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32)>
항아리
항아리는 세계이다. 세계는 일정하게 자리하고 있음이다. 물론 자리하고 있음이 반드시 공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정지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에는 심리나 정신처럼 비공간적인 것도 있다. 심리도 움직이고 정신도 유동한다. 우주에는 각각의 공간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들 운동과 흐름을 가지고 있다. 항아리도 마찬가지이다. 항아리는 정지해 있는 것 같지만 항아리가 앉아 있는 땅은 움직이고 있고 항아리 속 또한 움직이고 있다. 항아리 그 자체도 조금씩 풍화하고 있다. 항아리 속에 들어있는 간장이나 된장은 미세하지만 발효 중에 있고 그 위의 표주박 또한 뜬 채로 움직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아리는 일정하게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자리하고 있는 특정한 자리는 스스로 취한 자리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하여 주어진 자리이다.
세계는 항아리다. 항아리처럼 세계는 일정한 경계를 구분선으로 하여 안과 밖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안은 안대로 밖은 바깥대로 유동하고 있다. 안의 세계와 밖의 세계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질서와 원리이다. 이 원리와 질서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자기의 세계에서는 그 세계를 지배하는 근원이 된다. 이것이 깨어지면 혼란이 온다. 다른 세계로의 변이가 일어난다. 하나의 세계가 끝이 나고 다른 세계가 온다.
항아리는 숨을 쉰다. 표면에 생겨 있는 구멍은 미세하지만 안과 밖이 소통하는 통로이다. 따라서 항아리가 식품의 신선도를 유지하는데 적격인 그릇이듯이 세계와 세계도 서로 소통될 때 유기적 세계가 된다. 폐쇄되고 단절된 세계는 질식하고 고사한다.
항아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초벌구와 재벌구이라는 것이 있다. 초벌구이는 애벌구이 또는 설구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재벌구이는 본구이 또는 참구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람이나 세계가 다듬어지는 데도 이러한 과정은 그대로 적용된다. 과정이나 단계마다에서 흠결이 없어야만 말 그대로의 완성이 이루어진다. 완성은 오류 제로의 총합이다.
항아리에 도공의 손길과 숨결이 스며있듯이 세계에는 세계형성자의 땀과 정성이 서려 있다. 그러나 세계형성자는 세계를 정성 들여 만들기는 하되 만들어진 세계에 연연하지 않는다. 만들어진 세계는 제 나름의 질서와 원리에 의하여 자기의 길을 따라 전진한다. 도공은 완성되어 팔려간 항아리를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 만들어진 항아리는 도공의 관심이나 염려를 떠나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다.
깨어진 항아리는 날카롭다. 파편들은 우수수 무너져 내리지만 저마다 날카로운 칼날을 하나씩 가진다. 구분선이 무너져 내림으로써 두 세계가 하나의 세계로 통일되지만 통일의 밑바닥에는 잠자는 칼날이 감춰져 있다. 바닥이 바닥으로 굳어지기 전에 건드리거나 파헤치면 안 된다. 그대로 두어야 한다. 하나의 세계로서의 새로운 질서와 원리가 형성될 때까지 안정 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항아리 조각이 가진 칼날이 반란을 일으킨다. 피를 본다.
빈 항아리는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로 그 공허는 비어져 있음이 아니라 채워져 있음이다. 공허는 가득 찬 가능성이다. 빈 항아리에는 곡식을 넣을 수도 있고 소금을 넣을 수도 있다. 이미 가득 차 있으면 다른 것을 넣을 수 없다. 비어 있는 곳에만 무언가를 넣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공허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가난과 곤궁도 마찬가지이다.
항아리의 효시는 신석기 시대의 빛살무늬토기라고 한다. 고대인들은 반짝이며 쏟아지는 빛살이 경이로웠을 것이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신비성을 느꼈을 것이다. 손으로는 잡히지 않는 보석이 빛살이다. 빛살은 모아 담을 수 없는 보석이다. 그래서 그들은 토기에 빛살을 심었을 것이다. 용기의 용도성이 예술성으로 승화되는 계기가 이미 고대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항아리는 아래위가 좁고 배가 부른 질그릇이다. 만삭의 여인네의 부풀어 오른 배 같은 모양이다. 청자나 백자는 날씬하고 매끈하여 귀족적이지만 항아리는 둔중하고 투박하여 서민적이다. 전자는 화려하고 후자는 소박하다. 그러나 다시 보면 항아리도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고 있다. 좌우는 대칭이고 상하는 물방울을 아래위로 잘라놓은 형상이다. 안정적이면서도 풍만하다. 받아들인 것을 고이 보존하도록 되어 있다. 한때 항아리치마가 유행한 적이 있다. 둔부를 최대한으로 풍만하게 부각시키는 디자인이다. 생산성이 콘셉트였던 것 같다. 선정적인 항아리치마를 보면서 남자들은 많이도 설렜다. 설렘의 이유는 보존에 대한 갈망에 있었다.
항아리는 기존의 항아리 모양을 해야 한다는 경직적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항아리의 모양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열린 사고로 본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전통적 항아리의 모양은 이미 오래 전에 고정화 되어 버린 것이기에 일정하게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항아리가 물건을 담아 저장하는 데 쓰이는 도구라는 점에서 보면 담아야 할 내용물에 따라서 항아리의 모양은 자꾸 변이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달라져 버리면 항아리라고 부르기가 곤란해질 것이다. 그런 경우 또 다른 이름이 새로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렇게 보았을 때 항아리는 항아리 모양을 해야 한다는 것이 경직적 사고라기보다는 전통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난설독서회 회원인 김석란 시인의 다음 시를 보자.
터 잡고 앉은 지 언제런가
꽃도 피워보고 배도 띄워보고
닿는 손길마다 인정이더니
사랑은 그림자
허물허물 허물어지고
허기져 부른 배를
보듬어 안고
섬 같은 침묵으로 뿌리내린 채
타 오르는 도가지
헛밴 줄도 모르고
실금이 지도록 기다린다
― 김석란, <항아리> 전문
항아리가 터 잡고 앉아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그렇게 앉아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의 항아리는 무심(無心)이고 무아(無我)이다. 항아리가 좌선을 하고 있다. 스스로 항아리인줄도 모르고 앉아 있는 항아리에게 사람들이 사랑을 쏟아 붓는다. 항아리 속에 “꽃도 피워보고 배도 띄워보”면서 인정 어린 손길로 항아리를 다룬다. 꽃은 간장에 피는 곰팡이를 의미하고 배는 간장에 띄워놓은 표주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항아리가 세계를 은유한다면 꽃과 배가 은유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으로 넘겨진다. 아무튼 간장독에 정성을 쏟으면서 건사하는 아련한 어머니의 사랑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그림자”라고 시인은 규정한다. “허물허물 허물어지”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간장독에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어도 독 속의 간장은 조금씩 줄어들고 마침내 빈 독이 되고 마는 법이다. 속이 비어도 항아리의 배는 부른 채로 있다. 이러한 모양을 시인은 “허기져 부른 배”라고 한다. 오래 굶주려 부황이 든 배는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속이 비었음에도 불구하고 배는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살가죽의 실핏줄이 아늘아늘하게 비치도록 부풀어 오른다.
“허기져 부른 배를/보듬어 안고/섬 같은 침묵으로 뿌리내린 채” 도가지가 타오른다. 도가지는 큰 독을 의미하는 경상도 사투리이다. 큰 독이 속이 빈 채로 앉아있는 형상을 시인은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도가지는 왜 섬같이 외롭게 침묵하면서 타오르고 있을까? 다시 그의 속이 무엇인가로 가득 차기를 기다리는 열망이 뜨거워서일 것이다. 무심하게 오랜 세월을 기다려온 도가지를 시인의 눈으로 보게 되면 뜨겁게 소망하는 도가지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기나긴 기다림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기다림은 무상하다. 설사 다시 채워진다고 하더라도 또 다시 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순환 속에 있는 기다림은 항상이 아닌 무상만이 그의 것이다.
덧없는 기다림으로 터 잡고 앉아 있는 도가지를 시인의 시선은 애처롭게 바라본다. 도가지는 “헛밴 줄도 모르고/실금이 지도록 기다린다.” 헛된 것도 모를 땐 헛것이 아니다. 모르는 것이 삶이다. 그러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미래는 미지(未知)의 것이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다림은 미지 위에서 성립한다. 그것을 통찰하는 시인의 혜안은 무상한 기다림을 측은해 한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仁)의 단초라고 맹자가 설파했다. 인은 사람의 근본이다.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시인은 무심한 항아리를 보면서도 측은해 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사람 중에서도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다.
'시 · 시 해설 > 시 해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34] 봄이 오는 기척-한희구 시인[칠곡인터넷뉴스] (0) | 2009.03.07 |
---|---|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33] 못다 비운 마음-이태희 시인[칠곡인터넷뉴스] (0) | 2009.02.28 |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31] 응아 소리-배성도 시인[칠곡인터넷뉴스] (0) | 2009.02.14 |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30] 야간열차-권정숙 시인[칠곡인터넷뉴스] (0) | 2009.02.07 |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9] 감기-김현숙 시인[칠곡인터넷뉴스] (0) | 2009.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