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8)>
고향집
설 연휴가 시작되었다. 귀성차량이 도로를 메우고 있다. 고향으로 가는 발길들이다. 매년 겪는 일이지만 귀성전쟁이라는 말조차 무색할 만큼 교통이 정체된다. 고속국도는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물론 KTX가 개통되고 고속도로망이 확충되면서 도로의 마비가 이전보다는 많이 완화되었지만 아직도 예측불허의 체증들이 여러 구간에서 발생한다. 교통정보를 활용하여 우회도로로 바꿔 타 보지만 귀성시간은 줄어들지 않는다. 명절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시인들의 필사적인 모습이 이러하다.
어째서 명절만 되면 이러한 귀성전쟁이 일어나는가? 고향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이와 같이 한꺼번에 몰려 나와 기를 쓰고 고향으로 돌아가는가? 서양인들이 본다면 어쩌면 불가사의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아무도 귀성전쟁을 의아하게 보지를 않는다. 고향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와 같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전쟁을 하듯이 고향으로 달려가는 것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고향집이 있기 때문이다. 뿌리에 대한 의식이 한국인의 심성 속에는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명절맞이의 감정 속에는 고향과 부모와 조상이 일체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향집은 단순히 건물로서의 집만이 아니다. 부모님도 집이고 친척도 집이고 조상들의 묘소도 집이다. 뛰어놀던 골목길도 집이고 멱을 감던 개울도 집이다. 고향집이라고 했을 때의 집은 유년의 기억이 존재하는 처소이다. 고향집과 고향은 결과적으로 같은 말이다. 고향은 우리들 의식의 뿌리로서 귀소성의 지향처이다. 자주 가지 못하더라도, 설사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더라도 고향집은 늘 거기에 있다.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삶이 각박할수록 고향에 대한 향수는 더욱 깊어진다. 명절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가야 할 고향이 없는 사람이나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심한 소외감과 고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고향집은 모성의 거소이며 든든한 대지이기 때문이다. 대지가 없는 자, 대지를 잃은 자의 마음은 정처 없이 떠도는 바람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향은 쇠락하고 유기되어 있다. 농촌이 황폐화 되어가고 있다. 농촌인구는 감소되고 묵은 전답은 늘어나고 있다. 그럴수록 향수는 더욱 애틋해진다.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상승하는 것이다. 낙동문학회 장영희 시인은 고향의 이러한 풍경을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고향집을 찾은 지 32개월 만이다.
담장에 혼자 익은 노란 탱자
찬바람에 맞서 알갱이가 터질 듯 잘 익은 구기자
주인 잃은 화분에서 피어난 패랭이꽃
언덕을 오르듯 집에 들어서니 말끔한 시멘트 마당이 보인다.
불편한 어머니의 휠체어가 잘 다니기 위함이었다.
낮은 헛간 지붕 위 엄마 닮은 무말랭이
뒤뜰에는 키 큰 도깨비바늘이 까마중과 엉켜 있다.
까마중 하나 꼭 깨무니 온 몸에 멍이 번진다.
안방 잠긴 문을 열면 온기가 훅하니 불어나올 것 같지만
애써 외면한다.
눈물이 쏟아져 나올까봐 겁이 난다.
어릴 적 겨울 밤
다락에서 꺼내온 홍시의 설렘이 생각나
창고 뒤 작은 문틈을 들여다보니 휠체어가 눈에 띈다.
누군가가 밀어주지 않으면
아무데도 갈 수 없는 굳어버린 휠체어
내 마음은 탈색된 단풍나무가 되어 오그라들었다.
잘 살아야 한다. 행복해야 한다.
중얼거리듯 내 귀를 스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바람이 전해주는 어머니의 숨결이다.
― 장영희, <고향집> 전문
화자는 32개월 만에 고향집을 찾아간다. 여기서의 귀성은 물론 명절 때가 아니다. 그러나 그 절심함은 다르지 않다. 햇수로 2년 반이 넘도록 화자는 고향을 찾지 못했다. 결혼생활과 육아 혹은 직장생활에 쫓겨서 귀향할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만은 늘 고향을 향해 있었을 것이다.
화자는 고향집의 정경을 카메라로 훑듯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시에서 드러나는 계절은 늦가을쯤으로 보인다. 탱자나무 울타리에는 노란 탱자가 달려 있다. 그러나 그 탱자는 “혼자 익은” 탱자이다. 돌보아주는 자 없이 저절로 외로이 익었다는 말이다. “혼자”라는 바로 이 시적 진술이 고향집의 처지를 암시하고 있다. 푸르렀던 탱자가 노랗게 익듯이, 꿈같은 고향집은 어쩌면 이제 쇠락하고 있을 수 있다. 화자는 회상에 젖어든다. 고향집을 지키는 어머니는 노쇠하여 거동조차 불편하였다. 어머니의 휠체어가 다니기 편하게 마당은 시멘트로 덮여졌었다. 고향집 본래의 흙마당이 사라질 만큼 세월은 흐르고 상황은 변해버렸다. 마당가에는 “주인 잃은 화분에서 피어난 패랭이꽃”이 놓여 있다. 본래 심어져 있었던 꽃은 사라지고 패랭이꽃이 저절로 피어난 것이다. 여기서 “주인 잃은 화분”이 은유하는 것 또한 고향집으로 보인다. 화분으로 비유된 고향집을 돌볼 사람, 그러니까 어머니가 지금은 살아있지 않다. 자녀들이 모두 도회로 떠나가 버리고 몸이 불편하면서도 혼자서 고향집을 지켰던 어머니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고향집을 지킬 사람이 없다.
“낡은 헛간 지붕 위”에는 무말랭이를 널어놓았는데 말라가는 형국이 생전의 늙은 어머니의 모습과 꼭 같다. 여기서 ‘낡은 헛간’은 돌보지 않는 고향집의 은유이며 지붕은 세월로 읽혀진다. 무말랭이는 늙은 어머니의 몸처럼 꼬들꼬들 말라간다. 가꾸지 않은 “뒤뜰에는 키 큰 도깨비바늘이 까마중과 엉켜 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황폐해진 뒤뜰의 모습이다. 도깨비바늘은 집요하게 옷에 달라붙는다. 풀숲을 지나간 증거로 남는다. 까마중은 까맣게 익은 열매가 중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검은 열매가 용의 눈알 같다 하여 용안초라고도 한다. 한국 원산으로 식용도 하고 약용도 한다. 지금의 장년 세대가 어린 시절이었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간식거리가 귀했다. 아니 양식이 귀해서 늘 배가 고팠다. 그 시대의 어린 아이들은 까맣게 익은 까마중 열매를 따서 한입씩 틀어넣고 우물우물 씹어 먹었다. 화자는 “까마중 하나 꼭 깨무니 온 몸에 멍이 번진다”고 한다. 배고팠던 유년의 어두운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말이다. 안방 잠긴 문을 열고 싶지만 외면한다. “문을 열면 온기가 훅하니 불어나올 것 같”아서라고 한다. 온기는 어머니의 기운이다. 병석에 누워있던 어머니의 입김일 수도 있고 자식들에 대한 염려로 평생을 살았던 어머니의 배려일 수도 있다. 그런데 안방의 문은 왜 밖으로 잠겨 있을까? 방을 지키던 안방 주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제 더 이상 안방이 안방으로 쓰이지 않는 것 같다. 화자는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쩌면 어머니에 대한 추모와 애도의 정인 것 같다. 고향집의 이러한 풍경은 정겹기보다 오히려 쓸쓸하고 허전하다.
화자는 문득 유년의 겨울밤을 떠올린다. 긴 겨울밤이 이슥하면 속이 출출해진다. 그때 다락에서 홍시를 꺼내와 먹었다. 홍시는 서늘하면서도 달콤하게 감칠맛이 났다. 볏짚을 깔고 층층이 쌓아둔 홍시이지만 겨우내 먹기 위해선 아껴가면서 먹어야만 했다. 그래서 홍시를 꺼내올 때면 늘 마음이 설레곤 했다. 화자는 그때의 홍시를 생각하며 “창고 뒤 작은 문틈을 들여다” 본다. 방치된 사물로서의 휠체어가 눈에 띈다. “누군가가 밀어주지 않으면/아무데도 갈 수 없는 굳어버린 휠체어”가 거기 있다. 휠체어를 타던 사람은 밀어주지 않아도 떠났는데 굳어버린 휠체어만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남겨져 있다. 잘 다니라고 마당을 시멘트로 포장해 놓았지만 지금은 그 휠체어가 더 이상의 쓰임새를 잃어버리고 창고 속에 들어가 있다. 아무도 이제 휠체어를 밀어주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화자의 “마음은 탈색된 단풍나무가 되어” 오그라든다. 단풍나무는 곱고 아름다운 잎을 다는 나무이지만 지금은 그 색깔을 잃어버린 나무가 되어 있다. 탈색된 것은 유년에 가졌던 꿈이며 환상이다. 화자가 겪고 느끼는 것은 무상한 세월이고 쓸쓸한 현실이다. 어머니에 대한 회상에 젖어있는 화자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 “잘 살아야 한다./행복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이 화자의 귓전을 스친다. 간곡하게 당부하던 어머니의 말이며 염원이다. 이 말은 화자의 어머니가 화자에게 했던 말이고 이미 어머니가 되어 있는 화자 또한 그 자식에게 해줘야 할 말이다. 행복은 부모의 소망이면서 동시에 자식들의 의무이다.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하는 것은 부모의 바램을 이루어주기 위한 자식들의 지상과제인 것이다. 화자의 귓전을 스치며 들려오는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은 “바람이 전해주는 어머니의 숨결이다.”
고향집엔 어머니의 숨결이 머물러 있다. 어머니의 염원, 어머니의 소망이 깃들어 있다. 오로지 자식들의 행복만을 염원하는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고향집 곳곳에 묻어 있다. 그래서 고향은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고향이다. 언제나 우리를 염려해 주고 아무 때나 우리를 감싸주는 곳, 헐벗은 마음이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고향이다. 거기서 우리는 비로소 잃어버린 맨 처음의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다. 고향이 거기에 있다.
우리는 거기로 간다. ‘거기’는 현실적ㆍ지리적 고향일수도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우리들 마음속이다. 고향은 궁극적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고향을 찾아서 우리는 꿈에서도 가고 현실에서도 간다. 고향이 우리를 부르고 우리를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고향이 부르는 소리가 가장 크고 절절한 때가 바로 명절이다. 그리하여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고향으로 간다. 전쟁을 치르듯이 고향으로 간다. 가지 않고는 못 배길 길이기에 거기로 간다.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든 길을 명절에 나선다. 다름 아닌 고향집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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