학적 냄새가 풍기기도 한다.

나는 그 이전부터 비슷한 것을 끼적거리기는 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된 시라고는 써본 적이 없었다. 다만 8년 연상인 누님이 읽은 소설이나 시집 등을 초등학교 시절부터 옆에서 주워 읽기는 했다. 참 많이 읽었는데 지금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소월시집과 옛 시조집, 소설 청춘극장, 다정불심, 무영탑정도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백일장 입상 시 이 써졌던 것 같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 53년 동안 나는 시를 쓰다 말다 해오고 있는데 고1 때의 백일장 입상이 나로 하여금 어쭙잖은 시인으로서의 일생을 살게 만들었던 것이다.

 

문청 시절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의 이 입상을 계기로 나는 시인이 다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살게 되었다. 나는 초중등에서는 학급에서 1등 자리를 거의 놓치지 않았고 초등 6, 중등 3년 동안 우등상(우등상장 스캔 첨부)을 계속해서 받았다. 1차 시험 성적을 전형자료로 하는 2차 모집학교인 대구고등 입학 당시의 학급 석차는 3위권이었다. 그러나 시에 헛바람이 들어 공부가 멀어지면서 성적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중학교 9년간 선두를 유지했던 공부를 미련 없이 하루아침에 버렸다. 그리고 당시에 출간된 한국연간시집』 『한국전후문제시집』 『세계전후문제시집같은 책을 가방에 넣어 다녔다. 그리고 협객을 동경하면서 당수(오늘날의 태권도)를 배우러 도장엘 다녔다. 주먹과 시, 이것이 그 당시의 내 삶의 전부이자 지고한 목표였다.



1966531, 대구역 서편에 있는 KBS 2층 공개홀(지금의 대구시민회관 자리)에서 문학의 밤 행사(주최:경북문협/회장:김춘수 시인)가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행사에서 나는 여명이라는 제목의 시로 서시를 낭독했다. 소위 오프닝 무대에 나선 것이다. 조명을 따라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갔고 눈이 부셔 글씨가 잘 안 보이는 가운데 흥분된 마음으로 시를 읽었다. 꽃다발을 몇 개씩이나 받았다. 소위 나의 문학 일생에 있어서 이때가 어쩌면 전성기이며 황금기였던 것 같다.

 

새벽은

그 밀려나는 어둠의 무게만큼

어려 오는 꽃꿈을 안으며

다사로운 햇살을 기다린다.

갈매빛 망토의 기사가

어느 영성(領城)의 문을 두드리는 자세로

당신의 정원엔

검게 출렁이는 바다가 서 있고

두터운 적막을 뚫고 울려오는

그 가느다란 종소리는

언제쯤 그의 언덕을 떠나온

정갈스런 노래, 노래였을까.

미미한 가슴마다

일렁이며 다가오는 바다의 물무늬,

물무늬는

고요한 정원을 더듬다가

혹은, 당신의 내실 그 깊숙이 찾아들다가

내부로 개화하는 꽃꿈의 의미만큼

스스로

은은히 울려오는 내일을 잉태할 줄도 안다.

꽃꿈은 밖으로 훌훌 향기를 뿌리며

그 뿌리께로 잠들어간 나비의 영혼처럼

심하게 울려오는 고동소리

고동소리가

안겨오는 환희로 호흡을 멈추고

사랑이 화음으로 환원하는

지점에서 쯤

당신의 내실은

잠시 희미한 기억으로 문을 열고 안겨오는 노래는

심한 포옹으로 입맞춤하며

화안이 램프를 켤 수도 있다.

마침내 동편의 하늘가

쏟아져 내리는 햇살의 여울,

여울은

빈 정원을 한두 번 배회하다가

아직은 청초한 음악으로

서서히 아침을 맞는다.

출렁이던 정원은

이제 막 햇살을 흡입하는가.


                           ― 졸시 여명전문

 

이때의 시 여명은 묵혀 두었다가 1968412(대학 1학년 때) 발행된 대구고등학교 교지 달구7호에 실렸다.  

1966년 가을 신라문화제에는 대구고등학교에서 대거 참가했다. 학교에서 지급받은 여비가 상당했다. 우리 2학년 문우들은 하루 전날 경주에 도착하여 밤의 화려한 등불행렬을 구경한 뒤 시내의 막걸리 집으로 갔다. 술값은 추렴했다. 17살인 우리보다는 10여년 연상의 작부가 들어왔는데 한복을 차려입고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하고 있었다. 천연두 자국이 빼곡히 남아 있는 얽은 얼굴이었다. 우리는 거기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더러는 옆에서 새우잠을 자고 더러는 밤을 새우면서 술을 마셨다. 다음날 아침 돈이 떨어져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백일장에 참가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줄줄이 낙방할 밖에 무슨 수가 더 있었겠는가

1966년은 계단문학이라는 동인지를 처음으로 찍어낸 해이다. 1963년 이후 대구고등학교 문예부를 중심으로 이어져 오던 계단문학의 밤이 중단됨에 따라 국반절판 규격의 등사판으로 계단문학을 만들었다. 이것이 계단문학동인지 창간호가 되는 셈인데 아무리 찾아도 지금 내게는 그 책이 없다. 계단문학 출신으로서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문인수, 이하석 시인이 나의 선배이고 치과 의사인 송재학 시인과 대학 교수인 오정국 시인이 나의 후배가 된다. 그보다 아래지만 영화계에서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이창동 감독도 이 모임 출신이다.

고등학교 2학년인 나는 19661210일 경북문협 송년문학회(대구지구 송년문학제 : 대구 현대예식장)와 시탑동인 시화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67120일 발행된 교지 달구6호에 단편소설 크리스마스이브를 실었다. 200자 원고지 105매 분량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2학년이었던 그 당시 나는 천지를 모르고 깝죽댄 것 같다. 소설까지 손을 대었으니 말이다.

시도 공부도 부실했던 1967, 3이 끝나갈 무렵 대학입학원서를 써야 했다. 당초에는 국문과를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연구주임을 맡고 계셨던 국어과의 이유철 선생님께서 계속 글을 쓰려면 국문과 보다 철학과가 나을 것 같다고 귀띔을 하셨다. 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로 원서를 냈다. 꼭 일주일간 집에 들어박혀서 수험준비를 한 뒤 당시만 해도 대학별로 출제하는 입학시험을 치르고 19683월에 입학을 했다.

대학 1학년 시절도 나는 여전히 시인이라는 환상 속에서 어영부영 보내고 있었다. 교양학부라 제대로 된 철학을 배우지도 못했고 다만 지긋지긋한 교복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만끽하면서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채 반들반들 구두를 닦아 신고 다녔다.

1969년 대학 2학년이 되었을 때, 시를 쓴다고 사찰을 전전하던 이하석 선배가 2년 간의 낭인생활을 끝내고 같은 대학 문리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1년 선배인 그가 대학은 1년 후배로 입학한 것이다. 그래도 고등학교의 선후배 관계는 삼엄한 것이라 나는 그를 깍듯이 존대했고 천성이 후덕한 그를 통해서 같은 대학 법대생으로서 학보사 편집국장을 맡고 있는 정덕환 선배 또한 만나게 되었다. 정덕환 선배의 배려로 그해 봄 경북대학보에 나의 시 4월 아침에를 싣기도 했다.  

문학적 열정이 워낙 뜨거웠던 이하석 선배가 정덕환 선배와 상의를 하여 시화전을 하기로 했다. 한 달 이상 학보사에서 정덕환 선배가 시화를 그렸다. 파스텔로 신들린 것처럼 그림을 그리는 그의 옆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하얀 귀공자의 얼굴을 가진 그가 그림에 열중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1969512일부터 17일까지 경북대 시청각실에서 열린 <이하석김주완 시화전>(리플릿 스캔 첨부)에는 두 사람이 각각 10편씩의 시를 전시했다. 전시공간이 마침 음악 감상실이어서 많은 학생들이 북적거렸다. 시내의 다른 대학 여대생들도 많이들 찾아와서 시화를 감상하였다

나는 그 이후 변변한 시를 쓰지 못한 채 시인이라는 환상 속에서 연애에 열중하고 있었다. 꾸준히 시작에 정진한 이하석 선배는 1971년 대학 3학년 시절에 현대시학추천완료가 되어 등단을 하였다. 부러웠다. 그러나 나는 등단 대신에 결혼을 했다. 대학 4학년이었던 1971717일에 지금의 집사람과 약혼식을 하고 같은 해 1225일에 결혼을 했다. 당시만 해도 대학 졸업 후의 세 가지 숙제는 병역, 취업, 결혼이었다. 철학 전공으로는 취업할 길이 없었고 개인적 자유주의자인 나는 상하 계급사회의 복종 문화가 싫어서 학군단도 하지 않았으며 군 입대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세 가지 숙제 중에서 취업병역을 뒤로 미루고 나는 우선 할 수 있는 결혼을 한 것으로 위안을 삼고 졸업을 맞았다. 참 대책 없는 무모함이었다. 결혼 후에도 시를 동경하고 시집을 뒤적거리긴 했지만 오래 동안 시를 쓰지 못하고 절필하다시피 하였다. 시도 철학도 그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는 채 나는 그것들로부터 떠나 버린 것이다.

 

등단 시절

 

초등 교사인 집사람에게 얹혀 살면서 방위소집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1976년 고등학교에 첫 직장을 잡았다. 시에서 자기소외된 나는 사진에 빠져들었다. 35밀리 카메라는 펜탁스를, 6×6 카메라는 핫셀블라드를 사용했으며 광각과 망원렌즈 등 장비도 갖추었다. 8밀리 영화 촬영에도 손을 댔지만 주로 딸아이들 성장과정을 기록했다. 월간 사진잡지에 사진작품을 몇 년간 연재했다. 편집자의 권유에 따라 사진 옆에 글을 실었다. 시의 형태를 띤 글이었다. 그 중에서 구름꽃이란 글이 우연히 구상 시인의 눈에 들었던 것 같다. 그 글로 19847월호 현대시학에 초회 추천을 받고 같은 해 11월호에 마이산에서란 시로 추천완료가 되었다. 초회 추천이 있고 난 후 구상 선생님은 새로운 시 50편을 차근차근 써서 내년쯤 보내 보라고 하셨다. 말하자면 추천완료를 위한 과제였던 셈이다. 나는 빨리 등단하고 싶은 일념으로 세 달도 되지 않아 대충대충 쓴 시 50편을 우편으로 보냈고 이러한 나의 욕심을 가상하게 보신 구상 선생님은 그 중의 한 편을 골라서 초회 추천 후 넉 달 만에 추천완료를 해 주셨던 것이다.

이 때는 이미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후이다. 셋째 딸의 취학 연령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더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원을 시작하였고 하기락 교수에게 사사를 받고 있었다. <시란 무엇인가?>,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기 위하여 미학과 예술철학을 전공방향으로 삼았으며 대구경북에서 이 분야를 지도할 수 있는 유일한 학자인 하기락 박사가 계명대학교 명예교수로 계셨기에 대학원 입학을 계명대학원으로 했다.

19847월에는 선주문학회에 가입하여 선주문학창간호(1985.03.20.)부터 제10(1990.08.20.)까지 참여하여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원로 여영택 시인과 중진 윤종철 시인은 오래 전에 작고하였고 김원호 시인, 박태환 시인과는 지금까지 교류하고 있다.

석사 학위를 끝낸 다음 해인 1986년에는 전봉건 선생이 알선해 준 혜진서관에서 첫 시집 구름꽃을 묶었다. 선주문학회에서 열어 준 조출한 출판기념회에는 서문을 써 주신 구상 선생님이 멀리 서울에서 내려와 참석해 주셨다. 해설을 쓴 이하석 시인도 참석했다.

1987년에는 죽순시인구락부의 원로 시인 이윤수 선생을 만나 죽순 회원으로 가입하고 대구 문단에 발을 들여 놓던 시기이다. 이윤수 선생은 구상 선생이나 하기락 박사와도 친분을 오래 동안 이어온 분이라 나를 더욱 살뜰히 살펴 주셨다.

1988119일에는 제2시집 어머니를 발간하여 선비 탈상전에서 전문을 읽고 제상에 올렸다. 이 시집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부터 초상과 삼우, 49, 탈상일에 이르기까지의 장면들과 추모의 정을 스케치한 23편의 시로 엮었다. 시집을 내는 소회는 다음과 같이 후기로 붙였다.

 

어머니 가신 지 일 년, 스물 세 편의 시, 이것이 내가 어머니에게 드릴 수 있는 그 동안의 모두이다. 가진 것이 이 뿐이기 때문이다. 덜 다듬어졌을지도 모른다. 마음도 솜씨도 아직은 이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노래가 이것으로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 졸시집 어머니후기 일부

 

1988513일 대구시 중구 문화동에 있는 <문화공간 시인>에서 28회 시인과 독자의 만남에 초대시인으로 불러 나갔고 같은 해 85일부터 87일까지 23일간 경북 월성군 대본해수욕장에서 열린 2회 여름시인학교의 문학세미나에서는 시와 철학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교수 시절

 

시간 강사와 연구소 생활을 하면서 박사과정 중에 있었던 나는 198891일 대구한의대학교 전임강사 발령을 받았다. 드디어 전임 교수가 된 것이다. 선비의 탈상이 지난 뒤 7개월 만이다. 전적으로 어머니의 음덕이라 생각한다. 이로부터 2009228일 명예퇴임을 하기까지 206개월은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숨 가쁘게 달린 시기였다.

나는 학내에서 연구실 생활이나 강의뿐만이 아니라 여러 보직을 맡아 수행했다. 조교수, 부교수, 정년보장 교수로 승진을 했고 사무처장, 기획실장, 제한의료원 기획관리실장, 홍보실장, 행정처장, 기획처장, 교무처장, 국학대학장, 교육대학원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보직을 섭렵하게 된 것은, 재직 대학인 대구한의대학교는 198131일에 개교한 신설 대학으로서 초창기 대학의 어려운 난관이 많았던바 그때그때 구원 투수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계단식 대형 강의실에서 진행했던 교양 강좌 <성과 사랑의 철학>은 수강생이 몇 백명을 넘기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학회 활동으로는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인증 학회인 대한철학회, 한국동서철학회, 새한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특히 은사이신 하기락 박사께서 1963년에 창립한 대한철학회는 내가 회장을 하는 동안 국내 최초의 사단법인으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와중에서 시작(詩作)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학 교수직에 있는 문인들이 창작에 전념하기는 힘이 들고 문학적 성과를 내기가 어려운 사정은 매한가지이다. 강의, 연구, 사회봉사 실적 평가에 쫓겨야 하고 대학원 석박사 논문 지도까지 맡다 보면 창작할 시간이 원천적으로 없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마음의 여유가 아예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나는 여러 보직을 섭렵하면서 동분서주했으니 말이다.

나는 시를 제대로 쓰지도 못하면서 이 시기에 학계와 문화계에서는 제법 괜찮은 시인으로 인정받아 기념시, 축시, 조시 등을 주로 썼으며 대구시내 여러 회사의 사보나 지역신문, 대구문화 등에 단편적인 시를 청탁 받아 기고했고 학보나 일간지의 사설, 칼럼, 산필, 논단 등을 썼다. 당시만 해도 시인의 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이리라.

1987년에서 1990년 사이에는 구상 시인이 대구에 내려 오셨을 때 하기락 선생, 이윤수 선생 및 내가 자리를 함께 한 적이 몇 차례 있다. 나는 세 분 모두와 인연을 맺고 있었고 세 분은 1950년대부터 대구에서 친교를 가지셨던 사이이기 때문이다.

19942월에는 계명대학교에서 존재학적 예술철학에 관한 연구-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미학이론을 중심으로 - 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을 쓰면서 나는 <시란 무엇인가?>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철학적 해답을 얻었다. 누가 어떤 이론을 내세워 아무리 현란하게 말하더라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내 나름의 중심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늘 나를 짓눌렀던 의문이 비로소 해결된 것이다. 학위 논문을 갖다 드리러 갔을 때 구상 선생님은 이제 김 교수는 하나의 틀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사물이나 사상을 보더라도 거기에 갖다 댈 자기만의 척도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전심전력을 다해 시작에 용맹정진하라.”고 당부를 하셨다. 항상 깨끗한 마음을 가지라고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휘호를 써 주시면서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인 옥빛 백자 필통 하나를 선물로 주셨다.

19949월에는 제3시집 엘리베이터 안의 20를 상재하였다. 구상 선생님의 알선으로 기획출판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해 본 시집이다. 추천사도 구상 선생님께서 써 주셨다. 이후 교수 재직 중에는 더 이상 시집을 내지 못했다.

1995~1997년 사이에 대구를 중심으로 하여 현대시학출신의 시인들로 구성된 <자연시동인>에 참여하여 윤태혁, 박곤걸, 하청호, 박정남, 권운지, 이유환, 채종한 시인과 교류하면서 동인지 제8집에서 제10집까지 발행하고 1998년 이후 동인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때는 검도에 심취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정년퇴임 후에는 검도 도장을 운영하겠다는 욕심을 가지면서 시간 나는 대로 4년 정도 수련에 몰두하였다.

199611월엔 큰 딸아이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구상 선생님이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 오셔서 주례를 맡아 주셨다. 공항으로 나가 영접하고 모시는 일은 대구대학교의 윤장근 교수가 수고해 주셨다. 이후 구상 선생님은 투병생활로 대구 출입을 못하셨다.

19972월엔 은사이신 하기락 박사가 타계하여 내가 앞장 서서 대한철학회장으로 장례를 거행하고 학덕비 건립을 위한 모금을 전국의 철학교수들을 대상으로 하여 전개하였으며 이 성금으로 2002년에 고인의 고향인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공원에 학덕비를 제막하였다. 비문은 내가 썼다. 성금에 참여하신 원로 시인으로는 구상 선생과 김춘수 선생이 있다.

199791일에는 논문 문인수의 시 간통에 대한 미학적가치론적 고찰을 써서 대한철학회 학술지인 철학연구62집에 발표하였다. 이 논문의 분량은 200자 원고지 210매로서 보통의 소논문 2편 분량이었으며 전문 508자의 산문시 한 편을 분석 대상으로 하여 한 편의 전문적인 철학 논문으로 작성한 것으로는 국내 철학계에서 최초의 기록이다. 문인수 시인은 이를 고맙고 자랑스럽게 여겨서 지금도 이 학술지를 그의 침실 책장의 맨 위에 꽂아 두고 있다.

이를 본 박곤걸(1935~2008) 시인이 시집 화천리 무지개의 원고 뭉치를 들고 와서 논문 형식의 해설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나는 그때 대학에서 보직을 하고 있던 때라 도저히 원고를 쓸 형편이 못 되어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박곤걸 시인은 그 다음 시집을 내면서도 화천리 무지개의 해설을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주 큰 미안감으로 부랴부랴 원고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021031일에 논문 박곤걸 시의 존재론을 새한철학회 학술지 철학논총30집에 겨우 발표하였다. 분량은 200자 원고지 155매였다.

이보다 몇 달 앞선 20026월 초순, 고향인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공사중이었던 구상문학관 완공이 다가올 즈음하여 구상 선생님이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구상문학관장을 맡을 수 있는가?”라고 의사 타진을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수락하지 못했는데 지금까지 죄송하다.

20041215일에는 카툰에세이집 짧으면서도 긴 사랑 이야기를 상재하였다. 몇 년간 맡아 온 <성과 사랑의 철학>이라는 교양강좌의 강의 원고를 주제별로 나누어서 아주 짧은 수필로 만들어 한 쪽에 싣고 맞은편 쪽에는 전문 일러스트레이터가 글의 내용에 맞추어 그린 일러스트를 배치하였는데 이 책을 교보문고에서 도서 분류를 하면서 카툰에세이에 포함시켰다. 출판사로부터 초판 인세로 300만원을 받았는데 재판은 들어가지 못한 것 같다.

200739일 구상문학관 시창작반 강사를 맡았다. 처음 몇 년은 연간 30~40(주당 3시간) 정도의 1~2학기 강사료를 받으면서 강의를 했는데 나중에는 정규 강좌가 없어져서 연중무휴 무보수 강의로 20161231일까지 계속했다. 구상 선생님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갚는다는 심정으로 수강생의 인원수에 연연하지 않고 학구적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오로지 실력 향상에 매진하였다. 이 강좌를 이끌면서 나도 시 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다. 가르치면서 시를 배웠다. 내 스스로 매주 1편씩, 어떤 때는 몇 편씩의 시를 쓰기도 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시에 대한 이론 정립이 되었다면 이 강좌를 이끌면서 시작에 대한 실천적 감각을 다시 다듬게 된 것이다.

이 강좌의 수강생을 중심으로 하여 2007810일에 창립된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의 활동은 참으로 자랑스럽다. ‘언령(言靈)’이라는 명칭은 구상 선생님이 직접 작명하신 이름이다. <시의 언어가 가진 신령한 힘>을 의미하는 말로서 구상 선생님이 평소에 가지셨던 시에 대한 신념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언령>은 구상 시인을 포함한 기성 문인 30명이 모여 전국규모 동인으로 결성이 시도된 적이 있다. 대구경북에선 내가 유일하게 멤버로 참여하였다. 19881029일부터 1989315일 사이에 언령 동인 결성이 구체적으로 추진되다가 구상 선생님의 결단으로 취소되었다.(자세한 경위는 언령5, 2010.11.25. 157~160쪽 참조.) 바로 그 명칭 언령을 구상문학관 출신 시인들이 물려받아 쓰고 있는 것이다.

언령에서 수강한 사람은 연인원 200여 명이며 2018년 현재 연간인 동인지 제13집이 발간되었다. 전국 단위의 문학상을 수상한 사람이 여러 명 있으며 개인 시집을 발간한 회원도 여러 명 있다. 무엇보다도 회원들의 작품 수준이 높아 전국 단위로 보아도 상위 수준이라 할 만하다.

 

경북문단 입참과 경북문협 회장 시절

 

2009228일 나는 정년을 56개월 남겨둔 채 대학 강단을 버리고 명예퇴직을 했다. 201062일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고향인 칠곡군수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실패했다. 배신과 기만의 흙탕물에 빠졌다가 나왔다. 덕분에 고향 왜관에 주저앉게 되었다. 선거의 충격을 가라앉힌 뒤 나는 곧 경북문단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문인들이 곳곳에 있는 덕분에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경북문협에 입회한 것은 2008년이지만 그동안 적만 걸쳐두고 있던 것을 이제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여생을 시인으로서의 길을 걷기로 한 이상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2013826일에 제4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를 상재했다. 3시집 이후 19년 만에 내는 시집이라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다소의 무게감이 있는 시와 장시가 수록되었다.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승하 교수는 시집 해설에서 고마운 말을 많이 해 주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젊은 시를 쓰는 시인이 한 분 왜관에 계시다. 그분의 성함이 김주완시인이다. 생을 완주하고자 하는 마라토너의 심정으로 시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 이 이름을 기억하기로 하자.

                                                                                                   ― 이승하, 존재의 집을 거듭 지어서 거듭 허무는 자끝 부분

 

이 시집에 수록된 시 해무2년 후, 아나키스트 김성국 교수의 역저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신국판 932/서울:이학사, 2015.12.23.)의 에필로그에 전문이 인용되었다. 그는 이 시로서 아나키스트로서의 그가 가야 할 노정에 대한 진솔한 술회를 대신했다. 이 저서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로 김성국 교수는 2017년 제62회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수상하게 된다.

 

바다 아닌 곳, 안개 끼지 않은 앞길이 없다는 걸 알아

 

그럼, 바다엔 늘 안개가 끼어 있지

기상 위성은 밤과 구름을 투시하여 지상으로 통신을 보내오지만

출항계에 찍히는 스탬프 그늘에는 늘 해신海神 부적이 숨어 있어

 

지금은 닻을 내리고 정박하는 수밖에 없

지뢰처럼 터져 비산할 한 치 앞의 암초를 분별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조류潮流는 우리를 데리고 어디론가 갈 거야

바다 깊은 아래서 바람은 불고

좌초는 우리의 선택을 넘어서 있어

 

바다의 생애가 훈증 너머에 갇혀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지연紙鳶처럼 펄럭이며 따라오던 바닷새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수평선과 분분한 섬들이 사라지고 외로움의 그늘만 연기처럼 남았다

선수船首가 지워지고 사방 분간이 지워졌다, 자침磁針이 흔들리는 나침반

때 아닌 곳에서 우두커니 서버린 시간

정적은 엄마가 보이지 않는 오후의 대청처럼 무서워

 

등대는 맑은 밤에나 소용에 닿는 불빛을 내지 달빛이나 별빛은 모두 솜이불 속으로 들어가 묻혀버렸어 혹등고래의 혹 같은 돔을 뒤집어쓴 월드컵경기장 백 미터 트랙에 땅강아지 한 마리 엎드려 있는지도 몰라 빗살처럼 하얀 수염의 방향을 잡아주던 북두칠성이 침몰했겠지 아무리 날아올라도 이미 그건 퇴화하는 날개일 뿐이야 해안은 이미 무너졌어

 

너의 옆엔 지금 너밖에 없어

우리가 너의 안개를 벗겨줄 순 없어

 

안개 속에 내일이 있다는 건 시간을 건축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이야 네가 내일 살아 있다면 그것은 내일이 아니라 안개 낀 오늘인 거야 설령 내일이 실제로 있으면 뭐 해 네가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걸 안개 속의 항해잖아

 

정박에 안간힘을 쓸 필요는 없어

출근길의 지하철 승강장처럼 우리는 모두 떠밀려 가는 거야

기껏 오늘에서 오늘로 가는 거야, 거기서 돌아오는 거야

 

기도는 안개 너머로 날려 보내는 종이비행기 같아

축축이 젖어서 내려앉은 자존심이 입 다물고 소리 내는 복화술이야

해무로 밀봉된 바다에서는 모든 일이 다 부질없는 짓이지

 

봄꽃 한 송이 피는 일은 곧 봄꽃 한 송이 지는 일인 거지,

 

                                                                                                                                                                       ― 졸시 해무전문

 

졸시 해무는 이보다 앞서 계간 철학과 현실2012-여름호(통권 93) 권두시로 게재되기도 했다.

20141013일에는 제5시집 그늘의 정체를 서울 시인동네에서 발간했다. 4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의 시들이 길고 무거웠기에 단시를 모아 묶은 것이 그늘의 정체이다. 이 시집은 경북문협 회원들에게 광범하게 배포되었다. 나는 그때 경북문협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고 연말에 있을 회장 선거에 출마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알리기 위한 방편으로 이 시집을 활용한 것이다. 그늘의 정체2015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추가 인세를 받았다.

연말의 경북문협 회장 선거에서 나는 단일 후보로 등록되어 무투표 당선되었다. 런닝메이트로 부회장직에 함께 뛰어 준 박태환, 진용숙, 황봉학, 권오휘, 정구찬 사백의 울력으로 내가 얻은 영광이었다. 이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한다. 201527일 김천과학대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나는 당선증을 받고 경북문협 제24대 지회장에 취임하여 2017228일 임기만료 시까지 재직하였다. 그 이전에 나는 한국문협 제25대 이사(2011.03.03.~2015.02.28.)를 맡아 보았지만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운영에 회의를 느끼면서 변방의 소외를 체험했기 때문에 경북문협은 회원 중심으로, 민주적으로 운영하겠다는 결심을 새로이 다졌다.

나는 경북문협을 운영함에 있어서 먼저 회계집행과 재무 처리의 공정을 기했다. 매일의 입출금 전표와 금전출납부, 그리고 은행 통장을 정확하게 일치시켜 임기 만료 후 인계 시에 2년간의 회계 서류와 장부 및 통장을 모두 넘겨 주었다. 이로써 종전에 금전출납부와 증빙서류, 은행 통장이 인계되지 않던 좋지 않은 전례를 불식시켰다.

그동안 관례로 시행하여 오던 경북문학상을 성문화한 <경북문학상운영규정>을 제정하여 국내에서 가장 공정하게 운영되는 상이 되도록 하였다. 지회장은 심사위원이 될 수 없도록 하고 또한 심사결과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지며, 소수의 추천권 독점을 막기 위하여 자기추천이 가능하도록 하였고 집행부 임의로 수상 장르가 결정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회원 분포 비율을 반영하여 향후 20년 간의 매년도 시상 장르를 못 박았으며 최고 최하점을 제외한 점수를 합산하는 방식의 완전 채점제를 도입하였고 심사결과 열람제를 도입함으로써 종전의 사법고시 2차 시험과 같은 공정성을 확보하였다. 각종 규정을 신설, 개정하여 정비하였고 <경북작가상> <경북작품상>을 신설하여 적은 상금일망정 시상함으로써 회원들의 수상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였다. <경북문단 신인상>을 신설하여 돈이 들지 않고 신인들이 등단할 수 있는 등용의 문을 개방하였다.

연말의 경북문협 행사 시 중앙 유명 문인의 초청 특강이 관례적으로 있었는데 이는 경북문협 지회장의 입지 확대를 위한 발판으로 이용될 소지가 있다고 보아 이를 폐지하고 경북문협 원로 회원의 초청 특강(나의 문학적 일생)으로 대체하였다. 매년 2~3명의 초청특강 원고를 받아 기관지 연간 경북문단에 게재함으로써 문학사적 자료로 남게 하였다.

경상북도 보조금 2건을 본예산에 편입시킴으로써 매년도 사업비보조지원신청을 따로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였으며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문향 경북문인 시낭송 올림피아드> 행사를 새로운 사업으로 매년 시행하게 하였다.

종전에 관례로 집행해 오던 지회장 출장비를 폐지하였으며 각종 상금 등 부족한 예산은 광고비 유치와 지회장 사비 출연으로 충당케 함으로써 회장 직은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봉사하는 자리라는 인식을 남겼다. 회장 직이 좋았던 것은 내가 평소에 가졌던 정의, 평등, 민주, 공정 등의 가치를 소신껏 실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문학상 수상 시절

 

경북문협 회장 임기 2년 차이던 201647일에 제6시집 주역 서문을 읽다를 상재하였다. 이 시집에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헌사를 책머리에 붙였다.

 

이 시집을

 

평생에 걸쳐

 

높은 고을 상주와 낙동강과 동학을 노래하는

박찬선 시인과

 

멀고 외로운 길 위의 한 그루 푸른 솔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

김성국 교수에게

 

진정을 다해 바친다.

 

                                                                                                                  ― 졸시집 주역 서문을 읽다헌사

 

박찬선 시인과 김성국 교수는 생존하는 분들이다. 생존하는 분에 대한 헌사를 쓴다는 일이 조심스러웠지만 소신껏 썼다.

나는 이전에 철학계와 문단의 스승으로 모셨던 생전의 하기락 선생님과 구상 선생님을 존경했다. 하기락 선생님은 한국 제1세대 철학을 대표하는 분이면서도 아나키스트로서의 삶의 길이 오롯하셨던 분이고 구상 선생님은 시와 삶이 일치하는 구도의 일생을 사신 분이다. 나의 한생을 이끌어 온 두 개의 지주인 시와 철학, 그 도달과 성취가 낮다는 자격지심으로 나는 늘 두 분께 죄송한 마음을 가졌다. 그만큼 나는 그분들을 존경했고 나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제 하기락 선생님과 구상 선생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두 분이 타계하신 후 나는 많이 허전했다.

그러다가 박찬선 선생님을 만났다. 오래 전에 우편으로 시집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고 대학에 재직하던 시절에는 한국철학을 전공한 시인이자 교육자로서의 그의 명성을 멀리서 듣긴 했지만 정작 교분을 트고 자주 뵙게 된 것은 경북문협 활동을 통해서이다. 수준 높은 작품 세계나 갖춘 품성과 인격이 당대에 따를 자가 없는 분이다. 나는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2016년에 박찬선 시집 우리도 사람입니다의 해설을 맡아서 쓸 때는 성심으로 몰입하여 그분의 높은 시 정신을 만났다. 그리하여 시집 해설의 제목을 사람을 모시는 신인神人의 시라고 내다 걸었다.

아나키스트 김성국 교수는 은사 하기락 선생님과 함께 아나키스트 운동을 한 분으로서 일찍이 그 명성을 접하고 있었지만 교분을 튼 것은 한국아나키즘학회 2015년 정기학술대회에서이다. 국내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마친 엘리트 학자, 진보적 사회학자, 강고한 사회운동가,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 등 그를 규정하는 수많은 관형사와는 달리 참으로 소탈하고 겸손하며 자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보다 2년 연상이지만 나는 그가 세운 주체적 아나키즘 이론이 좋았고 줄기찬 실천적 삶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개인적 자유주의자라는 점에서 우리는 같은 지점에 서 있었다. 나는 그가 미덥고 존경스러웠다. 최근에는 아나키스트 김성국 교수라는 22행짜리 시를 써서 발표하기도 했다.

나는 문학상과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주변에서는 쉽게 받는 상도 내게는 참으로 어렵게만 보였다. 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초연하게 살기로 했다. 그러던 중 2017년에는 한꺼번에 상복이 터졌다. 먼저 제18회 경북예술대상을 받게 되었다. 경북문협 진용숙 회장님이 추천하고 경북예총 이사회에서 투표를 통해서 결정된 상이다. 뒤이어 제31회 경상북도문학상을 받았다. 나의 문하에서 시를 공부한 김인숙 시인 부부가 정성을 쏟아서 받게 된 상이다. 마지막으로 제54회 한국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한국문협 부이사장을 맡고 있는 박찬선 선생님이 추천하여 돌아온 영예이다. 오래 남을 영광을 만들어 주신 이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러나 아직 이 상을 받지 못한 분들에게는 송구하다. 아무튼 졸시집 주역 서문을 읽다를 내면서 과분한 행운이 내게 찾아왔고 한국문협의 간판상이라 할 수 있는 한국문학상 수상 시집 또한 바로 이 시집이다. 내게 있어서 기념비적인 시집의 표제시 주역 서문을 읽다를 옮긴다.

 

400세 조선 경당敬堂900세 송나라 정이程頤를 만나는 아침,

 

어제는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굵은 비의 혀가 만 가지 단서를 일으켜 참과 거짓의 경계를 가르니 지극히 큰 밝음이 어둠을 밀어냈다, 꿈속에서 서애 류 선생을 뵈었다

 

닭이 울어 새벽에 깨었다, 다시 잠들 수 없어 주역 서문을 읽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걸어 묻는다, 선생의 선생은 말을 콩처럼 골라서 답변을 하는데 분별이 어렵다, 하늘과 땅의 정적이 둥글게 부풀어 일어서고 있다

 

오래도록 가물다가 비가 내리니 모든 백성이 모를 옮겨 심는데 검은 머리 아이와 흰머리 늙은이가 논길에서 기뻐하며 함께 손뼉을 쳤다, 지난봄의 일이다

 

마음은 계란과 같으므로 인은 곧 생하는 성이다, 마음이 살면 길과 흉이 한 몸 안에 있어 천하의 걱정이 앞을 향하니

 

주역 서문을 삼독三讀하면 둔갑을 한다고 미욱한 자들이 믿고 있다, 싸리 울타리 너머가 숲이고 어둠이다, 아 두려운지고 깜깜한 내일이여, 대업을 내는 사람이여

 

머리를 빗지 않았다, 마음만 가지런히 빗고 족인族人의 초대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 취해서 돌아왔다, 일전의 일이다, 때는 처음부터 하나만 있지 않으니

 

주역의 말은 질문이고 대답이다, 만물은 변하기에 변하지 않음에 붙어 있다, 변화의 근본은 간단하다, 다음인 지금이 변화이다, 앞과 뒤가 없어야 불변이다

 

듣고 말하는 서책書冊은 사람이다, 소리가 없는 데서도 듣는 듯이 하며 얼굴이 없는 데서도 보는 듯이 해야 하느니, 삼천 년이 지나도 하늘에서 비 오고 해 진다, 달 뜨고 새 난다, 뿌리 있는 자만이 꽃을 피우느니, 피지 않은 꽃은 꽃이 아닌지라

 

 

* 경당일기을묘년乙卯年(1615) 7월 병오丙午(1) “주역 서문을 읽다 讀易序의 기록을 전후하여 재구성하였음.

** 경당일기: 17세기 안동지역의 대표적 산림처사이자 도학자인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1564~1633) 선생의 일기.(장흥효 지음, 국역 경당일기, 강정서 외 옮김, 장윤수 해제, 한국국학진흥원, 2012.9)

 

                                                          ― 졸시 주역 서문을 읽다*경당일기** 을묘년乙卯年(1615) 7월 병오丙午(1) 전문

 

또 하나 이 무렵 내게 있어서 큰 사건으로서의 만남이 있었다. 바로 청전 서상은 선생님과의 조우이다. 그는 호미곶 출신의 거인이었으며 관계에서 크게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시와 수필가로서의 명성도 대단했으며 고향 호미곶에 대한 그의 사랑과 헌신은 가히 전설이 되고도 남을 만 했다. 2017년에 나는 그분의 시집 호미곶 별사의 해설을 쓰면서 고절하면서도 장엄한 별사의 시라는 제목을 뽑았다. 2018428일에 제막한 청전 서상은 문학비의 비문도 정성을 다해서 내가 썼다. 청전 선생님의 노익장이 곧 한국문단의 홍복이라고 믿는다.

 

에필로그

 

고등학교 시절에 맞닥뜨린 교내 백일장에서의 입상을 계기로 운명적으로 들어선 문학의 길, 그 길을 걸어온 나의 일생은 어쩌면 <시와 시작(詩作)이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좋은 시란 어떤 시인가?>, <명성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먼 길을 돌아온 구도의 길이었던 것 같다.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철학과로 진학을 하였고 박사논문도 언어(존재)에 초점을 맞춘 존재론적 예술철학에 관한 연구로 하였다. 나름대로는 해답을 찾았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문단엔 내가 설 자리가 없었다. 문단에서만 한 평생을 보내온 사람들에게 나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명성이 높아진 시인도 많고 새로이 빛나는 이름을 들고 나오는 시인도 많았다. 대중적 지명도나 인기가 높은 사람들은 자부심이나 권위가 대단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의 작품을 읽어 보면 별로 기죽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문단도 사람이 모인 사회라는 것을 많이 늦게 알았다. 사람이 모이는 곳은 어디든 거기가 거기였다. 진실하고 고결한 인격을 갖추고 문인으로서의 길을 오롯이 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딜레땅뜨와 사이비가 활개를 치고 있었다. 문단 모리배라고 해도 좋을 만한 사람들도 마주쳤다. 이중적인 인격도 만났고 허세와 허풍으로 행세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멀리서 가졌던 좋은 이미지가 깡그리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힘든 일은 헛된 권위와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패괴하는 일이었다. 대개의 경우 피해서 지나갔지만 아주 간혹은 나름대로 응징한 경우도 있었다. 많은 문인들이 실상을 보지 못하고 허상에 매달리고 있었으며 그것을 꿰뚫어 보고 역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의도 있었고 부정의도 있었으며 그것들이 뒤엉켜 흘러가고 있었다. 문단은 강물이었다.

2007년부터 시작한 구상문학관 시창작 강좌 및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의 지도는 10년을 채우고 나서 201713일부터는 이 강좌 출신 중에서 가장 우수한 성과를 내고 있는 김인숙 시인에게 넘겨주었다. 현재는 김인숙 시인이 지도교수 겸 회장으로 <언령>을 이끌고 있다. 연중 무휴로 운영되고 있는 스터디에 나는 이제 시간 나는 대로 참가한다. 나의 공부를 위해서이다. 참석할 수 있을 때까지 참석할 예정이다.

여생이 얼마일지는 모른다. 몇 권의 시집을 더 상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시를 놓지 않고 가겠다는 생각만은 가지고 있다. “돈이 되지 않더라도 정년이 없는 시인이 된 것은 행운이라고 말씀하신 근곡 박찬선 선생님의 생각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우연하게 만난 시가 평생을 곤궁하게 하더니 노년이 되니 그 시가 오히려 나를 풍요하게 하고 있다.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는 말을 실감한다. 나는 탁구나 수영을 하러 다니지도 않고 복지회관이나 노인교실에 무엇을 배우러 다니지도 않는다. 어쩌다 당구장에 나가기도 하지만 아주 가끔씩이다. 술은 젊은 시절부터 먹지 않았고 지금은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운동이라곤 매일 10km씩 걷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아 실천하고 있고 나머지 시간은 쉬엄쉬엄 시를 읽거나 쓰는 일로 소일한다. 내가 시를 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시도 나도 하릴없이 참 심심하여 서로를 붙들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 나는 대표작이 없다. 앞으로도 대표작을 쓸 생각이 없다. 독자의 취향이나 수준에 나를 맞추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대중적이고 싶지 않다. 대중은 그가 이해한 것에 머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유명한 사람을 추종하고 싶지 않다. 그들과의 친분을 과시하여 나의 권위를 높이고 싶지 않다. 마음이 승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비형식적 오류 중의 하나(권위에 호소하는 논증의 오류)라는 것을 안다. 명성은 상업주의의 산물이다. 거기에는 출판계나 서점가의 전략이나 문단의 섹터주의가 개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명성과 실상이 등치 관계에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명성은 생물이고 속물이다. 명성은 부담이며 언젠가는 추락하고 훼손된다. 따를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속적 명성이 아니라 시적 자존심이다.

시는 대중적일 수 없고 시로서 부자가 될 수도 없다. 시는 현실적으로 유용하지 않다. 미학에서는 그것을 무용성의 유용성이라고 가르친다. 비록 아무도 읽지 않을지언정 나는 늙지 않는 시를 쓰고 싶다. 젊음은 진보이다. 젊은 사고, 젊은 신념의 소수자로 살고 싶다. 나는 이념의 신봉자는 될지언정 권력의 시녀는 되지 않으려 한다. 허상에 고개 숙이지 않을 것이며 현실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비굴하지 않을 것이다. 이름없는 시인으로 살면서 오로지 순수와 양심에 나를 봉헌하려고 한다. 참된 진보적 시인으로서 외롭게 살고자 한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의 논문 횔덜린 시의 해명에서 시인의 시적 삶은 인간의 시민적 삶에 선행한다.”고 하였다. 선행(先行)은 고독을 수반한다. 혼자이기에 외로운 길이 앞서 가는 길이다. 앞서서 사는 것이 꼭 능사는 아닐지라도 능동적주체적 삶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주체적 삶은 종속을 싫어한다. 주체적 삶이 개인적 자유를 신장하고 사회적 해방을 견인한다. 시가 시인을 자유케 한다. 참된 자유와 해방이 시인을 참시인으로 만든다. 참시인은 시로 말하고 시로 남는다. 그러나 누군가는 시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간단하게 뭉뚱그려 말한다.

 

()는 시().

시는 명명(命名)이다. 존재가 입는 최초의 옷, 자유이며 해방이다.

시작(詩作)은 시작(始作)이다.

시작의 주재자는 신()이다.

시인은 반신(半神)이다.” 하이데거의 통찰은 여전히 명쾌하다.

창작과 감상, 긴장과 이완의 순환 속에서 시인은 시인으로 산다.

세상으로 시를 내보내는 시인의 모험은 위대하다.

좋은 시는 영혼을 살리는 생수(生水)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하여 샘물은 솟는다. 니체의 증여덕이다.

명성은 냇물 위에 뜬 단풍잎이거나 잠시 부푸는 물거품이다.


김주완 자술 연보

 

194947일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211-15에서 태어나다. 본관은 의성(관란재공파)이며, 아버지는 중원(重源), 어머니는 벽진 이씨(완석정공파) 호기(浩基)이다. 부모님은 12남매를 출산하여 6남매를 병으로 잃고 6남매만 성가시켰다. 나는 성가한 42녀 중 차남이다. 태어날 때 태를 감고 나왔다고 하여 아명은 태호(胎浩)이다.

19506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같은 해 83일 왜관 소개령이 내려짐에 따라 당시 15세의 형님과 9세의 큰 누님은 외가 곳인 홈실(성주군 초전면 월곡리)로 피난을 보내고 조모와 부모님, 4세의 누나를 따라 대구 무태(지금의 대구시 북구 동변동, 서변동 일대)로 피난을 가다. 같은 해 919일 미군에 의해 왜관이 탈환되었고 101일 복귀령이 내려서 귀가하다. 큰 나무 대문의 기와집이었던 우리 집은 당시 인민군의 야전 병원으로 사용되어 미군의 융단폭격을 면했으며 피투성이 붕대와 수술칼, 집게 등이 뒷밭 구덩이에 가득했다고 한다.

피난길에 4세인 누나는 아버지의 배낭에 올라앉아서 가는데 갓 돌이 지난 나는 서투른 발음으로 자꾸! 자꾸!” 하면서 앞서 갔다고 한다. 피난지에서는 내가 경기(驚氣)를 하여 질식한 것을 할머니가 통행금지된 시간에 제한 구역을 넘어 용한 의원을 찾아가서 응급처치를 함으로써 겨우 소생시켰다고 한다.

1954~1955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5~6세 때에는 집 앞 도로 가의 도랑 풀숲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해골바가지를 꺼내서 발로 차고 다니면서 놀다.

1956(초등 1) 4월 초 왜관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다.

그해 11월 말 하교길에 갑자기 주저앉은 후 걷지 못하는 증세가 생겨서 12월 방학 시작때까지 20여 일간은 병결하고 이후 겨울방학 기간을 이용해 집에서 치료하다. 처음에 병원에서는 대퇴골 아래 두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는데 할머니가 병신을 만들 수는 없다.”고 하면서 집으로 데려와서 백방으로 수소문한 민간 조약을 써서 치료하다. 이듬해 개학 후에는 완전하게 걷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활동은 가능해서 아버지가 태워다 주시는 자전거로 등하교를 하다가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완쾌되다.

1958(초등 3) 3년 연상인 작은 누나가 같은 학년의 남학생에게 시달림을 받는다고 해서 또래 보다 몸집이 컸던 나는 6학년 교실에 찾아가 3년 선배를 응징하다.

늦가을 어느 날 나는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고 출세를 해서 돌아오겠다는 생각으로 늦은 밤에 가출하다. 왜관역에서 열차를 타려다가 14년 연상인 형님에게 붙들렸고 집에 끌려와서 죽도록 맞다.

1959(초등 4) 봄에 왜관 공회당에서 열린 군내 반공웅변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하였지만 입상하지 못하다.

                          2학기 초에 열린 교내 학예회의 흥부와 놀부 연극에 흥부로 출연하다.

1960(초등 5) 당시 통지표를 보면 특별활동으로 교내 문예부에 소속되다.

                          전국 표어 공모전에 입상하여 칠곡경찰서장실에서 상장과 상품을 받다. 주제는 불조심또는 반공이었던 같은데 상장은 보관되어 있지 않다. 상품으로 아주 고급한 필통을 받은 기억이 있다.

1961(초등 6)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다. 헌병 대위 출신인 5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 갑자기 차출되어 왜관읍장으로 부임하는 것을 보다.

                        전교 어린이회장에 당선되어 매주 월요일 열리는 전교 조례 때 교장 선생님 다음 순서로 조례대에 올라가 주생활목표를 발표하다. 이때가 내 생애에 있어서 최고 전성기였던 것으로 생각되다. 공부도 싸움도 거의 전교 1위를 하던 때였으니까. 친구 한두 명의 도전이 있었지만 제압 후에는 더 이상 아무도 도전하지 않다. 후에 프로 레슬러가 된 친구도 있고 서울대를 나와 대기업 임원이나 서울대 교수를 한 친구들도 몇 명 있었는데 당시는 아마 나를 아끼며 봐 주었던 것 같다.

                         의미도 잘 모르는 혁명공약을 소리 내어 외울 때는 아주 신이 났다.

196229일 왜관초등학교 6학년을 졸업하다.(이때부터 신학년도 시작일이 41일에서 31일로 바뀌다.)

                        남학생 2학급, 여학생 2학급의 반 편성으로 초등 6년을 다닐 동안 학급의 새로운 편성은 없었으며 6년 내내 학급 석차 최상위를 유지하였고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우등상을 계속 받다. 또한 6년간 급장(지금의 반장)을 맡았는데 당시는 담임 선생님의 임명 또는 선거로 급장이 결정되던 때였으며 학교 공부와 숙제 이외의 어떤 공부도 하지 않던 시대였다.

1962(중학 1) 3월 순심중학교 1학년 입학하다.(1차 경북중학교에 지원하여 불합격하고 그 점수를 들고 순심중학교를 찾아와 추가 입학하다.)

                          생물반에 들어가 여름방학 기간에 34일간 구미 금오산 정상에서 야영을 하면서 생물채집을 하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까지 야영을 했는데 중학교 1학년은 나 혼자였다. 생물 선생님()을 따라 계곡에 가서 둘이서만 목욕을 했는데 유교적 환경에서 자란 탓으로 다 큰 성인의 벗은 몸은 그때 처음 보다.

1963(중학 2) 보이스카웃 활동을 하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하루 2갑 정도를 피우다. 2000년 경에 만성 폐쇄성 호홉기 질환을 앓기 시작하여 2014814일에 담배를 끊다. 내가 학교에 가고 나면 중학교 2학년 아들의 방에 있는 재떨이를 어머니께서 씻어 주셨는데 아마 한숨을 자주 쉬셨을 것으로 짐작되다.

아버지의 꾸중을 듣고 가출하여 친구의 자취방에서 잠을 잔 뒤 교복이 아닌 사복 차림으로 등교를 했는데 도시락을 들고 창문 밖에 와서 서성이는 어머니를 발견하고는 다시는 가출하지 않기로 결심하다.

1964(중학 3) 지도부장(규율부장)을 맡아 아침 등교시간엔 교문 앞에 서서 등교하는 학생들의 복장과 소지품을 검사하다.

남학생 4학급, 여학생 2학급으로 편성된 중학교 3년간 나는 학급에서 최상위 성적을 유지하면서 우등상을 계속해서 받았고 매년 학급의 실장을 맡다.

1965128일 순심중학교 3학년을 졸업하다.

1965(고교 1) 3월 초 대구고등학교 1학년 입학하다.(1차 경북고등학교에 지원하여 불합격하고 그 점수를 가지고 2차인 대구고등학교에 진학하다. 학급당 정원 60, 8개 학급으로 편성된 신입생 480명 중 나의 입학성적은 학년 석차 20위권 내외였다.)

                         봄부터 당수(태권도)를 배우러 도장에 다니기 시작하다.

1030. 한글날 기념 교내 백일장에서 시 으로 차하를 수상하다.

1966(고교 2) 4월 술집 출입에 입문하기 위하여 친구들과 어울려 왜관 아랫개 선창가에 있는 제법 큰 술집에 들어가 술상을 들이고 작부 몇 명을 사이사이에 앉힌 후 주연을 시작하다가 당시 순심중고등학교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발각되다. 일부는 창문을 타넘어 도망을 치고 나머지는 선생님의 권유로 귀가하다.(학생주임 선생님께서 묵인해 주심으로써 이 일로 처벌받은 친구는 아무도 없다.)

                          531일 경북문협(회장 김춘수 시인) 주최 문학의 밤(대구역 서편 KBS 2층 공개홀/지금의 대구시민회관 자리) 행사에서 자작시 여명으로 오프닝 낭독을 하다.

                          가을 대구고등학교 계단문학회 회원들과 함께 신라문화제 백일장에 참가하여 낙방하다.

                          가을 대구고등학교 계단문학동인지를 창간하다.(국반절판 등사판)

                          1210일 경북문협(회장 김춘수 시인) 주최 문학의 밤(대구지구 송년문학제/대구 현대예식장)에 참가하다.

                          12월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이브(200×105)를 써서 대구고등학교 교지 달구6(1967.01.20.발행. 134~143)에 발표하다.

1967(고교 3) 대학 입시 준비는 안중에도 없이 한국전후문학전집을 들고 다니다.

1968117일 대구고등학교 3학년을 졸업하다.

1968(대학 1) 3월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1학년 입학하다.(철학과 입학정원 10명 중 2등으로 합격하여 반면 장학금을 받고 입학함.)

1969(대학 2) 512~17일 이하석김주완 2인 시화전을 개최하다.(경북대 시청각실)

                          7월 경북대 일청담에서 출정식을 한 3선 개헌 반대 데모대에 합류하여 대구역까지 진출하였다가 진압경찰에 쫓겨 칠성시장 재래 상가에 숨어들어 연행되지 않음.

1971(대학 4) 717일 초중학교 동기이며 초등교사인 조경환과 3년 여의 연애 끝에 약혼하다.

                        1225일 조경환과 결혼하다.(대구 고려예식장/뒷날 경북대 총장과 계명대 이사장을 역임하신 한명수 교수가 주례를 하시다.)

                        대학 4년은 시도 공부도 실패했던 시기이다. 현대문학과 갓 창간된 월간문학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지만 매월호의 사분의 일도 읽지 않았으며 시작에 전념하지도, 성과를 내지도 못한 채 낙오자가 되어 허송했다.

1972225일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4학년을 졸업하다.(문학사)

1972~1975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과 대학가의 유신반대운동이 사생결단으로 맞서던 암울한 사회적 불안기에 가장이 되어 생계에 쫓긴 나는 한동안 이어 온 행정고시 수험 준비를 작파하고 낮에는 난전 행상(양말 장사), 영업용 택시 운전사, 할부 책장사 등을 하면서 격일제 야간 방위소집 근무를 하다. 까까머리에는 양키시장에서 산 가발을 쓰고 다니다.

1973년 맏딸 자현 태어나다.(현재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

1975년 둘째 딸 정현 태어나다.(현재는 고등학교 수학 교사)

1975910일 육군 방위소집을 만기전역하다.(일병)

1976~1987 중등학교와 연구소(지산학술연구소 선임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이 기간을 보내다. 이 사이에 작품사진 촬영에 전념한 적이 있으며 개인사진전을 3회 열다.

1977년 셋째 딸 혜현 태어나다.(서울대 법대 졸업/현재는 변호사)

1983년 한국 현대철학 제1세대 학자인 허유 하기락(1912~1997) 교수에게 사사하다. 하기락 교수를 중심으로 하여 이종후 교수, 조욱연 교수, 김태양 교수 등과 함께 대구시 수성구 소재 종교문제연구소 등에서 스터디에 참여하면서 하기락 교수가 명예교수로 있는 계명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다.

이때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매년 여름방학이면 하기락 교수를 모시고 하기락 교수의 고향인 경남 함양군 안의면 용추계곡에 들어가 합숙을 하면서 공부에 전념하다.

1984720일 선주문학회(1984.01.20.창립)에 가입하여 선주문학창간호(1985.03.20.)부터 제10(1990.08.20.)까지 참여하여 회원으로 활동하다.

창립 회원 중 여영택, 윤종철 시인은 작고하였고 경북문학상을 수상한 김원호 시인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으며 박태환 시인은 1987913일 제30회 회원 작품 합평회에 참석하여 입회하고 선주문학6(1988.02.10.)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다.

1984111일 구상 시인 추천으로 현대시학추천 완료되다.

                   『현대시학19847월호(통권 184)에 초회 추천되고 같은 해 11월호(통권 188)에 추천 완료되다.

198526일 선주문학회 제10회 회원 작품 합평회 후 김주완의 문단 데뷔 축하연을 가지다.

1985820일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국민윤리교육전공을 졸업하다(교육학 석사).

                            석사학위논문 :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가치윤리학에 관한 연구 - 이마누엘 칸트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직장에 나가면서 다닐 수 있는 야간제 대학원 중에서 그나마 학문성이 있는 데가 교육대학원이었고 철학 영역과 가장 가까운 학문 분야가 윤리였다.)

19861030일 첫시집 구름꽃을 서울 혜진서관에서 발간하다.

19861121일 첫시집 구름꽃출판기념회를 경북 선산군 선산읍의 한 식당에서 가지다.

                     서문을 쓰신 구상 시인, 해설을 쓰신 이하석 시인, 선주문학회장 여영택 시인 외 선주문학 회원들이 참석하다.

1987825일 한국자유시인협회의 문학 심포지엄이 강원도 속초 영랑정에서 열렸는데 여기에 구상 선생이 초청 강연을 하였고 하기락 선생, 이윤수 선생, 김주완이 참석한 후 숙박하였으며 이튿날 구상 선생과 작별한 후 남은 우리 세 사람은 마등령 등정을 하고 장마 후 산사태가 난 계곡을 따라 백담사로 하산하여 절방에서 다시 1박을 하였는데 밤새 비가 내렸다.

1987~1996년 죽순 회원으로 참여하여 작품을 발표하다.

1945년에 죽순시인구락부를 창립하고 이듬해부터 시지 죽순을 발간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경북문협 제8(1972~1973) 회장을 역임한 원로시인 석우 이윤수(石牛 李閏守; 1914-1997) 선생은 나의 문단 스승이신 구상(具常 :1919~2004) 선생과 오랜 친분이 있던 분이라 자연스럽게 인연이 맺어졌다. 또한 나의 철학계 은사인 허유 하기락(虛有 河岐洛:1912-1997) 박사와도 40년 지기의 우정을 이어 온 사이였다. 이런 연유로 나는 이 세 분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었다.

                         내가 석우 이윤수 선생과 허유 하기락 박사를 함께 자주 모신 시기는 1987~1990년이었다. 이 기간에 대구시 봉산동 소재 뉴욕피자호프에서 자주 만났으며 지리산과 설악산 산행을 몇 번 했다. 산행에는 수필가인 효성여대 최정석 교수가 동참하기도 했다. 1987년에 죽순 가입을 한 나는 한동안 열심히 참여하며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나중에는 죽순지에 작품을 제대로 싣지도 못하였으며 석우 선생 만년에는 다소 적조하였다.

1988119일 제2시집 어머니를 대구 도서출판 그루에서 발간하여 선비 탈상전에 바치다.

1988513일 고등학교 후배 박상봉 시인의 알선으로 문화공간 시인초청 <28회 시인과 독자의 만남> 김주완 편에 나가다.(매일신문 512일 제134889<문화단신> 보도/KBS 1 TV 517() 10:20 녹화방영)

198885~87(23/경북 월성군 양북면 대본해수욕장) 후배 박상봉 시인의 배려로 문화공간 시인주최 <여름 시인학교>에 초청되어 시와 철학이란 주제로 특강을 하다.(매일신문 711일 제135399여름시인학교5~7일까지보도)

                          여기서 이하석(‘80년대의 문학적 상황’), 김상환(‘문학이란 무엇인가’) 시인의 특강이 연이어 있었으며 종합토론에서는 서지월 시인이 순수시와 민중시의 본질과 위상에 대한 질문을 함으로써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참가자들의 숙소로 사용한 양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첫날 밤에 열린 캠프파이어에는 문무학 시인이 사회를 맡아서 큰 키와 구수한 입담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다.

                           행사가 끝난 후 나는 박곤걸 시인과 함께 양북초등하교 교장 사택에서 새벽까지 담소하며 숙박하다.

1988820<장옥환 교단 정년 퇴임 기념 특집>(선주문학7)에 시 해설 장옥환의 시 세계 -따뜻한 합자연성의 시학-(200×65) 발표하다.

198891일 대구한의대학교 철학부 전임강사로 임용되다.(2009228일까지)

                         이후 조교수, 부교수, 정년보장 교수로 승진하였고, 1990년부터 보직을 맡기 시작하여 2009228일 명예퇴임 때까지 사무처장, 기획실장, 제한의료원 기획관리실장, 홍보실장, 행정처장, 기획처장, 교무처장, 국학대학장, 교육대학원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하다.

1990725일 논문 H. G. Gadamer의 놀이와 예술작품을 대한철학회 철학연구46집에 발표하다.

1990830일 윤종철 시집 부끄러운 여정에 그 마디를 남기고해설 폐쇄된 현실 공간에 대한 초월로서의 꿈꾸기와 한국적 관능, 그 부드러움의 미학발표하다.(분량 200×72)

1994222계명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다(철학박사/예술철학 전공).

                         박사학위논문 : 존재학적 예술철학에 관한 연구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미학이론을 중심으로-

                         지산학술연구소의 학술지원금으로 박사과정 6학기 등록금 및 교재비를 충당하다.

199431일 저서 미와 예술(크라운판 434)을 서울 형설출판사에서 발간하다.

199481일 논문 시와 언어, -M. 하이데거와 N. 하르트만의 존재론적 해명-을 대한철학회 철학연구53집에 발표하다.(분량 200×194)

1994922일 제3시집 엘리베이터 안의 20를 서울 도서출판한줄기에서 발간하다.

1995117일 대한철학회(1963.11.9. 창립, 창립회장 하기락)를 대구시 교육청의 설립허가를 받아 국내 철학관련 학회 중 최초로 사단법인화하다.

                         같은 해 28일 대구지방법원에 설립 등기를 완료하고 설립당초 임원으로 등재되다.

1995~1997년 대구를 중심으로 하여 현대시학출신의 시인들로 구성된 <자연시동인>에 참여하여 윤태혁, 박곤걸, 하청호, 박정남, 권운지 시인 등과 함께 동인지 제8집에서 제10집까지 발행하고 1998년 이후 동인 활동이 중단되다.

1995~1998년 도장에 나가 검도 수련을 하다. 정년 퇴임 후 검도 도장을 열겠다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몰입하다.

1995105<시와 반시 문예대학>에 초청되어 특강을 하다.(대구교대 강당/주제 시와 철학’)

19961117일 장녀 자현의 결혼식(대구 알리앙스예식장)을 구상 시인의 주례로 거행하다.(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투병생활에 들어가신 구상 선생님은 2004511일 소천하실 때까지 대구 출입을 하지 못하시다.)

199723일 은사인 허유 하기락 박사가 타계하자 나의 주도로 경북대 철학과 연구실과 뉴영남호텔에 추진 사무실을 두고 전국적인 규모의 장례위원회를 구성하다. 장례위원장은 당시 대한철학회장이던 부산대 김위성 교수가 맡고 한명수 박사, 이종후 교수, 구상 시인, 설창수 시인을 고문으로 모시는 체제를 갖추다. 같은 해 2606시 경북대 부속병원 장례식장에서 김도종(현 원광대 총장) 교수의 사회로 대한철학회장으로 거행하다.

                        이 영결식에서 장례위원인 나는 자작 조시 가셔도 가시지 않았으니」 ―허유 하기락 선생님 영전에를 낭독하다.

1997531~61일 통일부 지원 <통일 문제 국제학술대회>(부산대)에서 논문 통일시대의 예술을 발표하고 대한철학회 철학연구60집에 게재하다.(분량 200×183)

1997725<철학자 허유 하기락 선생 학덕비 건립 추진위원회> 발기를 주도하여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함으로써 모금에 들어가다. 성금을 출연한 문인으로는 고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구상 시인, 김춘수 시인 등이 있다.

                          당초 학덕비 건립 장소를 대구시 달서구 소재 두류공원 내 문화예술인 동산으로 예정하였으나 학덕비는 전례가 없다는 사유로 무산되어 지연되다가 5년여가 지난 20026812시 고인의 고향인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공원에서 제막되다.

                           학덕비 전면과 후면의 비문 전체는 고인의 말제자이면서 당시 대한철학회장이던 내가 짓고 영남대 교수를 역임한 고인의 1대 제자 효정 채수한 교수가 비명을 쓰다.

199791일 논문 문인수의 시 간통에 대한 미학적가치론적 고찰을 대한철학회 철학연구62집에 발표하다.(분량 200×210)

199823일 논문 하기락과 자유를 대한철학회 철학연구64(하기락 선생 서거 1주년 기념 특집호)에 발표하다.(분량 200×160)

1998225일 저서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크라운판 466)을 서울 형설출판사에서 발간하다.

200231일 공저 :성과 사랑(신국판 344)을 대구 이문출판사에서 발간하다.

2002518일 대한철학회 제33대 회장을 맡다.(2003.05.31.)(현재는 종신 고문)

20026월 초순 구상문학관 완공이 다가올 즈음하여 구상 시인이 나의 연구실로 전화하여 구상문학관장을 맡을 수 있는가? 김교수를 칠곡군에 추천하려고 하는데라고 의사 타진을 하셨다. 나는 그때 학내에서 대학원장과 교육대학원장을 겸임하고 있었으며 대한철학회장직을 갓 맡은 터여서 그 제의를 수락할 수 없었으며 뿐만 아니라 정년퇴임도 12년 정도 남아 있는 형편이었다.

20021031일 논문 박곤걸 시의 존재론을 새한철학회 철학논총30집에 발표하다.(분량 200×155)

20041215일 카툰에세이집 짧으면서도 긴 사랑 이야기(97)을 도서출판 그루에서 발간하다.

200611일 한국동서철학회 제16대 회장을 맡다.(2006.12.31.) (현재 종신 고문)

20061130일 논문 시의 정신치료적 기능에 대한 철학적 정초를 대한철학회 철학연구100집에 발표하다.(분량 200×127)

                          ‘시 치료에 대한 철학논문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200711일 새한철학회 제24대 회장을 맡다.(2007.12.31.) (현재는 종신 자문위원)

200739일 구상문학관 시창작(평일반)’ 강사를 맡다.(2016.12.31.)

2007810일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지도교수를 맡다.(2009.03.27.~ 2016.12.31.까지는 무보수연중무휴로 강좌를 이끌다.)

                        내가 강좌를 맡은 10년 간 언령은 동인지 11권을 발행하였다. 그동안의 수강생은 연인원 200여 명이며 등단한 시인은 30여 명이다. 이들 중에는 한국문협 시군지부장을 맡은 사람도 더러 있고 시비가 세워진 사람도 3명이 있으며 1~3권의 시집을 발간한 사람이 여러 명이다. 상금이 큰 전국단위 문학상을 1~6회 받은 사람도 상당수 있다.

2008320일 공저 :정신치료의 철학적 지평(신국판 466)을 서울 철학과 현실사에서 발간하다.

2008531일 박춘식 시집 어머니 하느님해설 모성 지향적 기다림의 시학발표하다.(분량 200×87)

200882일 고향 왜관의 낙동강가에 집필실(양수재)을 마련하고 입주하다. 살림집은 대구에 남겨두고 이후 현재까지 왜관과 대구를 내왕하며 살다.

20081025일 한국문인협회 칠곡지부 주관 <2008 구상문학제>에 초청되어 강연하다.(강연 주제: ‘구상시인의 흔적을 찾아서’)

20081129일 운제철학상운영위원장을 맡다.(현재)

2009228일 유력한 자의 강력한 권유(20083월경)를 받고 칠곡군수 출마 준비를 위하여 대구한의대학교 정년보장 교수직을 명예퇴임하다.

                         (이후 다음해 62일까지 칠곡군 왜관읍에서 군수 출마를 위한 여러 가지 활동에 전념하다. 운전 전담 기사 1명과 수행원 1명을 데리고 칠곡군 8개 읍면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다. 덕분에 고향 땅의 지리에 통달한 것이 얻은 것이라면 얻은 것이다.)

2009713일 대구교육대학교 겸임교수로 임용되다.(나의 가까운 후배로서 대구교육대학교 기획처장을 역임한 장윤수 교수가 김주완 선배의 칠곡군수 선거 준비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굳이 초빙하여 임용된 것임)(2015.08.31.)

201033일 칠곡군수 선거 김주완 예비후보자 칠곡군선관위에 예비등록하다.

2010319일 한나라당경북도당에 김주완 후보자 공천 신청하다.

2010325일 칠곡군수 선거 김주완 예비후보자 선거사무실 개소식을 개최하다.

2010416일 칠곡군수 선거 김주완 예비후보자 홍보물을 발송하다.

2010426일 김주완 후보자 한나라당 공천 탈락과 출마 포기 및 반격을 가하다.

                        (불의와 배신과 협잡이 판을 치는 선거판에 회의를 느낀 나는 공천 탈락 이틀 후인 428일 한나라당을 탈당하다. 429일 무소속으로 후보등록을 변경하였다가 57일에 후보직을 최종적으로 자진 사퇴하면서 조건없는 무소속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키다. 마이크를 잡고 치열한 선거전을 치러 무소속 단일 후보가 62 전국동시지방선거 칠곡군수 선거에서 최종 당선되게 만들다. 이리하여 공천받은 집권 여당 후보는 낙선하였으며 공천권자도 차기총선에서 정치생명의 종언을 고하다.)

                        (이후 시작 활동에 전념하며 노년을 보내겠다는 각오로 양수재에 칩거하다.)

201133일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제25대 이사를 맡다.(2015.02.28.)

201261일 계간 철학과 현실2012-여름호(통권 93) 권두시로 졸시 해무를 게재하다.(나의 가까운 후배로서 현재 경북대학교 교학부총장을 맡고 있는 문성학 교수가 나를 격려하기 위하여 철학과현실사에 다리를 놓아 원고청탁을 하게 함으로써 생긴 기회였음.)

20121013<2012 낙강시제 문학페스티벌>에 초청되어 강연하다.(강연주제:‘나의 삶, 나의 시’)

2013627(19:00/구미저축은행 갤러리) 재능시낭송협회 경북지회 지역민과 함께 하는 6월 목요시 낭송회 <김주완 시인의 이야기> 초청 대담하다.

2013826일 제4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를 서울 문학의전당에서 발간하다.

2013105일 이경이 시집 손편지를 쓰는 당나귀해설 생의 현상과 본질에 대한 인식과 통찰의 시발표하다.(분량 200×81)

20141013일 제5시집 그늘의 정체를 서울 시인동네에서 발간하다.

20141215일 김종섭 시집 , 관음전에 들다해설 순수 서정으로 가는 탈속의 시업발표하다.(분량 200×97)

201527일 선거에 의해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경상북도지회 제24대 지회장에 취임하다(장소/김천과학대).(2017.02.28. 임기 만료) (현재는 종신 고문).

      ○ 회계집행을 투명화하다.

      ○ 2015.03.21. 경상북도문학상운영규정을 제정공포하여 운영의 공정성과 투명성 제고하다. 지회장 또는 소수인에 의한 경북문학상 수상자 선정의 농단을 막기 위한 세세한 장치를 하다.

      ○ 2015.03.21. 경북문협인터넷카페운영규정, 편집위원회규정, 심사위원풀운영규정, 경북문협 100인 시화전 운영방식 변경 등을 제정공포, 시행함으로써 경북문협 운영의 혁신을 기하다.

      ○ 2015.06.08. 경북작가상경북작품상 운영규정을 제정공포하다.

               ― 광고 유치, 지회장 자비 출연으로 상금을 마련하여 다음과 같이 시상함.

∙                     2015 1회 경북작가상 4, 1회 경북작품상 4명 시상.

∙                     2016 2회 경북작가상 4, 2회 경북작품상 6명 시상.

      ○ 2015<경북문단 신인상>을 신설하여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인들이 돈을 들이지 않고 등단할 수 있는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하다.

      ○ 중앙 유명 문인 초청 특강을 폐지하고 경북문협 원로의 초청 특강(나의 문학적 일생)으로 대체하다.

      ○ 2016 경상북도 보조금 2건을 본예산에 편입하다.

      ○ 2016.05.14. 경북문협 세미나를 개최(12/영양문협 주관)하다.

      ○ 2016.09.03. 경상북도 예산 지원으로 제1회 문향경북문인 시낭송 올림피아드를 신설개최하여 매년 정규사업이 1종 늘어나게 하다.

      ○ 지회장 출장비 집행을 폐지하다.

      ○ 기관지 연간 경북문단<경북의 뿌리깊은 동인탐방> 특집란을 신설하고 2015~2016년에 두 개의 동인 활동을 집중 소개하다.

2015214일 한국아나키즘학회 2015 정기학술대회(경북대 사회과학대 교수회의실)에서 인간 하기락과 자유를 발표하다.

20151127일 시집 그늘의 정체가 세종도서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되다.

20151223일 김성국 지음,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2017 62회 대한민국학술원상 수상작), 서울:()이학사, 2015.12.23., 891~892(에필로그)에 졸시 해무전문이 인용되다.

2016225칠곡포럼 공동대표를 맡다.(현재)

201647일 제6시집 주역 서문을 읽다를 서울 북인에서 발간하다.

2016730일 경상북도글짓기교과교육연구회 초청 강연하다.(09:30 경상북도립상주도서관/‘예술, 사랑, 시의 치유적 기능’)

2016820<66회 낙강시제> 초청 강연하다.(강연 주제:‘시란 무엇인가?’)

20161129일 영남예술아카데미 초청 강연하다.(강연 주제:‘예술과 사랑’)

20161130일 박찬선 시집 우리도 사람입니다해설 사람을 모시는 신인神人의 시발표하다.(분량 200×89)

201713일 지금까지 10년 간 맡아온 <구상문학관 시창작교실 강의 및 언령 Study 담당교수직>을 이 강좌 출신 시인 중에서 최고의 기량을 갖춘 제2대 김인숙 교수(겸 언령 회장)에게 인계하다.

201724일 임기만료로 경북문협 제24대 회장을 이임하다.(11:00/칠곡 리베라웨딩)

2017530일 서상은 시집 호미곶 별사해설 고절하면서도 장엄한 별사의 시발표하다.(분량 200×95)

20171013일 제18회 경북예술상 대상을 수상하다.(19:00/봉화 청소년센터)

2017129일 제31회 경상북도문학상을 수상하다.(경북문협 송년문학축전/11:00/포항 송도활어회센터 3층 대연회장)

20171220일 제54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하다.(15:00/서울 대한민국예술인센터 3층 파코아트홀 소공연장)

2018214경상북도 문학관등록심의회 위원에 위촉되다.(현재)

2018222일 사단법인 한국예총 경상북도연합회 수석부회장에 선임되다.(현재)

2018428일 청전 서상은 문학비 제막(09:30 대보초등학교 교정) -- 비문을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