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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5] 기다림-이동진 시인[칠곡인터넷뉴스]

김주완 2008. 8. 16. 14:08

2008-08-16 오전 8:45:38 입력 뉴스 > 문화&영화소개

‘기다림’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5)>

 

 

 

기다림

 

 

 


기다림은 간절하다. 무릇 그가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한 그 기다림은 간절할 수밖에 없다. 소식을 기다릴 수도 있고 사람을 기다릴 수도 있고 행운을 기다릴 수도 있다. 나아가 천지가 개벽하는 새 세상을 기다릴 수도 있다. 이와 같이 간절한 기다림의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소풍이나 운동회 전날 밤 설레는 가슴으로 밤을 보낸 기억은 유년의 아름다움으로 일생 동안 남아 있다.


이와는 달리 불안한 기다림도 있을 수 있다. 잘못을 저지르고 벌을 기다리는 심정은 초조하고 불안하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자를 기다리는 수도 있다. 변심하여 떠나간 애인이나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연인은 돌아올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다림이란 잊혀지지 않는 것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따라서 그리움은 기다림의 또 다른 이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다림은 나무와 닮았다. 겨울나무는 봄을 기다리며 엄동설한을 지난다. 봄의 나무는 싹을 틔우며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열매가 맺기를 기다린다. 산새가 와서 그의 품에 깃들기를 기다린다. 가뭄 속의 나무는 비를 기다리고 우기 속의 나무는 햇볕을 기다린다. 때로 바람이 찾아와 그를 집적거리거나 심하게 몸을 흔들어도 기다릴 줄 알기에 나무는 참고 견딘다. 나무는 아무 것도 피하지를 않고 그저 온몸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제 자리에서 꿋꿋하게 버틴다. 나무는 기다릴 줄을 아는 것이다. 견디는 인내를 아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다림은 곧 인내이다.


기다림의 본질은 서 있음이다. 그냥 서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향을 향하여 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다림이란 한 방향을 향해서 제 자리에 서 있는 일이다. 기다리다가 지쳐서 얼마만큼 마중을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 있는 자리의 이동일 뿐이지 서 있음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중을 나간다고 해서 기다리는 대상이 더 빨리 당도하는 것도 아니다. 기다리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서 있는 일일 뿐이다. 서서 인내하는 일일 뿐이다.


기다림의 대상은 마침내 기다리는 사람 앞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끝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찾아올 가능성이 적은 것일수록 우리는 간절히 기다린다. 간절한 기다림은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 말은 역설일까?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인내심을 북돋우기 위해서 한 말일까? 그렇다. 이루어진다는 기대가 없이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다. 가질 수 없는 것,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일수록 우리는 더욱 애절하게 가지고 싶어 한다. 기다려서는 안 되는 것일수록 더욱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삶이 그러하다. 그래서 삶은 역설이고 모순인 것이다.


기다림은 가능성이다.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다가올 수 있는 가능성이다. 현실적으로 기다리는 대상이 다가오면 그것은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성이 된다. 기다리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이 이루어진 요인을 찾아보면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 거기에 구비되어 있다. 성사 조건들이 모두 구비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루어진 현실성의 바탕에서 되돌아보면 거기에는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기다림이 이루어졌을 때 가능성은 현실성이 되고 그 현실성은 곧 필연성이 된다. 그러나 이루어진 기다림은 이미 기다림이 아니다. 그것은 기다림의 충족이며 완성이며 성취인 것이다. 따라서 기다림은 미완성으로서 완성될 수 있는 가능성에 불과하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기다릴 가치가 있는 것이고 가능성이 있기에 기다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낙동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동진 시인은 <강가에서>라는 아래의 시에서 기다림의 보편성을 잔잔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단시임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성찰이 담긴 철학성이 기저를 이루고 있다.


메시지 한통 없는

고요한 밤


행여나 싶어

휴대폰을 열어 본다.


섬광에 비치는 건

아홉 시 오십구 분


불어오는 강바람이야

내 마음 알랴마는


오늘 따라 강물은

이리도 촐랑이노


         ― 이동진, <강가에서> 전문


시인은 고요한 밤의 강가에서 문자메시지를 기다린다. 특정한 사람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고 그냥 막연하게 무슨 소식을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다. 화자는 신호가 없는 휴대폰을 무심결에 열어 본다. 초기 화면만이 떠오르고 9시 59분이라는 시간 표시만 나타나 있다. 시인은 그 시간 위에서 정지하여 메시지를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서 휴대폰과 메시지를 메타포로 읽게 되면 이 시는 삶의 과정을 노래하는 시가 된다.


강물은 흐르고 강바람이 분다. 강물은 아래로 아래로 흐르고 강바람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분다. 양자는 방향성과 이동성을 공유한다. 낮은 곳을 향해서 강물이 흐르는 것은 곧 이곳에서 저곳으로 강물이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강안을 건너오는 강바람은 대기의 이동을 의미한다. 이 역시 메타포로 읽게 되면 역사와 역사적 사건의 무심성을 의미한다. 화자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지만 역사는 무심히 흘러가고 역사적 사건들은 때 없이 부침한다. 이러한 무심성과 무의식성을 화자는 “오늘 따라 강물은 이리도 촐랑이노”라는 원망조의 한탄으로 풀어낸다. 중견시인의 원숙한 시적 진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기다리는 자는 공간적으로 정지해 있는 자이다. 역사적 시간과 사건은 강물처럼 무심하게 흘러가고 기다리는 자의 기다림은 하염없이 계속된다. 흐르는 것 속에서 화자의 삶도 나이도 흘러가고 있겠지만 그의 기다림만은 그러나 정지해 있다. 강물이나 바람이나 시간과 같이 이동하는 것 속에서 제 자리에 붙박이로 서 있는 자의 자세가 기다림인 것이다. 강물도 흐르고 강바람도 흐르는 강가에서 한 그루 큰 나무로 서 있는 자가 시인이다. 그가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굳이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한없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알면 족한 것이다. 그러한 시인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 모두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약력>

 

칠곡 왜관 출생

왜관초등(47회) / 순심중(17회)

시인(구상 선생 추천으로 1984『현대시학』등단)

철학박사 / 대구한의대 교수(현)

구상문학관 시창작교실 지도강사(현)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지도교수(현)

대한철학회장 / 한국동서철학회장/새한철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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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덕 기자(cg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