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월간『한국시』2011.11월호(통권 271호) 47쪽. 발표>
<2011.12.20. [경북문단] 제28호 65쪽 발표>
집 14 / 김주완
― 존재의 집
나는 있는데 나는 없다 모래사장에서 먹이를 찾는 깝짝도요는 두세 발 걷고는 머리와 꽁지를 까딱거린다 쇠물닭은 꽁지를 흔들면서 물풀 위를 걷는다 별꽃은 간밤에 가져온 하얀 별빛을 대낮의 밭이나 길가에 총총하게 뿌려댄다 이름값을 한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이름 없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소용이 없다 나는 있는데 내가 없다 하다못해 무명초라는 이름이라도 가지고 싶다
오다가다 누가 문득 던져주는 말 한마디, 이름이다 그가 그로 서게 하는 명명命名, 그러나 말에는 무게가 없다 발화되어 나오면서부터 하등식물의 홀씨처럼 풀풀 날아가거나 비눗방울처럼 가볍게 떠다니다가 푹 꺼지고 만다 말의 종말은 무소霧消이다 말이 사라지면 이름 불린 것도 사라져 없어진다 말로 부른 이름 속에 이름 불린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말 속에는 존재가 들어 있다 말의 집에는 존재가 거주하고 있다 소라게처럼 스스로 선택하여 들어간 것이 아니다 누가 그에게 이름 붙여 주었을 때, 너를 너라고 소리 내어 불러주었을 때 주술에 걸린 것처럼 존재는 말 속으로 빨려들어가 거기에 거처를 정할 뿐이다 그때부터 말은 감옥이 된다
아직 이름 없는 것, 호명되지 않은 것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없는 듯이 있는 것이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것이다 빛 속에 있더라도 빛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다 명명만이 빛 속으로 불러낸다 어둠을 밀치고 나온 것의 무게가 말에 실린다 그 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것의 크기와 꼭 비례하지는 않는 말의 무게, 무게를 넘어선 무게가 분명 말에는 있다 하늘이라는 말은 높이 올라가 있고 땅이라는 말은 낮게 엎드려 있다
집마다 문패를 단다 목각도 있고 대리석도 있다 더러 황금이나 옥돌 문패를 화려하게 달기도 한다 문패의 무게 속에 갇혀버린 사람들, 질식할지도 모른다 육중한 문패를 메고 다니느라 집의 등골이 휜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불리는 한 그들은 그 집에서 나오지를 못한다 이름 속에 유폐된 존재의 감옥
어느 날 참시인이 반신半神으로 온다 큰 망치를 휘둘러 낡고 굳어버린 말들을 깨트린다 헌 말을 새 말로 바꾸어 놓는다 새 말 속으로 새로운 존재가 빨려들어간다 말의 해방, 존재의 새로운 탄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얼마큼 지나면 집은 또 헌 집이 되고 집 속의 존재 또한 헌 것이 된다 나는 이름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말집이 없어 갇히지 않았으므로 처음부터 자유다 낡을 일이 없다 내가 없는 채로 나는 이대로 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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