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상상력의 아우라, 과거로 향하는 현재
- 김인숙 시인의 시
박현수(시인, 문학평론가)
1. 고고학적 상상력의 아우라
김인숙 시인의 시적 핵심은 고고학적 상상력이다. 고고학적 상상력이란 과거의 유물이나 사건 등이 불러일으키는 환기력에 바탕을 두고 시인의 감성과 지성으로 시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상상력을 말한다. 역사서의 기록이나 유물 등에서 촉발되는 이런 상상력은 고고학에 대한 지식과 관심을 바탕으로 시의 형식과 내용을 구성한다. 정일근 시인의 다산 정약용의 서간체 시나, 상희구 시인의 발해시편, 최근 이건청 시인의 반구대 암각화 시편, 서안나 시인의 천축국 시편 등이 이런 환상을 성공적으로 활용한 시라 할 수 있다.
고고학적 상상력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작품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먼저, 작품에 아우라, 즉 어떤 신비한 환상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고고학적 상상력의 호소력은 상당 부분 시적 대상에 부여된 신화적 아우라에서 생긴다. 어떤 대상이 지닌 아우라는 작품에 대한 기대를 강화시키고 그것이 시를 읽는 데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가령 천마도, 또는 천하도 등을 시적 소재로 취할 때 이런 대상이 지닌 신비함은 사소한 표현상의 결함을 상쇄시킨다. 이것이 고고학적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환상이다.
그 다음 장점은 작품에 구체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시인이 다루는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은 그 자체로 존재할 때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생각을 가장 효과적이고도 절실하게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그런 생각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생생한 이미지가 필요하다. 이럴 때 고고학적 상상력이 많은 도움이 된다. 이런 상상력은 이미지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긍정적인 영향을 옥타비오 파스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태양의 돌」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과거의 유물을 소재로 하여 자신의 사상을 깊이 있게 형상화한 작품으로서 옥타비오 파스의 이 작품을 능가하는 작품은 없기 때문이다.
모두 불꽃이다,
눈들과 그 눈들이 바라보는 사물들 모두,
귀도 불, 소리도 불,
입술은 벌건 숯덩이, 혀는 타다 남은 나뭇조각,
손과 손에 닿는 물건들, 모두 불이다,
생각과 생각하는 이와 그 대상들도,
모두가 불타오른다, 우주는 거대한 불기둥
무(無)까지도 불탄다,
무란 별게 아냐, 불탄다는 생각 그것일 뿐,
- 옥타비오 파스, 「태양의 돌」 부분
이 작품은 아즈텍인들의 유물을 시적 소재로 삼아 시간과 존재의 본질을 노래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시에서 다루는 ‘태양의 돌’은 고대 멕시코 아스텍인들의 역법과 우주관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거대한 원형의 돌이다. 이 돌은 아즈텍인들의 시간관과 우주관을 포함한 그들의 심오한 사유를 정교하고도 아름답게 나타낸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적 대상의 이런 아우라는 파스의 시에 무게감과 신비감, 그리고 그로부터 스며 나오는 사유의 심오함 등을 부여한다. 독자는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이 작품의 소재로부터 충분한 기대감을 가지고 작품을 기꺼이 높이 평가하려는 환상을 스스로 만들며 작품을 읽을 준비를 하게 된다. 이런 과정이 작품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태양의 돌이라는 시적 대상은 시간과 존재의 본질을 다루는 파스의 생각을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한 것으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시간이나 존재의 문제는 추상적이고도 막연한 문제로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파스는 이런 문제를 태양의 돌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에 의존하여 설득력 있게 풀어나간다. 인용한 부분에서 시인은 우주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것과 무(無)마저도 그 본질이 불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주의 모든 것이 지닌 역동성, 그리고 생명성을 강조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태양처럼 타오르며 흔들리며 모든 것에 생명을 주는 존재로서의 불이 지닌 속성이 시간과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파스의 이런 생각은 태양의 돌을 소재로 함으로써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인용한 구절에 나오는 ‘불꽃’은 시인의 상상이 아니라 태양의 돌 한가운데 새겨진 태양신과 관련된 불꽃무늬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시간과 존재의 문제처럼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주제를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태양의 돌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이다.
물론 이런 상상력의 한계도 무시할 수 없다. 먼저 고고학적 상상력은 일종의 지적 부담감을 독자에게 준다. 그래서 이런 상상력이 바탕이 된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적 대상이 되는 구체적인 소재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런 사전 지식이 없다면 작품을 막연하고도 추상적으로 읽게 된다. 옥타비오 파스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태양의 돌」 같은 작품을 예로 들어 보자.
옥타비오 파스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을 때, 해당언어권의 어느 학자이자 시인인 사람이 방송에 나와 ‘태양의 돌’이 무슨 뜻이냐는 어느 방송인의 질문에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태양은 뜨거운 것, 돌은 차가운 것이라서 이 시는 성질이 상반되는 이미지의 엉뚱한 결합을 보여주는 초현실주의적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읽는다면 파스의 작품이 제대로 이해될 리가 없다. 이처럼 고고학적 상상력은 시인과 독자의 어떤 지적 공동체를 가정하게 만들고,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엉뚱한 해석을 하게 만든다.
또 다른 한계는 고고학적 상상력의 환상에 손쉽게 의존하여 자신의 부족한 역량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쉽다는 것이다. 일련의 고고학적 대상이 매너리즘의 소재로 선택되기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때 세한도가 시적 대상으로 유행했던 것이 그 예가 된다. 시는 대상에 대한 직관적 장악력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사상을 장미꽃의 향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엘리엇의 말은 평범하면서도 보편적인 진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적 능력이 소재를 감당하지 못할 때, 그 대상은 그 한계에 대한 아쉬움을 더욱 뚜렷이 드려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것이 고고학적 상상력이 야기하는 환멸이다. 이 환멸은 시인의 시적 능력의 한계를 더욱 부각시키며 소재에 억눌린 왜소한 시인을 비극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고고학적 상상력에 의지할 때 환상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환멸에 거리를 두는 균형 감각이 필수적이다.
2. 신라적 아우라를 다스리는 지혜
김인숙 시인은 신라의 유물을 주요한 시적 소재로 삼아, 이를 감각적으로 형상화하는 재능을 보여준다. 이 시인은 여성적인 어조를 잘 활용하여 시적 소재를 자신과 밀접한 존재로 만든다.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신라문학대상 당선작인 「만파식적」이다.
검은 허공을 마디마디 안고 있는 나는
당신의 더운 입김을 기다리는 피리여요
만 가지 근심이 출렁이고 있어요
속 깊이
바람을 불어넣어 내 몸을 덥혀 주어요
내려앉은 어둠을 밀어내 주어요
당신의 촉촉한 입술이 닿으면
깜깜한 어둠에 파르르 균열이 일어나지요
가지런한 내 숨구멍을 따라
당신의 손가락 끝이 움직일 때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비명이 흘러나와요
내가 깨어나는 소리여요
당신이 자아낸
푸른 음률은 북명北溟 바다를 찾아 떠나고
따뜻한 음색은 흐르는 강으로 녹아들며
하늘 아래 외로운 대나무들
무성한 숲으로 서게 하여요
내 몸속으로 들어와
깊디깊은 잠을 깨우는 당신은
어둠을 베는 섬광 같은 칼날인가요
강바닥 쿡쿡 내려찧는 상앗대인가요
소리로써 천하는 다스려지는데
당신 없는 나는 침묵이어서
슬퍼요, 서러워요
- 「만파식적」 전문
이 작품은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신라의 보물 만파식적을 소재로 고고학적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이다. 기존에도 만파식적에 대한 시는 많다. 최초의 근대시로 거론되기도 하는 김여제의 「만만파파식적을 울음」이 그 최초일 것이다. 만파식적을 다룬 시가 많은 것은 그 소재의 아우라가 시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형상화에 성공하여 문학사적 기억에 남는 작품은 거의 없다. 이런 현상에서 소재의 아우라에 기대어 시를 구성하는 노력의 한계, 즉 고고학적 상상력의 환상에 의존하는 작업의 어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만파식적을 소재로 하는 시는 소재의 위력에 시적 능력이 굴복당하기 쉽다. 이런 소재를 하나의 시로 만들 때 필요한 것은 소재의 위력과 맞싸우거나 그 위력에 투항하지 않는 지혜이다. 즉 그 위력을 적절하게 제어하여 자신의 시적 흐름을 강렬하게 만드는 지혜 말이다. 김인숙 시인은 이런 지혜를 가지고 있다. 위의 시에서 시인은 소재가 지닌 신화적 위력을 받아들여 자신의 목소리로 변용시키려 노력하였고, 그것은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시는 소재가 지닌 신화적 위력의 상승기류에 자신의 시적 능력을 잘 맡긴 작품이다. 이것이 성공한 것은 만파식적을 여성 화자로 바꾸어 신화를 자신의 상상력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한 설정 덕분이다. 만파식적이 간절한 기원을 지닌 여성화자가 됨으로써 삼국유사의 설화 속에 등장하는 만파식적의 남성적 강렬함은 오히려 더 빛을 발하며 시적 화자와 혼융일체가 되는 것이다. 첫 구절에서 대나무 피리의 마디를 “검은 허공”이라 부르고 자신을 “당신의 더운 입김을 기다리는 피리”라고 한 것, 그리고 당신의 입김으로 “어둠에 파르르 균열이 일어”난다고 한 것은 이 시를 빛나게 하는 시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상력은 다른 소재를 다룰 때에도 여실히 제 능력을 드러낸다. 「천마도장니」라는 작품을 살펴보자.
남산 속으로 걸어 들어갔지요
두 사람이더군요
길쌈을 하는 원화와
말 달리는 화랑이었죠
질풍같이 달리던 들판이 보였어요
초록바다같은 옷감이 펼쳐졌어요
서로의 눈망울로 들어간 두 사람은
숲을 차고 오르며 달렸지만
발이 땅에 묶여 있었죠
바람처럼
훨훨 하늘을 날고 싶었지요
밤마다 달을 향해 마음만 달렸어요
그랬지요,
그들은 끝내 날아오를 수 없었지요
영험한 목신의 자작나무 하얀 껍질에
일각수一角首 말을 그렸어요
비상하는 꿈을 꾹꾹 눌러 담아서
하늘을 뚫고 오르는 날개를 달았지요, 장니
말의 안장 아래 올려 푸른 하늘로 올랐겠지요
두 사람을 하늘에 실어다 준 천마는
해쓱해진 얼굴로 여태껏
장니 속에서 수천 년을 포개져 자고 있지요
- 「천마도장니」 전문
이 시는 천마총에서 발견된 장니 즉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신라적 아우라를 적극적으로 시에 도입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앞의 작품과 연계된다. 이 작품은 천마(천마도의 대상이 말이냐 상상의 동물 기린이냐를 두고 논란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말의 윤곽이 더 뚜렷하다는 것은 틀림없다)를 ‘일각수 말’로 해석하고, 이 말이 왜 말다래에 그려져 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데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한다. ‘천마’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마도는 지상에 발을 내려놓고 있는 말이 아니라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말을 그리고 있다. 짐승의 발을 마치 구름이나 인동 덩굴처럼 처리한 것은 이 말의 지상성을 천상성으로 변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이 그림을 해석하는 데 서사적 구조를 도입한다. 연인 관계로 설정된 두 인물, 즉 원화와 화랑은 그들의 지고지순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세속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런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그들이 택한 것은 예술이었다. 그것은 “영험한 목신의 자작나무 하얀 껍질에/ 일각수 말을 그”리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것은 “비상하는 꿈을 꾹꾹 눌러 담”은 실천적 행위이다. 이 예술작품이 “장니/ 말의 안장 아래 올려” 그들을 푸른 하늘로 오르게 하였던 것이다. 천마로 인하여 그들은 세속적 한계를 넘어서 하늘로 오르게 되고, 그들을 “하늘에 실어다 준 천마는/ 해쓱해진 얼굴로 여태껏/ 장니 속에서 수천 년을 포개져 자고 있”다고 하는 것이 시인의 상상력이다.
이런 상상력은 천마도에 대한 시인의 해석을 더욱 빛나게 한다. 여기에는 시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예술이 지닌 힘이 가미되어 있어 더욱 주목할 만하다. ‘세속적 한계에 갇힌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예술밖에 없다’는 암시가 그것이다. 이때의 예술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매개이자 지상을 천상으로 옮기는 매개인 것이다. 이런 해석이 이 작품을 고리타분하거나 단순한 작품으로 떨어지는 것을 잘 제어해 주었다.
시인의 상상력은 많이 유통된, 그래서 그 신화적 위력까지도 통속적으로 닳아버린 소재를 다시 생생한 상태로 복원한다. 이런 능력은 이와 유사한 소재를 다루는 시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이런 소재를 사용한 시를 시집에서 한 무리의 작품으로 모아 놓을 정도로 신라적 상상력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소재를 다루는 시인의 상상력이 소재의 위력에 무기력하게 종속되거나 그 상투성에 매몰되지 않게 하고 있다는 점이 이 시인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3. 과거로 향하는 현재
김인숙 시인의 고고학적 상상력은 신라적 아우라를 다루는 부분에서 빛을 발하였다. 그런데 이 상상력이 강렬할수록 현재의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고학적 상상력의 대상이 과거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시의 성향은 다분히 회고적이거나 과거지향적으로 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시는 과거 그 자체의 재현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시인의 해석이다. 과거는 어떤 경우에도 현재와 무관하게 그 자체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으며 언제나 현재의 개입을 요구한다. 어떤 시인이 특정한 과거를 호명한 것은 시인을 포함하고 있는 현재의 요구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인숙 시인의 고고학적 상상력도 현재의 해석이며 현재의 개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김인숙 시인의 시에서 이 과거의 호명이 어떤 점에서 현재의 요구를 담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새로운 해석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것이 현재와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회고적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작품 자체로 독립적인 영역을 잘 구축하여 미적 완결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현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지 않는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준다. 한마디로 이 시인의 시에서 과거의 위력이 너무 막강하여 현재가 상당히 위축되어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시의 중요한 특질로 흔히 제시하는 것은 현재성이다. 시간적 성격에 주목할 때 시는 “사물의 순간적 파악, 시인 자신의 순간적 사상·감정을 표현한 것, 인생의 단편적 에피소드, 영원한 현재”(김준오) 등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시가 시인의 직관적이고 순간적인 인식에 근원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현재를 영원화한다는 것이다. 시가 다른 장르에 비하여 짧은 형식과 함축적인 내용을 지니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김인숙 시인은 현재의 영원화보다는 과거의 재구성에 더 관심이 많다. 현재는 늘 과거로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시에서 현재보다는 과거를 다루는 시가 더 성공적으로 보인다. 다음에 드는 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옛 시골에는 마을마다 으레
꼭지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마지막, 끝점이 되어
배 꼭다리 떨어져 나가듯
줄줄이 태어나는 딸아이가 끝나라는
서럽고 힘든 여자의 꼭지가 되라는 뜻쯤 된다
바람願이 이름이 되고
이름이 결실이 되어 마침내 꼭지로 여무는 것이다
꼭지는
감당하기 힘든 무게를 지탱한 채
떠나보내기 위해서 속으로 말라가며
이름값에 목을 매는
서러운 자리이다
- 「꼭지2」 전문
‘꼭지’라는 대상보다는 그 이름의 과거 이력이 중심이 된 작품이다. 그리고 이것은 적절한 표현으로 한 편의 완결된 작품이 되었다. 꼭지 자체가 지닌 특성이 아니라 과거의 해석이 이 시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과거로 향하는 시선이 이 시의 탄생의 근원인 것이다. 이 경우 과거로 향하는 시선은 시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서정은 근원적으로 과거와 연계될 때 안정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사물을 겨누다 순간적으로 과거가 개입할 때 시는 다소 불안한 상태가 된다. 어머니나 아버지 등 가족의 과거를 다루는 시가 시적 긴장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우려를 고려할 때 다음은 그 위기를 잘 모면하고 있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소나기 후두둑 지나간 텃밭
푸릇한 배춧잎에 들어붙어
달팽이 한 마리 기어가고 있다
제 몸보다 더 큰 집을
보기에도 버거운 삶처럼
꾸역꾸역 짊어지고 간다
사람에게도 그런 껍질이 있다
내 아버지,
체구보다 더 큰 나뭇짐을 지고
아침마다 산을 내려오셨다
올망졸망 자식들,
평생을 달팽이 껍질처럼 지고 산
아버지의 집이었을까,
단 한 순간이라도
소나무 푸른 그늘에서
그 짐 내려놓고 쉬어본 적 있었을까
배춧잎 위의 달팽이 한 마리
어느새 저만큼 기어간다
- 「달팽이」 전문
시인의 시선은 “소나기 후두둑 지나간 텃밭/ 푸릇한 배춧잎에 들어붙어” 기어가는 달팽이 한 마리이다. 그 모습은 “제 몸보다 더 큰 집을/ 보기에도 버거운 삶처럼/ 꾸역꾸역 짊어지고” 가는 존재로 비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어떤 모습과 겹쳐진다. 시인이 이 달팽이에서 겹쳐 보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에게 그 달팽이의 집이란 무엇인가. 시인은 “올망졸망 자식들”이 바로 그 집이라 한다.
이 순간 현재의 달팽이의 등에 과거가 가득 실리게 된다. 시는 순간 과거의 상태로 들어가며, 현재는 무기력하게 그 의미를 탈취 당한다. 만일 이 상태에서 이 시가 완료되었다면 시적 긴장은 많이 손상되었을 것이다. 이런 위기에 시인은 현재를 다시 구원해낸다. 마지막 구절이 과거형으로 완료되지 않고 “배춧잎 위의 달팽이 한 마리/ 어느새 저만큼 기어간다”처럼 현재형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시는 과거와 현재의 긴장 상태에서 그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4. 첫 시집의 시인, 그리고 그 후
이번 시집은 김인숙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시인에게 첫 시집은 출발이면서 도착이며 현재이면서 과거이다. 첫 시집은 시인으로서 자신의 지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출발이지만, 동시에 이후에 펼쳐질 모든 길을 품고 있는 알이라는 점에서 도착이기도 한 것이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비교적 뚜렷한 자신의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필자는 한 마디로 고고학적 상상력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한계도 확인해 보았다. 그러나 그 외의 가능성도 확인할 수 있다.
난초는
하늘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다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베일 것 같다
그러나 난잎은 제 살을 베지 않는다
밖으로 날을 세운 건
꽃대 긴 목 뽑아 올리기 위한
단호한 결기일 뿐,
보이지 않는 날이 더 무서운 법이다
- 「난초」 전문
「난초」와 같은 작품은 고고학적 상상력과 전혀 다른 지점에 놓인다. 난초의 현재를 통찰하면서 그 속에 담긴 의미에 도달하려는 치열한 의식이 보인다. 이런 작품이 시집 전체의 긴장을 잘 유지하며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 이런 지점에서 시인의 또다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앞으로 이 시집에 담긴 여러 실마리가 어디로 향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첫 시집의 해설을 쓰는 일이 어렵고도 설레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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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박현수: 시인. 문학평론가. 경북 봉화 출생. 1992년 한국일보에 「세한도」로 등단. 시집으로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 [위험한 독서], 평론집 [황금책갈피] 등이 있음. 한국시인협회 젊은 시인상 수상. 현재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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