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 칼럼]
순심, 순심인
김주완 동문
(중17회)
1949 왜관 출생
교육학 석사/철학박사
전 대구한의대 교수
(대학원장/교육대학원장/국학대학장/교무처장/기회처장/행정처장/홍보실장 등 역임)
대한철학회장/한국동서철학회장/새한철학회장 역임
시동인 ‘언령’ 지도교수
대부분의 학교 명칭은 도시 이름이나 지역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학교의 소재지를 강조하는 지역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드물게도 순심중고등학교는 그 명칭에서 지역이나 도시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지향하는 가치덕목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순심’이라는 덕목은 성경적이자 도덕적인 가치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근원에 닿아있는 덕목이다.
순심(純心)은 맑은 마음이다. 맑은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3절의 말씀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마음이 비어있다’는 말이다. 마음속에 탐욕이나 시기, 증오나 질투가 없다는 말이다. 텅 비어 있는 마음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사랑과 배려, 지혜와 용기를 담을 수 있다. 순심은 그러므로 무한한 가능성이다. 무한한 가능성은 곧 천국이다. 지상의 가능성은 한계가 있지만 천국의 가능성은 한계가 없다. 그리하여 천국을 주재하는 자는 전지전능하게 된다.
순심은 때 묻지 않은 마음이다. 하얀 마음, 순결한 마음이다. 하얀 마음은 여러 가지 색깔로 물들 수 있고 오염될 수 있다. 그러나 씻어내면 다시 맑아진다. 본래적 순결은 순심만이 가진 특성이다. 순심은 악을 보고도 악인 줄 모른다. 악을 믿지 않고 악도 선으로 보기 때문이다. 악을 방어하지 않음으로써 악에 대하여 외적으로는 무력하지만 사실은 가장 강한 것이 순심이다. 순심은 더러운 마음을 감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흑심이 순심에 마주쳤을 때만큼 자기의 무력함을 처절하게 느끼는 때는 없다. 순심은 불순에 대하여 살아서 보행하는 양심이다.
순심중고등학교를 상징하는 교화는 백합이다. 백합은 순결의 화육(化肉)이며 순수한 미(美)의 상징이다. 꽃잎을 열고 갸웃이 서 있는 백합을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경건해진다. 백합꽃잎에 이슬방울이라도 또록또록 맺혀 있는 것을 보면 그 영롱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어진다. 순심의 결정(結晶)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순심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마음의 정화(淨化)는 이와 같이 순심의 전이에서 이루어진다. 순심이 만인의 마음으로 퍼져 나간다면 지상에 천국이 건설될 수 있을 것이다.
순심인(純心人)은 정갈하다. 백합 같다. 몸과 마음이 맑으므로 그의 행위 또한 담박하다. 순심인은 비열하거나 비굴할 수가 없다. 순심인은 고결하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다. 외롭더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간다. 오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외적으로는 상처를 입더라도 내적으로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순심인은 일체의 잔 재간을 싫어한다. 목적뿐만 아니라 수단도 선택한다. 순심이 자기의식을 가질 때 긍지심이 생긴다. 순심인의 자존심은 단지 자기만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명예도 똑같이 존중한다. 그러므로 순심인은 겸손하다. 우러러 볼 수 있는 것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순심인은 품위가 있고 백합처럼 아름답다. 맑은 마음이 순수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어디서든 당당하다. 그러면서도 순심인은 남을 용서할 줄 안다. 백합 꽃잎처럼 가슴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순심인은 솔직하다. 숨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로이 자기의 참뜻을 말한다. 그러므로 순심인은 자연미를 보유한다.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순심인이 어린아이의 상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청년이나 장년, 노년이 되어서도 순심인은 유지될 수 있고 회복될 수 있다. 순심은 본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면서도 씻어냄으로써 다시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순심을 상실할 때 근원적인 인간성마저 상실하게 된다.
순심인은 칠곡의 중심축으로 존재한다. 총동창회 이영환 회장은 “순심의 수준이 칠곡의 수준이고 칠곡의 수준이 순심의 수준이다”라는 소신을 자주 피력한다. 순심인의 책임감을 강조하는 말이다. 순심인이 승승장구하면 칠곡은 욱일승천한다. 칠곡의 위상이 올라가면 순심인의 기백 또한 넘치게 된다. 칠곡과 순심인은 둘이 아닌 하나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일성이다. 순심의 덕목이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어 칠곡과 순심인의 자존의식이 드높아지기를 기대한다. 오늘 우리가 선 칠곡 땅이 오염된 시대를 순심으로 정화시키는 메카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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