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10)>
왜관역전 시화전
왜관역전 시화전이 열리고 있다.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회원들이 왜관역을 주제로 한 기획시화전을 2008년 9월 10일부터 30일까지 개최하고 있는 것이다. 왜관역 광장과 소공원에는 지금 깃발처럼 시화가 펄럭이고 있다. 소공원 입구에는 구상 시인의 시비 ‘꽃자리’가 세워져 있고 그 주변으로 ‘언령’ 회원들의 시들이 걸려 있다. 시화의 반쯤은 시제가 왜관역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다.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회원들의 배려라고 생각된다. 특히 추석(9월 14일)을 전후하여 늘어날 귀성객들과 귀경객들에게 왜관역에 대한 향수를 풍성하게 담아 보내기 위한 시도가 돋보인다.
역전 시화전은 그리 흔한 행사가 아니다. 대부분의 시화전은 특정한 공간 안에 작품이 걸린다. 물론 야외 시화전도 더러 시도되기는 하지만 숲이나 거리 등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대도시의 기차역에서 몇 번의 시화전이 이미 열리기는 했었다. 그러나 왜관역전에서 열리는 시화전은 왜관역이 생긴 이래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의의가 크다. 아마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에서는 앞으로 매년 역전 시화전을 계속해서 이어 가리라고 예상된다. 연륜이 쌓이고 횟수가 거듭될수록 시화전이 더욱 내실을 더해 갈 것은 자명하다.
칠곡 사람들에게 왜관역은 그리움과 설레임, 기다림과 떠나보냄의 가슴 저린 일들이 스며있는 곳이다. 이번 시화전의 시들에서도 이러한 정서들이 드러나고 있다.
경부선 하행 열차는 낙동강 철교를 건너서 자고산 터널을 빠져나온 후 왜관역 플랫폼으로 진입한다. 종착역인 부산을 향해서 먼 길을 질주해 가는 도중에 왜관역이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달려가는 기차가 왜관역쯤에 이르면 사랑하는 대상은 새파란 미나리밭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눈물겹게 유순한 사랑의 종점은 종점이 아니라 소멸점이 된다. 떠나온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 기차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기차는 레일 위를 달리고,
쿵쾅쿵쾅 철교를 건너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내 사랑은
종착역인 그대를 향하여 질주한다
그대 가슴엔 새파란 미나리밭이 있다
미나리 여린 새순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다
눈물겹게 유순한 그대에게 다다라도
나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되돌아 나와야 한다
길게 이어진 그리움을 밟으며
쉼 없이 선로 위를 미끄러져야 하는 나는
세상이 단호하게 쳐낸 야구공이다
고무줄에 묶여 이탈이 불가능한 물풍선이다.
― 지도교수 김주완, <기차> 전문
쉼 없이 선로 위를 미끄러져야 하는 기차는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인들이다. 생활 속에 묶여있는 소시민들은 삶에 묶여 있으면서도 세상의 중심으로부터 튕겨져 나와 주변인으로 소외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시민의 삶은 끈질기고 저력이 있다. 인생은 레일이고 소시민은 기차이다. 소시민은 날아가는 야구공이고 고무줄에 묶인 물풍선이다.
기차는 실 같은 레일 위에 얹혀 있다. 실타래에서 실꾸리로 풀리면서 감기는 방향이동과 위치이동의 과정 중에 있는 운동이다. 운동의 축은 기차역이다. 반복성을 본질로 하는 운동은 단조롭다. 기차역은 답답해서 먼 산을 본다.
나는 그동안 답답해서 먼 산을 보았다
어머니는 내 양손에다가 실타래의 한 쪽씩을 걸고
그걸 또 당신 쪽으로 마저 다 감았을 때
나는 연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밤 깊어 더 낯선 객지에서 젖는 내 여윈 몸이 보인다
길게 풀리면서 감기는 빗소리
― 초대시인 문인수, <실> 전문
레일 끝에 매달린 기차는 연이 되고 싶다. 한없이 가벼워진 몸으로 창공을 날아오르고 싶다. 그러나 실타래의 실처럼 풀리면서 땅으로 잦아드는 객지의 밤비 소리를 들으며 깜깜하게 젖는 삶이 무거운 사람이 있다. 지치고 수척한 그의 몸이 밤비에 젖은 기차에 오버랩 된다.
앞서 달리는 기차에 탄 사람과 뒤떨어져 달리는 기차에 탄 사람은 맺어질 수 없다. 그가 남기고 간 흔적을 뒤쫓아 가면서도 둘은 영원히 서로 다른 둘로 남을 뿐이다.
팔을 걷어붙였다
매끈한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누가 훔쳐갔을까
땅에서
아니, 뜨겁게 달아오른 몸에서
손가락이 없어졌다
어려운 말도 쉽게 받아쓰던 손가락이 없어졌다
흔적도 없이, 어떻게 된 것일까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도둑맞은 손가락 찾으려 하지 않았다
손가락 없는 손에서 향기가 났다
놓친 사랑에 병이 났다
― 초대시인 권숙월, <상사화> 전문
사랑이 오고 가는 정교한 플러그가 손가락이다. 서로 깍지 낀 손가락은 둘을 하나로 만든다. 어려운 말도 사랑의 플러그인 손가락을 통해서는 쉽게 전달된다. 그러나 맺어지지 않는 사랑은 궁금하지 않아야 한다. 앞서 달려가는 기차가 도둑질해 간 사람은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내 손에 남은 그 사람의 체취는 향기롭다. 그 향기에 취하며 상사화처럼 뒤따라가는 기차에 탄 사람은 결국은 병이 나고 만다. 기차라는 세계 속에 갇힌 실존은 교체될 수 없는 다른 세계를 꿈꾸면서 병이 난다.
어떤 기차는 함박눈 내리는 호수 너머 자작나무 숲을 지나왔을 것이다. 기차에는 자작나무 숲에 머물던 옛사랑의 그림자 하나쯤 묻어 있을 수가 있다.
숲속길 가다보면 문득
눈부신 은색
반짝이는 잎새들 몸 부비는 소리,
황홀한 자작나무의 군무群舞와 만난다
느닷없이 잊고 지냈던 삽화 같은
그림 한 폭이 떠오르고
호수엔 하나 가득 설레임이 고인다
함박눈 흩날리는 바탕화면 속
순백의 풍성한 안개 옷을 입고
호수의 저쪽에서
우아하게 춤추던 한 무리의 백조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물비늘 가르며 잔잔히 건너오고 있다
깨어나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꿈
이룰 수 없었던 사랑
조금은 아쉬움이 묻어 있는
은은한 옛 사랑의 그림자 하나 떠올리면
나는 금세 젖어 들어
날 저물도록 발길 옮기지 못한다.
― 회장 박현주, <자작나무 숲에서> 전문
승객은 꿈꾼다. 눈부신 은빛의 자작나무 숲을 걸어가는 꿈을 꾼다. 그것은 회상이며 동경이며 회한이다. 숲속엔 호수가 있다. 호수엔 설레임이 가득 고여 있다. 첫사랑의 설레임이다. 객실 좌석에 앉은 승객의 눈앞엔 컴퓨터 모니터 바탕화면이 떠오른다. 함박눈 흩날리는 호수에서 한 무리의 백조들이 안개 속의 물비늘을 가르며 건너오고 있다. 꿈같은 정경이다. 그것은 사춘기부터 승객의 가슴에 간직하여 온 사랑의 풍경이다. 그러나 이룰 수 없었던 옛 사랑의 그림자를 승객은 문득 떠올리게 된다. 날은 저무는데 회한에 젖은 승객은 발길 한번 옮기지 못하고 달리는 기차 안에 붙들려 있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온 기차의 객실 안은 어느새 자작나무 숲으로 바꾸어지고 있다.
육중한 기차가 레일 위를 굴러가지만 엄청난 체중을 지탱해야 하는 바퀴에는 가시가 박혀도 더욱 깊게 박히게 된다. 탈선하지 말고 똑바로 가라고 만든 길이 레일이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가라고 만들어 놓은 길이 레일이다. 그러므로 레일은 꽃길이다. 그러나 그 꽃길이 돌맹이처럼 발을 찔러 생가시로 박히는 마음 여린 노시인이 있다. “저기 저쯤 가면 끝나는 길”임을 아는 노시인은 허망하다. 그의 일생이 “돌밭 가는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가는 사람이
나를 위해 꽃길 만든다고
뿌린 꽃송이들이, 돌멩이 되어
내 발에 생가시로 박힌다
(중략)
저기 저쯤 가면 끝나는 길
― 고문 박춘식, <돌밭 가는 길> 부분
<언령> 동인들의 시화가 펄럭이고 있는 왜관역 광장 북편 소공원에는 구상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새겨진 시편 <꽃자리>는 “앉은 자리가 꽃자리이니라”로 시작된다. 왜관역 광장이 바로 꽃자리이다. 자리 중에서는 가장 부드럽고 아름다운 일품의 꽃자리이다.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반갑고 고맙고 기쁠” 수밖에 없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는 말은 구상 시인의 스승격인 공초 오상순 시인이 생전에 자주 쓰던 말이다. 이 시비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구상문학관이 있다. 구상 시인은 강을 좋아하셨다. 물을 보는 일은 마음을 보는 일이라고 하셨다.
구상문학관에는
한 토막 잘라다 놓은
작은 낙동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중략)
햇살 따슨 오후
뭉개구름 몇 덩이 물속으로 내려앉으면
구상 시인은
작약과 벌개미취 가득한
물가 화단으로
조용히 산보 나옵니다
― 고문 여환숙, <구상문학관에는> 부분
구상문학관장을 지냈으며 <언령> 초대회장을 역임한 여환숙 시인은 위의 시와 같이 구상 시인을 그리워하며 추모하고 있다. 여환숙 시인은 구상문학관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구상 시인의 시세계에 심취하여 시 공부를 시작하였고 나아가 등단한 여류시인이다.
기차가 지나가는 가을날의 왜관역에는 솔바람 소리가 난다. 심산유곡의 낙락장송은 아니지만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황홀감으로 떠는 소나무의 맑디맑은 신음소리이다. 실낱같은 눈썹달이 부끄러워하며 구름 사이로 몸을 숨기는 가을 하늘, 그 아래로 흐르는 솔바람 소리는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가는 길손과 흡사하다.
구름에 가려진 눈썹달이
실낱 같고
볕에서도 가을이 흐르듯
다정한 길손 같이
솔바람 소리가 옵니다
― 나동훈, <솔바람 소리> 부분
왜관역에는 기다림이 있다. 벽시계 가녀린 분침이 레일처럼 들어붙어 움직이지 않는데 기다리는 사람은 길게 목을 뺀 채로 선로만 바라보고 있을 수가 있다.
벽시계 무거운 분침이 반 바퀴나 돌고
늦게야 들어오는 기차의 허리
할미꽃 같이 휘어져 꼬리가 길다
― 이연주, <왜관역> 부분
기다리는 시간은 길다. 긴 건 기차이면서 또한 기다림이다. 역에서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열차가 지연이라도 되는 경우에는 지겹다 못해 저절로 주리가 틀린다. 파김치처럼 지칠 대로 지칠 때쯤 되어 기차가 들어오면 제 속도로 오는 기차라고 하더라도 느리게만 보인다. 상행선 기차가 왜관역 구내로 들어올 때는 왜관중학교 앞쯤에서부터 휘어져 들어온다. 그때의 정경을 이연주 시인은 “할미꽃같이 휘어져 꼬리가 길다”고 표현한다.
왜관역 광장에는 이팝나무들이 서 있다. 실제로 서 있을 수도 있지만 설사 서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시인의 눈에는 이팝나무들이 보인다. 이팝나무는 꽃이 이밥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마 굶주리던 시대에 지어진 이름인 것 같다.
이팝꽃 향내음 홀라당
오늘 하루를 부대끼며 몸부림으로 북적거리던
까칠한 노동, 왜관역 등짝을 토닥거린다
(중략)
버림받은 아픔이 아물 때
두고 온 내력을 그리워하면서
대합실 문지방을 힐끔힐끔
뒤꿈치 툭툭 치던 개 한 마리
하이얀 하늘 쪽으로 서럽게 울고 있다
― 배성도, <왜관역 마당에 가면 아픔을 절고 있는 개 한 마리 울고 있다> 부분
하루의 까칠한 노동을 끝낸 자들이 기차를 타고 돌아온다. 그들은 그래도 정겨운 왜관역의 등짝을 토닥거린다. 왜관역에는 이팝꽃이 자욱하니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 버림 받은 한 마리 개는 하늘을 바라보며 서럽게 운다. 여기서 개가 가리키는 메타포는 무엇일까?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건너가는 문명사적 전환기에서 기술문명에 짓눌려 종속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이다. 그러니까 주체성이 아닌 종속성이 바로 개의 메타포이다.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구한다. 얻기 위해선 나서야 한다. 따라서 갇힌 자는 뻗어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김명희 시인은 궁핍한 시대의 소시민을 나팔꽃으로 은유하고 있다. 시인의 따뜻한 심성 탓이고 희망을 잃지 않는 시선 탓이다.
덧없음을 알까
햇살에 타는 갈증 허덕인다
뻗어 나가고 싶은 목마름
초록 줄기 뒤늦게 철 들었나
밤새 봉우리 다듬어 꽃망울 터트린다
― 김명희, <나팔꽃> 부분
실존적 삶의 현장은 어둠이 아스라하게 깔린 안개바다이다. 야간열차의 전조등 긴 불빛은 어둠을 헤치며 앞으로 나간다. 밤의 안개나 어둠이 객차 안의 승객에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행로는 미지의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나가고 있다. 시인의 휴머니즘은 레일 위를 가로지르는 고비사막의 모래바람을 염려한다. 졸음에 겨워 정적이 흐르는 객석에 측은한 눈길을 보낸다.
어둠을 헤치며 달리는 성난 파도처럼
아스라한 안개바다
내일을 향해 기차는 달리고
저 멀리 고비사막의 모래바람이
만날 수 없는 평행선 위를 가로지르는
졸음에 겨워 휑한 객석
― 권정숙, <야간열차> 부분
하행선 기차가 왜관역으로 들어올 때나 상행선 기차가 왜관역을 지나쳐 나갈 때 스쳐 지나는 곳이 돌밭이다. 돌밭은 유서 깊은 고을이면서 한국전쟁의 역사를 증거하는 곳이다.
골골이 펼쳐진 돌밭은
오래된 서적의 책갈피처럼
검고 어두운 천으로
처절한 기억들을 덮어 감추고 있다
― 전재욱(구상문학관 시창작 교실), <돌밭> 부분
한국전쟁의 격전지였던 이 곳 돌밭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처절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 58년이 지나고 그러한 기억들은 덮여지고 있다. “오래된 서적의 책갈피처럼/검고 어두운 천” 너머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기차는 지나가며 장막 저편의 기억들을 다만 흔들어 놓을 뿐이다.
참담한 전쟁의 상흔 위에서 재건된 곳이지만 칠곡엔 암담하거나 우울한 기색이 흐르지 않는다. “물에서 태어나/물에서 살아도/길게 고개를 내밀고/연잎은 물에 젖지 않는다.”
물에서 태어나
물에서 살아도
길게 고개를 내밀고
연잎은 물에 젖지 않는다
(중략)
뿌리에는 여러 갈래
구도의 터널을 뚫어 놓았다
― 최옥이, <연잎은 물에 젖지 않는다> 부분
연잎처럼 넓고 싱싱한 발전의 기반을 칠곡은 닦고 있다. 칠곡의 관문이며 숨구멍인 왜관역은 간이역이 아니라 인근 지역의 중심역이다. 남북으로 길게 벋는 경부선 복선 철로로 칠곡 발전의 대동맥을 이루고 있다. 칠곡의 뿌리인 왜관역은 “여러 갈래/구도의 터널을 뚫어 놓”고 있다. 그것은 곧 경부고속국도와 중앙고속국도이다. 이러한 핏줄로 물류들이 콸콸 흐를수록 칠곡은 물류중심도시로 부상한다.
앞서 가며 발전을 선도하는 수행자는 외롭다. 앞서 가는 자의 앞에는 미지의 불안과 설레임만이 있다. 그러나 그 엄청난 무게를 오로지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미래 시점에서 거슬러 바라보면 앞선 자는 저 뒤에서 기다리는 자이다. 달맞이꽃처럼 “밤이고/낮이고/그렇게 기다”리는 자이다.
늘
혼자
달랑 남았다
밤이고
낮이고
그렇게 기다렸다
― 김효임골롬바 수녀, <달맞이꽃> 부분
기다림이 있는 역사에는 날마다 달맞이꽃이 핀다. 혼자서 피우는 간곡한 기다림이 대합실에 머물고 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러나 종내는 오고야 말 어둠 속의 빛을 향해서 수줍지만 자지러지게 달맞이꽃이 핀다. 모든 것을 밝고 아름답게만 보는 김효임골롬바 수녀 시인은 누구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을 가지고 있다.
밤을 새워 찾아온
벌거숭이 어린 기차가
우리 집 마당에
별 한 수레 부려놓고
벌써 산모퉁이 다 돌아간다.
― 진창현, <기차소리> 부분
마침내 기차는 빛으로 온다. 어둠을 뚫고 “밤을 새워 찾아온” 기차는 벌거숭이 어린 아이 같다. 어둠 속으로 온갖 가식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순백의 맑은 소리로 온다. 왜관역에 다다른 기차소리는 마침내 별이 된다. 아니 한 가득 별을 실은 기차가 왜관역으로 온 것이다. “우리 집 마당”, 칠곡의 왜관역 마당에 영롱한 “별 한 수레 부려놓고” 기차는 여우골 앞 산모퉁이를 돌아서 자고산 터널로 들어간다.
쏟아진 별들이 산처럼 쌓인 왜관역은 무게중심을 잡고 인근 역들을 거느리고 있다. 저 든든한 왜관역사는 “언제나 몸이 되어 우리를 품어 안”는다. 연화역과 약목역은 왜관역을 받쳐주는 버팀목이 된다.
왼손으로 연화역을 꼭 잡고
오른손은 약목역을 거머쥔 채
언제나 몸이 되어 우리를 품어 안은 왜관역,
― 이경이, <고향 역> 부분
그래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이 많다.” 어려움에 부딪치지 않는 삶이란 없다. 어려움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어려운 일” 중에서도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어쩌면 더 어렵다.
그래 살다보면 어려운 일이 많다
그 중에 어려운 일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그러나
(중략)
더 어려운 일이 있다
그것은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마음을 노출해도
― 최지숭, <노출> 부분
“그러나/더 어려운 일이 있다/그것은/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다/마음을 노출해도” 그렇다. 있는 마음 그대로 모두를 내어 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가장 어렵다. 왜관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무엇 하나 숨기지 않고 마음을 드러내도 되는 좋은 사람들이다. 왜관역에서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햇살 자욱이 쏟아지는 날
저기 숲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
푸릇푸릇 일어서는 풀 향기 같은 것
낙엽 삭아드는 황토 흙길 같은 것
― 함명숙, <숲> 부분
모두가 좋은 사람들로 살아가는 칠곡 사람들은 은혜의 숲을 끼고 살고 있다. “햇살 자욱이 쏟아지는 날” 숲이 칠곡 사람들을 부른다. “푸릇푸릇 일어나는 풀 향기”로 또는 “황토 흙길”로 사람들을 부른다. 이곳에서 안식하자고 이곳에서 나누며 살자고 자꾸 부른다.
자족하며 살아가는 칠곡 사람들과 굳건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왜관역은 안정되어 있다. 누가 보아주든 보아주지 않든 간에 거기에 연연하지 않으며 오롯이 자기들의 삶을 살고 있다.
그가 이 마을을 꼭 지나간다는 말만 들었을 뿐
붙들 수도 없습니다
내게 눈길 한번 안 주고 휑하니
스쳐가는 그를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 김정순(구상문학관 시창작 교실), <왜관역> 부분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왜관역이다. 왜관역은 머물러 있다. 왜관역의 운명은 수동성에 있다. 품속으로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연인처럼 기차를 맞이하고 보낼 수밖에 없다. 왜관역은 기차를 붙들어 놓을 수 없다. 기차는 무심하게 왜관역을 지나가지만 왜관역은 기차를 미워할 수가 없다. 기차를 잠시 품었다 떠나보내는 왜관역은 어머니와 같다. 떠나고 돌아오는 승객들에 대해서도 왜관역은 곧 어머니이다,
마음 허술하게 살아온 시간들이 길다
그대의 숨소리조차 느끼지 못하는
내 생生은 그림자일 뿐,
잠시 내려 쉬어감이 마땅하다
― 박현주(언령 회원), <기차> 부분
삶의 긴 여로에서 승객은 피로하다. 기차는 삶이고 레일이 삶의 여로라면 삶의 주체인 인간은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다. 다만 기차에 타고 내릴 수 있을 뿐이다. 삶의 피로가 과중해지면 잠시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잠시 내려 쉬어감”은 곧 휴가이며 여행이다. 그 휴가와 여행은 짧은 시간이나마 왜관에 머무는 일이다. 머물면서 재충전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왜관역은 안식의 터전이 된다. 충분한 안식을 얻은 뒤 다시 기차를 타고 왜관을 떠나도 된다.
역은 떠나보내는 곳만이 아니다. 역에서 만나는 사람도 있다. 먼 길 기차를 타고와 왜관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랑을 성사시키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경우 왜관역은 곧 사랑하는 사람과 동일시된다.
당신을 십년 전에 만났지요
당신의 허술한 옷차림과 작은 체구는
때론 초라해 보일 때도 있었지요
하지만 당신의 깔끔한 모습과 환한 웃음은
장시간을 달려온 나의 심신을 오월의 장미꽃처럼
활짝 꽃망울을 터트리게 합니다
― 박혜영, <왜관역> 부분
이 시에서 ‘당신’은 왜관역이다. 왜관역은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다.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깔끔하고 산뜻하다. ‘당신’은 사랑하는 연인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왜관역’과 ‘사랑하는 연인’은 하나로 융합되어 ‘당신’으로 합일된다. 연인을 만나기 위하여 장시간을 달려온 화자는 당신으로 인하여 마음을 여는 사랑의 꽃망울을 활짝 터트리게 된다.
연못 속 진흙에
뿌리 얌전히 감추어 두고
너그러운 미소, 은은한 향기로
여섯 연밥 진주로 영글게 하신
연꽃 어머니
― 김인숙, <연꽃 어머니> 부분
사랑의 결실로 맺은 열매는 소중하다. 그 열매를 진주로 영글게 하는 이가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연꽃처럼 궁핍의 수렁에 발 딛고 있으면서도 자식들에게는 가난을 내색하지 않는다. 가난 속에서 끌어올린 자신의 자양분을 모두 쏟아 부어 육남매를 훌륭하게 키워낸다. 연꽃은 모성이고 어머니는 곧 연꽃이다. 이리하여 저승 가신 어머니는 연화대 위에 앉아계실 자격이 충분하다. 그녀의 한 생을 희생과 헌신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연꽃이 은유하는 것은 왜관역일 수 있다. 왜관역은 화려하거나 풍요하지 않지만, 오히려 초라하고 궁핍한 형편에 발 딛고 있을 수 있지만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과업에 성공할 수 있도록 굳건한 밑받침의 역할을 다한다. 이렇게 되면 연꽃은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왜관역의 아늑한 품이 된다. 왜관역 또한 연화대 위에 앉을 자격이 충분하다.
첫사랑 하나 띄우고
미련도 하나 띄우고
어쩌다 나비가 되기도 하고
어떨 땐 삼층탑이 되는 물결
작은 바람에도 춤을 춰대던 물결은
이쁜 걸음 내딛은 물수제비를 삼켜버리고
기억 너머에서 반짝이던 햇살이
사뿐사뿐 건너오고 있다
― 최은영, <물수제비 뜨기> 부분
칠곡 사람들은 왜관역을 거점으로 하여 꿈과 성공의 물수제비 뜨기를 한다. 역사驛舍의 침목과 레일은 육중하지만 멀리 벋어나간 레일은 물결처럼 일렁인다. 가물가물한 물결 위로 띄워 올리는 첫사랑과 미련은 나비처럼 나풀거리기도 하고 탑처럼 쌓이기도 한다. 물수제비처럼 통 통 통 튀어 나가던 기차는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나타나기도 하는데 희망으로 빛나는 햇살이 꿈에서 현실로, 외지에서 왜관역으로 사뿐사뿐 건너온다.
기차가 오가는 작은 역 - 왜관역은 결코 작지 않은 품으로 역사歷史를 껴안으며 영원으로 치닫는다. 머무는 자와 떠나는 자, 가는 자와 돌아오는 자를 가리지 않고 품어준다. 만남과 이별, 기쁨과 슬픔, 영광과 번영, 사랑과 눈물을 이 가을의 코스모스 체험장으로 불러 들인다. 거기 삶의 참모습이 있다. 왜관역은 사시사철 꽃이 피는 영원한 꽃밭이다. 연화대 위에 앉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 영원한 모성으로서의 왜관역
<약력>
칠곡 왜관 출생
왜관초등(47회) / 순심중(17회)
시인(구상 선생 추천으로 1984『현대시학』등단)
철학박사 / 대구한의대 교수(현)
구상문학관 시창작교실 지도강사(현)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지도교수(현)
대한철학회장 / 한국동서철학회장/새한철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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