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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해설] 박춘식 시집 <어머니 하느님> / 김주완

김주완 2008. 5. 31. 08:18

 

<해설>

모성 지향적 기다림의 시학

― 속죄의식 그리고 도덕적 자유의 실현 ―


김주완

시인/철학박사/대구한의대 교수


1. 은자(隱者)로서의 시인의 삶


일흔이 넘은 나이에 처녀시집을 상재하는 박춘식 시인은 늦깎이 시인이라면 아주 많이 늦은 늦깎이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피상적 인식에 불과하다. 그는 생래적인 시인이며 삶 자체가 시로 영위되는 시인이다. 그러니까 등단 여부를 떠나 이미 시인이었고 시적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은자(隱者)의 삶을 살아온 시인은 칠곡군 왜관읍 연화리에서 도예가인 부인과 함께 전원생활을 해 오고 있다. 시인의 집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단번에 느낄 수가 있다. 정남향 2층 반양옥 건물의 너른 1층 공간 전체를 서재 겸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다. 시인은 여기서 주로 시를 쓰지만 그뿐만 아니라 서예도 하고 서각도 한다. 부인이 도자기를 굽는 공방은 별채로 독립하여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앞의 정원도 넓지만 건물 뒤의 정원은 더욱 넓다. 잔디를 심어 특별히 관리하지 않고 크는 대로 키우고 있다. 뒷 정원이 끝나는 부분의 중앙에는 성모 마리아 상이 서 있다. 집 마당에서 바로 인근 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도 열려 있다. 따로 울타리를 치지 않은 것이다. 마당의 동편 끝에는 산과 접해 있는 작은 계곡이 흐른다. 비라도 조금 내리면 개울물이 콸콸 쏟아져 내린다. 2007년 여름, 내가 처음으로 시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이 이러하다. 시인은 이런 곳에서 정적(靜的)이며 구도적인 삶을 살고 있다. 시단에 등단을 하고 시집을 내는 이러한 형식적 절차 이전에 이미 박춘식 시인은 내밀하고 정관적인 시적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은자로서 기도하며 살아가는 시적 삶이 그의 삶이다.

 


2. 자기규정성으로서의 속죄의식


정관적 삶을 사는 박춘식 시인은 그러나 겨울 속에 서 있다. 그 겨울은 스스로 자신을 가둔 독감방(獨監房)이다. 겨울 속에서 시인은 하염없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이 시집의 맨 첫째 시편으로 「봄을 기다리며」를 싣고 있다.


사랑하는 이를

저 세상에 보낸 사람은

스산한 독감방獨監房에 자신을 가둔다

고드름은 햇살로 오색을 뽑아내지만

꽃망울을 만들지 못한다

마음 아픈 사람에게

따사로움이 가장 좋은 처방이다

―「봄을 기다리며」 부분


시인은 ‘마음 아픈 사람’이다. ‘따사로움이 가장 좋은 처방’인데 시인은 추위 속에서 떨고 있다. 추위의 결정체인 고드름은 햇살로 오색을 뽑아내어 찬란한 빛을 낸다. 그러나 고드름이 꽃망울을 만들 수는 없다. 시인은 마음이 아프다. 박춘식 시인의 마음이 아파야만 하는 본래적 이유는 무엇인가? 죄의식 때문이다. 시인이 ‘저 세상에 보낸’ ‘사랑하는 이’는 누구인가? 시인이 가졌던 꿈으로 읽힌다. 시인은 그가 가졌던 목표와 꿈을 버린 일에 대한 죄의식으로 마음 아파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질문과 대답은 이 시집 전편을 통해서 밝혀야 할 것이다.

 

시인이 스스로 자기를 규정하는 의식세계는 한 마디로 속죄 그 자체이다. 시인은 젊은 시절 천주교 신부로 서품을 받았고 월남전 종군 신부의 어려운 길도 마다하지 않은 자이다. 박춘식 시인의 형제자매 중 3명이 신부이고 1명이 수녀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지낸 고(故) 박도식 신부가 시인의 형이다. 그러나 4명의 성직자 중에서 유독 박춘식 시인만이 나중에 환속하고 만다. 환속의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자격이 모자란다고

자신 없다고 신부神父 옷을 벗었다


부모 마음에 대못을 박고

형제들에게 씻지 못할 상처만 주며

교회 신자들을 섬겨야 하는데도

오만의 극을 보여주고 군림하여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주는

정말로 못난이가 되었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작은 방

내 마음의 방이 점점 어두워진다

납덩이처럼 무겁고 칙칙해진다

이제

참회의 무늬 벽지로 바꾸고 싶다

우중충한 속죄의 장판을

조금 더 밝은 것으로 깔고 싶다


신부 옷을 벗는 일은

또 다른 모양의 원죄라는 생각이

초승달 모서리처럼 느껴지던 날

―「환속還俗」 전문


시인은 ‘자신이 없어서’, ‘스스로 자격이 모자란다고’ 생각하여 ‘신부 옷을 벗었다’. 그것은 ‘원죄’가 되어 스스로 만든 ‘마음의 방이 점점 어두워’지고 ‘납덩이처럼 무겁고 칙칙’해진다.

 

신부 옷을 입은 자나 벗은 자나 윤리학적으로는 인격이다. 신격(神格)도 물격(物格)도 아닌 인격(人格)이다. 경험적으로 행위하고 착오하는 인격은 죄를 저지른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자기 자신 죄책을 지려고 하는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죄의식은 가책(嫁責)과 인책(引責)에 맞닿아 있다. 가책은 <책임지움>이고 인책은 <책임짐>이다. 천주교 사제로서 자신이 없고 자격이 모자란다는 가책에서 신부 옷을 벗는 인책을 시인은 부담하였고, 신부 옷을 벗었다는 가책에서 죄의식이라는 인책을 짊어진다.

 

죄의식은 인격 자체를 부정하고 압박하고 심지어 생명을 위협하는 경향조차 있다. 죄는 머리를 들어 자기의 인격을 위협한다. 죄는 그 중량으로 사람을 누르고, 다시 일어설 수 없게 한다. 죄를 지었다는 느낌은 매우 실감적이다. 인간 위에 운명처럼 엄습해 온다. 그것은 문득 다가와 심판하고, 부정하고, 힘으로 눌러서 복종시킨다. 그런데도 이 침입자를 외래자로 느끼지는 않는다. 자기 속에 자기를 심판하는 하나의 힘이 나타난 것으로 느낀다. 죄의식에서 자기 마음 속 법정은 극히 확실한 실재로 된다. 누구나 이 현상을 양심의 소리로 알고 있다. 양심에서 자기의 도덕적 태도는 회한이다. 죄의식과 회한은 일체의 반성에서 독립한 현상이다. 자기의 행위에서 윤리적 반가치가 느껴지자마자 내적 필연성을 갖고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필연성과 불가피성에 의하여 시인은 자기 자신의 환속을 원죄라고 느끼며 자기가 갇힌 독감방의 벽을 ‘참회의 무늬 벽지로 바꾸고 싶어’ 한다. 시인은 자기가 책임을 느낄 때면, 책임지려고 한다. 시인은 도덕적으로 성숙한 자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발달한 사람의 경우, 만약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지움이 거부되면 자기의 인간됨의 품위가 손상되는 것으로 여긴다. 일종의 자격박탈과 품위격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인은 지나간 자기를 책임지기 위하여 지금의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 가두어 버린다. 다음의 시편이 또한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늘을 부여잡듯

맨몸 파르르

두 손 치켜든다

외면하는 바람

가지 사이로 휑하니 빠져 나간다


점점한 별들 자욱이 쏟아지면

눈물 같은 별들

달빛이 쓸어 담아 갈까


얼어붙은 겨울나무

그 안에 내가 갇힌다

―「겨울나무」 전문


맨몸으로 겨울을 나야 하는 겨울나무는 곧 시인 자신이다. 시인은 얼어붙은 나무로 겨울을 나고 있다. 시인은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나무’의 고어인 ‘나모’를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아호雅號로 쓰고 있다. 나무 속에 갇힌 시인은 길을 가다가 넘어진 사람이다. 곧추 선 채로 또박또박 자기 길을 가지 못하고 넘어진 자는 곧 죄인이다. 시인은 스스로 자신을 대죄인(大罪人)으로 규정한다.


― 저 사람은 누구지

― 신부神父하다가 그만 둔 사람이야

― 그럼 파계破戒했군

― 파계도 되지만 환속還俗이지

― 속물俗物되었으니 눈총 많이 받겠구먼


태양은

종탑 위 십자가도 만지고

길바닥에 떨어진

부러진 십자가도 내려 본다


하늘에서 보면

서 있는 사람은 점點으로 보이고

넘어진 사람은 선線으로 보인다

점 보다는 선이 눈에 더 띈다

애써 만든 변명,

그분은 선을 볼 때

더 쓰린 눈길을 보내지 않을까

―「대죄인 1」 전문


실존적 시인은 변명한다. 하느님의 위치에서 내려다보면 곧추 서 있는 사람(점)보다 넘어져 누워있는 사람(선)이 더 잘 보일 것이고 하느님이 보내는 사랑의 눈길은 넘어진 사람을 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신부라는 신분은 버렸지만 신앙은 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독실하게 하느님의 품에 파고들고 있다. 시인은 이제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죄인인 내가 하느님을 알고 믿으면서

때로는 그분을 배반하고, 그분께 대들고

그러다가 용서를 청한다

―「세 번째 성경」 부분


나에게 일흔이란

일곱 번 용납하라는 말일 거다

일곱 번에 일흔 번을

용서하고 용서 받아야 하는 나이


나의 고희는

보기 드문 대죄인이란 뜻이고

나의 종심從心은

이제 마음을 자연 안에서

조용히 가지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숱한 잘못에 대한 속죄와

뿌리째 넘어지는 자세로 참회하는 나무

그 나무에서

연둣빛 싹이 돋기를 기다린다

―「연둣빛 새싹」 부분


일흔 나이에 시인은 용서받고 싶어한다. 환언하면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용서는 종교의 특권이며 신앙의 특혜이다. 용서받음으로써 인간의 죄는 제거된다. 인간은 죄로부터 해방되고 정화되며 부활한다. 그러나 용서는 내가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자가 주어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용서받음은 확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기 확신이 되기가 힘든다. 따라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용서를 기다리는 일뿐이다. 용서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면서 다만 용서 받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믿음으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연둣빛 싹이 돋’는 것이 시인에게는 곧 용서를 의미한다. 아래의 시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시인은 이승에서는 받을 수 없는 것이 용서라고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자기 자신을 ‘죄지은 잡놈’으로 규정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스스럼없이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인이 하느님으로에게 용서 받았는지 어떤지는 여전히 확인할 수 없지만, 시인은 이미 자기 자신을 스스로 용납하고 용서함으로써 죄에서 해방되고 정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은 이제 범속(凡俗)에서 초월하여 있는 것이다. 아래의 시에서 우리는 그것을 읽을 수 있다.


걸레스님이 찾아와

나를 보고 잡놈! 하기에

큰 잡놈! 이라고 화답하며 웃었다


죄의 골짜기 속 깊이

나는 잡것으로 있었고

잡놈으로 갇혀 있었다


내가 이승을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기도해주면 저승에서

잡놈이 별놈이 되리라

그리고

걸레스님에게

큰 별놈이라고 불러야겠다

―「잡놈」 전문


시인은 저승에 가면 별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죽은 시인을 위하여 기도해주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시인은 더 할 수 없이 속죄하는 삶을 살았다는 자기믿음이 있다. 그래서 이승에서는 용서받지 못했더라도 저승에 가면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고, 지상에서는 잡것으로 살았지만 저승에서는 가장 맑은 별로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시인의 자기용서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또한 자기 자신의 속된 삶이 걸레스님인 중광스님의 기행(奇行)보다는 때가 덜 묻었다고 여유를 부릴 줄도 안다. 아마 시인의 연배가 중광스님보다 몇 년 아래인지라 상대방을 공대하는 마음도 여기에는 담겨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살아온 햇수만큼 때가 묻을 거라는 시인의 생각은 소박하다 못해 순수하다.

 


3. 모성지향의 시 정신


박춘식 시 세계의 정수는 모성지향의 시 정신이다. 그는 ‘고체화 되어 가는’ ‘두렵고 꺽꺽한 하느님을’ ‘포근한 엄마 가슴처럼 만들’고 싶어한다.(「어머니 하느님 1」) 시인은 마침내 ‘하느님은/천 개의 부드러운 손을 가지고/만 개의 젖가슴을 가진/엄마이다.’(「어머니 하느님 2」)라고 규정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어머니로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시인은 내놓고 하느님을 어머니로 부른다. <아버지 하느님>이 아니라 <어머니 하느님>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을 부성(父性)이 아닌 모성(母性)으로 이해하고 싶어하는 시인의 염원이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염원을 넘어선 시인의 신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 같은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하느님의 모성에 대한 논의가 심심찮게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국내에서는 이러한 논의가 드러나게 나타났던 일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박춘식 시인의 개방적 사고와 부드러운 심성을 엿볼 수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모성의 징표는 대지이다. 대지는 만물을 그의 품에 안으며 생명을 잉태하고 산출한다. 대지는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대지는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하면서 자기보다 높은 모든 것을 떠받든다. 대지는 겸손하면서도 가장 큰 사랑을 지니고 있다. 대지는 곧 어머니의 표상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하늘에서 땅으로 하느님을 모셔오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엄마라는 말보다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럽고

더 향긋하고

더 위대한 단어는 없다


― 엄마

두 글자 안에

하느님 얼굴이 보인다면

두 글자 안에

하느님 마음이 가득하다면

정말 좋겠다

―「엄마라는 말」 전문


하느님을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시인은 ‘하느님은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기도」) 같은 존재가 되기를 기도한다. 이러한 모성지향의 박춘식 시인의 시 정신의 근저에는 육친(肉親)으로서의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다.


어릴 때

엄마가 옹기를 팔러가던 십리길

대매장날은 기다림을 배우던 날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엄마를 부르지 않는다


마당 가 옹기 그릇 안에

엄마 냄새가 있고

집 뒤 미루나무에는

엄마 그림자가 있지만

집안 어느 구석에도 엄마 소리는 없다


해가 서산에 앉을 때

언덕에 올라 엄마를 기다린다

엄마 머리 위에서 걸음 따라 움직이는

까만 보자기 매듭이 보이면

동생과 나는 마구 뛰어 간다

엄마 얼굴을 보고서야 배고픔을 느낀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콧등이 뜨거워진다

―「대매장날」 부분


대매는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재지의 속칭이다. 아마 장꾼이 많고 큰 매매가 이루어지는 장이 선다고 하여 ‘대매장’이라고 부른 것 같다. 그 대매장에 시인의 어머니는 옹기를 팔러 가고 어린 시인은 학교에서 돌아와 텅 빈 집에서 어머니를 기다린다. 간절한 기다림으로 배고픔도 잊고 있다. 해 저물녘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면 어린 시인은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향해서 뛰어간다. 그제야 허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시인은 이때부터 기다림을 배웠던 것이다. 아름답고 부드럽고 향기로운 어머니, 시인의 시원(始原)이며 안식처인 어머니, 그 어머니를 하느님처럼 기다려야 함을 배운 것이다. 환속한 후에는 하느님이 어머니처럼 멀리서 다가와 주기를 시인은 기다려 왔다.

 

그리고 시인은 성모 마리아님을 하늘마마라고 부르면서 하느님의 모성까지 깊이 느끼게 된다.


― 하늘의 어머니

― 하늘 엄마

― 하늘 마마


하늘을 땅까지 끌어내린다

땅을 하늘까지 떠받쳐 올린다

온 몸으로 천궁天宮을 끌어안고

아름다운 별이 된

하늘마마!


동서남북을

그리고 상하좌우를 품고 있는

하늘마마, 이 네 글자는

나의 기도

나의 하소연

나의 마지막 희망이다

―「하늘마마」 전문


하늘마마는 ‘온 몸으로 천궁天宮을 끌어안고/아름다운 별이 된’ 자이다. 시인의 끝없는 기다림은 이제 하늘마마의 품에 정착한다. 하늘마마는 시인의 우주와 우주 속의 시인을 끌어안고 안식을 주는 어머니 같으면서도 하느님 같은 존재이다. 시인의 ‘기도’이며 ‘하소연’이며 ‘마지막 희망’인 하늘마마는 다름 아닌 시인이 매일 부르고 매달리는 성모 마리아님이다.

 


4. 종교적 구제 그리고 도덕적 자유의 실현


70년이라는 생의 긴 길을 시인은 걸어왔다. 끝없는 ‘기다림’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걸어서 온 것이다. 어머니를 기다리면서 보낸 유년에서 출발한 시인은 어머니 하느님의 용서와 구제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하느님의 품에 도달하려고 한다.


바라다보는 일은

존재를 서로 이어주는 일이다

손 보다 끈끈한 눈길로

우리는 매일, 많은 이음새를 잡고 있다


산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를 만들어가며

바라다보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실존은 원죄처럼 종교와 도덕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다. 구제를 기다리는 죄의식이 시인의 의식 한 편에서 여전히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구제’는 종교적 문제이고 ‘죄의식’은 도덕적 문제이다. 종교와 도덕은 언제나 이율배반을 이룬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면밀히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먼저 시인이 바라보는 스스로의 자화상을 살펴보자.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헛꽃이

오늘도 미소 짓고 있다, 내 모습인양

―「헛꽃」 부분


멀리멀리 흘러야

자꾸 풀려야 얼지 않는 겨울강

―「겨울강」 부분


시인의 자화상은 한편으로는 헛꽃이 되어 하느님의 구제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편에서는 얼지 않기 위하여 멀리멀리 겨울강으로 흐르는 시인의 자화상이 있다. 전자는 신앙인으로서의 자화상이며 후자는 양심의 소리에 충실한 도덕적 존재로서의 자화상이다. 종교와 도덕의 경계선에서 갈등하는 시인은 자신의 자화상을 곶감으로 은유하기도 한다. 아래의 시는 처절하다 못해 섬찍하다.


피부가 몽땅 벗겨졌다


작은 바람도 칼바람 되어

쓰리게 스쳐가고

햇볕은 송곳처럼 콕콕 찌르며

새 피부를 만든다

모든 핏줄이 피억새 되어

안으로 안으로 조이듯 엉킨다


가슴에 박히는 못들이

얼마나 많은 피멍을 만들면

내 마음이 검붉게 익을까

―「곶감」 전문


여기서 우리는 종교와 도덕의 이율배반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위(2)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용서는 받을 자가 받고자 한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줄 수 있는 자가 줄 때만 받을 수 있다. 박춘식 시인의 경우, 용서를 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느님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경험적 실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의 용서라는 것은 형이상학적 가상일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는 용서해 준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존과 실존 사이에서는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마음으로 그렇게 정리하는 것이지, 사실로서의 죄는 여전히 남아 있다. 시인은 이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경험적 실재가 아닌 신의 용서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고, 죄를 저지른 자도 마음속에서 씻어 내지를 못했다. 그래서 시인의 속죄는 끝없는 진행형이다.

 

죄개념에는 가치갈등이 있다. 죄의 부정과 죄의 긍정이 함께 있다. 죄에서 도피하려는 마음과 죄를 인정하려는 마음, 해방의 동경과 책임의 의지가 있다. 죄를 긍정하고 책임의지가 강한 사람은 도덕적인 자이다. 죄개념의 가치갈등 배후에는 자유의 부정과 긍정이 있다. 죄의 긍정은 자기의 자유를 긍정함인데, 죄의 부정은 자기의 자유를 부정함이다. 죄 지은 자는 속죄하고 용서 받기를 바란다. 죄에서 해방되고 싶은 동경은 내적 파산의 표시이다. 종교는 그 구제 사업을 이 파산 위에서 구축한다. 구제는 인격의 자립을 박탈하고 자유를 포기시킨다. 여기에서 종교와 도덕, 구제와 자유의 이율배반이 일어난다.

 

인간의 신에 대한 종교적 관계는 신 앞에서 그가 범한 죄상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신에 의하여 죄에서 구제되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도덕적 죄는 하나의 무거운 짐이라는 것, 사람은 그것을 스스로 인수하여 부담하거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짓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 본질이다. 그러나 종교적 개념으로서의 죄에는 제2의 요소가 첨가된다. 죄는 인간과 그의 행위에서 분리될 수 있는 ‘실체적인 어떤 것’으로 된다. 왜냐하면 구제는 바로 죄의 제거요, 인간의 면죄요, 인간의 해방이요, 정화요,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악은 본래 나쁜 행위 또는 나쁜 의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그야말로 취소될 수가 없고, 구제가 되더라도 전혀 폐기되지를 않고, 오히려 다만 용서 받을 뿐이며 문책되지 않을 뿐이기 때문이다. 본래의 악은 짐이요, 짊어져야 함 그리고 짐으로 인하여 도덕적으로 방해됨이다. 윤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악행에 대한 죄책은 누구에게서도 제거될 수 없다. 죄책은 범행자에게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죄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도덕적 책임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죄책의 영원함과 폐기될 수 없음은 도덕적 자유와 관련이 있다. 죄책을 단죄하는 가치가 존립하는 한, 죄책은 필연적으로 존립한다. 도덕적 공적과 마찬가지로 죄책도 사람이 죽은 뒤까지 남는다. 악행은, 자기 행위의 가치론적 성질이므로, 설사 범죄자가 마음을 바로잡은 후라 할지라도, 그것이 악행임에는 변함이 없다. 타인이 그것을 용서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타인의 도덕적 행위이지 자기의 죄에는 상관이 없다. 도덕적으로 악행을 극복할 수는 있으나, 죄 자체를 파괴할 수는 없다. 죄책을 짊어짐은 매우 불유쾌하고 고통이고 고뇌이고 직접적 벌이다. 죄책은 결과일 뿐이다. 죄책이 불러일으켜진 한에서, 그것은 자유의 한 계기이고, 그 도덕적 고유가치의 계기이다.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자는 죄책을 면제받고자 할 수 없다. 박춘식 시인과 같이 자기 자신의 죄책을 자기 스스로 평생에 걸쳐서 짊어지고 가는 사람은 높은 도덕적 경지에 이른 사람이며 자유를 행사하는 도덕적 자유인이다.

구제는 윤리적으로 불가능하며 반가치적이다. 그런데 종교적으로는 가능할뿐더러 인간이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중대하고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종교적 견지에서는 자유는 아무래도 좋을 부차적인 것이지만, 윤리적 견지에서는 자유는 가장 높은 가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장 강한 가치이다. 정명제(구제 받을 수 없다)와 반명제(구제 받을 수 있다)는, 한편은 종교생활의 현상에 의하여 지지되고 다른 편은 윤리생활의 현상에 의하여 지지된다. 한편 입장에만 서는 사람에게는 다른 편 입장은 부자연하고 무리한 입장으로 생각될 수 있다. 피차 타방을 무리라고 느끼는 곳에 이 이율배반의 특징이 있다. 이것이 구제이율배반의 본질이다. 이 이율배반은 풀리지 않는다. 이 배반은 종교가 불러낸 것이므로, 그 해결은 종교철학적 임무에 속하겠지만, 종교철학에서도 풀리지 않는 영원한 수수께끼일 것이다.

 

박춘식 시인은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와 있는 자이다. 신부 옷을 벗은 일은 그에게 도덕적으로는 자유를 행사한 것이 된다. 그 일이 도덕적으로 악이 될 어떤 이유도 없다. 오히려 자유를 행사한 용기와 결단은 치하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 왔으며 용서를 끝없이 기다리고 있다. 용서와 구제는 종교적 문제이다. 따라서 시인은 도덕적 자유와 종교적 구제의 교집합 지대에서 해결되지 않는 이율배반의 형벌을 받아 온 셈이 된다. 나이 일흔이 된 이제야 시인은 달관하고 초극(超克)하는 시선을 확보한다.


저기 저쯤 가면 끝나는 길

겹쳐진 상처를 내디디어

눈물 넘치지 않도록

이제라도 괭이 잡고 소쿠리를 들어야겠다


내 삶이 끄트머리까지

돌밭 가는 길이 될 수는 없다고

중얼 중얼거리면서

―「돌밭 가는 길」 부분


한평생 죄의식이라는 돌밭길을 걸어온 시인은 그가 걸어가야 할 남은 길에서 이제 돌들을 주워 내고자 한다. 생의 끝이 그렇게 멀지 않은 시점에서 길 위의 돌멩이를 주워 냄으로써 자신이 만든 독감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인식이 종교와도 소통되어 원융(圓融)하는 것을 우리는 다음의 시에서 볼 수 있다.


하늘보고 놀란 돌멩이가

아멘, 하니까

새들도 연이어 아멘

나무들도 아멘, 한다

―「아멘」 부분


아멘(Amen)은 라틴어로 ‘그렇게 되소서’란 뜻이다. 종교적 입장에서 수용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멘이란 말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시인은 각(覺)을 넘어서서 비로소 관(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결한 자가 가지는 겸손의 덕목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삶과 하느님과 사람과 진리에 대한 시인의 겸손을 우리는 아래의 시에서 읽어낼 수 있다.


나의 세례명 야고보를

夜孤步라고 적어

조금은 건방지게

필명으로 사용하던 사십 여년


밤에 홀로 걸어 다니면

두려움과 쓸쓸함을 느끼게 되고

밤에

고고히 걷는다면

거만함과 허망함을 느낀다


이름 때문에 거만해지거나

유별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이제는

夜孤步야고보를 나무 밑에 묻어

묵언하심黙言下心으로 살고 싶다

―「야고보」 전문


저의 얼굴이 많은 허물로 가득하지만

겸손의 그림자가 분명히 비친다면

또 겸양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주님,

그것으로 넉넉합니다

그것으로 감사합니다

―「간절한 기도」 부분


그러나 걸어온 길이 멀고 험했기에 시인은 피로하다. 살아온 정신의 삶이 치열했기에 시인은 혼곤하다. 그것은 곧 초월의 나른함이며 현자(賢者)의 정관(靜觀)이 된다. 시인은 산뜻한 모습의 밟히지 않는 ‘낙엽’이 되고 싶어하며 ‘마음을 내려놓음(下心)’으로써 마침내 ‘침묵하는 바람’이 된다. 여기서 시인은 암흑을 찢는 빛살을 만난다.


나무는 계절로 낙엽을 만든다

사람은 세월로 낙엽이 된다


나는 어떤 모양의 낙엽인가

어떤 색깔의 낙엽이 되어가고 있는가

참회하고 용서받아 산뜻한 모습으로

밟히지 않는 낙엽이 되고 싶다

―「낙엽」 부분


늘 불룩불룩 거리고

툭하면 흔덕거리면서 분잡한

마음을

밑바닥에 내려놓으면

넘어질 염려가 없어서

편하고 참 좋을 것 같다

―「하심下心」 전문



풍속風速따라 산천을 일곱 번이나 뒤집고

이 바람에 잠깐 쏠렸다가 또

저 바람에 넘어지는데, 이제는 지쳐

입 다물고 누워있는 바람 옆에

잠잠히 엎드려 나도 눈을 감는다

―「침묵하는 바람」 부분


깜깜한 벽이

제 살을 갉아 먹는다

새벽은 언제 오는가

어둠이 어둠을 엮어가며

눈물방울마다 씨앗을 담는다


암흑이 찢는 빛살

보인다

어둠에서 그려본 세상

―「눈 뜨는 석류」 전문


마음을 내려놓은 시인에게는 복잡한 말과 이론이 쓸모없어진다. 그는 성지순례 길에서 로마를 지나며 사랑을 깨닫는다. 라틴어에 능통한 시인의 해박함에서 나오는 깨달음이다.


무슨 말이 이렇게 많은고 무슨 이론들이 이렇게 복잡한고 어지럽다 … (중략) … 딱 한 단어면 되는데 그 한 단어 때문에 수제자 베드로를 로마에 보냈는데 ROMA를 뒤집어 쓰면 AMOR임을 왜 몰랐을까

―「로마에서」 부분


AMOR는 라틴어로 ‘사랑’이다. 그렇다. 시인의 말처럼 사랑 앞에서는 말도 이론도 무용지물이 된다. 종교와 도덕의 이율배반도 생의 현장을 뒤흔드는 실존적 갈등도 무용지물이 된다. 모든 것이 사랑 안으로 녹아들고 해결된다. 사랑은 하느님이고 용서이며 구제이다. 사랑은 종교적이면서도 동시에 도덕적인 가치덕목이다.

 


5. 청정심과 노시인의 실존


모성지향의 시세계를 구축한 노시인의 마음은 말 그대로 청정심(淸淨心)이다. 망령도 집착도 없이 맑고 맑은 상태이다. 우주 안의 우주와 우주 밖의 우주가 노시인의 시선 끝에서 하나로 합일한다. 깨어짐이 온전함이고 온전함이 깨어짐이 된다. 시인의 주변 모든 존재와 상황을 하느님의 모성으로 귀결시키려고 한다.


밤하늘에

하얀 처녀 가슴이 동그마니 떠 있다


마당 가

무언가 비치는 것이 있었다

물을 안고 있는 깨어진 도자기

그 안에

더 하얀 엄마 가슴을 품고 있다

―「깨어진 도자기」 전문


이백의 ‘술잔에 담긴 달’을 연상시키는 시이다. 이백의 시가 풍류의 극치라면 박춘식 시인의 이 시는 모성 표현의 극치이다. 평안하고 고요한 모성 이미지의 성공적 형상화이다. 하늘의 달은 하얀 처녀 가슴으로 치환되고 깨어진 도자기 조각에 고인 물에 가라앉은 달은 더 하얀 엄마 가슴으로 현현(顯現)한다. 여인의 가슴을 보조관념으로 동원하고 있지만 전혀 관능적이지 않다. 그저 맑고 깨끗하다. 한국적 어머니 상으로서의 은유가 기 막히는 표현이다.

 

시인은 이제 고희의 나이에 갈등과 속죄의식을 넘어서서 그가 실현한 도덕적 자유를 바라보는 경지에 이르러 있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르면 되는 종심從心의 시기에 시인은 이제 다다른 것이다. 청정심(淸淨心)에서 삶도 시도 마음대로 이끌어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지금의 시인에게 남겨진, 삶과 시에서 자유의 한계는 어디인가? 바로 시인 자신의 마음이 그 한계일 것이다. ― “인간은 그가 가진 자유에 대한 의식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는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명제가 이에 다름 아니다.

 

― 시인은 속존束存하면서 탈존脫存하는 실존實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