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벽돌 / 김주완
1
생존의 끝에서 나는 나 아닌 내가 되고 있었다. 우연의 명제에 땀 한 방울 떨어지고 운명도 의미도 살 껍질 조금씩 묻은 채 삭막한 독립으로 내던져져 있었다. 내 살을 나누어 받은 이탈의 신비는 단지 나의 것이었다. 나의 운명은 나의 눈물의 것, 죽지 못해 죽음을 만드는 생산의 노작은 나의 핏줄의 것.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태초의 단절이 손의 끝 손가락 너머로 자꾸 던져지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채색된 야비野卑가 서쪽 하늘 속으로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2
너희는 내게로 와서 물을 먹이고 내 배가 버석버석 말라 터지도록 물을 빼앗고 너희의 유용을 위해 나의 단련은 되풀이 되고 있었다. 너희가 준 것을 너희가 회수하고 너희의 뜻 너희의 질서에 따라 대지의 얼굴에 배를 깐 나의 일생은 어느새 끌려가고 있었다. 누구도 살피지 않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설렁줄 흔드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희미하게, 그러나 가장 분명하게.
3
이제껏 내가 배운 건 체념이다. 스스로 시작하고 스스로 끝낼 수 있는 것들의 자유와, 시작은 아니나 끝은 제 뜻으로 마칠 수 있는 것들의 행운과, 참으로 나와는 무관한 그런 것들의 꼴사나운 꼴을 보지 않기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들의 자유 위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의 자유를 슬그머니 얹어 놓고 히죽히죽 웃기, 차갑게 보기이다.
4
너희가 때리면 나는 부서지지만 너희가 던지면 나는 날아가지만 너희의 횡포는 밤마다 오는 나의 쾌락이다, 안식이다. 부서지면서 분열하면서 펄펄 살 가루를 날리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의 꿈은 기쁨의 은밀한 노래를 부른다. 눈 내리듯 눈물 내리듯 춤추는 내 피의 가루가 너희의 그늘에 가득할 때까지.
5
기다린다. 새벽 안지랑 오거리*, 힘을 늘어놓고 노점상이 되어 너희를 기다린다. 여덟 시가 되도록 고삐는 늘어지고 눈 감고 앉아 나의 하루를 끌고 갈 너희의 선택을 기다린다. 너희의 용도와 필요의 구석에 내 할 일이 있기를, 내 뜻으로가 아니라 너희의 뜻으로 내 핏줄의 연약한 하루가 끊어지지 않기를, 어디엔가 들앉아야 할 우리의 자리를 견고한 강도와 질긴 내구의 전 재산인 나의 체력이 속절없는 아침마다 기다리고 있다. 차車의 사슬과 갈 곳 있는 사람들의 행렬이 저만큼 땅에는 흘러가고 있는데,
* 매일 아침 노동시장이 서는 대구시 대명동의 교차로
6
반려자는 숨어서 온다. 밟히지 않는 무게의 입 다문 그림자로 따라서 온다. 어머니처럼 헤진 옷을 입고 그늘을 따라 숨어서 오는 걸음, 소리 너머에서 들리는 가장 나직한 소리. 눈물 혹은 강물 같은 흐름의 부엌 바닥에 굴을 파고 숭늉이나 훑어 배를 채우며 메마른 내 육신에 피를 주입한다. 은밀한 환풍기를 역류하는 감미로운 연기를 불어 넣는다. 내가 배회하는 너희들 크나큰 건설현장이 저리도 삼엄한데. 끊임없이 그러나 물지도 짖지도 않으면서.
7
무너져 내리면 세울 것이다. 젖은 몸이 식으면, 마침내 마르면 땅의 사랑은 떠나갈 것이다. 벽이 되어 갇힌 노래는 무거울 것이다. 그러나 산 노래만이 눌린 만큼 누르며 겨워서 꾸는 자유의 꿈, 눈 먼 노래는 질량에 잡혀 충직한 어깨를 버틸 것이다. 신神의 창조는 고개 숙인 채 길을 나서고 현장엔, 속까지 스미는 한기와 차오르는 열기가 정직한 수동적 전달임을 시대의 주역들은 차단할 것이다. 처음의 돌가루와 모래알로 돌아가면 거기, 내게도 이웃이 있는 것을. 눌리고 누르지 않아도 갇히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 거기가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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