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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왜관 첨상(瞻想)/김주완

김주완 2025. 2. 28. 13:28

칠곡문화원, <칠곡문화> 제20집, 2024.12.31., 100~116쪽

 

왜관 첨상(瞻想)

 

김주완[각주:1]

 

○ 프롤로그

 

이 글은 왜관에 대한 술회이다. 소설이나 기록이 아니다. 주장이나 논증도 아니다. 다만 나의 기억과 회상 그리고 가벼운 상념(想念)을 따라가며 서술하는 작은 소묘(素描)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누구든지 얼마든지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은 그들의 서술 지평에서는 전적으로 옳을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종류의 토론이나 논쟁에 대해서도 나는 미리 문을 닫는다.

이 글의 시간축은 내가 태어난 1949년부터 현재인 2024년까지 75년 동안이며 공간축은 나의 출생지인 왜관읍과 칠곡군 일원이다.

 

○ 아름다운 칠곡

 

왜관은 1914년 이래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이다. 행정구역 안의 8개 읍면 가운데 제일의 위상을 아직은 지키고 있다. 그러나 칠곡군은 1978년에 인동면이 구미시에 편입되고, 1981년에는 칠곡읍(지금의 대구 북구 칠곡지역)이 대구시에 편입됨으로써 행정구역이 축소되었고 지금은 칠곡 없는 칠곡군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칠곡군에는 지금 ‘칠곡’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이다. 칠곡향교, 칠곡초등학교, 칠곡중학교가 모두 칠곡군이 아닌 대구시 북구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한강 정구가 만년에 와서 강학하였던 사수(원래는 칠곡군 칠곡읍 사수동) 지역도 지금은 대구시 소속의 ‘한강근린공원’이 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의 칠곡 학자로서 영남 유학을 대표하는 여헌 장현광이 강학을 위해 창건한 동락서원(1610년 창건 당시의 명칭은 ‘부지암정사’이며 칠곡군 인동면에 속해 있었음) 또한 구미시에 속해 있다. 중앙고속도로 칠곡IC가 대구 북구에 소재하고 있어서 칠곡군으로 오는 자동차가 그곳 대구로 잘못 가는 경우도 자주 있다.

 

이처럼 실제와 맞지 않은 행정구역 명칭에 문제의식을 느끼거나 관심을 가지는 자는 거의 없다. 칠곡군에 칠곡이 있든 없든 살아가는 데에는 지장이 없어서일까? 이름이 존재를 규정한다. ‘칠곡군’이라는 행정구역 명칭은 과연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의 역사적 정위는 어떻게 가리게 되겠는지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리 빼앗기고 저리 빼앗긴 후 남은 이곳, 변함없이 ‘칠곡군’으로 불리는 이곳은 여전히 아름답고 길한 곳이다. 떠난 것은 아쉽지만 남은 것은 있는 그대로의 지금으로서 아름답다.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곧고 곱다. 나는 오래전에 <아름다운 칠곡>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칠곡은 아름답다. 이름이 아름답고 지세가 조화롭다. 칠곡군 지도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경북 남서부에 자리한 칠곡군은 호랑나비의 형상을 하고 있다. 날개를 활짝 편 커다란 호랑나비 한 마리가 살포시 앉아 있는 것이다.
 
왼쪽 앞날개 위쪽 끝은 금오산 자락을 누르고 있고 오른쪽 앞날개 아래쪽 끝은 팔공산에 걸치고 있다. 왼쪽 뒷날개 꼬리는 성주대교에 이르고 오른쪽 뒷날개 꼬리는 지천철교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왼쪽 날개 죽지에는 북에서 남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서북으로는 경부고속국도와 경부선 철도 그리고 KTX가 힘차게 벋어 있다. 오른쪽 날개 중앙 부분에는 남북으로 또한 중앙고속국도가 내닫고 있다. 호랑나비의 두 날개 위에 지방도는 물론, 군도, 면도, 리도가 호랑 무늬인 듯 사통팔달로 이어져 있다.
 
호랑나비의 머리와 가슴에 해당하는 곳은 석적읍 성곡리, 망정리, 도개리, 반계리이고 배에 해당하는 곳은 왜관읍 아곡리, 봉계리, 매원리, 삼청리이며 그리고 지천면 연화리와 금호리가 배의 끝에 해당한다. 이곳들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펼쳐진 너른 호랑나비 날개 위에서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산들이 여기저기 용솟음치면서 칠곡군의 기상을 뽐내고 있다.
 
호랑나비는 길한 곤충이다. 기쁨과 행복을 상징한다. 그래서 아침에 호랑나비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고, 이른 봄에 호랑나비를 보면 신수가 좋아진다는 말이 있다. 호랑나비의 지형을 가진 칠곡은 길한 곳이다. 귀히 쓰이는 인재들이 이곳에서 줄지어 나올 것이다. 호랑나비가 앉아 있는 것은 꿀이 있기 때문이다. 칠곡은 꿀이 흐르는 땅이다. 이제 한반도의 상공으로 커다란 호랑나비가 너울너울 날아올라 그 당당한 위풍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

-졸고, <아름다운 칠곡> 부분[각주:2]

 

○ 혓바늘이 돋는 이름-왜관

 

왜관이라고 발음하면 입에서 까끌까끌한 혓바늘이 돋는다. 왜관이라는 이름에는 상주나 성주 같은 의젓함이 없고 청송이나 청도 같은 청량함도 없다. 포항의 쇳내나 구미의 공단 분위기도 없고 경주나 대가야 같은 예스러움도 없다. 왜관(倭館)은 ‘조선 시대에, 입국한 왜인(倭人)들이 머물면서 외교적인 업무나 무역을 행하던 관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이 머물던 집이 왜관이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전국에 많이 소재하고 있었겠지만 그 이름이 아직 남아서 행정구역 명칭으로 사용되는 곳은 이곳 왜관읍 밖에 없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1 선봉대가 동래에 상륙해 이곳 왜관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는 주 침략로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왜관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그해 8월 3일 왜관에는 소개령이 내려 주민들이 피난길에 나섰고, 전후하여 9월 24일까지 55일 동안 왜관 북동쪽에서는 다부동전투가 6.25 전쟁 최대 혈전으로 치러진다. 이 사이 북한군의 점령지가 되었다가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돌파하던 날 왜관에도 주민들의 복귀 명령이 내려져 마침내 피난민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8월 16일 정오를 전후하여 26분간 이어진 B-29 폭격기를 이용한 미군의 융단폭격은 960톤의 폭탄을 이곳에 투하했다. 이 폭격으로 인민군은 큰 타격을 받아 패전의 길에 들어섰고 왜관 일대는 초토화되었다. 당시 왜관읍 건물의 80%가 소실되었는데 왜관동 211-15번지의 우리 집은 그나마 북한군의 야전병원으로 징발되어 폭격을 면했다. 피란에서 돌아와 본, 집의 뒤쪽에 있는 200평의 밭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야전병원에서 나온 피 묻은 거즈랑 폐기된 의료 기구들이 쌓여 있었다.

 

왜인들이 밟던 땅, 동족상잔의 아비규환이 있었던 땅에 1960년 5월 이후에는 미군이 들어와 캠프 캐럴이라는 병참 기지를 만들어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다. 한동안 부대 후문 일대(왜관읍 석전동)에는 ‘텍사스 거리’라는 것이 생겨서 홍등가와 향락가로 성업을 이루기도 했다. 왜관은 이방인의 땅이며 전쟁의 땅이며 떠도는 사람들이 거쳐가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왜관’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는 혓바늘이 돋은 듯이 입안이 깔깔해진다. 한때, 이 이름 ‘왜관’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잠시 있기는 했다. 그러나 세계 전쟁사에 오른 주요한 곳의 지명이기에 쉽게 바꿀 수 없다는 이유로 무산되었다. 나중에 도시가 커져서 시로 승격되면 그때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여지도 남겼다. 그러나 시 승격은 여전히 요원하다.

 

나는 약력을 쓸 때 출생지를 ‘경북 칠곡’이라 하지 않고 ‘경북 왜관’이라고 줄기차게 명시한다. ‘칠곡’이라는 이름의 혼란성을 피하자는 의미도 있겠지만, ‘왜관’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자랑스럽지는 않아도,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부끄러운 이름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은 존재의 옷이다. 한때 입었던 남루한 옷도 나의 옷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그 옷을 입었던 존재로서의 거기 왜관이다. 존재가 부끄럽지 않은데 존재가 잠시 입은 옷이 부끄러울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더 좋은 새로운 옷이 있다면 갈아입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때로는 새 옷이 새날을 열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 강변 도시,  왜관

 

왜관은 강변 도시이다. 낙동강이 왜관을 끼고 서쪽에서 흐른다. 강가에서 태어나서 강가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생각이 막혀 있지 않고 세상을 담는 가슴의 품이 넓다. 나는 왜관 낙동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강을 끼고 있는 도시는 풍요하다. 젖줄 같은 물을 찾아 자리 잡은 천혜의 요람이다. 파리의 센강이나 런던의 템스강, 서울의 한강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강변으로 둑길이라도 만들어져 있는 도시는 낭만과 운치가 있다. 왜관 낙동강의 십 리 강둑길이 그러하다. 한국 현대사의 아픈 상흔이 역사적 유물로 남아 있는 왜관철교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낙동강을 따라 제2왜관교에 이르는 강둑길이 2km 남짓이고 북쪽으로 칠곡보에 이르는 산책로가 2km여서 합하면 대략 십 리에 달한다. 강 건너 서쪽에도 그만한 길이의 산책로가 있다. 산책로로서는 딱 알맞은 거리이다. 그 강으로 봄이 오고 여름이 열리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머물다 비켜나는 생(生)의 순환이 되풀이된다.

-졸고, <강둑길을 걸으며> 부분[각주:3]

 

강변 산책[각주:4]

 

집을 나선다.

 

나의 산책길은 왜관 낙동강이다. 지도상으로 보았을 때 낙동강의 유일한 직강 구간이라 할 수 있는 지점이다. 왜관읍 시가지 서쪽에 위치한 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직선으로 흘러간다. 매일 오후 3시쯤 강가에 있는 나의 집에서 나와 강의 좌안을 따라 남쪽을 향해서 걷다가 제2왜관교를 서쪽 방향으로 건너 강의 우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와서 다시 동쪽 방향으로 인도교(낙동강 구 철교, 호국의 다리)[각주:5]를 건너 집으로 돌아온다. 8km 거리이다. 대학 강단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2008년 이래 지금까지의 나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물가를 걷는 일이다.

 

강둑의 서편에는 옛 왜관나루터[각주:6] 자리가 있다. 옛 자취는 완전히 사라지고 지금은 둔치가 되어 버린 선창가 자리에 표지석만 덩그러니 서 있다. 강 건너 강정나루터에는 철로 침목을 총총히 세우고 그 위에 얼기설기 걸쳐 놓은 잔교가 있었고 이 다리 밑으로는 푸른 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물가는 삶의 근처에 있고 가장자리에 있어 언제나 벼랑이다. 197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던 강정나루에 달뜬 정경을 잊을 수 없다. 물가()에 달()이 뜨면 그곳이 애월이다. 애월은 제주도 북제주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걷는 이 강가에도 지난밤에 뜬 달이 아직 남아 있다. 강물에 얕게 떠 있는 희미한 낮달에 다가가려면 나는 지금 까마득한 벼랑을 내려가야 한다. 강의 벼랑이 아니라 영혼의 벼랑이다. 벼랑 아래로 흘러가는 길을 따라 깜깜한 책장을 넘겨야 한다.

 

나는 평생 외로웠다. 사람과 지식으로서는 채울 수 없는 허공이 내 속에 있었다. 나의 영혼은 어떤 안내도 받지 못한 채 길의 끝까지 하염없이 갔다가 허무하게 돌아왔다. 들뢰즈와 자크 아탈리가 규정한 대로 인간의 속성은 <호모 노마드(Homo Nomad)>에 있다. <유랑하는 인간>은 누구나 상실한 자기 자신을 찾아 끊임없이 순례의 길을 떠나지만 결국은 허무를 손아귀에 움켜쥐고 길을 돌아오거나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사람의 삶은 <길 위에서의 삶>이다. 삶은 길이고 흐름이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라고 하는 자크 아탈리의 명제는 불편하지만 불변이다. 물이 드나드는 왜관 아랫개에서 나의 고독과 방랑은 시작되었다.

 

꽃을 보는 눈이 있었다
계절 밖에서도 꽃은 피었다
 
(중략)
 
물이 드나드는 길의 끝에서 가로수는 만나고
 
나는 섬이 되어 떠내려가면서도 꽃 피는 섬으로 눈길을 보냈다 섬의 큰 키와 휘날리는 머릿결은 가물가물 피어나는 붉은 구름 사이에서 물결처럼 출렁이다가 사라지곤 했다
 
(중략)
 
바다의 끝에 닿을 때까지 파도처럼 지지 않고 꽃은 피기만 할 것이다 흐르는 길을 따라 보는 이가 없어도 저 혼자 필 것이다
 
꽃은 질 때 꽃잎을 떨군다

―졸시,「왜관 아랫개에 대한 다큐」 부분[각주:7]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제2왜관교를 건넌다. 다리 중간에서 오른쪽으로 강의 상류를 조망하면 멀리 인도교와 왜관교, 기차 철교 너머 칠곡보가 보이는 먼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250년 전 칸트는 프레겔강변을 걷고 230년 전 괴테는 마인강변을 걷었는데 나는 지금 낙동강변을 걷는다. 극복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시간대이지만 지구과학적인 큰 시간대에서는 어쩌면 엇비슷한 지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대는 중요하지 않다. 강변을 걷는다는 사실, 걸으면서 인간과 자유와 평등을 사유하고 세계와 해방과 평화를 생각한다는 사실, 잃어버린 나 자신을 찾아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세계를 질서 지우고 인간의 본질을 밝히며 우리 속의 수많은 창고에 숨어있는 미지의 보석들을 캐내는 작업이 바로 물가를 걷는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칸트나 괴테에 감히 비할 수 없는 미미한 존재이지만 ‘걸으면서 이루었다’는 그들의 방법은 따르고 있다. 내가 쓴 대부분의 시편은 왜관 낙동강변을 걸으면서 착상이 되고 구성이 되었다. 걷다 보면 막힌 말이 물 흐르듯이 걸어 나오고 말의 집이 지어지는 것이다.

 

칸트의 산책길은 불후의 일화를 남기고 있다. 태어난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칸트는 매일 오후 대학 연구실에서 나와 시가지를 거쳐 프레겔강변을 걸었다. 그의 철학이 정확성과 체계성으로 단단하게 구성되어 있듯이 그의 산책 또한 규칙성으로 이루어졌다. 얼마나 정확한 산책이었으면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시계를 맞추었다고 하지 않는가.

 

제2왜관교를 건너서 강변을 따라 북쪽 방향으로 걷는 길은 기산면 지역으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좌우로 도열한 황톳길이다. 이국적이다. 1Km에 조금 못 미치는 짧은 길이지만 봄에 돋기 시작한 초록 잎들이 여름에 무성했다가 가을이면 붉은 갈색으로 단풍이 들고 낙엽으로 진다. 겨울에는 나목으로 지난다. 어느 계절이건 이등변 삼각형의 첨탑으로 뻗어 오른 수형이 아름다운 건 매 마찬가지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말로만 듣던 독일의 <철학자의 길>과 <괴테의 산책로>가 떠오른다. 하이델베르크 네카강 건너편에 있는 철학자의 길은 헤겔, 하이데거, 야스퍼스, 막스 베버가 걸었던 길이다. 칸트는 고향을 떠난 적이 없으므로 이 길을 걸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괴테의 산책길은 11km 정도이며 3시간 정도가 걸리는 거리인데 프랑크푸르트 마인강 우안을 따라서 가다가 아이젤너 다리를 건너서 유럽의 심장부라고 불리는 비즈니스 중심지를 지난다고 한다. 독일 인문학의 발상지라고 한다. 일본 교토, 캐나다 토론토, 샌프란시스코에도 철학자의 길이 있다. 한국에도 서울 서초구 양재천에 칸트의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다. 산책길은 과학적 실험의 길이 아니라 인문적 사유의 길이기에, 유랑하는 인간의 속성을 충족시켜 주는 공간이다. 길을 가면서 길을 찾는 인간, 유랑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인간, 걸으면서 세계로 미래로 나가는 인간의 인간다움이 바로 이러한 산책길에 있다.

 

메타세쿼이아 길이 끝나면 잠시 이팝나무 길과 대나무 길이 이어지다가 그다음 약목면 관호리 지역으로 들어서면 데크로 조성된 잔도가 나온다. 강을 따라 강물 위로 높게 설치된 구조물이다. 산기슭에 비스듬히 선 물버들, 수양버들, 뽕나무의 가지들이 지나는 사람들의 머리 위까지 드리워져 있다. 오른쪽 아래로는 출렁거리는 물결이 강안에 철썩이고 있다. 중간쯤에 아늑한 휴식 공간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몇 그루 늙은 수목의 무성한 그늘 아래 강물 위에 잔도를 넓혀서 설치한 데크가 있고 10여 명이 쉴 공간을 따로 만들어 난간을 세우고 앉을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양옆으로 난 잔도는 굽어서 나가고 발아래는 강물, 등 뒤는 산기슭이다. 포근하고 안온하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나는 거기를 ‘그녀의 집’이라고 나 혼자 이름 붙여 부른다. 여기까지 오면 걸음을 멈추고 물을 마시면서 그의 품속에서 느긋하게 쉰다. 어느 여인의 품이 이렇게 아늑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대개 혼자서 이 분위기를 즐긴다. 뽕나무에서 오디가 떨어지는 오월이면 갓 떨어진 오디를 주워서 먹기도 하지만 발에 밟혀 뭉개지는 것이 부지기수라 가히 발 디딜 틈이 없어진다. 조금 지나면 약간의 오르막도 있지만 요즘 말로 뷰가 정말 좋다. 오른편 전방으로 강을 가로지르는 인도교의 상판 트러스트가 선과 조형미를 뽐내며 그림처럼 아름답게 서 있다. 각진 돌로 쌓은 오래된 교각도 일정한 간격으로 도열해 있어 은근히 친근하고 정감이 간다.

 

나는 물가를 걷는다. 혼자서 걷지만 시공간을 넘어 영혼이 맑은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 하기락 교수, 구상 시인, 박찬선 시인, 김성국 교수, 김인숙 시인과 함께 걷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칸트, 헤겔, 괴테, N. 하르트만, M. 하이데거, 횔덜린과도 함께 걷는다. 사람은 숙명적으로 고독한 존재이지만 정신의 영역은 경영하기에 따라서 외롭지 않을 수 있다. 도서관 속의 고독은 고독이 아니라 풍요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인도교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서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은 지쳐 있다. 피곤하지만 몸과 마음을 비워 개운하다. 가득 차 있으면 답답할 텐데 몸도 마음도 숨쉬기가 훨씬 편해졌다. 인도교도 그럴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의 시간대에선 숨이 막혔을 텐데 다른 시간대인 지금은 강물 소리를 들으며 적막에 들어 있다.

 

인도교를 건너며 인도(人道)를 생각한다. 여기서의 ‘인도’는 당위가 아니라 존재이며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실존적이다. ‘인도(人道)’는 ‘사람의 길’이다. 사람이란 무엇이며 길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불사름’이다. 태어나면서 불붙인 불꽃을 평생 꺼트리지 않고 이어간다.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면 불꽃이 꺼진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그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불꽃처럼 뜨겁게 자신을 태우다가 이승을 떠난다. 길이란 무엇인가? 길의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길의 의의는 길을 가는 데 있다. 길이 있어 길을 가고 길이 끊어지면 길을 이어서 간다. 길의 끝에는 으레 목표가 있다. 길의 끝까지 갈 수 있다면 목표에 도달해서 좋은 것이고 가지 못한다면 가야 할 곳이 아직 남아 있어 좋은 것이다. 길은 살아있음을 증거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길 위에서 살아 있다. 길 위에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 길 위에 있는 자는 길 위에 있으므로 살아있는 것이다. 길이 끝나면 삶도 끝난다. 죽음은 길에서 내려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의 길이 끝나고 목표가 달성되면 다른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새 길을 나선다. 그런 의미에서 길은 정지성이 아닌 운동성이며 정적이 아니라 동적이다. 완료형이라기보다는 영원한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길이 길로 이어지는 연유이다.

― 졸고, <도(道)를 찾아 길을 나서다> 부분.[각주:8]

 

길은 가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人道)’은 ‘인생길’이며 ‘초목이 살아가는 길’은 ‘초목길’이다. 누구든 그의 길을 간다. 그만의 삶의 길을 치열하게 걸어간다. 이 길은 앞으로만 열려 있으며 뒤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앞으로만 열린 길도 한 걸음, 한 걸음 나갈 수만 있고 한꺼번에 건너뛰어 미래로 갈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한계 속에 있으며 연약하다. 그러나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미래는 상상으로 먼저 가볼 수 있고 과거는 회상이나 반성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인간만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위대하다.

 

인도교를 건너면 집이 있다. 집이란 무엇인가? 집은 어머니다. 인간은 누구든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조금 넓혀서 생각하면 세상 만물이 모두 그러하다. 만물은 모두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도 있고 심리적 공간으로서의 집도 있으며 영혼적 공간으로서의 집도 있다. 이 모든 집은 사랑의 집으로 귀결된다. 사랑의 집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다. 미래의 집은 내일 다시 상상하자. 현재의 집은 지금 들어간다. 들어가면서 과거의 집을 회상한다. 아름답다.

 

횔덜린[각주:9]도 회상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멀리까지 가서 힘들게 얻은 가정교사 자리에서 3개월 남짓 만에 해임된 그가 1801년 5월 10일 남프랑스의 보르도를 떠나 2개월간 걸어서 고향인 독일 뉘르탕겐으로 돌아가던 길에 스친 남ㆍ중 프랑스의 가론느 강과 돌도뉘 강의 가파른 강 언덕과 여울과 그 위의 참나무와 은백양나무의 모습을 회상[각주:10]한다. 프랑스에서 독일로 들어가는 관문 슈트라스부르크로 가는 어둡고 긴 숲속 고갯길을 넘은 그는 4년 뒤에 마침내 그의 가난하고 어둡고 긴 마지막 단칸방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는 거기 상주하였다. 그의 시 속에도 상주했다.

 

“상주(常住)하는 것은 그러나 시인이 건설한다.”[각주:11] 상주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집이다. 시(詩)가 집이다. 집은 어머니이고 시는 고향이다. 산책을 끝낸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시로 돌아간다. 그러나 나의 집인 <시의 집>은 아직도 미완성이다. 영원한 미완일 것 같다. 그래도 나는, 하루치의 산책인 또 한 번의 유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 정다운 왜관의 지명들

 

1970년대까지 왜관은 웃개와 아랫개라는 명칭을 썼다. 지금의 왜관역 정문에서 낙동강을 향하여 서쪽으로 난 당시의 중앙통을 기점으로 하여 북쪽은 웃개이고 남쪽은 아랫개였다. <개>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나 강물이 드나드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미루어 보면 지금의 왜관읍 돌밭(석전동)과 회동 아래의 전 지역에 강물이 드나들었다고 볼 수 있다. 전쟁 직후에는 병정놀이를 하면서도 웃개와 아랫개 아이들이 편을 나누어서 놀았다. 아랫개의 강변을 갱빈이라 불렀고, 구상문학관 남쪽에는 선창가가 있었다. 왜관나루터 주변을 그렇게 불렀다. 선창가 도로 양옆으로는 작부가 있는 술집이 몇 군데 있었다. 왜관역 정면 서쪽 방향의 중앙로 4길에는 구장터가 있었고 지금의 왜관시장은 새장터라 불렀다. 새장터는 싸전, 어물전, 포목전, 사기전, 옹기전, 나무전 등이 있었고 아랫개에 있던 우시장이 지금의 중앙로 왜관북부공영주차장 부근으로 옮겨와 있었으며 간혹 그곳에 씨름판을 만들고 큰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구장터 부근에는 물이 좋다고 이름난 명품 우물인 청로샘이 있었다.

 

왜관 구장터쯤에 청로샘이 있었지
벽이 트인 사각의 양철지붕 천정에 녹슨 도르래가 걸리고
물이끼 축축한 돌벽 안,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바닥에서
줄에 매달린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렸지
(중략)
더러 투명하게 아늘거리는 물벌레가 따라 올라왔지만
궁해도 맑고 신나는 날들이 축축하게 불끈거리던
왜관 구장터쯤에 청로샘이 있었지

―졸시,「청로샘」[각주:12] 부분

 

이 밖에도 역사적으로 인재가 많이 배출된 양반 고을로서 돌밭(석전동), 매원, 달오[각주:13]가 왜관에 있고 지형적ㆍ혈연적으로 이어지는 웃갓(지천면 상지)[각주:14]이 있다. 하나같이 정겹고 운치가 있으며 선비적 풍모가 느껴지는 지명들이다.

 

○ 아련한 풍경들

 

1950년에서 1960년 초반까지의 왜관 풍경이 의식의 스크린으로 불현듯 스쳐 갈 때가 있다. 그것들은 어쩌면 한국전쟁 직후의 황량한 사회적ㆍ지리적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치열하고도 끈끈한 삶의 약동이었을 수 있다.

 

지금의 왜관읍 중앙로2길(왜관역 정면 서쪽 두 번째 네거리) 남쪽에는 공회당이 있었다. 거기서는 반공웅변대회가 자주 열렸고 학생부와 일반부 연사들이 나와서 피를 토하는 웅변으로 전쟁의 참상과 반공을 외쳤다. 1958년 왜관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학교 대표로서 그해 웅변대회에 출전한 적이 있다. 왜관초등학교 운동장은 선거 유세장으로 간혹 쓰임을 받아 민의원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입후보자들이 합동 연설을 하며 기세를 올리기도 했다. 매년 가을에 열리는 왜관초등학교 운동회 날에는 갖은 행상들이 몰려와 운동장 주변에 전(廛)을 벌이고 학부모가 아닌 읍민들까지 모두 모여서 즐기던 축제장이 되기도 했다.

 

각종 국경일이나 기념일 행사 후에는 으레 왜관읍을 한 바퀴 도는 시가행진이 있었다. 맨 앞에는 순심중고등학교의 악대부가 행진곡을 합주하면서 행렬을 이끌어 나갔다. 악대부 뒤쪽으로는 높은 사람들과 지역의 유지들이 줄지어 행진하였다. 트럼펫, 트롬본, 호른, 튜바 등의 금관악기와 플루트, 클라리넷 같은 목관악기는 햇빛을 받아 광채가 번쩍거렸고 심벌즈나 큰 북과 같은 타악기는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로 지축을 흔들었다. 대원들의 제복은 칼날처럼 줄이 선 바지에서부터 몸에 착 달라붙는 상의까지 멋의 극치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어린 나를 압도했던 것은 여고생인 악장의 늘씬한 키와 시원스러운 걸음걸이는 물론, 절도 있으면서도 현란한 손끝에서 움직이는 지휘봉이었다. 공처럼 생긴 손잡이 위 지휘봉의 날카로운 꼭대기 끝에 달려 출렁거리는 황금빛 수술이었다. 어느새 도취되어 악대부 옆을 따라가던 나의 발걸음에는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막 신이 났다.

 

왜관역 광장에서는 자주 영화가 상영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야외극장 비슷한 것이다. 기둥을 세워서 하얀 스크린을 매달고 어둠 속의 뒤편에서 영사기가 돌아가면 원근 마을에서 나온 주민들이 흙바닥에 주저앉아서 영화를 관람했다. 지지직거리며 화면에 가로줄이 생기는 낡은 필름의 흑백 영화를 모두 몰입하여 감상하였다. <아리랑>, <백치 아다다>, 각종 <전쟁영화>를 주로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허장강, 장동휘, 조미령, 황해 같은 배우들이 주연이었다.

 

이어서 유랑 악극단과 서커스단이 왜관에 자주 들어왔다. 지금의 왜관북부버스정류장 부근에 주로 자리를 잡았다. 천막으로 만든 가설극장 안에 가설무대를 세우고 한 달 이상씩 머물면서 매일 몇 차례씩 공연을 했다. 배우와 종사자들은 인근 가정집에 월세방을 얻어 놓고 숙식을 해결하였다. 우리 집 아래채에 세 든 주연 배우 부부는 아침마다 풍로에 밥을 짓고 찌개를 끓였다. 무대에서는 분장한 얼굴과 화려한 복장을 했던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자고 일어난 부스스한 머리로 엉거주춤 나와서 밥을 짓는 맨얼굴은 우리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과 같은 것이어서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서커스단에는 원숭이와 자전거 묘기, 그네 묘기가 신기했고, 악극단의 연극으로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나중에는 약장수들이 들어와 같은 자리에서 악극단 비슷하게 노래와 연극을 하면서 약을 팔기도 했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 사이에 삼성극장이 왜관에 들어서면서부터 왜관역 광장에서 무료로 상영하던 영화는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지금의 중앙로9길에 중앙극장이 들어서고 나중에는 왜관북부버스정류장 북쪽, 왜관소공원 남쪽에 신도극장이 들어서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극장이 3개씩이나 왜관에서 성업을 했다.

 

극장이 생긴 후에는 주로 영화가 매일 상영되었고 입구에는 속칭 기도(kido)라고 하는 문지기 겸 입장권을 받는 사람이 서 있었다. 1960년대 초 삼성극장에는 ‘토니’라는 기도가 있었다. 곱슬머리를 목덜미까지 내려오게 단발을 한 키가 크고 젊은 남자였다. 단검을 잘 던지는 사람인데 왼쪽 팔뚝에 칼을 넣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었다. 극장에는 간혹 쇼단이 들어와서 화려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샹들리에의 현란한 불빛 아래, 이동하는 조명을 따라서 가수들이 걸어 나와 노래하였고 중간중간에는 만담과 원 맨 쇼도 하였다. “동남아 공연을 마치고 방금 귀국한 ○○○”라고 너스레를 떠는 사회자의 입담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TV가 없던 시절이라 가수나 연예인의 공연을 직접 볼 수 있는 방법은 쇼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인 1966년 삼성극장에 들어온 쇼단에 가수 문주란이 있었다. 나와 동갑인 17세의 문주란은 샛노란 민소매 미니 원피스를 입고 무대에 나와 ‘동숙의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바짝 마른 체구에서 나오는 묵직한 동굴 저음에 놀라 멍하니 바라보는 나의 눈에는 문주란이 소녀로는 보이지 않았고 어느 다른 세계에서 온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 폭설이 내리던 왜관

 

지구 온난화로 지금의 왜관은 겨울이 와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오 육십 년 전만 해도 폭설이 자주 내렸다. 눈오는 밤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1965년 1월 28일은 순심중학교 제17회, 순심고등학교 제11회 졸업식이 지금의 1번도로에 있던 삼성극장에서 열렸다. 남자부와 여자부가 서로 다른 교정에서 격리된 채 학창 생활을 하다가 졸업식 날은 한자리에 모여 행사를 거행하였다. 졸업식이 끝나고 난 후 순심중학교 남자부 졸업생과 여자부 졸업생 십수 명이 어떻게 서로 부킹이 되어 밤에 한자리에 모였다. 지금의 구상문학관 남쪽 과수원 집 양옥 건물이었다. 그 과수원 집 아들인 이형수(현 칠곡문화원장)가 제공한 장소이다. 중학교는 졸업했고 고등학교 입학은 아직 하지 않은 상태라 잠시 학생 신분을 벗어난 처지를 마음껏 활용하여 밤새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다. 그날 밤 자정 무렵 왜관에 폭설이 내렸다. 우리는 모두 밖으로 나가 사과밭과 바깥의 도로에서 깔깔거리며 눈싸움을 하였다. 달오다리(월오교, 지금의 구 달오다리)까지 눈길을 밟으며 나란히 걷기도 하였다. 목단추를 푼 교복 차림의 소년들과 땋은 갈래머리에 세일러복 차림의 여학생들이 자박자박 심야의 눈길을 걷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있고 아름다웠다. 그때의 친구들이 그로부터 60년이 지나는 지금까지 변함없는 우정으로 자주 만나며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중에 두 쌍의 부부가 탄생하였는데 곽수봉ㆍ박월란과 김주완ㆍ조경환이다. 두 쌍 모두 무탈하게 한 생을 살고 지금은 편안한 노후 생활을 하고 있다. 그날 밤을 모티프로 하여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6년에 단편소설 한 편[각주:15]을 썼고 근래에는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썼다.

 

(상략)
내가 처음 목격한 백야에는
하얀 옥양목이 천지간에 펼쳐져 있었다
쉼 없이 하늘에서
하얀 목화송이가 속절없이 쏟아져 내렸다
하얀 길 위의 나는 하얀 유니콘이 되어
눈부시게 하얀 키 큰 나무를 따라
긴 뿔을 쳐들고 하염없이 걸었다
(중략)
눈길을 밟고 오는 순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사의 기척일 것이라 생각했다
눈길을 밟으면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뽀드득 뽀드득
단단히 여미어 끌어당기는 찰진 소리가 났다
(중략)
잠시 눈부시고 오래 슬프게 가는 길
나설 때는 황홀하지만
돌아올 때는 쓸쓸한 길이 사랑이었다
사방이 길인 하얀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떠돌지 않으며 서 있을 나무는 어디에도 없다
방랑은 그러므로 싱싱하고 절실하고 성스러웠다
(하략)

―졸시,「눈 내리는 겨울밤에 월오교를 걸었다」[각주:16] 부분

 

○ 왜관의 큰 바위 얼굴

 

왜관 사람은 왜관에 사는 사람이다. 왜관을 사랑하거나 그리워하는 사람도 왜관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이다. 거기에 더해 왜관을 지키고 가꾸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왜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왜관 사람은 아름답고 따뜻하다. 품위가 있고 자존심이 강하다. 왜관 사람에게서는 문화적 향기가 나고 인격에서는 샘물 같은 청량함이 느껴진다.

 

너대니얼 호손은 그의 소설 <큰 바위 얼굴>에서 고향의 참된 지도자상을 부각시킨다. 세간에서 흔히들 출세했다고 말하는 재력가나 장군이 아니고, 정치인이나 시인이 아니라, 이름 없이 한평생 고향에 살면서 자기 마을을 사랑하고 아끼며 가꾼 사람이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진정한 지도자라고 한다.

 

왜관의 큰 바위 얼굴은 누구인가? 국회의원이나 군수, 지방의원과 같은 선출직들을 나는 거론하지 않겠다. 그들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사가(史家)들이 냉철하게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관의 큰 바위 얼굴로서 나는 나의 죽마고우를 지목한다. 장규석, 이형수, 노말복, 곽태한이 그들이다.

 

앞의 세 사람은 태어나서 한 번도 고향 왜관을 떠난 적이 없으며 지방공무원으로 한평생을 봉직했다. 장규석은 부이사관으로, 이형수와 노말복은 서기관으로 정년퇴직했는데 주변에서는 청백리라 했다. 곽태한은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퇴직 후에는 개인 사업을 하여 성공한 사람이다. 우리 모임(청수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큰 몸집에 어울리게 중후하며 양보와 헌신에 능하다. 노말복은 노년에 서예에 심취하여 신선처럼 살고 있다. 깊은 사유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 촌철살인의 한 마디 말로 사태의 정곡을 찌른다. 이형수는 양반가의 후예답게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침착하며 곧은 지조와 결기를 갖추고 있다. 퇴직 후에도 칠곡군 자원봉사센터 소장으로 봉사한 후 지금은 제19대 칠곡문화원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장규석은 순심중학교 총학생회장 출신답게 신중하고 입이 무겁다. 말하는 것 보다 듣는 것을 좋아하며 배려심이 넓다. 일찍부터 훤한 이마가 뒷머리까지 확장되어 머리 전체에서 광휘가 난다. 이들은 나의 70년 친구로서 그동안 단 한 번도 서로 간에 다툰 적이 없다. 지금도 매주 금요일에 만나 함께 점심 식사를 나누고 있다.

 

물론 왜관의 큰 바위 얼굴로서는, 이외에도 왜관을 지켜 온 나의 많은 동기생 친구들이 있을 것이며 그보다 더 많은 선ㆍ후배들이 모두 다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기회가 된다면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나의 죽마고우들은 하나같이 높은 인격을 갖추고 있어서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이 없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대화할 때도 낮은 음성으로 한다. 겸손이 몸에 밴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를 낮추므로 남을 우러러본다. 그러나 비굴하지 않다. 긍지를 가지면서 당당하게 자기를 낮춘다. 낮춘다고 자기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낮출수록 스스로 커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또한 서로에 대해서 정중하며 언제든지 상대방을 배려한다. 친구 사이지만 나는 그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크게 가진다. 정신이 맑고 인격이 고매한 그들을 나는 현대판 선비라고 부르며 언제나 윗자리에 그들을 앉히고 나는 말석으로 물러나 앉는다. 서울, 부산, 대구 등 외지에 사는 동기들이 모교나 고향에 일이 있으면 모두가 이들에게 연락한다. 이리하여 이들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우리 동기생들의 구심점이 되어 있다. 왜관의 큰 바위 얼굴로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다.

 

○ 왜관 정신과 칠곡 정신

 

조선 시대 낙동강 중류 지역의 유학을 흔히들 ‘낙중학’이라고 한다. 대개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을 낙중학의 원류로 본다. 여헌 장현광은 원래가 칠곡인이고 한강 정구는 성주인으로서 만년에 사수에 와서 강학하였으므로 두 사람 모두 조선 중기 이후 칠곡 정신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 낙중학은 퇴계학과 남명학을 받아들여 종합한 학문이다. 강안학파(江岸學派)라고도 한다. 칠곡 지천에 있는 녹봉정사가 강안학파의 강학 장소였다고 한다. 이론과 실천, 어느 한쪽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양쪽을 양 날개로 삼아 균형추 구실을 한 것이 낙중학이다.

 

낙중학을 근거로 한 칠곡 정신은 통합, 종합, 실용의 정신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쪽에 경도되지 않는 유연성과 균형성일 것이다. 흑역사라면 흑역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찍부터 왜관이 낙동강 수로를 이용한 왜인들의 무역 장소였다면 왜관의 교역 정신은 글로벌 정신으로 이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왜관 정신이나 칠곡 정신이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종합주의, 실용주의, 유연성, 균형성, 글로벌 주의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관해서는 전문 학자들의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연구를 장려하고 진작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 에필로그

 

상전벽해(桑田碧海)는 '뽕나무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라는 말이다. 세상의 변천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웃개, 아랫개로 나뉘던 소박한 마을이었던 왜관이 지금은 많이 변했다. 인구수나 주택의 종류와 규모, 번화가의 이동 등 이제는 중소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전략)
저기 어디쯤,
웅덩이가 있던 자리에 공중목욕탕이 들어서고
코스모스 긴 꽃대가 흔들리던 철둑 근처엔 모텔 출입문이 외지게 나 있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 어둠 깊은 들길이 열리던 곳은 지금 예식장이다
땅에도 기운이 있고 쓰임이 있는 것이다
바람도 풀도 나무도 부림이 있다
(중략)_
저기 어디쯤
나를 낳은 어머니가 있다
자정 넘은 눈길이 있다
첫사랑이 있다
(하략)

―졸시,「저기 어디쯤」 부분[각주:17]

 

왜관은 무상해도 왜관은 항상하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옛 모습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왜관은 왜관이다. 사람이 가고 와도 왜관 사람은 왜관 사람이다. 그것을 정체성이라고 한다. 정체성은 사물이 아니기에 보거나 만질 수는 없어도 왜관 사람들의 마음속에 건재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줄기찬 강물로 마음속에서 흐른다. 그런 의미에서 왜관은 역사를 넘어서는 역사성을 가진다. 왜관이여 영원하라! 왜관 사람들이여 끝없는 강물로 흐르시라!

  1. 김주완(金柱完) : 1949 경북 왜관 출생. 시인(구상 시인 추천으로 1984현대시학추천 완료). 철학박사(예술철학 전공). 대구한의대 교수(대학원장, 교육대학원장, 국학대학장, 교무처장, 기획처장, 행정처장, 홍보실장, 제한의료원 기획관리실장), 대구교육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대한철학회장, 한국동서철학회장, 새한철학회장 역임. 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그늘의 정체, 주역 서문을 읽다, 선천적 갈증외 다수. 카툰에세이집 짧으면서도 긴 사랑 이야기. 저서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미와 예술외 다수. 논문 시와 언어, 시의 정신치료적 기능에 대한 철학적 정초외 다수. 한국문학상ㆍ경북문학상ㆍ경북예술대상 수상. 2015, 2024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한국문협 이사ㆍ경북문협 회장 역임. ) 운제철학상 운영위원장. [본문으로]
  2. <칠곡신문> 2008년 9월 4일 게재. 칠곡포럼 회보 <풍경소리> 창간호, 2018.01. 재게재. [본문으로]
  3. <칠곡신문> 2009년 3월 31일 게재. [본문으로]
  4. 김주완, 철학 에세이 「물가를 걷다」, ≪낙강문학≫ 창간호, 낙동강문학관, 2022.10.25., 30~52쪽. 이 글에서는 그 일부를 축약하여 옮긴다. [본문으로]
  5. 현재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와 약목면 관호리를 연결하는 낙동강의 교량이다. ‘칠곡 왜관 철교’, ‘인도교’, ‘낙동강 구 철교’, ‘호국의 다리’로 불린다. 일제가 1905년 군용 단선 철도로 개통한 경부선 철도교로서 약목역과 왜관역 사이에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로 건설되었다. 1914년 11월 30일 이곳에서 북쪽 100m 지점에 길이 510m의 복선 철교가 가설되면서 이 다리는 경부선 국도로 사용되어 왔다. 이 철교는 한국전쟁(1950~1953) 시 북한군과 유엔군의 주력 부대 사이에 격전이 전개된 중심 지역에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한 달이 조금 지난 때인 1950년 8월 3일에는 왜관 소개령이 내려졌고 전체 주민은 피난길에 나섰다.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같은 날 오후 7시 40분 경 미군 제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의 명령으로 왜관에서 약목 방향의 제2 경간이 폭파되었다. 이때 다리를 건너다 희생된 피난민들의 참상은 아비규환이었다는 구전이 있다. 이후 같은 해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돌파하던 날 왜관에도 피난민들의 복귀 명령이 내려졌는데 이때까지 이곳 낙동강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면서 아군과 UN군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오늘날에는 ‘호국의 다리’라고 명명되고 있다. 1953년 휴전 후 목교(木橋)로 임시 복원된 후 차량과 사람이 함께 내왕하는 인도교로 사용되었다. 교폭 4.5m의 1차선 다리로서 장차(오일장이 서는 인근 지역으로 상인들의 물건 보따리를 실어 나르던 화물차)가 간혹 지나다녔지만 차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주로 사람들이 걸어서 이용했던 다리여서 인도교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1979년에 홍수 피해를 입어 교각이 유실되자 통행이 전면 차단되었다. 이후 1991년 8월에 보수작업에 착수하여, 전면 복구가 완료된 1993년 2월 10일부터 차량 통행은 금지되고 사람의 통행만 허용하였다. 이때 설치한 동판으로 제작된 교명판(橋名板)에는 ‘낙동강구철교’로 표시되어 있다. 4대강 사업이 진행되던 2011년 6월 25일에 집중 호우로 서쪽 끝부분의 교각 1개와 상판 2개가 유실되었으나 2013년 4월 30일에 완전 복구하였다. 상판 크러스트 철판에는 아직도 크고 작은 포탄과 탄환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2008년 10월 1일에 문화재청에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으며 등록문화재 제406호(칠곡 왜관철교)가 되었다. [본문으로]
  6. 원래는 ‘돌밭나루터’였는데 왜관이 생김에 따라서 ‘왜관나루터’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강의 동쪽인 왜관읍 쪽으로는 왜관(돌밭)나루터가 있고 강의 서쪽인 기산면 쪽에는 강정나루터가 있어서 나룻배가 오고 갔다. [본문으로]
  7. 김주완 시집, 『선천적 갈증』, 서울:문학세계사, 2023.10.16., 50~51쪽. [본문으로]
  8. 김주완 칼럼, <도(道)를 찾아 길을 나서다>, 칠곡포럼 회보 《풍경소리》 제5호, 2019.04. 38~39쪽. [본문으로]
  9. 횔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őlderlin, 1770~1843) 독일의 시인, 몹시 가난하게 살다가 35~6세(1805~6) 때 정신착란을 일으켜 그 뒤부터 튀빙겐의 한 단칸방에 갇혀 있다가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대 그리스 시의 고전적 형식을 독일 시에 도입하고 그리스도교와 고전이라는 두 주제를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횔덜린은 생전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100년 가까이 거의 완전히 잊혀 있다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횔덜린 연구와 여러 차례에 걸친 강연을 통해 재조명되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해명’의 존재론 건설에 횔덜린의 시는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0. 횔덜린 시, 「회상」 1연. [본문으로]
  11. 횔덜린 시, 「회상」의 마지막 행. [본문으로]
  12. 김주완 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서울:문학의 전당, 2013.08.26., 67쪽. [본문으로]
  13. ‘달오’는 속칭이고 원래는 '월오(月塢)‘이다. 월오는 '달이 뜨는 후미진 곳' 또는 '달마을'이란 뜻이다. [본문으로]
  14. 웃갓은 ‘윗가지’가 음운 변이된 것이고, 한자로는 상지(上枝)이다. 마을의 생김새가 매화나무의 윗가지(높은 가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상지라 불리었다. [본문으로]
  15. 김주완,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이브」, 대구고등학교 교지 《달구》 6집, 대구:경북인쇄소, 1967.01.20., 134~143쪽. [본문으로]
  16. 김주완 시집, 『선천적 갈증』, 서울:문학세계사, 2023.10.16., 54~56쪽. [본문으로]
  17. 김주완 시집, 『선천적 갈증』, 서울:문학세계사, 2023.10.16., 46~47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