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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칼럼] 인간의 봄 [대구한의대학보 제70,71호 : 1990.03.20.]/ 김주완

김주완 2001. 1. 7. 16:28

[교수 칼럼]


<대구한의대학보 제70, 71호 1990.03.20. 4쪽.>


인간의 봄

김주완(철학과 교수)


1.


춥다. 바깥엔 봄이 온다고 하는데 이곳은 아직 으스스하다. 썰렁하고 을씨년스럽다. 강의실이 춥고 연구실이 춥고 도서관이 춥다. 캠퍼스를 가득 메우는 대자보가 애절하게 봄을 부르고 있다. 연일 신문과 방송을 오르내리는 우리 대학의 이야기가 어깨를 움츠려들게 한다.


바람은 왜 또 그리 드세기만 한가. 등록금 바람, 인사 바람, 압독벌에는 지금 거센 겨울바람이 질주하고 있다. 든든하고 미쁜 신입생들이 들어오고, 방학을 지낸 얼굴들이 반가운 표정으로 해후하고, 새 학기가 개강되어도 압독벌은 춥다. 아직은 겨울이다.


“봄이 왔어요. 이젠 묵은 옷을 벗어야 해요. 화사한 새 옷으로 숨결을 틔워야 해요.” 작은 들새가 속삭이고 또 속삭여도 차디찬 겨울의 뼈는 귀머거리이다. ‘민주’의 고운 꽃무늬가 놓인 ‘민선(民選)’의 천으로 지은 가장 이상적인 옷을 만들어 주어도 겨울은 이 옷을 들고만 다닐 뿐 빙하기의 추억에 연연하며 겨울로 남아있기를 고집했다. 사람들이라도 모이는 장소에선 손에 든 옷을 깃발처럼 흔들어대고, 할 일이 있을 땐 우주의 섭리와 거역할 수 없는 신(神)의 뜻임을 강조했다.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가장 적절한 무력함의 과시로 살아남는 지혜를 그는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정해진 기간만큼 겨울은 겨울로 남아있고자 위엄을 더해가고 있었다.


저 강경한 버팀 앞에 옷이 얇은 우리는 춥다. 들새 혹은 연약한 풀뿌리로서의 생존의 방법은 도사림뿐이다. 몸을 낮추고 체형의 표면적 면적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동사를 면하는 길뿐이다. 그러나 역사를 향해 형안을 밝힌 채 작게 스러질망정 봄을 부르는 소리를 우리는 지금 질러야 한다. 절실한 문제이므로.


2.


봄은 저절로 오는가? 가만히 두어도 겨울은 가고 봄이 다가오는 것인가? 아니다. 시간의 진행에 따라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우리의 상식은 경험적 자연법칙의 인식이라는 과학적 지식의 토대 위에 서 있다. 과학적 지식은 우리가 가진 잡다한 지식 중에서 하나의 부분영역에 불과하다. 그것은 특별히 정해진 관점과 방법의 한계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봄은 반드시 저절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오는 봄이 있는가 하면 저절로는 오지 않는 봄도 있다.


그러한 봄의 구분은 어떻게 파악되는가? 이미 진부한 것이지만 이분법적 도식으로 보았을 때 전자는 자연의 봄이고 후자는 인간의 봄이다. 이들 양자는 필연적 관계가 아니다. 자연절후의 봄이라고 해서 반드시 따뜻하고 포근해지는 것은 아니다. 봄에 겨울을 살고 있는 저 많은 민중들 속에서 우리는 이를 실증적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봄은 인간에 의해서만 온다. 상황 앞의 실존이 내리는 단호한 결단과 구성원 공동의 반성과 자각과 투쟁에서 얻어진다. 그리하여 일정한 삶의 장(場)이 ‘인간의 얼굴’을 하는 바로 그때 봄다운 봄은 오는 것이다. 굳고 언 땅을 비집고 나오는 새싹의 소리가 우선은 미미하지만 여기저기서 나오는 이러한 봄을 부르는 소리가 하나로 결집되고 마침내 큰 함성으로 터져 나올 때 봄은 어쩔 수 없이 오고야 만다.


그러므로 양심과 진리와 정의가 약동하는 저 젊음의 충천하는 실천력과 함성은 장하다. 기성세대에게는 사라져버린 저러한 진취적이고 헌신적인 힘이 언제나 역사의 원동력이었고 견인차였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