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33)>
못다 비운 마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3절의 말씀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문으로 ‘the poor in spirit’로 번역된다. spirit은 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정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과 마음은 같은 것이 아니다. 정신은 나의 의지로 가난하게 할 수가 없다. 내 바깥에도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정신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한 생(生)보다 더 긴 정신들이 많이 있다. 언어도 정신이고 역사도 정신이며 모든 창작품들도 정신이다. 정신은 인간과 인간을 소통시킨다. 그러나 마음은 한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면서 개인을 개별적으로 만드는 존재이다.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은 같을 수가 없고 나의 마음은 마음 그 자체로서 온전히 너에게 전달될 수 없다. 마음의 전달은 정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말이나 글로 마음을 전달할 때의 말과 글이 바로 정신이다. 마음은 남의 강요로서가 아니라 나의 의지로서만 조절할 수 있다. 한 인간이 스스로 가난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정신이 아니라 마음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심령>은 마음이라고 보면 된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어째서 복이 있는가? 이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한 선결문제는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이라는 곳간이 비어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탐욕, 비겁, 공포, 증오, 자랑, 교만, 허세 같은 것이 들어있지 않음이다. 비어있는 마음의 곳간에서는 동정, 긍휼, 겸손, 온유, 순종이라는 덕목이 발현한다. 마음이 가난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욕심의 굴레를 벗어나게 된다. 고통과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러므로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해진다.
마음이 가난해지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때 묻지 않은 마음이다. 티 없이 맑은 마음이다. 마음이 맑은 자의 눈에는 깨끗한 것만이 보인다. 탁한 눈에는 세상이 탁하게 보이고 맑은 눈에는 세상이 맑게 보인다. 맑은 것은 곧 순결이다. 순결한 마음을 가진 자는 그래서 진실하고 정직하고 솔직하다. 남을 의심할 줄 모른다. 악(惡)을 모른다. 악을 모르면서도 악을 감화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순결의 위대한 예(例)는 성서의 예수이다. 순결은 완전한 신성(神聖)에 접한다. 빈 마음은 숨길 줄을 모른다. 숨길 필요가 없다. 숨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아픔을 받아들일 수 있고 쓰다듬을 수 있다. 비움은 채움보다 위대하다. 비우면 커지고 채우면 작아진다. 외양이 아니라 내면이 그러하다. 비우면 비울수록 내면은 더욱 여유로워지고 넓어진다.
그러나 완전한 비움은 그리 쉽지 않다. 누구든 마음을 다 비우지는 못한다. 비운다고 비워도 어느새 충동과 욕구가 다시 되돌아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가난하게 가지고자 하는 자의 충동과 욕구는 비뚤어지지 않고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보유한다. 중요한 것은 비운 상태를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神)만이 가능한 일이다. 마음을 비우고 나면 다시 욕구가 들어오고 그러면 다시 마음을 비우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다. 욕구가 다시 들어오지 않는다면 다시 비울 일도 없어진다. 욕구가 생기지 않아 빈 마음이 되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며 그것은 가치가 없다. 끊임없이 욕구가 마음으로 들어오고 그때마다 마음이 욕구를 밀어냄으로써 빈 마음으로 되어 가는 것이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낙동문학회 회원이며 새마을운동칠곡군회장을 역임한 이태희 시인은 완전하게 비울 수가 없는 마음의 본질을 다음 시와 같이 형상화 하고 있다.
일생을 살아오면서
느꼈다고 느낀다면
마음의 모든 인연들이
거칠게 부드럽게 근본이 되어
나는 나의 주(主)가 된 일들에게
어떤 모양새로 다가섰는지를
바람소리 새긴 창을 바라봅니다.
그대와 나의 언어(言語)에서
그대와 나의 행(行)에서
괴로움과 아픔을 많이도 겪어 왔다는
수레바퀴의 밑바닥을 생각할 때
지극히도 어리석은 사랑이었습니다.
빗물이 여기 저기 고이듯
고인 물처럼 마음을 빼앗긴
그곳 그 자리에서의 인연들
고통이 오리라는 것도 모른 체
그런 물속에 젖어버렸던 순간들마저
어느덧 더러운 형상을 지닌
그리움으로 달려옵니다.
마음이 무엇이었기에 맑은 물에도 젖지 못했고
더러운 물에도 젖지는 않았는지요
지혜의 빗물에 젖고 싶었지만
너무 힘에 겨웠고
분별력의 빗물에 젖어 봤을 때
인연들이 나를 힘들게 하였기에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실 앞에
못다 비운 마음들뿐입니다.
― 이태희, <못다 비운 마음> 전문
마음은 인과연쇄의 과정 가운데 있다. 하나의 마음이 원인이 되어 다른 마음이 생기고 생긴 그 마음이 또한 원인이 되어 다시 다른 마음이 생긴다. 말 타면 종 두고 싶고 종 두면 벼슬 하고 싶어지는 것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이태희 시인은 “마음의 모든 인연들”이라고 한다. 마음은 고리에서 고리로 이어지면서 확대재생산 되어 마침내 가득 차게 된다. 이것은 삶의 근본이다. 일은 마음에서 연유한다. 마음으로부터 생긴 일들이 나의 전부가 되어 마침내 나를 옭아맨다. 시인은 그것을 “나의 주(主)가 된 일들”이라고 한다. 시인은 이제 그러한 마음과 일들이 “어떤 모양새로 다가섰는지를” 바라본다. 살아온 생에 대한 자기성찰을 시인이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어느 한 순간도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알게 모르게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삶은 이어진다. 무인도에 표류된 단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풀뿌리와 나무열매, 그리고 물고기만 잡아먹고 연명한다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 있다. 그의 몸에 배인 문화와 그의 지식과 사유는 물론, 육지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의 소망이 이미 다른 사람들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것을 “그대와 나의 언어(言語)에서/그대와 나의 행(行)에서” 인과연쇄로 이어져 있는 고리라고 한다. 그 고리가 서로 부딪치고 흔들릴 때마다 “괴로움과 아픔을 많이도 겪어 왔다”고 한다. 그것은 곧 삶의 수레바퀴이다. 수레바퀴의 밑바닥은 수레의 무게를 지탱하면서 흙 속에서 허우적여야 한다. “지극히도 어리석은 사랑”이다. 주고받은 언어에 묶인 사랑, 관계의 그물망이 만든 행(行)의 지층 아래서 부식하는 사랑을 시인은 ‘어리석은’ 것이었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비는 하늘을 비우면서 내린다. 그러나 땅에 내린 빗물은 흙을 씻으며 흘러가기도 하지만 크고 작은 구덩이에 고여서 거기에 머물면서 말라간다. 구덩이는 빗물을 비우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으면서 고갈되는 빗물과의 인연에 연연하고 있다. 고인 물, 고여서 말라가는 물에 연연하는 구덩이는 곧 시인의 마음이다. 시인의 마음은 “그곳 그 자리에서” 고통으로 남아 있다. 그 고통은 곧 그리움이 된다. 그러나 시인은 그 그리움을 “더러운 형상을 지닌”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자기혐오와 자기부정에 빠져든다. 여기서 마음이 가진 이중성이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얽히고설킨 인연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는 마음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워하는 그 마음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또한 생기는 것이다.
“마음이 무엇이었기에” 그러한가를 시인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시인의 마음은 “맑은 물에도 젖지 못했고/더러운 물에도 젖지” 못했다. 시인의 마음은 고결과 혼탁, 어느 한쪽에 전적으로 머물지를 못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다. 시인은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시인이 만약 성직자라면 고결의 쪽에만 머물 것이며 그 반대로 세속인이라면 혼탁의 쪽에 머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못한다. 시인은 양 극단의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하고 혼자 서 있는 외로운 양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설사 힘에 겹다고 하더라도 “지혜의 빗물에 젖고 싶”어 한다. 이와 같이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보고 싶어 하는 자가 시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시인은 평범한 일상인이면서도 일상인을 넘어선다. 일상인은 사물의 본질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도덕규범의 지배를 받으면서 동시에 적당히 그것을 어기면서 별다른 생각 없이 살아가는 자들이 일상인이다. 그러나 시인은 고결과 혼탁 사이에서 고뇌하면서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다. 시인에게 조금의 분별력이 생겼을 때 시인은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보게 된다. 시인을 힘들게 한 인연의 인과연쇄에 끌려서 혹은 그 고리들에 매달려서 현실이라는 바다를 힘들게 건너가는 자가 바로 시인의 초상이다. 시인 자신의 초상이 곧 “못다 비운 마음들뿐”임을 처절하게 스스로 통찰한다. 비우고자 했으나 다 비우지는 못한 마음, 그러면서도 마지막 남은 하나까지 비우고 싶어 하는 마음이 바로 시인의 마음이다. 고뇌와 갈등은 그러므로 시인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다. 시의 거소는 다 비운 마음도 아니고 가득 찬 마음도 아니다. 스스로 비우면서 또한 저절로 채워지는 가운데 다시 또 비우려고 하는 고심 가운데 시는 거주한다. 못다 비운 마음은 곧 시의 원천이다. 양심 하나를 애바쳐 들고 보행하는 시인의 행로가 바로 못다 비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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