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43)>
돌밭 가는 길
2007년 7월 19일부터 지난주까지 칠곡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들의 시 작품을 소개해 왔다. 그동안 40여명에 달하는 칠곡 시인들의 시를 어쭙잖은 필치로 시평(詩評) 비슷하게 써온 것이다. 아직도 소개할 시인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그분들의 시적 수준 또한 매우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시작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칠곡의 시인들’ 작품 소개는 이제 쉬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다시 시작할 때까지 필자의 졸시를 당분간 발표하기로 한다.
흙먼지 날리며 타박타박 오르던 언덕길을 다시 간다, 지금은 포장된 도로 옆으로 찔레넝쿨이 없어졌다, 싸하니 코를 뚫고 가슴으로 파고들던 찔레꽃 향기도 없어졌고, 낙동강을 도하한 인민군의 해골이 숨어 있던 도랑의 풀숲도 없어졌다, 이 길 오르면 아홉 덩이 바위가 있어 이름도 돌밭石田인 마을이 있다, 광주 이씨가 우거寓居하여 세거지지世居之地로 삼고 먼저 자리 잡은 벽진이씨와 아랫돌밭 웃돌밭으로 오순도순 살아온 옛 고을이다,
구왜관이 있던 백포산성터는 강 건너에 있고 이쪽에 있는 소읍 왜관의 시가지도 저 아래이다, 벽진이씨, 광주이씨 양반네 선조들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왜인들을 보며 망연했을까, 왜인들이 물러가자 뒤이어 미군들이 널널이 들어오고 기지촌이 자리 잡을 때 그들은 또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수난의 땅, 가운데 자리 잡은 돌밭의 발치로 경부선 열차선로가 놓여 있다, 낙동강 철교를 쿵쿵쿵 건너와 자고산 기차 굴을 빠져 나온 완행열차는 늘 기적을 울리며 풀썩풀썩 허공으로 연기를 쏟아냈다, 워크라인*을 밀고 밀리며 산화한 피아간의 병사들, 차마 떠나지 못한 영혼들이 그때마다 벌떡벌떡 일어나곤 했다,
언덕배기를 지나면 금방 문양文陽할매 대갓집이었다, 집 뒤쪽으론 너른 과수원이 아득히 열려 있었다, 날아갈듯 들어 올려진 부연에 기가 죽으며 들어서는 기와집 안채에는 문양할매가 안방 아랫목에 앉아 있었다, 단아한 한복차림의 눈이 크고 얼굴이 맑은 문양할매는 까치가 파먹다 만 사과를 내와서 깎아주었다, 문양할배의 사랑채에선 간혹 헛기침 소리만 들려왔다,
돌밭 사과가 핏빛으로 익는 이유를 그때 나는 모르고 있었다,
* 워크라인 :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1일 미군의 워크 중장이 설치한 낙동강 방어선
― 졸시, <돌밭 가는 길 3> 전문
돌밭은 왜관읍 석전리의 우리 말 명칭이다. 돌밭이라는 이름은 역설적이다. 척박한 땅을 의미하면서도 실제로는 유서 깊은 명문가들이 일찍이 터 잡은 명당이며 대대로 행신하는 뼈대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한국근현대사의 살아있는 징표인 땅이기도 하다. 왜관 사람이라면 돌밭에 대한 추억이 없을 수 없다. 문양 할매의 대갓집은 아직도 간혹 꿈에 나타나는 유년의 기억이며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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