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 시집 수록 시편/제3시집 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밤 / 김주완

김주완 2011. 3. 14. 11:11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밤 / 김주완



밤은 창 밖에 있고

이쪽의 나는 저쪽에서 분열한다.

두 시 너머 다섯 시 사이

말라가면서 나무를 보는

떨어진 꽃잎은 자유가 된다.

줄을 끊고 탈출하는 저 분방한 정신의 유영;


ㅡ 시원始原의 벌판을 달려 나와 방황하는

바람의 실명失明은 무자비 하나니,

도시의 숲은 깊어지고 울창한 아파트촌

납골당 속의 사람들은 바람의 독기를 마시고

깊은 밤에 잠잔다.

낮에도 잠들었던 사람들이

깨지 않고 오랜 잠을 잔다.

삼엄한 빌딩과 빌딩의 수목 사이

차고 푸른 별은 멀리 있고

헝클어져 어수선히 탈색하는 어둠의 토양

꿈으로 쏘아 보낸 직관의 화살은

음습한 점령지에서 흙으로 돌아가고 있다.

순수는 삭고

동화는 사멸하고

단지 사람들은 잠잘 뿐이다.


가장 동물적으로

돌아보지 않고 눈 뜬 채 눈 감은 채 침몰하는

저 오랜 백년의 잠, 천년의 잠

감사 하여라!

잠잘 수 있음이여!

무덤 속에 묻힌 의식의 시신屍身은 편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아무도 생각지 못하는 사이

수의를 뚫고 손톱과 발톱이 자라나오듯

눌린 수염과 머리칼이 밀봉된 한지를 부풀리듯

잠든 육신은 은밀히 살이 찐다.

언제나 새것, 더 크고 많은 것을 쫓는

자욱한 탐욕의 날개를 펄럭이며

필경은 허공으로 살의 축적,

살의 폭발이 일어난다.

해방된 살들이 뿔뿔이 떠나가는 가운데

비로소 별빛은 한 번의 은혜로 쏟아지고

벗은 우리는 지금

부서지는 바람 앞에 선다.

참회의 눈물을 떨구며

찢겨진 지연紙鳶으로 선다.


퀭한 눈을 뜨고 남겨진 뼈는 슬프다.

비우면 채워야 하고 채우면 비워야 하는

절대순환의 검고 흉흉한 변증법이 서럽다.

감겨져 있음으로서 받는 필연의 눈뜸은

눈부시게 다가오는 불꽃의 고통,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갈증의 머나 먼 소리,

깨어있는 청력은 아프다.

짧을수록 더욱 아득한 침몰,

깊은 잠의 지나간 함몰은 아련하고

시간의 키가 아니라 뿌리의 깊이로

도달하는 별들의 열중

자주 잠들수록 자주 깨는 개체적 눈뜸의 감격,

많이 눈 뜨는 자는

깊이 고통 받는다.

가장 슬픈 자는 가장 맑은 자,

깎이고 씻기는 물돌 같은

텅 빈 순수는 그래서 아름답다.

남겨진 뼈의 퀭한 눈은 가늠되지 않는

허공의 깊이로 순수이다.

남겨진 토대로 슬픔이다.

충만의 강인한 탄력에 고개 숙이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에 나서는

아무 것도 없는 결핍으로서

모든 것을 허락하는 수용으로서

빈 순수는 충만을 압도한다.

못가진 자의 서러운 허공은 그래서

관용이다, 아량이다,

무한한 순수이다.

끝없는 눈뜸이다.

빛과 어둠의 밀고 밀리는 결전장 너머

하나의 눈뜸은 전체적 조망으로 마침내

그곳에서만 은총으로 베풀어진다.


어찌 오래 잘 수가 있는가,

이 어둔 밤에

왜 잠자고 있어야 하는가,

잠든 가운데 눈뜸은 절실하나니

더욱 자주 눈뜸으로서

더욱 많이 사를 수 있는 외경

감사 하여라!

눈뜰 수 있음이여!

빛은 계속해서 빛나지 않는다.

가장 짧은 순간에 문득 반짝일 뿐,

햇빛은 순간이다,

별빛 달빛도 순간이다.

경탄과 환희와 경이로 명멸하는

빛 앞에 선 구름장만 배회하는 법,

사라지는 것은 가까이에 남는 것,

그래

가장 짧은 빛만이 반짝이며 빛나는 것이다.

한 자락 빛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둠 속에는 아직 한 그루의

모반의 불꽃나무가 자라고 있다.

양 옆으로 돋은 탐욕의 날개를 펄럭이며

살찐 우리의 시신屍身이 어둔 정신의 뒤란을

끝없이 더듬어도 온밤 어릿한

천상天上의 달,

지금은 갇힌 불, 목 잠긴 불이 되어

잠든 지상地上의 외벽을 곁눈질 한다.

밤 앞에 고개 숙이는 두터운 전경,

지엄한 배경의 하명에 깨어있는

청력은 아프다.


무수한 눈뜸을 누려라,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서

당초의 순수에 체류하라,

끝없이 버림으로써 시원始原으로 회귀하라.


ㅡ 이 어두운 밤에 잠 아닌 무엇을

우리는 할 수 있는가,

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