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가을 / 김주완
오구굿이 벌어지고 있다 숙연宿緣으로 벌이는 굿판 한 거리이다 산과 들 씻어내는 맑고 서늘한 댓바람 소리 귀기 서린 요령 소리 얼랑얼랑 물살을 밟으며 강을 건넌다 더욱 높이 올라간 하늘 너른 멍석자리 새파랗게 내 준다 보내고 떠나는 자者들 처연한 풍경 눈물 난다
낙엽들 부산하게 떨어지고 오소소 밤바람 옷깃으로 스며드는 가을이면, 동굴 같은 구멍 가슴 한복판에 뚫려 삼동三冬의 문풍지같이 몸서리 칠 때 있었지 긴 방죽길 말없이 같이 걸어줄 사람 절절히 그리울 때 있었지 남들은 가지고 가는 길 혹은 버리면서 가는 길 나 처음부터 가진 것 없어 가지 못한 적 있었지 가슴 저미는 기다림 실종되고 말았지 컥컥 숨 막히는 밤중
달빛 종적 없이 사라진 그믐밤, 늙은 개승냥이 소리 낮춰 길게 운다, 조금씩 스러지는 가을 끝자락
[시작 노트]
가을이 되면 生의 한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날이 있다. 추상도 아니고 관념도 아닌 살아있는 체험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 때 그대로의 느낌, 가슴 저미는 슬픔으로 꺽꺽 말문 막히면서 내가 나와 한 약속, 기다림이다. 긴 시간 오래 오래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음이다. 나는 그렇게, 절실하게 기다림을 약속한 적이 있다. 미래의 나를 미리 꽁꽁 묶은 것이다. 그러나 40년이 지나는 동안 그 견고했던 밧줄은 나도 몰래 먼지처럼 삭아 내리고 말았다. 나는 너무 멀리 다른 곳에 와 있었고 사라져 버린 속박조차 잊고 있었다. 나는 나로부터 풀려나 있었던 것이다. 풀려난 채 한 生을 살아버린 것이다.
우리는 말없이 깜깜한 방죽길을 걸었다. 먼 읍내의 여린 불빛이 가물거렸다. 낮게 정적을 깨는 발걸음 소리가 우리를 앞서 나갔다. 서늘한 기운이 도는 교외의 가을밤, 약간의 바람기에 묻어나는 그녀의 비누향이 신선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그때 우리는 팔짱을 낄 줄도 몰랐다. 그럴만한 분위기가 아니었고 허용되는 관계도 아니었다. 어깨와 어깨 사이로 지나가는 밤기운이 맑고 싱싱했다. 한 걸음쯤 앞서 살고 있는 그녀의 성숙한 몸내가 풋풋하게 건너왔다. 가지런한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그녀의 영혼이 푸르도록 감미로웠다. 나는 깊이깊이 도취되고 있었다. 내 남은 삶을 모두 바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에 내 生이 끝나고 땅 속으로 잦아들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의 생각에 불과했다. 그때 이미 그녀는 별이 되어 우주 먼 공간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황망하게 “기다릴께!” 마지막 말 한 마디만 그렇게 남길 수가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계절이면 해마다 찾아오는 통증, 젊은 날의 저 생생한 生의 한 장면, 가장 절실했던 풍경이 40년 전에 저렇게 버젓이 살아있는데 나는 지금 나를 책임지지 못하면서 겨울로 들어서고 있다. 가을 끝에서 나의 무책임을 장사지낼 날을 이제는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을 유기한 기다림 앞에서 줄어든 심폐기능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황홀했던 슬픔을 문득문득 절절히 떠올리고 있다.
―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가을, 그래서 슬프다. 소중하다.
<2007.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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