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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산필 9] 잠자는 유월 [대구일보 : 1990.06.27.] / 김주완

김주완 2001. 1. 19. 12:53


[大日散筆 9]


<대구일보 1990.06.27. 6쪽.>


잠자는 유월


김주완(시인/대구한의대 철학과 교수)


유월이 다 가고 있다. 더러 깨어날 듯 깨어날 듯 뒤척이다가 여전히 혼곤한 잠 속이다. 떨어진 꽃들의 혼령이 어쩌면 거리를 배회하고, 양심과 신념의 깃발을 펼쳐 들었던 용기 있는 자들이 아직 벽 너머, 벽 속의 들새가 되어 도륙난 자유의 날개를 창공으로 날리고 있는데, 흐리고 덥고 습한 짜증과 우울의 유월이 마침내 장마로 마감되고 있다. 잉태한 눈물이 자라 차오르는 유월의 배, 이리 무겁다.


아카시아가 발붙이면 산을 망친다고 틈만 나면 아버지는 산에 가서 아카시아 무성한 생명을 낫 끝으로 걷어냈다. 줄기와 가지만 치는 것이 아니고 괭이로 땅 깊은 뿌리까지 찍어냈다. 잘리고 찢어지고 부서진 아카시아는 그러나 더욱 깊고 멀리 소리 없는 생명을 뻗어 나갔다. 하얀 피를 옴싹옴싹 솟아내며 슬기로운 은둔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거역하는 불경을 나는 어느새 저지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폭력에 죽어가는, 그러나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 아카시아에게 나의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 꼭 꼭 다독여라, 낮게 낮게 엎드려라, - 한 뼘 뿌리라도 땅속 깊이 남아라, 끈질기게 살아라, 밝은 날 눈 뜨고 시퍼렇게 보아라, -


울창한 초록의 아카시아 숲을, 자욱한 향기의 꽃 주저리들을 나는 꿈꾸고 있었다. 가슴 서늘한 진초록의 수채화 한 폭을 의식의 어둔 벽에 높다랗게 걸었다. 은밀한 거역을 통하여 막힌 숨통이 트여졌다.


순환도로는 중증의 불치병을 앓고 있다. 꼬리에 꼬리를 이어 쉼 없이 흘러야 하는데 꼭꼭 막혀 꼼짝달싹도 못하고 있다. 서툰 자들이 퍼질러 앉아 우선순위를 주장하고 있다. 점잖게 바위 같이, 자욱이 쌓여가는 콜레스테롤의 지층, 죽음 - 신(神)보다 높아질 수 있는 인간의 특권, 그것을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하여 행사하고 있다. 가장 소중한 특권이므로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될 그것을...


과학자들은 ‘방법’을 가지고 전자오락을 하고 있었고, 철학자들은 ‘방법론’을 가지고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과학자들의 현란한 컴퓨터그래픽 뒤로 ‘현실’은 은폐되고 기만되어 갔고, 철학자들의 춤추는 혀 너머로 ‘현실의식’은 높이높이 추상의 날개를 공허하게 달았다. 각질의 몽롱한 마취, 그러나 달콤했다. 불타는 역사의 노을 아래 이유를 은닉한 채 더러 시인들이 붓을 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