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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42]회색빛 산토리니로 가는 길-김성호 시인[칠곡]

김주완 2009. 5. 2. 16:00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42)>

 


회색빛 산토리니로 가는 길

 


칠곡군 지천면 신동재에서 열리는 아카시아 축제가 다가오고 있다. 아카시아 꽃의 개화시기와 축제기간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수도 있지만 매년 이맘때가 되면 신동재에서는 아카시아 축제가 열린다. 2009년의 축제는 꽃의 만개 시기와 일치할 것 같다. 도로의 입구는 왜관 쪽과 대구 쪽에서 모두 차단되고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사람들이 넘쳐난다. 꽃과 꿀과 향을 찾는 사람들이다. 갇힌 일상에서 벗어나는 해방과 도취라는 축제의 본래적 의미가 자연 속에서 넘실거린다.


아카시아 꽃은 탐스럽고도 흐드러지게 핀다. 꽃의 색깔로는 노란색과 흰색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옥양목빛 하얀 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주저리로 만개한 아카시아 꽃이 풍만한 전신을 늘어뜨리고 있다. 한마디로 풍요롭다. 아카시아 꽃에는 꿀이 많다. 꽃향기와 꿀향기가 무척 진하다. 아카시아 꽃숲에 들어서면 진한 향기에 누구든 어지럼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여린 바람이라도 지나갈라치면 꽃주저리가 설렁설렁 움직이며 아주 멀리까지 향기를 퍼뜨린다. 누구든 이 향기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신동재는 옛날부터 아카시아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1970년 경부고속국도가 개통되기 이전까지는 왜관과 대구를 잇는 유일한 국도가 이 재를 넘어서 가도록 되어 있었다. 주로 완행버스가 엉금엉금 기어서 넘어 다녔다. 그때나 지금이나 2차선 도로는 마찬가지인데 지금은 경부고속국도 이외에도 4차선 우회도로가 또 하나 뚫려서 신동잿길은 이제 국도라는 지위도 빼앗긴 채 그저 한적한 드라이브 코스로 바뀌고 말았다. 이 길로 아카시아가 터널처럼 이어져 있다. 운치를 찾는 사람들은 고갯마루에 차를 세워두고 산책을 하기도 한다. 포장마차 트럭도 한두 대 세워져 있다. 갖가지 모양의 장승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고갯마루를 지키고 있다. 잠시 쉬어가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마라톤 마니아들의 연습장으로 애용되는 곳이기도 하다. 현대인이 잃어버린 고향의 숲길을 찾기에는 제격인 잿길이다.


낭만적인 신동잿길을 ‘회색빛 산토리니로 가는 길“이라고 규정하는 난설독서회 김성호 시인의 다음 시를 보자.

 


물기 어린 아카시아 나무들이

순하게 일어나 이불을 둘둘 개는

신동재, 구불구불한 산을 돌아

앞만 보고 가다보면 나타나지 않는다. 산토리니

정해진 길에서 탈선하듯 급커브로

한센병 전문 기독의원을 돌아서면

산 계곡을 향해 가파르게 서서 이방인을 맞는다. 바람의 언덕

기대야 하는 사선의 숙명처럼

회검정 지붕이 다른 이의 마당이 되고

골목길 언저리가 되기도 하며

인생의 막장에서 곤두박질하듯

엄숙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곳


회색빛 산토리니, 새 하얀 집 새 파란 지붕

푸른 지중해를 향해 모퉁이마다 피워내는

빨갛고 노란 꽃들은 없어도

옥상에, 좁은 길모퉁이에, 손바닥만 한 앞뜰에까지

축축한 닭똥들을 고추처럼 말리고 있으므로

그곳에 가야한다. 지중해 코발트빛

바다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은 없어도

비강을 향해 날카롭게 달려드는

닭의 역 비린내가 온 계곡을 감돌아 다니므로

가야 한다. 십만 군사의 말발굽처럼,

브로끄벽돌 슬레이트 지붕 아래서 닭들이 우우우

소나기 몰고 오는 소리를 내고 있으므로


아카시아 하얀 바람의 언덕

한글교사가 되어 흰 부추꽃 같은 후안마이를 만나러 간다.

앞만 보고 가다보면 찾지 못하는 길

내가 이방인이 되어 여기에서 너를 만난 것도

네가 기어이 베트남 바다를 건너 마침내 이곳까지 찾아들어

한센병 시부모, 어눌한 남편을 만난 것도

순한 얼굴로 시린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도

‘닭똥 한 포대 2천원이에요.

돈 많이 벌어요. 한 달에 이십만 원

아기 우유 살 수 있어요. 난 괜찮아요.’

괜찮아요. 닭똥 무덤가에도 꽃은 피어요

마당 한 귀퉁이 상추, 고추, 흰 부추꽃,

저 흰 부추꽃...

회색빛 산토리니, 후안마이가 사는 곳

바람의 언덕너머 흰 기저귀 깃발처럼 날리는 그 곳


* 후안마이 : 베트남 여성으로 대구에 시집 온 지 한 달 만에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 본 시와는 상관이 없지만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녀를 잊지 않고자 이름을 빌렸음을 밝힌다.


        ― 김성호, <회색빛 산토리니로 가는 길> 전문

 


시인은 신동잿길을 오르면서 그 길을 무채색인 회색빛으로 본다. 아카시아 꽃숲을 “순하게 일어나 이불을 둘둘 개는” 형상으로 본다. 시의 도입부부터 곤궁한 삶의 순박성을 암시하고 있다. “구불구불한 산을 돌아/앞만 보고 가다보면 나타나지 않는” 아카시아 숲속에 묻혀있는 언덕배기 마을을 산토리니라고 시인은 명명하고 있다. 아마 해외여행에서 본 산토리니의 가옥들과 이 마을의 집들이 유사하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산토리니는 지중해 연안의 화산군도로서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다. 벼랑에 집들이 다닥다닥 지어져 있는 곳이다. 신동잿길 옆으로 아카시아 숲속에 숨어있는 이 마을의 집들도 그렇게 지어져 있다.


“정해진 길에서 탈선하듯 급커브로/한센병 전문 기독병원을 돌아서면/산 계곡을 향해 가파르게 서서 이방인을 맞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한센인의 마을이다. 여기엔 전염되지 않는 음성 한센병 환자들이 정착하고 있다. 어쩌면 일제시대 때 시작된 ‘한센인 격리정책’에 의해 조성된 마을일 수 있다. 이 정책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1964년 2월 8일 폐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착한 한센인들은 그 후에도 그대로 여기에 머물러 살았던 것 같다. 이 마을을 회색빛 산토리니로 보는 시인은 이곳을 “바람의 언덕”이라고 한다. 여기서의 바람은 부정적 의미가 아니다. 아카시아 꽃숲처럼 향기로운 마음을 가진 이곳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언덕이라는 뜻 정도가 “바람의 언덕”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인 것 같다. “회검정 지붕이 다른 이의 마당이 되고/골목길 언저리가 되기도 하며” 닥지닥지 붙어있는 이 마을의 집들을 시인은 “기대야 하는 사선의 숙명처럼” 서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인생의 막장에서 곤두박질하듯/엄숙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본다. 힘든 삶의 강인성과 처절성을 시인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휴머니티의 발로이다.


시인은 이 마을을 산토리니와 극명하게 대비한다. 산토리는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그러나 이 마을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적막한 곳이다. 그래서 시인은 더욱 더 이 마을에 “가야 한다”고 다짐한다. 일종의 소명이다. 시인의 명명에 따르면 이곳은 회색빛 산토리니이다. 산토리니에서 볼 수 있는 “새 하얀 집 새 파란 지붕/푸른 지중해를 향해 모퉁이마다 피워내는/빨갛고 노란 꽃들” 대신에 이곳엔 닭똥들을 말리고 있다. “비강을 향해 날카롭게 달려드는/닭의 역 비린내가 온 계곡을 감돌아 다”닌다. “브로끄벽돌 슬레이트 지붕 아래서 닭들이 우우우/소나기 몰고 오는 소리를 내고” 있다. 이곳 사람들의 생계수단은 양계이다. 집이 서 있는 모습은 산토리니와 비슷하지만 여기에는 핍진한 삶의 피로가 쌓여 있다. 이곳 사람들은 양계를 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바람의 언덕”에는 아카시아 꽃이 하얗게 피어 있다. 화자는 한글교사이다. 베트남에서 이곳으로 국제결혼을 해 온 이주여성 후안마이를 만나러 간다. 물론 여기부터는 시인의 의도가 담긴 시적 구성으로서의 픽션이며 은유이다. 이는 각주에서 확인된다. 후안마이는 “흰 부추꽃” 같은 여인이다. 부추는 가는 몸매의 여린 식물이다. 새하얗게 고개 숙인 부추꽃은 애잔하다. 풍성한 아카시아 꽃과는 그 모습에서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마당 한 귀퉁이”에 흰 부추꽃이 피어 있고 그 옆으로 상추, 고추도 심어져 있다. 흰 부추꽃과 후안마이는 곧 떨어질지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베트남에서 시집 온지 한 달 만에 자살한 후안마이는 흰 부추꽃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이라고 시인은 보고 있다. 화자는 이주 여성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화자와 후안마이의 만남은 닭똥 냄새 속에서 이루어졌다. 화자는 이곳이 생소했다. 따라서 화자가 이방인이 되고 닭똥을 말려 파는 후안마이가 본토인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후안마이는 “베트남 바다를 건너 마침내 이곳까지 찾아들어/한센병 시부모, 어눌한 남편을 만”나 “순한 얼굴로 시린 삶을 살아내고 있는” 여인이다. 먼 이국까지 국제결혼을 하여 건너 왔으면 좀 더 잘 살아도 좋을 텐데 닭똥을 말려 팔면서 산다. 닭똥 판 돈으로 아기 우유를 살 수 있다고 좋아하며 산다. 전율이 느껴질 만큼 경건한 삶이다. 시인은 후안마이의 삶과 의식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삶의 진정성을 숙연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후안마이가 사는 곳”은 “회색빛 산토리니”이다. 또한 그곳은 바로 “바람의 언덕”이다. 거기에는 흰 기저귀가 깃발처럼 날리고 있다. 한센병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어눌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새 생명이 탄생한 것이다. 후안마이가 살아가는 외적 조건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후안마이는 비관하지 않는다. 후안마이의 의식은 긍정적이며 의욕적이다. “닭똥 한 포대 2천원이에요./ 돈 많이 벌어요. 한 달에 이십만 원/아기 우유 살 수 있어요. 난 괜찮아요.” 후안마이는 어눌한 한국말로 자신감을 나타낸다. 시인은 화자의 입을 통해서 “괜찮아요. 닭똥 무덤가에도 꽃은 피어요”라고 후안마이처럼 어눌하게 말한다. 그렇다. 닭똥 무덤가에도 꽃은 핀다. 흰 부추꽃이 피고 상추, 고추도 파랗게 자란다. 그리고 언덕에는 아카시아 꽃이 하얗게 피고 있다. 시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의 진정성과 경건성이다. “저 흰 부추꽃…”과 후안마이를 동일시하면서 시인은 정감 어린 눈길을 보내는 것이다. 여리고 약한 자에게 애정의 눈길을 보내는 자가 시인이다. 삶의 진정성과 경건성을 노래하는 자가 시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