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특별기획⓹_(프로시딩 27~30쪽)
김춘수의 시로 본 하기락의 자주인 사상 스케치
김인숙(시인)
○ 하기락의 아나키즘을 주제로 하여 김춘수가 쓴 시
시인 김춘수는 하기락의 아나키즘을 주제로 하여 두 편의 시를 썼다. 「허유(虛有) 선생의 토르소」와 「제18번 비가(悲歌)」이다. 이 글은 시 「허유(虛有) 선생의 토르소」를 통하여 시인 김춘수가 이해한 하기락의 자주인 사상의 모습을 스케치한다.
○ 시 「허유(虛有) 선생의 토르소」 - 김춘수
허유(虛有)* 선생의 토르소
김춘수
안다르샤**
잡풀들이 키대로 자라고
그들 곁에
머루다람쥐가 와서 엎드리고 드러눕고 한다. 그
머루다람쥐의 눈이 거짓말 같다고
믿기지 않는다고
장군 후랑코가 불을 놨지만, 너
천사는 그슬리지 않는다.
안다르샤,
머나먼 서쪽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그러나
죽도화는 피지 않는다.
피지 않는다.
* 아나키스트 하기락(河岐洛) 선생의 아호
** 스페인령(領), 1930년대 아나키즘의 본거지
○ 안다르샤 - 아나키스트의 성지
시인은 시의 도입부에서 <안다르샤>를 호출한다. 안다르샤는 안달루시아(Andaulucia)의 김춘수식 표기이다. 안달루시아는 스페인 최남단에 있는 광역자치주이다. 시인이 시의 하단에 덧붙인 주에는 안다르샤를 ‘1930년대 아나키즘의 본거지’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 된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안다르샤의 동부는 좌파(공화파)가, 서부는 우파(국민파)가 장악한 가운데서 전쟁이 치러진 치열한 격전지였다. 아나키스트는 공산주의자와 함께 좌파인 인민전선 정부의 중심 세력이었고, 쿠데타를 일으킨 우파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세력에게 이곳에서 패배한다. 1939년 4월 1일 수도 마드리드가 함락되면서 내전은 종전되고 프랑코 독재 정권이 탄생하여 이후 40년간 지속된다. 50만 명이 사망한 이 전쟁이 끝난 후 격전지였던 안다르샤는 독재자 프랑코에 의해 경제발전에서 배제됨으로써 형극의 땅이 되어 극심한 기아 사태를 겪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의 안다르샤는 아나키스트 전사들이 독재자의 권력에 맞서 장렬하게 전사한 전장이며 수난의 땅이다. 이리하여 이곳 안다르샤는 아나키스트의 성지가 된다.
○ 잡풀들과 머루다람쥐 - 이상 세계의 구성원들
잡풀들이 키대로 자라고
그들 곁에
머루다람쥐가 와서 엎드리고 드러눕고 한다.
<잡풀들이 키대로 자라는> 세상은 천부적 자유를 누리는 세상이다. 잡풀은 백성이다. 민초이다. 외적 강제에 의하여 삶을 제한할 필요가 없고 아무데도 구속되지 않는 세상, 자기의 한계만큼 마음껏 벋어 가면서 살아도 되는 세상, 잡풀들이 키대로 자라는 세상이다. 그러한 세상의 준거는 마음에 있고 마음은 자기 안에 있다. “자기 자신에게 맡겨져 있음이 사람의 자유이다.”(니콜라이 하르트만) ‘잡풀들이 키대로 자라는’ 세상은 그러므로 자유의 세상이다.
거기에 와서 <그들 곁에/엎드리고 드러눕곤 하는 머루다람쥐>는 하기락의 메타포이다. 그런 세상을 꿈꾸고 노래하는 머루다람쥐의 눈은 흑요석처럼 검고 맑다. 아나키스트 하기락의 지고지순한 이념의 순수성을 시인은 머루다람쥐의 눈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머루다람쥐는 하기락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모든 아나키스트이다. 그들은 키대로 자라는 것을 꿈꾸는 민초들 곁에 와서 지사로서 엎드리고 투사로서 드러눕곤 한다. 잡풀들과 머루다람쥐는 이상 세계의 구성원들이다. 이러한 이상 셰계가 실현된다면 그야말로 지상 낙원이 된다.
○ 머루다람쥐의 눈 - 장군 후랑코 - 천사
그
머루다람쥐의 눈이 거짓말 같다고
믿기지 않는다고
장군 후랑코가 불을 놨지만, 너
천사는 그슬리지 않는다.
<머루다람쥐의 눈이> 말하는 그런 세상은 그러나 <거짓말 같다고 믿기지 않는다고> 장군 후랑코는 들판에 <불을 놓는다>. 이른바 화공(火攻)이다. 장군 후랑코는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의 김춘수식 표기이다. 무자비한 독재 권력자 장군 후랑코는 그런 세상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불을 놓는다. 권력의 현실성과 맹목성, 절대성을 과시하고 입증하기 위하여 들판을 불태워 버리는 것이다. 민초도 불타고 아나키스트도 불타고 세상은 절망만 남는 지경이 된다. 그러나 시인은 절망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제시한다. 시인은 천사라는 존재를 등장시킨다.
들판에 불을 놓아도 <너/천사는 그슬리지 않는다.> 천사는 ‘하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자’이다. 천사는 하늘의 사자(使者)이기에 그 몸이 지상의 불길에 타지 않는다. 연기에 그슬리지도 않는다. 천사는 절대적으로 순결하고 선량한 존재이다. 시인은 아나키즘을 천사라고 명명한다. 개인의 천부적 자유가 곧 개인의 절대적 권리라는 것을 근본 원리로 하는 아나키즘,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는 자주인 사상의 이념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순결한 하늘의 이치이기에 그것은 곧 천사로 치환된다. 따라서 이 시에서의 천사를 동양 사상과 연결하면 도(道)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의 이치(천명, 天命)을 따르는 것이 곧 도(道)이기 때문(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중용)이다. 시인은 머루다람쥐를 <그>라고 하고 천사를 <너>라고 구분한다. 머루다람쥐는 현실적이고 천사는 이상적이다. 가까이 있는 아나키스트를 3인칭의 <그>라고 하여 보다 멀리 밀어내어 객관화시키고, 아나키즘의 근원으로서의 자주인 사상 이념을 2인칭의 <너>라고 하여 보다 가까이 당겨서, <그(아나키스트)는 유한하지만 너(아나키즘)은 영원하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안다르샤 - 피지 않는 죽도화
안다르샤,
머나먼 서쪽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그러나
죽도화는 피지 않는다.
피지 않는다.
<안다르샤>는 대한민국의 정서 쪽에 있으며 대한민국과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다. 면적은 대한민국보다 조금 작다. 그리하여 안다르샤는 이상향이고 <머나먼 서쪽>에 있다. 이상향은 가까이 있지 않다. 가까이 있지 않으므로 이상향이다. 이상의 땅이면서 형극의 땅인 안다르샤에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그러나/죽도화는 피지 않는다.> 죽도화는 겹황매화의 다른 이름이다. 줄기가 대나무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겨울에도 줄기의 초록빛이 변하지 않고 꼿꼿이 선 채로 겨울을 난다. 죽도화는 관목 울타리로 자주 심는 우리들 주변의 나무이다. 4~5월에 노란색이나 흰색으로 겹꽃이 피며 열매는 맺지 않는다. 열매 맺지 않으므로 그 기다림이 영원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죽도화의 꽃말은 숭고, 고결, 기다림이다. 이상향은 머나먼 서쪽에 있고 세월이 지나도 자주인의 세상은 개화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자주는 먼 기다림의 대상으로 아득하게 있다. 피지 않는 것은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백성들은 스스로 숭고한 자주인이 될 날을 기다리면서 산다. 시인은 죽도화가 피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죽도화는 피지 않는다/피지 않는다>고 되뇌면서 시인 김춘수는 허유 선생의 토르소를 바라본다. 그러나 죽도화는 언젠가는 피게 될 것이고, 아나키스트의 성지인 안다르샤는 때가 오면 불가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세상, 서방정토가 될 것이다. 숭고한 것은 고결하고 고결한 것은 다만 기다림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루어진다.
○ 별이 된 토르소
제목은 내용의 극단적인 압축이다. 하기락의 아나키즘을 시로 형상화하면서 김춘수는 제목을 「허유 선생의 토르소」로 뽑았다. 토르소는 <머리와 팔다리가 없이 몸통만으로 된 조각상>이다. 머리와 팔다리가 없는 몸통만으로는 움직일 수가 없다. 이동이나 운동이 불가능하다. 하기락의 아나키즘은 추종 세력이나 지지 세력이 미미하여 현실화될 수 없다고 김춘수는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김춘수는 이념적 존재의 본질을 놓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치로서의 이념(이념 그 자체)은 현실화에 연연하지 않는다. 밤하늘의 별은 구름이 끼거나 비가 오거나 간에 그냥 그 자리에 있다. 다만 여건에 따라 지상에는 빛으로 비치거나 비치지 않을 수 있다. 자주인 사상의 가치 그 자체는 실현되거나 실현되지 않거나 간에 시공을 초월한 세계(이법적 세계)에 그대로 있다. 아나키즘이라는 가치를 바라본 누군가가 현실 속에 그것을 실현할 때 그것은 현실화된다. 허유 선생의 토르소는 거기 그대로 있다. 몸통의 근육만으로도 그 위의 머리에서 운행될 정신의 청년성과 역동성을 가늠할 수 있고 언젠가 생길 실천인의 팔다리 근육의 강건성과 운동성을 암시하며 내포하고 있다. 하기락의 자주인 사상은 거기 그 자리에서 이미 하나의 별이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자주인 사상은 스스로 운동하지 않지만, 자유를 향한 모든 운동의 근원자로서 거기 그렇게 있는 것이다. 토르소는 몸통이지만 전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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