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_이경이 시집 <손편지를 쓰는 당나귀>
해동문학 2013년 겨울호(통권 84호) 수록
생의 현상과 본질에 대한 인식과 통찰의 시
김주완(시인, 한국문협 이사, 전 대구한의대 교수)
사람들은 왜 시인이 되고자 하는가? 남들에게 지적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서인가?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인가?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경로이든 간에 문단에 이름을 올리기만 하면 금세 시인이라는 명함을 들고 여기 저기 행사장을 찾아다니며 얼굴 알리기에 급급해 한다. 지면의 성격이나 수준을 가리지 않고 시를 발표하는 것에 연연한다. 시를 아는 사람이 자기 시를 읽고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하다못해 좁은 지역이나 작은 단체의 홍보물 표2에라도 시를 발표할 기회가 있으면 마치 대단한 시인이나 된 것처럼 격양된다. 블로그나 개인 카페를 만들어 빈약한 경력을 늘여서 나열하고 이름도 생소한 단체의 직책을 간판으로 내건다. 덜 익은 시들을 모아 성급하게 시집을 출간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돌린다. 이러한 방법들은 한국의 정치인들이 유권자를 기만하기 위해 쓰는 수법들이다. 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곧장 먹혀든다. 명예욕이 앞서는 이런 사람일수록 대개 시 쓰기는 뒷전으로 미루고 게을리 한다. 시적 발전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시인은 시로 말한다. 모든 시인이 모두 최고 수준의 시를 쓸 수는 없다. 그러나 최선의 시를 쓸 수는 있다. 한번 발표된 시는 자기 생명력을 가지고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어디에서든 그 시를 읽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시를 보고 시인을 평가한다. 시인은 자기 이름을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무책임한 사이비 시인이 될 것인가, 성실한 작가적 삶을 사는 시인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시인 자신의 선택의 문제이다.
이경이 시인이라고 해서 왜 이름을 날리고 싶은 생각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는 시인 행세를 하고 다니지 않는다. 이 행사장 저 행사장을 기웃거리지도 않는다. 패거리를 지어서 섹터주의에 연연하는 부류에 가담하지 않는다. 활동반경의 좁고 넓음을 떠나 그러한 일들이 시업(詩業)에 도움이 되지 않음은 물론 스스로 천박해질 뿐이라는 것을 안다. 시인 행세를 하고 다닌다고 해서 이름이 나는 것이 아니다. 시인들의 모임은 일반 사회단체의 모임이나 계모임과는 다른 데가 있어야 한다. 시인이 대단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특수성이란 무엇인가?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다. 시를 쓰는 일은 고독한 작업이다. 패거리를 지어서 몰려다닌다고 해서 시가 쓰이는 것은 아니다. 사물에 대한 독창적 인식과 깊은 사색은 자기 침잠에서 나온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것이 시작(詩作)이다. 제대로 된 시인은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시적 사유에 몰두할 수 있다. 고독한 작업은 고독한 실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시인이라고 하면 무조건적으로 지적 우월성을 인정해 주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사람들은 시인을 우습게 본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시인 행세만 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속으로는 냉소하거나 조소한다. 자기를 보여주고 싶어 안달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외면하며 실망한다. 단지 그의 시에 감동받았을 때만 그를 시인으로 인정한다. 수굿하고 말없이 시를 쓰는 사람, 삶이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 남보다 뒤에 서는 사람을 제대로 된 시인으로 평가한다.
이경이 시인은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에서 7년째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다. 젊은 시인들처럼 온몸을 바쳐서 시를 쓰지는 못하더라도 꾸준하게 공부하며 쓰고 있다. 시인의 옷가게에서 틈이 나면 시를 읽는 그의 모습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매주 하는 스터디에 일이 있으면 못 나오지만 숙제로 쓴 습작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내오곤 한다. 출석은 못해도 합평은 받겠다는 자세이다. 문인 단체에도 별로 가입하지 않고 문학 행사장을 중뿔나게 찾아다니지도 않는다. 주변에서 그가 시인인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간혹 오는 원고 청탁에도 조심스레 응한다. 이번 시집의 출간도 도반들의 권유에 따른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경이 시인은 그저 열심히 산다. 시간 나는 대로 차분하게 시작(詩作) 공부를 한다. 그는 삶과 시를 병행 시키고 있는 자이다.
이제 그의 시를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경이 시의 밑바탕은 생의 현상과 본질에 대한 인식이며 통찰이다. 생이 혼곤하면 이전 시점으로 복원하는 작업이 그의 시 쓰기이다. 유년으로 되돌아가 삶의 원동력을 재충전하고 씩씩하게 삶의 현실로 복귀하는 것이 그의 시작 과정이다.
첫코를 잡은
대바늘이 실타래를 풀어
한 올 한 올을 힘겹게 떠올라 갑니다
바늘에 걸린 고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
구멍 난 돌담 같이
쌓아 온 코들 속에서
빠뜨린 한 코가 있습니다
그 코를 찾으려
실은 풀려서 내려갑니다
풀고, 감아서 뜨고
돗바늘로 마무리 지어
목에 감을 때까지
대바늘은 떠올라 갑니다
―「목도리 2」전문
시인은 털실 목도리를 짜는 과정을 통해서 삶의 노정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한다. 사람은 누구나 목표를 세울 수 있고 목표가 세워지면 그것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어쩌다 뒤돌아보면 실수가 보이고 흠이 있는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지나온 일을 다시 돌이킬 수가 없다.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후회하는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일이 고작이다.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고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반해 뜨개질은 지나온 과정을 풀어서 다시 시작 할 수 있다. “구멍 난 돌담 같이” 비어 있는 “빠뜨린 한 코”를 다시 메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돗바늘로 마무리 지어 / 목에 감을 때까지” 대바늘로 떠올라 갈 수 있는 것이다. 삶의 일회성과 일방향성에 대한 시인의 통찰이 목도리 뜨개질을 통해서 생겨나고 인간적 삶의 한계에 대한 연민을 행간에 배치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여운을 남겨 주고 있다.
빈 옆자리 찾아 주었건만
이 자리가 그 자리인지
그 자리가 이 자리인지
뒹굴고 날려
이 시간 가랑잎은
바람에게
제 자리를 묻고 있다
―「가랑잎」후반부
인간은 가랑잎 같다.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굴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 가랑잎이다. 가랑잎은 말라버린 잎이다. 나이가 들면서, 세파에 부대끼면서 인간은 말라갈 수밖에 없고 이리저리 굴러다닐 수밖에 없다. 직업이 그렇고 인간관계가 그렇고 개개인 속에 있는 마음이 그렇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뒹굴고 날려”가는 것이 인간의 살아있는 생이다. 살아있으니까 “뒹굴고 날려”가는 것이다. 과연 인간에게 고정된 제 자리가 있겠는가? 자기를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바람에게 제 자리를 묻는 가랑잎은 역설적이게도 연약한 실존(인간의 현실적 존재)의 모습이다. 실존에 대한 시인의 비극적 인식은 다음 시와 같이 여러 양태로 드러난다.
이왕에 뿌리내릴 것이면
도고산 허리에다 터전을 잡을 것이지
그 산을 비켜
벼랑바위 틈새에서
유랑 극단 곡예 보듯
아슬아슬 가슴이 죄어들어 못 보겠습니다
이제껏 지내면서 굳어 버린
고집 다 벗으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뿌리내린 곳이 아니다 싶고
솔개비마저 털어 버릴 기력이 부치면
그때는 어찌하시렵니까
바위 한 덩이가
몰아친 비바람에 못 이겨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낭떠러지 소나무」전문
낭떠러지 소나무의 삶은 위태롭다. “유랑 극단 곡예”같이 살아간다. “벼랑바위 틈새에서” 악물고 살아가는 것은 강인한 삶의 의지이자 고집이다. 고집은 버티는 일이다. 인간의 삶은 바로 낭떠러지 소나무와 같이 아슬아슬한 순간, 순간을 버티고 이겨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자주 비바람은 몰아치고 우리가 버티고 선 땅(바위)의 한 부분은 무너져 내린다. 그러나 깊게 내린 뿌리의 힘이 위태로운 삶을 그나마 지탱하게 해준다.
서산 댁, 지산 댁은
명 짧아 일찍 떠난 영감을
동네 어귀에 서 있는
살찌고 늙은 능수버들과
키만 큰 참나무 한 쌍 탓으로 돌리며
그중에 가지 무성한 능수버들을
더 원망한다
늘어진 그늘 밑 평상에 나앉은 두 과부댁
온종일 저린 다리 뻗쳤다 접었다 하며
신세 한탄, 썩은 화투장을 내리치고 있다
―「보리 익을 무렵」제2연, 제4연
이 시는 경북 칠곡군 기산면 죽전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실화에 바탕한 시로 보인다. 아니면 실제의 지역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시인의 상상력으로 설정한 상황일 수도 있다. 죽전리 마을 어귀에는 능수버들과 참나무 한 쌍이 나란히 서있다. “키만 큰 참나무”는 남성의 토템이고 “가지 무성한 능수버들”은 여성의 토템이다. 그런데 능수버들의 기가 더 세어서 참나무를 짓누르고 있다. 남성성인 참나무가 여성성인 능수버들의 기(氣)에 눌려 남자의 명이 짧다고 동네 사람들은 믿고 있다. 실제로 이 동네 남자들은 일찍 죽고 여자들은 과수댁이 많다. 대개 이런 줄거리이다. “서산 댁, 지산 댁은 / 명 짧아 일찍 떠난 영감을” 능수버들과 참나무 탓으로 돌린다. 어느 한 나무만 없었더라도 영감이 일찍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능수버들을 더 많이 원망하는 이유는 능수버들의 기가 더 세기 때문이다. 잘못된 일은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인간의 심리, 더 센 것에 저항하는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배우자를 잃고도 남은 자는 또 살아간다. “온종일 저린 다리 뻗쳤다 접었다 하며 / 신세 한탄, 썩은 화투장을 내리치고 있다.” 서글픈 체념이며 쓸쓸한 수용이다. 서산 댁의 영감 제사가 드는 이때는 마침 보리 익을 무렵이다. 제법 따가워진 빛살에 사람들이 그늘을 찾는 때이다. 보리는 익는데 외국에 나간 자식은 소식이 없고 서산 댁은 능수버들을 원망하면서 혼자 영감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 토속적 원시신앙에 닿고 있는 이 시는 우리 사회가 맞이하고 있는 고령화 사회의 한 단면과 독거노인들의 적막한 삶의 모습 또한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는 멍청이,
바닥으로 살면서 긁히고 찍히며
이름도 잊어가며
수난의 생을 사는 네 이름은 도마
―「도마」전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긁히고 찍히며” 바닥으로 살아간다. “이름도 잊어가며 / 수난의 생”을 살아간다. 자기의 이름을 기억할 여유가 없고 “자신의 소리를 낼” 겨를도 없다. 그만큼 삶이 절박한 것이다. 쫓기는 것이다. 시인 또한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 화자는 이러한 삶을 사는 자기 자신을 “멍청이”라고 자조하면서 “네 이름은 도마”라고 규정짓는다. 도마는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개개인이다.
삶에 대한 시인의 이러한 비극적 인식은 시간 의식에 좌승(座乘)하고 있다. 실제로 이경이 시인은 여러 시편에서 ‘시간’이란 시어를 반복하여 구사하고 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의 본질은 흐름이다. 철학적인 전문 용어로는 차원이다. 시간에는 뒤에서 앞으로 나가는 하나의 방향만이 있다. 누구도 그 방향을 거꾸로 돌릴 수가 없다. 시간은 ‘지금’이라는 점의 연속이다. 어제는 지나간 지금이며 내일은 다가오지 않은 지금이다. 어제의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그 때이며 내일의 지금은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한 그 때이다. 오늘까지 오면서 겪은 일들, 행해온 모든 일들은 어떻게도 되돌릴 수 없다. 뜨개질처럼 풀었다가 다시 뜰 수가 없다. 어제의 지금들의 결과가 오늘의 지금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지금이 만족스럽지 않은 사람은 어제의 지금을 후회한다. 되돌아가서 다시 고쳐 살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오늘의 지금)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오늘의 지금이라는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고 어제는 되돌아 갈 수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불행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말한 시간은 실사적 시간일 뿐이다.
이와는 달리 직관적 시간이 있다.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직관적 시간은 먼 과거로도 되돌아 갈 수 있고 먼 미래로 앞질러 내달릴 수도 있다. 전자는 회상이고 후자는 전망이다. 실사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내닫지만 직관시간은 되돌아 갈 수도 있고 앞질러 갈 수도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사적 시간의 흐름을 타고 앞으로만 내닫는 개체적 생의 절박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직관적 시간의 회귀 방편인 회상이다.
치열한 현실적 삶에서 상처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시인의 영혼은 연민한다. 연민하는 시인의 영혼은 지난 날로 되돌아간다. 지난날은 아늑하고 평화롭고 행복하다. 그래서 시인은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그 속에서 치유 받는다. 이경이 시인의 시에서는 이러한 회상이 많다.
시인의 유년 시절, 1970년대 농촌풍경의 스펙트럼은 가난과 남루이다. 시인은 “허기진 배 채웠던 오디”, “아린 가난은 너울져/속쓰림으로 스며들”(「오디」부분)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는 오늘 보다 경제적으로는 궁핍했지만 마음이 순수했던 어제가 더 행복했던 날들이다.
할배가 새끼줄 꼬아
엉덩이 들썩여 뒤로 모아 놓으면
줄 끝을 잡고 손녀는 잠이 들었다
낮에 개울에서 멱 감다
고무신 한 짝 떠내려 보내고 눈이 붓도록 울었다
팔베개에 눌려 찍힌 멍석 자국,
풀벌레 울음 속에서
벼이삭은 불룩하게 배가 불러가는 밤
모깃불 연기가
새끼줄 길이만큼이나 밤하늘로 오를 때
은하수는 살짝 정수리를 비켜서 있었다
―「바깥마당에 앉으면」전문
바깥마당에 앉아 할배가 새끼를 꼬는 여름날 밤, “풀벌레 울음 속에서 / 벼이삭은 불룩하게 배가 불러가는 밤”, 손녀는 할배의 엉덩이 뒤에서 새끼줄을 잡고 잠이 든다. “낮에 개울에서 멱 감다 / 고무신 한 짝 떠내려 보내고 눈이 붓도록 울었”던 손녀의 얼굴에 멍석 자국이 찍힌다. 평화롭다. 한 폭의 그림이다. 시인은 아름다운 어린 날의 풍경을 이와 같이 복원해 놓고 있다.
소나기가 한바탕 더위를 식히는 낮 시간
골진 마당 물길 따라 올라온 미꾸라지 한 마리
짧은 처마 밑에서
비 그치길 기다리는 수탉 같은 사내아이 손안에
꿈틀꿈틀 붙들려 있는 놀이감, 미꾸라지
―「미꾸라지」제1연, 제2연
그렇다. 1970년대, 그때만 해도 소나기가 내리면 온 마당에 황톳물이 콸콸 흘러 물길이 나고 거기로 미꾸라지가 올라와 퍼덕거렸다. 미꾸라지를 잡아 손에 들고 놀이감으로 하고 있는 소년이 수탉 같다고 한다. 그것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수탉, 얼마나 신선한 표현인가!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실로 참신하고 역동적이지 않은가.
말복 때쯤이면 가래를 들고
모래찜질에 나서는 할머니 뒤를 따라갔다
불볕에 달아오른 모래알
만병 치료제
낙동강 백사장에 반나절 몸을 묻었다
무겁게 살아온
생의 옷을 벗는 것처럼
모래더미를 젖히고 나면 한동안 통증을 잊었다
달맞이꽃대에 붙은 매미 껍질,
할머니의 요통도 백사장에 벗어 놓았다
―「껍질」전문
말복은 더위의 절정기이다. 지글지글 달아오른 강모래 찜질로 몸의 통증을 치료하던 때가 있었다. 요즘처럼 즐기는 그러한 피서가 아니다. 발바닥이 뜨거워 걷기도 힘든 모래사장을 걸어 나가 모래 위에 누운 채 온몸에 불덩이 같은 모래를 두텁게 덮고 한참을 보내는 것이 모래찜질이다. 손녀는 할머니 뒤를 따라가 그런 정경을 보면서 모래사장을 뛰어 놀았다. 회상에 잠긴 시인은 할머니의 몸을 덮은 모래더미를 무겁게 살아온 생의 옷과 연관 짓는다. 할머니는 그 “모래더미를 젖히고 나면 한동안 통증을 잊었”는데 “달맞이꽃대에 붙은 매미 껍질”처럼 허리 통증을 “백사장에 벗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허리 통증을 매미 껍질처럼 벗어 놓는다.’ 시적 표현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던가.
잔디밭 구르며
고무신치기 하던 마실 앞,
재실 높은 담을 넘다가 항아리 깬 친구들,
비석골 솔가지에 걸린 풀피리 소리는
아직도 그곳에 머물고 있을는지
―「풀피리 소리」마지막 연
시인의 회상은 직관 시간을 통하여 지난 날로 되돌아가지만 언제까지나 거기에 머물 수는 없다. 현실적 삶의 수행은 인간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현실로 되돌아 온 시인은 늘 지난날의 고향이 궁금하다. “고무신치기 하던 마실 앞”이 궁금하고 “재실 높은 담을 넘다가 항아리 깬 친구들”이 보고 싶다. 비석골의 풀피리 소리가 그립다. 시인의 이러한 정서가 바로 삶의 원동력이 되고 시의 근원이 된다.
지난날의 중심에는 가족들이 있다. 「가지치기」, 「손편지를 쓰는 당나귀」, 「회상」, 「어머니」, 「감나무」, 「돌밭 가는 길」, 「감자」,「김장」등의 시편들이 한결같이 지나간 지금(과거 시점)에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이다. 「기차」, 「통학길」 등은 학창시절의 고운 이야기들이다. 이경이 시인이 되돌아가고 싶은 곳이 바로 지난날의 비석골, 농촌 마을의 그곳이며 그때이기에 이 시집 전편을 통하여 돋보이는 절창이 거기서 나온다.
논배미에 내려앉은 산 그림자
발목이 퉁퉁 부어올랐다
진국물을 우려내는 벌떼 같은 개구리 소리
흙덩이 뭉그러진 까만 밤에
한 섬 실하게 끓어 넘쳤다
―「모내기」후반부
갇히고 닫힌 마음에
오솔길 하나 뚫으려 산길 간다
바람 한 자락 일어 꽃잎 살짝 흔들면
봉침 한 방 톡 쏘여서
찔레나무 숨통 틔워질까
―「찔레꽃」첫 연, 마지막 연
절창의 농촌서경이다. 써레질 해 놓은 논배미에 비친 산 그림자를 “발목이 퉁퉁 부어올랐다”고 한다. 답답한 찔레 꽃잎에 “봉침 한 방 톡 쏘”면 “찔레나무 숨통 틔워질”지 모른다고 한다.
시인은 남기는 자이다. 사라져 가는 것을 붙잡아 남기고 소멸된 것을 복원하여 남기기도 한다. 이경이 시인이 그의 유년과 청소년기를 아름다운 시로 써서 복원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정경들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시인은 지난날을 시로 빚어 남김으로써 그 정경들을 다른 독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이경이 시인의 시가 아니면 보지 못할 농촌 서경을 독자들은 나름대로 분배받아 자기 것으로 소유하며 즐기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남기는 자이면서 동시에 주는 자이다. 불특정 다수인에게 시를 나누어 주는데 아무리 나누어 주어도 시는 닳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니체가 말한 소위 ‘증여덕’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시인은 삶의 이치를 깨닫고 생명 의지를 더욱 강고히 한다. “봉오리는 느리게 / 한 잎, 한 잎 꽃을 낳는다”(「치자꽃 필 때」)고 함으로써 결실을 목표로 하는 개화의 인고를 말하는가 하면 “끌어안고 있다가 / 때를 찾아 내려놓아야 한다”(「은행」)면서 공들여 키운 자식도 때가 되면 독립된 개체로 홀로 서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순리를 소박하게 서술하고 있는 시가 아래의 「탈피」이다.
나가 살아라
내 걱정일랑 하지 말아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당부하던 말
박주가리는
걱정스럽지만
어머니 곁을 떠났습니다
울룩불룩한 껍질,
그 속에서 나온 박주가리는
멀리 있는
엄마를 닮은 삶을 살아갑니다
―「탈피」전문
탈피는 껍질을 벗어나는 일이다. 껍질을 벗어난다는 것은 더 이상 보호받을 데가 없이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박주가리는 농촌의 들과 산에 흔한 다년생 풀이다. 열매 속에 들어 있는 씨에는 흰 솜털이 깃털처럼 달려 있다. 이 씨가 바람에 날려가 다른 먼 곳에 자리 잡고 촉이 터서 자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주가리는 박주가리로 살아간다. 종(種)의 계승이며 번식이다. 떠나와서도 “멀리 있는 / 엄마를 닮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박주가리는 다름 아닌 인간의 삶이지 않은가. 생명의 숙명이지 않은가.
삶의 이치를 깨닫고 강인한 생의 의지를 다지는 이경이 시인의 정신적 지주는 당연하게도 아버지, 어머니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근원은 부모라는 사실이다. 물론 불안과 광기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 부모를 부정하는 패륜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원이 근원 아닌 것으로 부정될 수는 없다. 더구나 지난 어린 시절을 시 정신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는 시인에게 있어서는 부모는 굳건한 지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당나귀처럼 짐을 지셨다
깨물어서 더 아픈 손가락인가
바람에 털어 비워야 할 속은 반이 남아 있다
홉겹 옷에 단추 몇 개 잠그다 만 것처럼
벌어진 박주가리 껍질은 말라 있다
짧고 통통한 손가락은 몸부림치며
빠져나간 울타리 밖에서
제자리걸음만 걸었던,
귓전에 와 닿지 않은 말들도
무 구덩이 속에서
시간이 지나서야 싹으로 움튼다
어둔해진 박주가리
속은 더 비워지지 않는 것인가
회오리치는 시간 속에서도
때 묻지 않은 속껍질
쓰러진 곡식을 포기하지 않고
하늘 일로 받아들이는 농부처럼
쉼표 없이 쓴 구술 편지 흔들리는 문장은
합장한 손끝에서 촛불이 되어 피어오른다
저승에서도 아버지, 손편지를 아직 쓰신다
―「손편지를 쓰는 당나귀」전문
시인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다.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 당나귀처럼 짐을 지고 평생을 사셨던 아버지에게 시인은 어쩌면 “깨물어서 더 아픈 손가락”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자식들과는 다르게 특별히 아버지의 속을 썩였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다만 심성 고운 시인의 자기 회한으로서의 채찍이 시인을 그렇게 몰아세우고 있는 것일 게다. 이 시에서 아버지는 당나귀와 박주가리에 등치되어 있다. 노역과 집으로도 환언되는 시어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기도를 올리는 손끝에서 촛불이 가물거리고 그 너머로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염려와 염원이 흔들리는 문장으로 쓴 구술편지처럼 일렁이고 있다. 여기서 아버지는 종교적으로 하느님이 될 수도 있다. 그 음덕으로 시인의 오늘은 영위되고 있다.
새벽마다 정화수 받쳐 올려
두 손 모으는 어머니
속다 뒤집어 시커먼 속
누구에게 보여 드리나요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장님 삼 년을 지내고 나니
부처 길 따로 갈 필요 없지요
항상 웃음 짓는 낯빛 속에
생의 골이 깊게 드리워도
눈앞에 무서움이 없는 그 이름, 어머니
자식의 길 닦느라 등골 빠져 굽은 등
제자리를 찾지 못한 애석함에
천만년 사시길 기원하지만
한 입버릇 늙으면 죽어야지
오늘 그 말씀 거짓말이죠
좋고 나쁜 일, 눈 뜨면 보고 듣는 일들
이제 더 색다른 일은 없을 겁니다
―「어머니」전문
세상의 어머니는 누구나 헌신과 희생의 화신이다. 태아를 배 안에서 열 달이나 키우고 세상의 빛 속에 태어나게 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성스러운 존재이다. 그것도 남존여비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는 한국사회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처절한 삶의 질곡으로 대변된다.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살아온 길이 고초투성이지만 그 고초를 보상받을 방법이 없다. “항상 웃음 짓는 낯빛 속에 / 생의 골이 깊게 드리워도 / 눈앞에 무서움이 없는 그 이름”이 어머니다. 자식들을 위해서는 무쇠보다 강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같은 여성으로서 어머니가 살아온 길을 뼈저리게 공감하는 시인은 그 어머니가 오래오래 사시기를 기원한다. 그러면서 늙은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좋고 나쁜 일, 눈 뜨면 보고 듣는 일들 / 이제 더 색다른 일은 없을 겁니다”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안심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불어오는 바람 가득
두 손에 담고
봄의 숨결을 만져 본다
아지랑이 고물거리는
땅의 가슴 위에
해맑은 햇살
살며시 내려앉는 시간
생명들 막 터져 나온다
들판은 등이 가렵다
연두 빛 이파리도
계절을 열어젖히는
개나리도
저마다의 쪼그만 입으로
마구마구 나팔을 불어댄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소리에 끌려
봄이 온다
―「봄이 오는 소리」전문
시가 밝고 맑다. “봄의 숨결을 만지”는 사람은 싱싱하고 아름답다. 연두 빛 잎과 개나리의 “쪼그만 입으로” 불어대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소리에 끌려”서 오는 봄은 평화와 복락의 다른 이름이다. 이경이 시인은 지금 중년의 새봄을 맞고 있다. 삶의 환희가 충만해 오르고 있다. 본질적으로 모든 시인은 봄의 사람이다. 봄에서 겨울을 노래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봄의 따뜻함으로 세상을 덥혀 주는 자가 시인이다.
해설자는 이경이 시인에게 한국 최고의 시인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애 내내 오늘 같이만 하라고는 요구하고 싶다. 헛된 명예욕에 들떠 자신을 <상실>하는 사람이 아니라 차분하게 시와 삶을 병행시키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지금의 모습이 계속되길 바란다. 생이 고단할 때는 즐겁고 행복했던 유년이나 소녀 시절로 되돌아가 거기서 삶의 원동력을 다시 찾아 재충전 하고 아름다운 시로 빚어내어 돌이킬 수 없는 그 풍경들을 복원 시켜 남기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요컨대 스스로의 생이 행복한 시인이 되어 그의 시를 읽는 사람들 또한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시인이 될 것으로 믿는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남에 대해서 이경이 시인이 조용하고 안온한 시 치료사가 되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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