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 시집 수록 시편/제2시집 어머니[1988]

다음 날 1 / 김주완

김주완 2011. 3. 11. 23:11


[제2시집『어머니』(1988)]


   다음 날 1 / 김주완



아버지가 글씨를 씁니다.

금박물병 자형이 흔들어 들고

아버지의 만취가 휘청대는 붓끝으로 글을 씁니다.

빠져나간 아버지의 정신이

붓끝으로 살아나 펄펄 뛰며

어머니를 나무랍니다.

칠흑 옻칠 올린 관 위로

흔들리는 남은 자의 슬픔,

아버지의 노여움이

한 점 한 획 정성으로 굳어집니다. 

칠십 년의 노고 끝으로

은정 몇 개 꽝꽝 박히고

맨 정신 때보다 더 힘찬 아버지의

열 자 글씨로 어머니의 일생이 마감됩니다.

일흔 두 해 어머니의 각고가

자욱한 금가루로 내려

초롱초롱 별이 되어 빛을 냅니다.

십이 년 전 먼저 가신 할머니가 굽은 허리로

어디선가 어머니를 마중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