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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 ‘기적 소리’-박현주 시인[칠곡인터넷뉴스]

김주완 2008. 7. 26. 00:59

2008-07-26 오전 9:13:54 입력 뉴스 > 문화&영화소개

‘기적 소리’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

 

 

 

기적 소리

 

 


기적 소리는 사라진 소리이다. 기차가 디젤기관차로 바뀌면서 증기기관차는 박물관으로 들어가 버렸고 하얀 연기를 입심 좋게 품어내면서 뚜~뚜~ 울리던 기적 소리는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되어 버렸다. 초고속 전철인 KTX가 한반도를 질주하는 오늘날 지난 시절의 기적 소리는 아련한 향수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향수는 공통성과 개별성으로 대별될 수 있다. 고국을 떠나 해외에 거주하는 재외동포들이 가지는 향수는 공통적일 것이며 산골 계곡물에서 가재를 잡던 어린 날의 기억은 특정한 개인의 개별적인 향수가 된다. 그러나 모든 향수가 가지는 보편성은 불도장을 찍은 듯 가슴 속에 오래 남으면서 아련한 그리움으로 그것이 자주 재생된다는 것이다. 향수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강화된다는 속성도 있다. 기적 소리에 대한 향수는 지금의 40대 이상의 연배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이며 그리움일 것이다.


얼마 전에 만난 어느 선배는 기차와 기적 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상한 적이 있다. 1950년대 초, 왼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기차가 돌아나가는 왜관읍 아랫게는 사과와 자두 등을 재배하는 과수원 지대였다. 철길 옆으로 과수원들이 이어져 있고 탱자나무 울타리 길이 과수원과 과수원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어 있었다. 시간 맞춰 지나가는 기차의 기적 소리와 쿵쾅쿵쾅 바퀴 소리는 일정한 박자를 가지고 있었고 유년의 아이들에겐 그 소리가 자연스럽게 익숙하고 정겨운 소리가 되어 있었다. 대기압이 낮은 날이면 기차 화통에서 폭폭 쏟아내는 연기가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길고 굵은 선을 그으며 과수원 길로 내리깔리곤 했다. 아이들은 연기 속으로 달려 들어가 연기에 묻혀 뛰어가며 한참동안 연기를 마셨다. 지금 생각하면 기차 연기는 말 그대로의 매연이거나 여러 가지 독성물질이 함유된 증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석탄 냄새가 섞여있는 그 연기를 마시면 회충이 없어진다는 속설을 믿으면서 가슴을 부풀려 연기를 양껏 들여 마시곤 했던 것이다. 굳이 회충을 없애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재미있는 놀이를 그렇게 즐긴 것이다. ― 기적을 울리면서 기차가 휘어진 선로를 따라 칙칙폭폭 들판을 빠져나간다. 화통에서는 물컹물컹 연기를 쏟아 놓는다. 연기가 기차 길보다 낮은 과수원 길로 자욱이 깔려 흐른다. 아이들 여럿이 연기 속으로 뛰어들어 연기 속에 묻힌 채 연기를 마시며 달려간다. ― 눈앞에 그림이 그려지는 정경이다.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경험과 기억을 간직한 지금의 장년층이나 노년층에게는 아련한 이 장면이 곧 향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마와 홍수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은 제방의 축조와 안동댐의 방류 조절에 따라 여간해서 낙동강이 범람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장마철이 되면 왜관은 늘 범람의 불안을 느껴야 했다. 큰물이 밀려드는 사태를 몇 번은 겪어야만 했다. 사이렌이 불고 사람들이 대피하는 긴박한 경험도 지나고 나면 꿈같은 향수가 된다. 아이들은 어쩌면 집을 떠나 대피소에서 보내는 불편한 밤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신나는 잠자리였을 수도 있다.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회장인 박현주 시인은 이러한 유년의 기억을 한 편의 시로 형상화 시키고 있다.


여름 장마로

뚝이 틔워준 물길은 

밤새도록 잠잠히 들판을 적시고

잘박잘박 새벽이면

집 앞에 와 있다

 

잠결로 듣는

나지막한 물 기척

몸이 먼저 반기지만 

올 리 없는 기다림일 뿐,

애써 다독인 가슴을  

기어이 적시려 드는지

 

새 잠 청해 돌아누우면

빗소리에 섞여 간간이

길게, 짧게

무거운 기적소리

이 시간 기차는 또

누구의 시린 이별을 퍼 담아

나르고 있나

           ― 박현주, <기적 소리>, 전문


이 시는 새벽에 밀려들어오는 강물의 범람과 화자의 오랜 기다림을 연결시키고 있다. 시인은 갇힌 현실 속의 기다림을 장마와 터진 뚝방과 강물의 범람, 그리고 기적 소리를 보조관념으로 동원하여 잔잔하게 진술한다. 이 시에서 장마는 기다림이다. 장마와 기다림은 ‘길다’는 것을 공유한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언젠가는 이루어 질 것이라는 시인의 믿음이 ‘뚝이 틔워준 물길’로 나타난다. ‘잠결로 듣는 나지막한 물 기척’은 기다리는 것이 와 있다는 착각을 시인으로 하여금 잠시 동안 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이다. 착각을 일으키게 한 물 기척이 오히려 시인의 슬픔을 더욱 가혹하게 각성시킨다. 그 때 기적 소리가 길게 그리고 짧게 들려온다. 기적 소리는 경쾌하지 않고 오히려 무겁다. 사람들의 이루지 못한 꿈과 소망을 아주 멀리 실어 나르는 시커먼 괴물, 기차가 내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멀리 사라져버린 무언가를 오래 기다리는 자이다. 시인은 현실이라는 높은 둑 안에 갇혀서 그 너머로 사라져 버린 것을 하염없이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자인 것이다.


이 시의 구절 중에서 ‘새벽이면 잘박잘박 집 앞까지 다가오는 물길’, ‘잠결로 듣는 나지막한 물 기척’, ‘시린 이별을 퍼 담아 나르는 기적 소리’ 등은 성공한 감각적 표현의 본보기로서 훌륭하다. 한 마디로 절창이다. 여기에는 청각 이미지와 근육감각적 이미지, 촉각 이미지와 기관 이미지가 효과적으로 결합된 공감각이 시인의 감수성으로 통일되어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기적 소리를 가슴에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생이 무겁거나 고단할 때 그 기적 소리는 더욱 크게 더욱 애잔하게 마음속에서 되살아 나와 우리의 전신을 강타한다. 우리는 그 소리에 젖어 들면서 가중되는 슬픔에 빠져들 수밖에 없지만 마침내 생의 활력을 다시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직한 제마다의 기적 소리는 지나간 자아이면서 지금의 자아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는 것이다. 이 아침에도 깃들어 있는 우리들 가슴 속의 기적 소리.

 

 

<약력>

 

칠곡 왜관 출생

왜관초등(47회) / 순심중(17회)

시인(구상 선생 추천으로 1984『현대시학』등단)

철학박사 / 대구한의대 교수(현)

구상문학관 시창작교실 지도강사(현)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지도교수(현)

대한철학회장 / 한국동서철학회장/새한철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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