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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진단] 달성공원 노인들 [영남일보 : 1990.12.18.] / 김주완

김주완 2001. 1. 8. 00:25

[기획 진단]


<大邱, 大邱사람 10 / 달성공원 老人들>

<영남일보 : 1990.12.18.>


은빛 아름다움… 이젠 소외의 상징


김주완(시인/철학박사/경산대 교수)


敬老堂 신축 - ‘동네 미관 해친다’ 반발

뿌리 깊은 「兩班문화」 전통 一新할 때

「존경」사라지고 안방 → 건넌방 → 셋방 → 거리 신세


달성공원 앞에 늘 모여 있던 희끄무레한 한복 차림의 노인 무리들이 차가운 날씨 때문인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봄과 여름을 지나 늦가을까지도 공원 어귀에 모여 표정 없는 얼굴들로 망연하게 앉아 있었다. 일정 연령 이상의 노인들에게 무료입장이 허용되자 그들은 공원 안의 구석진 곳으로 옮겨갔지만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많은 노인들은 여전히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대구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들르는 달성공원 앞에 하염없이 앉아있는 노인들의 표정은 외지인뿐만 아니라 대구사람의 표정마저 흐리게 만든다. 그런 풍경이 어찌 대구뿐이랴. 노인문제는 이제 우리 사회의 중심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소외받는 노인들


얼마 전의 보도에 의하면 팔달시장의 쓰레기통 부근에서 유기된 노인이 발견 되었다고 한다. 현금 10만원을 봉투에 넣어두고 편지까지 있었다 한다. 이 노인의 여생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으로 말이다.


지난주에는 만촌동 교수촌에 건립 예정이던 경로당이 주민들의 강한 반발로 무산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교수촌이라는 속칭이 말해주듯, 지식수준이 높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곳 주민들의 반대 이유는 ‘경로당이 들어설 경우 노인들의 왕래가 잦아 동네 미관을 해치고 땅값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설득에 나선 구청의 논리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경로당은 양로원이나 고아원과는 달리 미관 저해 우려가 적다’는 것이다. 주민의 논리나 구청의 논리나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경로당이 미관을 저해한다는 데는 일치하고 있다.


최근 한 달 동안 이곳 대구에서 일어난 가시적 노인문제들이다. 특히 후자와 같은 일은 전국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버림받고 천대받는 노인들의 이야기는 지금의 대구인이 가지고 있는 의식의 단층적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례들은 2백 30만 대구시민 가운데 극히 적은 일부의 사람들에 국한된 특수한 사건들에 불과하고, 절대다수의 대구사람들은 그 고유한 양반 문화적 본성과 보수성으로 인하여 아직도 변함없이 전통의 유교윤리 사상에 젖어 있으며 또한 이를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만은 없겠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적 가치덕목들이 산산조각이 나고 범죄가 창궐하는 이 혼란의 시대에 유독 경로효친의 덕목만이 시퍼렇게 살아남아 있다고 할 수는 없음에서도 그러하고,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노인의식에 대한 가식 없는 반성에서도 그러하다.


이름뿐인 孝의 명분


우리 시대에 더 이상 미담은 없다. 만약 누군가가 자기는 효(孝)를 명실 공히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의 주변에는 아직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더러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자기최면에 의하여 추상화된 착각이거나 아니면 다른 목적이 은폐된 분장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문제성 파악조차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물음을 만나게 된다.

자식이 내다버린 노부모를 과연 누가 맡아 봉양해야 하는가?

쓰던 물건이 낡고 부서져 그 소용이 없어지면 쓰레기통에 버리듯 사람 또한 그렇게 하여도 되는 것인가?

노인은 초라하고 추하고 귀찮은 존재로서 단지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기만 하는가?

경로당 인근의 땅값이 떨어지는 현상은 무엇을 입증하는 것인가?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들 존엄하다는 인간의 속성들인가?


우리에게도 한때 노인이 존경의 대상이 되고 원숙한 노인의 정신세계가 숭앙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보다 정신이 존중되던 인간주의 또는 정신주의 시대라 불릴 수 있는 이 시대는 생명과 삶 그 자체가 중시되던 농경사회 시대였다. 사회적 진보의 속도는 느렸지만 전승되는 가치규범의 영역 안에서 안정이 있었고 평화가 있었고 소위 인륜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정신보다 물질이 중시되는 일대 변혁을 맞이했다. 보다 강조되는 것은 기술이며 능력이다. 이러한 물질주의 시대에는 정신적 가치는 공허한 관념과 사변의 산물로 매도되고, 오로지 물질가치만이 추구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사물화 시대에 적용되는 가치척도는 오로지 물질적 가치뿐이다. 이러한 준거에서는 젊음은 가치이고 늙음은 무가치이다. 노쇠한 육체와 탈진한 노동력은 반가치가 되고, 탄력을 잃은 피부와 비틀거리는 걸음은 비미(非美)가 된다. 권위와 가치로 표상되던 노인은 멸시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은빛 아름다움과 여유와 자족으로서의 노인상은 이제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것이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이미 고색창연한 전통의 유물이 되어 관람객이 없는 박물관의 소장품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모두에 언급한 노부모 유기와 노인 천대의 사례들이다.


자연주의 → 정신주의 → 물질주의라는 시대의 추이에 따라서 노인들은 안방 → 건넌방 → 셋방 → 거리로 끝없이 밀려나고 말았다. 그들은 소외된 지대에서 절벽 같은 외로움과 신체적 질병의 고통과 끔찍한 곤궁으로 지금 고통 받고 있다. 그들에게는 아침에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고, 밤새 죽지 않은 모진 목숨에 대한 원망과 한탄만이 있다. 그들의 넋두리들은 한결같이 “귀신이 왜 나를 잡아가지 않노!”, “늙으면 죽어야지!”, “죽어야 편한데…”, “약이라도 먹고 죽고 싶다.” 등으로 일관된다. 그러면서도 “자는 듯이 죽어야지.”라고 소망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자살충동의 이율배반적 갈등 속에서 시간, 시간을 허덕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젊은 사람들은 어떠한가? 합리성과 익명성과 무관심성의 현실원리 아래 그들에게 무심하다. 아니 무심함을 넘어서 노인들을 묵살하고 내다 버리고 천대한다. 바로 이것이 현대라는 시대지평 위에서의 노인의 위상이고 또한 우리 젊은 사람들의 병든 의식구조이다.


현재의 노령인구는 전 국민의 7.4%에 달하고 30년 후인 2020년에는 18.5%가 될 것이라 한다. 또한 자녀와 별거하는 노인이 지금 1만 명 이상이며 무의탁 노인이 3만 명 이상이라 한다. 특히 대구ㆍ경북 지역의 노령인구는 다른 지역보다 두 배나 된다고 한다.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노인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노인이 안고 있는 사회적 문제 또한 이에 비례하여 늘어나고만 있다. 그러나 노인복지정책의 발전과 경로효친의 생활화는 답보 내지는 퇴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각종의 사회단체들이 있고 노인문제연구소가 있고 행정관서에는 전담부서가 있으며 각종 캠페인이 전개되고 상당량의 노인문제 연구논문들이 쏟아져 나와도 아직은 문제성 파악조차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전통미덕 되찾아야


이라크에 의료진 파병이 운운되고, 경제지원을 하겠다고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하는 국력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다. 이 풍요의 시대 속에서 빈곤과 천대의 구렁텅이에 빠져있는 노인집단의 문제 해결에 바야흐로 국력을 쏟아야만 한다. 대구인의 보수성을 긍정적인 것으로 계승ㆍ변모 시키자면, 의식의 심층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주의와 체면주의를 도려내고 경로효친의 전통적 미덕을 되살려 내어야 한다. 몇 푼의 입장료가 없어 입구에 장사진을 이루고 앉은 달성공원 앞의 노인군들, 중동교ㆍ대봉교ㆍ수성교ㆍ신천교의 다리 밑에 여름 한 철 밤낮으로 나앉는 저 노인네들의 관심과 대화의 주제가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한다. 이 추운 분지의 삼동에 그나마의 휴식처도 잃은 채 그들은 어디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우리가 전통적 미덕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은, 단순한 과거로 회귀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인간성 그 자체이자 본질이기 때문이며, <노인의 어제는 우리의 오늘이며, 우리의 내일은 노인의 오늘이다.>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인문제는 바로 젊은이의 문제이다. 노인 경시나 혐오의 풍조는 스스로 파고 있는 젊은 우리의 무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