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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늙은 쥐에 대한 기억 / 김주완 [2004.09.22.]

김주완 2004. 9. 22. 09:52

[시]


늙은 쥐에 대한 기억

                                                                                         - 2003~2004


김주완


늙고 큰 쥐 한 마리 왔다. 벽을 갉는가, 했더니 문득 구멍을 뚫고 어느 날 불현듯이 왔다. 석양녘의 쥐구멍 곳곳에 섬지기 알곡 숨겨두고 새로 보탤 몇 개의 알곡 훔치러 왔다. 노욕의 인피 얼굴가죽 철판으로 쓰고 있었다.


놈의 까만 눈은 끊임없이 반짝거렸다. 섬뜩한 교활함이 흐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주변을 살피며 거역의 기미를 색출하여 밑동부터 잘라냈다. 놈의 지능은 억압의 한계선을 알고 있었다. 조였다 풀었다 하는 과정을 통하여, 폭발하지는 못하면서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지고 어디까지 노예로 변질될 수 있는가를 놈의 오랜 경험은 이미 알고 있었다. 따르는 자는 살아남을 것이고 저항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교활함에서 분출되는 오만이며 거기서 번져 나오는 교만한 살의였다.


길쭉한 외모를 가진, 놈은 어눌했다. 머리 도는 속도를 말이 따라가지 못해 놈의 어법은 뒤뚱거림과 더듬거림 바로 그것이었다. 놈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는 놈만의 함정이 바로 거기에 있다. 놈의 강조점을 간파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놈은 남들 앞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덕지덕지 때 묻은 지난 시대의 명함을 아무 데나 내어 밀고 은근한 공작에 나서는 로비 지상주의자였다. 놈은 신수가 좋았다. TV 토론 프로그램에라도 출연할라치면 번들거리는 놈의 얼굴은 장년에 진배없었다. 창공을 날아올라 멀리 보는 새라고 놈은 스스로를 착각하면서 요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놈의 발언은 시대에 역행하는 수구 반동의 무식 그 자체였다.


여우도 너구리도 삵괭이도 앞 다투어 쥐의 탈을 쓰고 놈 앞에서 작고 젊은 쥐로 변신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날다람쥐가 변신에는 가장 먼저 성공했다. 늙은 쥐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했다. 유독 희고 작은 토끼 두 마리가 놈의 정체를 일찍이 파악했다. 숲 속에서 작은 소리나마 질러 보았다. 그러나 끝내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숲은 늙은 쥐가 장악한 점령지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쥐가 되지 못한 하늘소 한 마리, 변방으로 밀려나 이방인이 되었다. 빈사의 하늘소는 날지 않았다. 토끼와 하늘소 - 그들은 가장 약한 자신의 모습들을 서로서로 비추어 보고 마음을 나누며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덥혔다. 그러나 그 겨울이 지나기 전에 하늘소는 마침내 동사하였고 토끼는 기어코 숲을 떠났다.


큰 쥐 앞에서 작은 쥐로 변신하여 찍찍거리던 짐승들은 머지않아 큰 쥐가 떠난 다음에야 ‘그 놈은 쥐새끼였다’고 호들갑을 떨 것이다. ‘그 놈은 노회한 독재자였다’고 ‘그 놈이 숲을 말아 먹었다’고 소리소리 지를 것이다. 세상 이치가 그러하다. 살아남은 짐승들은 현명하기 때문이다. 말과 얼굴을 바꿀 줄 아는 슬기가 그들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2004.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