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보 사설)
<경산대신문 제161호 1995.06.06. 2쪽.>
6.27과 진보적 지성
김주완(철학과 교수)
전 국토가 달아오르고 있다. 초여름의 계절 탓이 아니라, 6.27 선거정국의 열기가 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란한 정치적 수사학을 동원하여 표몰이에 나선 정당들이 시끄럽고 제도권의 언론들 또한 장단을 맞추어 왁자지껄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지엽적인 허상의 열기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냉담하다. 살아가기가 바쁜 주권의 소유자는 더 이상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치적 냉소주의는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더욱 심화되어 있다. ‘누가 해도 마찬가지인 정치’, ‘자기네들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정치’일 뿐, 그것이 전체 국민과 민족과 역사를 위한 것이라고 소박하게 믿는 순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이러한 불신은 국민들이나 젊은 세대들의 탓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광복 반세기, 정부수립 47주년에 이르는 이 나라 현대 정치사의 질곡과 파행이 낳은 필연적인 산물이 회의주의와 냉소주의인 것이다. 3.15, 5.16, 10.26, 12.12라는 역사를 후퇴시킨 사건들과, 그 사이 노도처럼 일어나긴 했으나 아직 꽃 피지 못한 4.19와 5.18 정신은 지성의 무장해제를 촉진시켜 왔다.
정치적 권력은 정권의 획득과 유지라는 논리에 따라서 끊임없이 다른 질서를 포섭하고 수행하는데, 회의주의와 냉소주의의 이면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실망감만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선거의 형이상학은 이대로 죽어버려도 좋은가? 무관심과 방관의 만연은 권력의 맹목적 성장과 독재를 계속 조장할 뿐이다. 1961년 군사혁명정권에 의해 지방자치가 사형 집행된 이후 34년 만에 다시 지방화의 시기가 부활하였다는 데 6.27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민족과 국가의 역사적 운명은 지금, 젊은 진보적 지성의 어깨에 걸려 있다. 묵고 낡은 중앙집권적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지방분권적 미세학의 정치가 펼쳐지는 계기로서 6.27은 규정되어야만 한다. 진보적 젊은 지성의 관심과 애정이 하나로 모여 6.27로 향해질 때 선거의 형이상학은 기사회생하고 민주의 새싹은 촉 틀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단순한 투표율 상승만으로는 안 된다. 중앙정치의 연장으로서 보수적 사이비 기득권 세력들이 포진하는 정치적 미성숙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양심적인 비판세력인 젊은 지성과 대학인들은 잠자는 주민의식을 깨어나게 하고 기권 없이 선거에 참여하여, 순수성과 진실성을 척도로 후보자의 자질을 평가하고 새사람을 뽑는 선거가 되도록 신선하고 건강한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고사하는 민주를 살려야 한다. 6.27이라는 역사적 상황은 우리 앞에 일회에 한해서만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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