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시]
『전통철학』창간호 축시(1993. 2)
제3시집 『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수록
철학을 위하여
김주완
*
이 삭막한 물질의 시대에 어쨌든 정신일 수밖에 없는 철학이 은둔의 땅에서 죽어가고 있다. 생존의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한 때는 생존 그 자체였던, 그것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이 지금은 잊혀진 화석으로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깊이깊이 묻혀져 있다. 더러 그것이라고 도굴해 낸 그것 아닌 것을 가지고, 혹은 묵고 찌든 책갈피 속에서 그것에 대한 환영이나 먼지 같은 것을 들고 나와 소뼈다귀인양 울궈먹고 또 울궈먹으며 학자연하는 사이비 또는 아류들이 가련하다. 시대에 영합하여 힘 앞에 고개 숙이며 꼬리를 흔드는, 보다 약한 자에겐 컹컹 짖으며 목줄을 물어뜯는 그들의 영악함을 누가 단죄해야 하는가?
1.
물질은 단지 물질일 뿐, 결코 물질 그 자체가 철학을 살인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정식과 같이 거기에 동력인이 작용하지 않는 한, 물질 그 자체는 무력한 것이며 무능한 것이다. 순수물질은 순수존재이다. 헤겔의 논리학적 도식이 말하듯이 그것은 곧 순수사유이며 무無이다. 형성의 힘은 동물적인 가장 동물적인 생명의 저항에서 나오는 것인 바, 세계의 단초로서의 힘의 맹목함이여!
2.
오늘 우리의 터전인 철학을 목 졸라 죽이는 자는 물질이 아니고 문명도 아니고 역사도 아니다. 그들의 주재자로서의 어둠의 신, 맹목한 사이비와 아류들의 아비父이다. 독단과 독선, 위선과 가식의 무대에서 꿈꾸며 춤추는 이들이 신이며, 어둠의 신의 노예인 그들이다. 절대 절명한 그들의 목소리, 무한창공을 펄럭이는 그들의 깃발, 「주체성」과 「정통성」그리고 「전통」의 주장이 요란하다. 우물 안 개구리의 소리로 공명하며 파문으로 일어서는 그들의 빈 주장은 차라리 엄청나다. 요란한 것이 늘 그렇듯이 그러나 그것은 속빈 껍데기의 공허한 소리일 뿐이다. 칸트의 미적 판단력이 파악하는 숭고와 그것은 어쩌면 흡사하다. 아, 그러나 미적 진리와 실사적 진리는 서로 다른 것, 철학의 살인자들이 창궐하는 이 춘추전국의 시대에 우리는 하염없이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니체가 내세운 철퇴의 철학이 필요한 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금이다.
3.
가장 굳건한 현실논리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그대들의 철학은 그러나 철학이 아니라 사상누각이며 실은 빛 좋은 개살구이다. 차라리 청년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이라도 받아 들여라! 그러면 한줌 던지는 연민이라도 그대들을 향할 것이다. 이제껏 그대들 빵의 철학이 빵을 부패시키고, 생존의 철학이 생존을 절멸케 하여 왔으니, 한시 바삐 허세의 가면을 벗어라, 가식으로 경직된 그대들 독선과 독단의 성곽으로부터 스스로 걸어 나와 그대들의 표리부동한 근엄성을 해체하라. 패권의 허상을 분해하라, 추상의 자연이 아니라 구상의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구두선의 인간주의가 아니라 실존적 인격을 존중하는 참 인간주의로 돌아가기 위하여 그대들은 아집과 유아독존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진실과 겸허와 사랑의 참모습에 눈 떠야 한다. 뿔다운 뿔은 각축하지 않느니, 각축하되 참다운 목적을 지향해서만 혹은 삶의 참다운 고양을 위해서만 각축하느니, 오늘 우리가 빈사의 철학을 살리는 길은 그것밖에 없느니,
4.
「정통성」과 「주체성」은 말만의 주장으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뼈를 깎는 노력의 지속으로만 도달될 수 있는 결과이다. 목적할 수는 있되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 지금 얻을 수는 없되 나중에 비로소 돌아오는 것. 참 부자는 돈 자랑을 하지 않고 참 양반은 양반 자랑을 하지 않는다. 허세와 과시는 임포텐스의 방위기제일 뿐이다. 인ㆍ의ㆍ예ㆍ지의 본래적 가치를 살해하는 칼날일 뿐이다.
5.
「전통을 되살리자」는 말처럼 허구이며 사기인 말은 없다. 죽은 전통은 되살릴 수가 없다. 죽은 연인의 싸늘하게 식은 시신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통곡하는 모습은 애처롭지만, 그러나 그 애처로움이 결코 회생의 힘이 될 수는 없다. 되살릴 수 있는 것은 죽은 전통이 아니라 잠자는 전통 뿐이다. 잠자는 공주의 볼에 뜨겁고 긴 키스로 활기찬 체온을 불어넣는 왕자처럼 우리는 지금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그러나 아직은 잠들어 있는 그러한 전통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새로운 철학의 단초를 삼아야 한다. 전통의 의의는 정통성이 아니라 현실성에 있다. 과거와 미래를 가슴으로 감싸안은 현실만이 굳건하다. 그것은 또한 양심에 토대하는 것이며, 인간적인 참으로 인간적인 철학의 회생을 위한 범세계적 개방성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전통의 초월로서의 전통의 회생이다.
**
초월은 튼튼한 현실의 지반을 떠나 끝없는 허공으로 날아감이 아니다. 현실을 현실 위로 끌어올려 어제의 이상을 오늘의 현실로 만드는, 인간의지의 결단에 기초하는 삶의 본원적 현상이다. 동서와 고금의 불멸하는 철인과 철학자들이여! 그 강건한 사상의 척주에서 배어나는 심원한 알레고리와 경이로운 메타포로 오늘 우리로 하여금 문득 눈뜨게 하소서! 가늘디 가는 실눈이라도 뜨여지게 하소서! 가르침에서 가르침 이상을, 언술에서 언술 이상을 깨치게 하소서!
<199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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