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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시] 『儒脈』창간호 / 김주완 [1989.12.]

김주완 2001. 1. 7. 16:42

[권두시]


 『儒脈』창간호 (1989.12.) 권두시

제3시집 『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수록



    민족이여, 겨레여


                                 김주완


우리 너무 숨 가쁘게 살아왔다,

아직 몽롱하게 곤한 잠자다가

남이 와서 문 열어준

개화의 새벽 이래

우린 너무 정신없이 잃어만 왔다,

노린내 나는 문화의 어지러운 마취와

천박한 실용주의의 마법에

방자한 과학주의의 환상에

달뜬 몸살 아프게 앓던 조선의 땅,

조선의 정신,

높은 인간의 자리를 버리고

댓돌 아래 내려서던 날로부터

풋풋한 자연은 어느새 떠나가고

덜 떨어진 경제적 동물

정치적 동물이 되어갔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이 시대가 선 역사의 좌표는 어디인가,

돌아보면 아우성 들린다,

생존의 각박한 몸부림 무성하게 보인다,

그러나 가운데는 늘

청맹과니 귀머거리 의젓한

이 땅의 오늘,

그리워라!

고조선의 푸르디푸른 하늘 자락

광활한 만주 벌판 쓸어 가던

한님의 아들

바람 먹어 부풀은 흰 옷자락 아래

꿈틀거리던 고구려인의 기상,

서리서리 이어오던 농경민족의 후박한 심성

이제 어디 가서 찾으랴,

질책하는 단군왕검의 노기가 오늘은

차라리 따갑다,

이끼 낀 기왓골 어디에도

홰나무 높은 가지 어느 끝에도

낯선 사람의 자리는 없다,

민족이여, 겨레여

이제 우리도 한데 모여 앉아

굳고 생경한 이데올로기의 묵은 옷을 벗고

숨 한번 터놓고 쉬어 보자,

우리끼리 앉아 우리의 이야기를 하며

조선의 눈물

조선의 정신 곱게 곱게 여미고

물이 흐르듯

꽃이 피듯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운 거기로 돌아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