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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9] 벌초-권숙월 시인[칠곡인터넷뉴스]

김주완 2008. 9. 13. 14:11

2008-09-13 오전 9:41:58 입력 뉴스 > 문화&영화소개

‘벌 초’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9)>

 

 

 

벌  초

 

 

 


내일이 추석이니 벌초가 끝났을 때이다. 타관에 멀리 나가 있는 사람들은 추석날이 되어서야 성묘를 겸해서 벌초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이가 벌초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찰에 신주를 봉안하거나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한 사람들은 아예 벌초가 필요하지 않다. 벌초가 필요하면서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외국에 나가 있거나 먼 객지에 살면서 생활에 쫓겨 고향 선영의 벌초를 엄두도 못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길이 바뀌고 지형이 변하고 산세가 달라져서 조상의 묘소 위치를 찾지 못해 벌초를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혹은 자손들의 대가 끊어져서 방치된 묘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묘소는 저절로 무연고 묘지가 된다. 세월이 지나면서 쑥대밭이 되고 봉분 위에 소나무나 참나무라도 자라게 되면 묘소의 흔적조차 사라질 수 있다.


요즘은 벌초대행업체가 많이 생겨나 있다. 금융기관에서는 정기예금 유치를 위하여 예금이자로 벌초를 대행해 주는 사업을 벌이기도 한다. 추석이 다가오면 농촌 길가엔 벌초대행을 안내하는 소형 현수막들이 군데군데 나붙는다. 매장 문화가 존속하는 한 어쩌면 앞으로 벌초대행업이 신종직업으로 각광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국토 잠식의 문제점 인식과 장례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변화는 물론 간편성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팽배함에 따라 매장문화가 화장 문화로 상당히 바뀌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벌초를 직접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같은 느낌을 가질 것이다. 사람이 풀을 이길 수는 없다고 넌더리를 칠 것이다. 벌초는 ‘무덤의 풀을 베어서 깨끗이 하는 일’이다. 추석을 앞둔 시기쯤 되면 풀은 자랄 대로 자라서 무성하게 된다. 근래에 만들어진 무덤은 잔디가 잘 살아 붙어 있지만 대개는 웃자라서 길고 숱 많은 머리카락처럼 바람결에 자욱이 쓸리곤 한다. 오래 된 무덤은 봉분의 흙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고 억센 잡초들이 사람의 키 높이로 듬성듬성 솟아있다. 곁뿌리가 벋어 새나무로 솟아난 잡목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곳도 있다. 석축 사이나 잡목 가지에는 말벌이나 땅벌이 집을 짓고 있는 곳도 있다. 그래서 벌초 때가 되면 해마다 벌에 쏘여서 죽는 사람까지 나온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벌초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정비된 무덤도 잠시 뿐이다.


아무리 말끔하게 풀을 깎고 갈퀴로 끌어내어도 다음 해엔 더욱 무성하게 자라나 있다. 억센 잡초 뿌리는 괭이나 호미로 캐내기도 하지만 소용이 없다. 해마다 벌초를 하더라도 끝내는 헛일이 되고 만다. 무덤 주변이나 무덤에 이르는 길을 덮어버린 풀숲은 기가 더욱 드세다. 청미래 덩굴이나 칡덩굴, 산딸기가 묘역까지 침범하여 쑥대밭이 되곤 한다. 자주식 잔디깍기 기계는 이런 곳에서는 무용지물이 된다. 그나마 예초기가 한 몫을 한다. 그러나 억센 풀잎들이 칼날에 감겨서 자주 작업이 중단 되어야 한다. 한번으로 모두 베어낼 수도 없다. 초벌 베기를 하고 난 후 다시 한 번 기계를 돌려야만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그러나 다음 해가 되면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제초제를 함부로 쓰지도 못한다. 산 아래쪽에 있는 농지에 농약성분이 흘러내릴 것을 염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납골당을 만들든지 수목장을 하든지 무슨 조치든 해야겠다고 벼른다. 벌초는 이제 더 이상 못하겠다고 다짐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해마다 벌초를 한다. 함부로 무덤에 손을 대면 자손들에게 해가 돌아올 수 있다는 미신이 은근히 사람들의 결단을 주저앉히기 때문이다. 벌초를 하면서 사람들은 숭조의 마음을 가지거나 추모하는 마음을 가지기도 한다. 부모나 형제자매와 같이 가까운 사람들의 무덤이거나 근래에 작고한 사람의 무덤일수록 추모의 정은 더욱 절실하다. 자손들이 잘 살게 해 달라고 속으로 기원을 하기도 한다. 이런 마음이 힘든 작업을 해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김천신문 편집국장 일을 보고 있으면서도 개인시집을 10권이나 상재하였으며 김천문화원에서 지금까지 10여 년 간 쉼 없이 시창작 강좌를 3개 반이나 지도하고 있는 대구ㆍ경북의 대표시인이자 한국시단의 중견시인인 권숙월 시인은 벌초를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형상화 하고 있다.


벌초하러 갔다가

남의 산소 벌초까지 다 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비슷비슷해서 알 수가 없었다.

뒤늦게 알아내긴 했지만

비슷비슷해서 가슴 저리게 하는 정은 찾지 못했다.

해마다 추석 무렵이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벌초를 하고

저마다의 뿌리를 확인해 보지만

가슴 덮는 잡초는 어쩌지 못한다.

더 급해도 그냥 둔다.

올해도 벌초하러 갔다가 되돌아오는 사람

그러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 없나 몰라.

살기 좋아져 벌초하는 기계 나오고

산소엔 잠시 다녀오면 그만인 것 같다고

그래선 안 된다고 산새가 운다.


         ― 권숙월, <벌초하러 갔다가> 전문

           (제4시집,『젖은 잎은 소리가 없다』, 도서출판 대일, 1994, 66쪽.)


시인은 “남의 산소 벌초”를 한 이야기로 이 시를 시작한다. 풀숲으로 덮인 오래 된 산소일수록 남의 산소인지 내 조상인지 구분할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상석이나 비석이라도 있으면 그래도 찾을 수 있겠지만 봉분만 있는 산소는 비슷비슷하다. 대충이라도 벌초를 하고 주변을 정리해야만 어렴풋이 산소의 윤곽과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내 조상 산소를 찾을 수 있다. 시인은 “가슴 저리게 하는 정은 찾지 못”하고 뒤늦게 산소를 찾아 벌초를 하고 내려온다. 돌아오면서 시인은 벌초에 대한 상념에 사로잡힌다.


이 시는 단순히 벌초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인의 혼돈과 탐욕에 대한 경계가 이 시의 원관념이다. 벌초, 잡초, 산소, 산새는 보조관념이다. 시인은 벌초를 이야기 하면서 마음의 잡초를 떠올린다. “해마다 추석 무렵이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벌초를 하”듯 사람들은 한 번씩 마음속의 탐욕이나 증오의 무성한 잡초들을 베어내거나 뽑아야 한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슴 덮는 잡초는 어쩌지 못한다.” 마음의 잡초를 벌초하는 일이 더 급한데도 사람들은 그냥 둔다. 잘라내고 뽑아내도 곧 무성해질 탐욕이며 미움이다. 탐욕이나 미움이 풀숲처럼 마음을 덮으면 실묘(失墓)를 하듯 우리는 자신의 본래 마음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마음을 깨끗이 할 엄두를 아예 내지도 않고 그냥 두는 것이다. “더 급해도 그냥” 두는 것이다.


산소를 찾지 못해 “벌초하러 갔다가 되돌아오는 사람”처럼 스스로 베어내어야 할 마음의 잡초를 사람들은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마음을 비워야지’ 하는 생각을 잠시 가져 보지만 무엇을 비워야 할지를 알지 못해서 결국은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그 이전의 일상인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사람들의 본성이다. 산소와 사람의 가슴은 닮았다. 산소에 월형이 있고 봉분이 있듯이 사람의 가슴에도 어깨와 늑골이 있고 그 안에 마음이 있다. 정리되어 깨끗해진 마음이 설령 오래 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한 번씩 비우는 것이 훨씬 더 낫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우지 못하고 그냥 지나고 만다.


이 시의 문면에 명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낫을 갈아서 한 줌 한 줌 풀을 베어내며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일이 마땅하다고 시인은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예초기로 벌초를 쉽게 하고 “산소엔 잠시 다녀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추모하는 마음도 기울이는 정성도 부족한 것이 된다.  이러한 일을 경계하는 자가 산새이다. 여기서 산새는 곧 시인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사람의 마음을 비워내는 일도 고백성사나 참회기도 같은 것을 통하여 일거에 편리하게 해치우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음을 뒤덮은 탐욕의 숲을 걷어내는 일은 누가 대신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거에 해치울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사람들이 조금씩 때마다 스스로 해야 할 자기선택의 노역이다. 그러니까 벌초는 산소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벌초가 참으로 필요한 곳은 산소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 마음이다. 떠도는 메아리가 되더라도 울어야 할 일이 있으면 우는 존재가 산새이며 시인이다. 산새와 시인은 그래서 외로움을 공유한다. 산새의 울음처럼 맑은 시인의 언명은 만인을 향한 경구가 된다. ‘마음을 덮는 잡초를 베어 내라’고 잔잔히 말하는 시인은 통찰하면서 경계하는 자이다.

 

 

 

 

 

<약력>

 

칠곡 왜관 출생

왜관초등(47회) / 순심중(17회)

시인(구상 선생 추천으로 1984『현대시학』등단)

철학박사 / 대구한의대 교수(현)

구상문학관 시창작교실 지도강사(현)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지도교수(현)

대한철학회장 / 한국동서철학회장/새한철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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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덕 기자(cg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