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가는 웃음
김 주 완/대구한의대 철학과 교수
현대인은 누구인가? 그는 언제 웃는가?
어쩌면 이것은 사람의 근원적 질문이다. 고대인은 누구인가? 그는 언제 웃는가?라는 물음과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한 시대라는 토양 위에서 삶의 구조적 특징과 구체적 모습을 대상화하여 파악하고자 하는 단초에서 필연적으로 이러한 질문은 제기된다. 지나간 시대의 해명은 자료의 부족과 그 신빙성에 제약될 수밖에 없고, 그 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에 대한 규명은 매몰성 그 자체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환경에 대한 인간의 피지배성에 스스로 제약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자 한다. 설사 그것이 결코 완전한 대상화는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완전히 객관화시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저만큼 가능한 곳까지 밀어낸 후 이쪽에서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현대인으로서 우리는 누구인가를, 그리고 언제 우리가 웃는가를. 바로 이것이 인간의 특성이자 지식과 인식의 가능성의 근거이다.
삶은 생활이다. 살아 남아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살아 남는데 방해되는 것, 움직이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은 거부될 수밖에 없다. 태초로부터 삶이 시작된 이래 인간은 이러한 장애극복을 위해 참으로 많은 것들을 발견하고 또한 만들어 왔다. 불․도구․문화․과학․관념․정치․사회․경제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로 하여 인간은 외부세계(환경)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 왔다. 그러나 이제 현대라는 시대의 거대한 벽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만들 것이 없어지고 만다. 오로지 만들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만들어 온 것을 파괴하는 그러한 기술뿐이다. 스스로 만든 세계의 무자비한 억압 아래서 인간은 질식해 가면서, 삶의 지속을 위한 삶의 파괴에 드디어 나서고 있는 것이다. 프랑켄스타인(Frankenstein)의 현실화이다.
환경의 아버지가 환경의 아들로 그 위치가 바뀌게 되면서 삶의 부정적 투쟁이 시작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반동일 뿐이다. 인간의 투쟁대상으로서의 외부세계에는 나 아니 일체의 것이 포함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까지도 말이다. 나의 삶을 위해 모든 인간은 나의 적으로 마주선다. 「모든 가치의 가치전도」(니이체)의 현상이 나타난다.
이제 인간은 전통적인 웃음의 미학을 잃고, 「파괴의 웃음」이라는 전혀 새로운 웃음을 웃을 밖에 없다.
현대인의 웃음은 공허하다. 쭉정이처럼 속이 빈 웃음이다. 천 길 지하의 깜깜한 동굴에서 울려 나오는 정체불명의 기괴한 소리이다. 출발점을 모르는 완전한 괴리이다. 웃지 않음 보다 더 간파하기 힘든 음흉한 은폐이다.
아무 상관없는 것들 속에서 상호관계성을 찾으려 하는 그러한 무모함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미소는 환상이다. 그것도 꿈을 쫓는 환상이 아니라, 있으나마나한 환상일 뿐이다. 철저하게 부서진 웃음 아니 웃음, 미소 아닌 미소가 그들의 얼굴에 구름처럼 지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우월성의 의외의 형태」(스탕달)도 아니고, 「승리의 노래」(마르세르 파뇨르도)도 아니며, 「최후에 웃는 자」는 아무도 없다. 직설도 역설도 아닌 속이 없는 웃음은 의사전달의 수단적 기능을 상실한다.
현대인은 웃지 않는다. 설사 웃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정직한 웃음이 아니다.
기쁨=웃음, 슬픔=울음, 이러한 등식은 하나의 직설적 정형일 뿐이다. 역설로서의 기쁜 울음과 슬픈 웃음 역시 역방향으로의 감정의 직접적 표출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정직한 웃음이며 그러므로 감동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직한 웃음을 이제는 아무도 웃지 않는다. 현대인의 웃음은 감정에서 무방향으로 괴리되고,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다른 얼굴을 가지는 부정직성 바로 그것이다.
자기의 감정을 직접적이고 적나라하게 (혹은 역설적으로 정직하게) 표현하는 순진성과 진솔성은 현대인에게 있어서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발가벗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나면 나의 유지가 불가능해진다. 개성의 확립과 미(美)의 추구라는 이름으로 엉뚱한 부분들이 강조된 의상을 입고 신체의 부족한 결함을 감추어 남을 혼란시키고 착각하게 하듯, 그들은 웃음으로서 자기를 보호하고 방어한다. 웃음의 보호색은 민감하게 자동 조절되며 오로지 목적에만 종속될 뿐 감정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자유의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웃음은 이제 방어용 무기의 역할로 그의 위치가 바뀌게 되고 높은 지성을 가진 자의 정제된 웃음일수록 더욱 고도한 목적성과 목적은폐성을 갖추게 된다. 모든 현대인은 무표정한 얼굴의 뒤쪽에 시퍼런 칼날을 감추고 익명성으로 은신한다. 진실로 무관심한 것인 양 믿는 착각성 사적(私的) 신앙을 가지고서 말이다.
사람 이외의 동물 일반은 웃을 줄을 모른다. 그들은 거짓웃음을 웃을 수 없고, 그러므로 감정의 표현이 정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은 너무 많은 웃음을 가지고 있다.
겉웃음․헛웃음․억지웃음․쓴웃음(고소)․찬웃음(냉소)․눈웃음․비웃음(조소)․깔깔웃음․껄껄웃음․너털웃음․미소․홍소․실소․일소…… 등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웃음들이 역설로서 나타나면 그 종류는 두 배가 되고, 괴리된 부정직한 표현으로 나타나면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교활성이라는 귀결에 이르는 인간 이성의 산물들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웃음은 차라리 환상적일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진의를 찾아낸다는 것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 가능성의 정도는 제로에 수렴한다.
많은 종류의 웃음을 가지고, 또한 그것의 교묘하고도 교활한 사용에 나선 인간이 마침내 도달하는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많이 가짐으로써 하나도 가지지 못하는 허무의 심연이다.
스스로 만들어온 모든 것을 잃고 끝없이 허우적이는 절대허공―현대라는 심연일 뿐이다.
현대인이 잃어버린 많은 것들, 그 중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하나가 바로 진정한 웃음이다.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오염된 그 물을 마시듯, 현대인 그들은 모두 변질된 웃음을 웃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그러면서도 그들이 무심할 수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 한국방송통신대학 대구․경북지역 구미․선산분회 발간, [금오탑] 제2집, 1989.10.30. 40-4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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