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시인이라는 관을 씌워 주신 구상 선생님
김주완
고등학교 1학년부터 시작된 어정쩡한 문청 시절이 흐지부지 끝나고 사회에 진입하면서 시인의 꿈을 접었다. 1980년대 초, 어쩌다가 월간 사진잡지에 사진작품을 몇 년간 연재했다. 편집자의 권유에 따라 사진 옆에 글을 실었다. 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자연스레 시의 형태를 띤 글을 써서 싣게 되었다. 그 중에서 「구름꽃」이란 글이 우연히 구상(1919~2004) 선생님의 눈에 들었던 것 같다. 그 글 중에서 「구름꽃 2」로 1984년 7월호 『현대시학』에 초회 추천을 받았다. 구상 선생님은 추천의 말을 다음과 같이 쓰셨다.
신인의 천거를 저어하는 내가 이번에는 한꺼번에 두 사람이나 내놓는다. 먼저 연작시 「구름꽃」의 金柱完은 젊은 철학도요, 또 국내외 사진공모전에 11회나 입선과 수상을 한 사진작가로서 시의 발표도 이미 허다하다. 보다시피 시에 있어서도 깊은 인식의 주제에다 영상적 수법을 살려 쓰고 있어 앞으로의 기대가 크다. ― 『현대시학』 1984년 7월호(통권 184호) 82쪽.
같은 해 8월, 서울 여의도에 있는 구상 선생님 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관수재 거실에서는 사모님께서 하얀 모시 치마 저고리를 입으시고 붓글씨를 쓰고 계셨다. 구상 선생님께서 나의 고향인 왜관에 거주하실 때는 정작 한 번도 뵐 기회가 없었는데 초회 추천을 받고 나서 서울 자택으로 찾아뵙고서야 나는 비로소 처음으로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구상 선생님은 새로운 시 50편을 차근차근 써서 내년쯤 보내 보라고 하셨다. 말하자면 추천완료를 위한 과제였던 셈이다. 나는 빨리 등단하고 싶은 일념으로 세 달도 되지 않아 대충대충 쓴 시 50편을 우편으로 보냈고 이러한 나의 욕심을 가상하게 보신 구상 선생님은 그 중의 한 편을 골라서 초회 추천 후 넉 달 만인 11월호에 「마이산에서」란 시로 추천완료를 해 주셨다. 등단에 대한 갈증과 나의 조급함을 가엽게 보신 듯한 느낌이 추천사에서 은근히 나타난다. 기대에 미흡하다는 다소의 실망도 배어 있다.
金柱完의 시편들에선 사물이나 事象이나 사리, 즉 존재에 대한 인식력에 기대하는데 그 상념의 치열성, 언어응축 등이 아쉽다. 앞으로 더욱 精魂을 기우려 대기만성의 진면목을 보여 줄 것을 바라고 믿는다. ― 『현대시학』 1984년 11월호(통권 188호) 147쪽.
1986년에는 전봉건 선생님이 알선해 준 혜진서관에서 첫 시집 『구름꽃』을 묶었다. 구상 선생님께서 서문을 써 주셨다.
金柱完님은 나의 천거로 <現代詩學>을 통해 나온 시인이다. 그는 대구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원을 거쳐 나온 철학도다. 그의 전공이 말해주 듯 그는 감성위주로 시를 쓰기보다 사물에 대한 인식의 깊이와 넓이를 시에 담고 있어 감각적 분장만을 일삼는 우리 시단에 이채로운 신인이라 하겠다.
나는 알려지다시피 시를 언어의 유희나 묘기로 보지 않는 사람이고 우리 시가, 아니 현대시가 그 형상성 추구에만 몰입한 나머지 상실한 생명의 全一性이 회복되어야 하고 또한 시의 구경이 구도와 不二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특히 그의 시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 김주완 시집 『구름꽃』, 서울:혜진서관, 1986, 2~3쪽. (具 常, 序. ‘마음 가난한 축복’ 부분)
같은 해 11월 21일 선주문학회에서 열어 준 조출한 출판기념회에는 서문을 써 주신 구상 선생님이 멀리 서울에서 내려와 참석해 주셨다. 해설을 쓴 이하석 시인도 참석했다.
이후 구상 선생님의 소개로 죽순시인구락부의 원로 시인 이윤수 선생님을 만났다. 1987년에서 1990년 사이에 구상 선생님이 대구에 내려오시면, 한국 현대철학 제1세대 철학자이면서 아나키스트인 하기락(虛有 河岐洛:1912~1997) 선생님, 이윤수(石牛 李閏守; 1914-1997) 선생님이 자리를 함께 한 적이 몇 차례 있다. 세 분은 1950년대부터 대구에서 친교를 가지셨던 사이이다. 나는 늘 배석했다.
구상 선생님과 하기락 선생님은 1987년 이때 당시 이미 35년 지기(知己)였다. 1953년 구상 선생이 영남일보사 주필로 취임하고 같은 해 하기락 선생님은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주임교수로 부임하면서 두 분의 교분이 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당시 하기락 선생님은 아나키스트 단체가 중심이 되어 설립(1946. 7. 7)한 독립노농당 경북특위 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었고, 구상 선생은 이승만 정권의 전횡에 대한 저항으로 『민주고발』이라는 사회평론집을 펴내었다. 이후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다가 6년 후인 1959년에 이르러 구상 선생님은 옥고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대구지역에서 같이 활동하면서 다 같이 비판적 입장에 섰던 두 분이 가까워졌던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구상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당신은 아나키스트가 아니었고 아나키즘에 반드시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기락 선생님이 주관하는 아나키즘 모임에 여러 번 참석하였으며, 하기락 선생님의 고향인 경남 함양군 안의면 용추계곡에서 같이 어울려 술추렴도 하였다고 한다. 언젠가 대구 동인호텔 부근에서 두 분이 함께 하신 술좌석에 필자가 배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두 분은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무척 재미있어 하셨다. 구상 선생님은 하기락 선생님을 허유 형이라 호칭하고 하기락 선생님은 구상 선생님의 호인 운성(暈城, 구상 선생의 호는 잘 불려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본명이 常浚이며 常은 필명인데, 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이라 불렀으며, 말씨는 상호간에 편한 높임말을 썼다. 두 분의 이야기 내용은 이러하다. 삼십 수년 전 경남 안의 용추계곡에서 여럿이 어울린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한창 흥이 고조되었을 때 남자끼리만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고 하여 같이 어울릴 여성을 동원해 오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이 일을 해 낼 것인가 이었으며 바로 여기에 선발된 자가 좌중에서 외모가 가장 준수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하기락 선생님과 구상 선생님이었던 모양이다. 두 분은 무거운 임무를 띄고 산 아래로 내려갔는데, 구상 선생님은 소득 없이 돌아왔고 잠시 후 하기락 선생님은 한복을 시원하게 차려입은 여성을 대동하고 점잖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성은 그날 그 자리에 참석 예정으로 있었던 어느 분이었다고 했던 것 같다. 아무튼 40대 전반과 30대 후반의 하기락 선생님과 구상 선생님의 호기는 대단했던 것 같았다.
1987년 7월 25일 강원도 속초 영랑정에서 열린 한국자유시인협회의 문학 심포지엄에서 구상 선생님이 초청 특강을 하셨다. 대구에서 올라간 하기락 선생님, 이윤수 선생님과 함께 나는 이 자리에 참석하였다. 그날 밤 우리는 영랑호반에 있는 콘도에서 잠을 잤다. 멋쟁이 원로시인 이윤수 선생님은 중년의 여류 시인들에게 끌려 나가 밤을 새웠고 하기락 선생님과 나는 T.V를 보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 후에 구상 선생님은 서울로 상경하시고 우리는 마등령 등정을 한 후 백담사에서 다시 1박한 후 대구로 돌아왔다.
1987.07.25.강릉 영랑호반(구상 시인, 김주완)
이 날로부터 한 달로 안 되는 같은 해 8월 21일에서 8월 22일까지 2일간 대구 계명대학교 대명동 캠퍼스 대강당에서 열린 한국아나키스트연맹(Federation of Anarchists in Korea) 제4차 대표자 회의에서 구상 선생님은 초청강연을 하게 되는데, 아마 속초에서의 이 만남에서 하기락 선생님이 초청하고 구상 선생님이 수락하여 이루어진 특강으로 알고 있다.
나는 1994년 2월 계명대학교에서 「존재학적 예술철학에 관한 연구」 -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미학이론을 중심으로 - 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을 쓰면서 나는 <시란 무엇인가?>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철학적 해답을 얻었다. 누가 어떤 이론을 내세워 아무리 현란하게 말하더라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내 나름의 중심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늘 나를 짓눌렀던 의문이 비로소 해결된 것이다. 학위 논문을 갖다 드리러 갔을 때 구상 선생님은 “이제 김 교수는 하나의 틀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사물이나 사상을 보더라도 거기에 갖다 댈 자기만의 척도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전심전력을 다해 시작에 용맹정진하라.”고 당부를 하셨다. 항상 깨끗한 마음을 가지라고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휘호를 써 주시면서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인 옥빛 백자 필통 하나와 파카 만년필 세트를 선물로 주셨다.
나는 1994년 9월 제3시집 『엘리베이터 안의 20초』를 상재하였다. 구상 선생님의 알선으로 자비출판이 아닌 기획출판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했다. 추천사도 구상 선생님께서 써 주셨다.
이 시집 <엘리베이터 안의 20초>의 저자 김주완 님은 1984년 <현대시학>에 나의 추천으로 데뷔한 시인이다. 그는 현재 대학 교수로 있는 철학도로서 시와 철학의 조화와 조율을 지향하고 염원하는 시인이다.
이렇게 말하면 흔히 골치 아픈 시를 쓰고 쓰려는 시인으로 들릴지 모르나 실상 진정한 시인이라면 노상 자기 존재나 당위에 대한 제일의적(第一義的) 물음을 묻지 않고 산다는 것이 오히려 해괴하다고 하겠다.
시집 <악의 꽃>으로 불란서 법정에서 풍속문란죄의 선고까지 받아 데카당스의 비조(鼻祖)로 꼽히는 샤를 보들레르의 그 단상집(斷想集) <벌거숭이의 내 마음>을 보면 그가 얼마나 치열한 존재론적 인식의 추구나 종교적 갈망 속에 살았는가를 역력히 살필 수가 있다. 이것은 비단 보들레르만이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손꼽히는 시편이나 시인들을 살펴보면 그것에는 단순한 감성적 감각적 서정이나 서경이 아닌 높고 깊고 넓은 철학적 종교적 사색이나 사상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20세기의 현절(賢哲)인 하이데거는 현대 자체를 “존재 망각의 밤”이라고 갈파하였는데 이 말은 특히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라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속에서도 홀로 깨어 있어야 할 시인들마저 존재의 본질이나 근원적 물음과 사색에서 비켜 있다는 사실이다. 즉 오늘의 우리 시의 제재나 주제가 거의 일상적 생활의 감각적 경험이나 감성적 표현에 머무르고 있으며, 기껏해야 심회(心懷)나 기존관념의 세계를 맴돌며 오직 그 표상의 분장에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얘기하려는 시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적 인식이라는 것을 그야말로 철학적으로 해석해서 그 인식을 사상적으로 체계화하고 논리화하여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불란서의 항공소설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한 대목, 즉 별에서 내려 온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 가장 친해진 여우와 이별하는 장면인데 여우는 왕자에게 자기가 간직한 가장 소중한 비밀을 가르쳐 주겠다면서 “사물의 본질이라는 것은 우리의 육안(肉眼)으로는 보이지 않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지!”라고 한다.
실제 인간의 삶이란 것은 눈에 보이는 것, 즉 감각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道理)나 사리(事理)처럼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또 지탱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마음의 눈으로 보는 세계를 시에 불러들이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인식에다 정서의 옷을 걸쳐야 한다. T.S. 엘리엇의 말대로 “시는 상상을 장미의 향기처럼 느끼게 하여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김주완 님의 시를 소개한다는 것이 시와 철학의 관계의 해설이 된 느낌이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의 시에 담긴 이러한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인식이 이 시대의 눈먼 삶에 등불이 되고 결국 우리 시의 세계적 보편성을 성취하는 길이 되리라고 확신하면서 그 용맹정진을 축원하고 오직 그러한 철학적 인식이 사변(思辨)이나 요설(饒舌)에 흐르지 않도록 경계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김주완 시집 『엘리베이터 안의 20초』, 서울:(주)도서출판 한줄기, 1994, 1~2쪽. (具 常, 추천의 글. ‘시와 형이상학적 인식’ 전문)
구상 선생님은 대구에 오시면 대개 동인호텔에 숙소를 잡으셨으며 객실에서 인슐린 주사를 손수 놓으셨다. 나의 집사람과 딸아이들을 불러서 함께 식사를 자주 하셨으며 호텔 커피숍이나 칵테일 바에서 기회가 되는대로 나에게 시 창작 강의를 하셨다. 조금이라도 더 물려주시겠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나는 성의를 다해 경청하고 메모하였다. 1996년 11월 17일 큰 딸아이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구상 선생님이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오셔서 주례를 맡아 주셨다. 공항으로 나가 영접하고 모시는 일은 대구대학교의 윤장근(소설가) 교수가 수고해 주셨고 식사 대접과 수행은 나의 후배인 경북대학교 문성학(교학부총장 역임) 교수가 맡았다. 이후 구상 선생님은 투병생활로 대구 출입을 못하셨다.
1997년 2월엔 나의 철학계 은사이신 하기락 선생님이 타계하여 내가 앞장서서 대한철학회장으로 장례를 거행하고 학덕비 건립을 위한 모금을 전국의 철학교수들을 대상으로 하여 전개하였으며 이 성금으로 2002년에 고인의 고향인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공원에 학덕비를 제막하였다. 비문은 내가 썼다. 구상 선생님께서 고문직을 맡아 주셨을 뿐 아니라 성금에 참여하셨다. 뒤이어 원로시인 김춘수 선생님도 성금을 보내 주셨다.
2002년 6월 초순, 고향인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공사 중이었던 구상문학관 완공이 다가올 즈음하여 병석에 계신 구상 선생님이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구상문학관장으로 추천해도 되겠는가?”라고 의사 타진을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때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서 대학원장과 교육대학원장을 겸직하고 있었으며 정년도 아직 10여 년 이상 남아 있었던 터라 수락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죄송한 마음이 크게 남아 있다.
2007년 3월 9일 구상문학관 시창작반 강사를 맡았다. 처음 몇 년은 연간 30~40주(주당 3시간) 정도의 1~2학기 강사료를 받으면서 강의를 했는데 나중에는 정규 강좌가 없어져서 연중무휴 무보수 강의로 2016년 12월 31일까지 계속했다. 구상 선생님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갚는다는 심정으로 수강생의 인원수에 연연하지 않고 학구적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오로지 실력 향상에 매진하였다. 이 강좌를 이끌면서 나도 시 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다. 가르치면서 시를 배웠다. 내 스스로 매주 1편씩, 어떤 때는 몇 편씩의 시를 쓰기도 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시에 대한 이론 정립이 되었다면 이 강좌를 이끌면서 시작에 대한 실천적 감각을 다시 다듬게 된 것이다.
이 강좌의 수강생을 중심으로 하여 2007년 8월 10일에 창립된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의 활동은 참으로 자랑스럽다. ‘언령(言靈)’이라는 명칭은 구상 선생님이 직접 작명하신 이름이다. <시의 언어가 가진 신령한 힘>을 의미하는 말로서 구상 선생님이 평소에 가지셨던 시에 대한 신념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언령>은 구상 시인을 포함한 기성 문인 30명이 모여 전국규모 동인으로 결성이 시도된 적이 있다. 대구에선 내가 유일하게 멤버로 참여하였다. 1988년 10월 29일부터 1989년 3월 15일 사이에 언령 동인 결성이 구체적으로 추진되다가 구상 선생님의 결단으로 취소되었다. 바로 그 명칭 ‘언령’을 구상문학관 출신 시인들이 물려받아 쓰고 있는 것이다.
언령에서 수강한 사람은 연인원 200여 명이며 2019년 현재 연간인 동인지 제14집이 발간된다. 전국 단위의 문학상을 수상한 사람이 여러 명 있으며 개인 시집을 발간한 회원도 여러 명 있다. 문학 전문 잡지와 신문, 방송의 조명도 여러 번 받았다. 무엇보다도 회원들의 작품 수준이 높아 전국 단위로 보아도 상위 수준이라 할 만하다.
2007년부터 시작한 구상문학관 시창작 강좌 및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의 지도는 10년을 채우고 나서 2017년 1월 3일부터는 이 강좌 출신 중에서 가장 우수한 성과를 내고 있는 김인숙 시인에게 넘겨주었다. 현재는 김인숙 시인이 지도교수 겸 회장으로 <언령>을 이끌고 있다. 연중무휴로 운영되고 있는 스터디에 나는 이제 시간 나는 대로 참가한다. 나의 공부를 위해서이다. 참석할 수 있을 때까지 참석할 예정이다. 구상 선생님이 선종하신 이후 많은 사람들이 구상 선생님과의 생전의 친분을 내세우거나 이런저런 연고를 내세워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고자 하는 것을 보면서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간다”는 속담을 자주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언령은 다르다. 구상 선생님의 명성을 팔지 않으면서 묵묵히 구상 선생님을 사숙할 뿐만 아니라 구상 시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언령 김인숙 교수와 회원들이 정말 자랑스럽고 고맙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의 논문 「횔덜린 시의 해명」에서 “시인의 시적 삶은 인간의 시민적 삶에 선행한다.”고 하였다. 선행(先行)은 고독을 수반한다. 혼자이기에 외로운 길이 앞서 가는 길이다. 앞서서 사는 것이 꼭 능사는 아닐지라도 능동적ㆍ주체적 삶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주체적 삶은 종속을 싫어한다. 주체적 삶이 개인적 자유를 신장하고 사회적 해방을 견인한다. 시가 시인을 자유케 한다. 참된 자유와 해방이 시인을 참시인으로 만든다. 참시인은 시로 말하고 시로 남는다. 겸손하고 고결하다.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는 구상문학관이 있고 연중무휴로 공부하는 시동인 언령이 있다. 참시인을 지향하는 성실한 도반(道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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