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시와 산문> 2025 봄/통권 125호, 도서출판 시와산문사, 2025.03.01., 280~283쪽.
<수필>
청녀(靑女)
김인숙 1
[1]
청녀(靑女)의 글자적 의미는 '푸른 여인'이다. 사전적 의미는 “서리를 맡아 다스린다는 신” 또는 “서리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청녀는 서리와 연관된 말 또는 서리 그 자체이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의 아침 들녘에 나가 보면 하얗게 서리가 내려 마치 눈이 온 듯한 풍경을 마주할 때가 있다. <서리는 ‘하얀 색깔’인데 왜 '푸른 여인'이라 하는가?> <서리의 신은 왜 남성이 아니고 여성인가?>
사전에서 검색해 보면, 중국어의 ‘靑女’나 일본어의 ‘せいじょ’는 우리 말의 청녀와 같은 의미이다. 다만 여기서는 서리뿐만 아니라 눈(雪)의 의미도 더하고 있다. 러시아어 ‘этн. дух инея’나 스페인어 ‘escarcha’ 또한 서리를 의미한다. 러시아어에서는 성에나 유빙의 뜻을 더하고 있다. 러시아는 남성 명사로 쓰고 스페인은 여셩 명사로 쓴다. 그 외의 다른 국가에서는 청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된다.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중북부에 있는 인접 국가로서 같은 의미의 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유럽 서남부의 이베리아반도에 위치한 스페인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언어학, 문화인류학, 역사학, 지구과학 등의 학제 간 연구에서 밝혀야 할 문제로 보인다.
언어는 정신이자 정신의 표현이다. 정신은 의식 위에서 성립하고 의식은 무의식 위에서 성립한다.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하여 이동하는 경로에서 동아시아로 진출한 네안데르탈인의 무의식층에는 빙하기의 혹독한 추위에 대한 공포가 어쩌면 저장되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정신의 표출로서 언어화되면서 상징과 비유의 과정을 거쳐 서리가 청녀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을 수 있다. 하얀 색깔의 서리가 푸른 색깔로 명명된 것은 차가운 이미지가 강조되어 덧씌워진 것으로 보이며, 서리를 여인과 신(神)의 의미로 명명한 것은 생산성을 가진 여인의 신성성과 자연에 대한 절대적 외경의 원시 신앙이 결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
청녀는 서리이다. 청녀가 오는 아침이면 하얀 면도날이 천지 만물에 곤두선다.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깔을 띠는 면도날 같은 청녀의 안색이 세상천지를 덮고 있다. 침묵, 정적, 적요, 창백 또는 근원이라는 말의 근원이 보인다. 일체의 먼지와 때와 오물들이 사라졌다. 처음은 그런 것이다. 순수는 그런 것이다. 청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시원의 지점, 모든 것이 비워진 공(空)의 지점에 우리가 서 있다. 비어 있으므로 모든 것이 이곳으로 달려와 가득 채워짐을 허용하는 저 넓은 관용의 품에 안겨 있다.
청녀는 차가운 아름다움을 관장한다. 오직 하얗게 반짝이는 청녀를 경외하는 사람은 신선한 미모와 청렬한 선함을 받을 것이며 감사의 열매가 그에게 돌아갈 것이다. 겨울 바다를 건너면서도 따뜻한 바람을 받을 것이다.
겨울이 다가온 아침 산책길에서 그녀를 만난다. 하늘을 향해 칼날을 쳐든 억새 잎에 서리서리 그녀가 내려와 있다. 시냇가에서 서로 몸을 부비며 춤을 추며 웃어대는 억새꽃에도 내려앉았다. 바람도 피해 가는 한적한 언덕 아래 아직 남은 초록한 풀잎에도 내렸다. 청녀는 사뿐한 걸음마다, 내쉬는 숨결마다 가시가 아니지만 가시가 되기도 하여 누군가를 향해 가시 꽃으로 서 있다. 지혜로운 자는 함부로 웃지 않아서 높은 방석을 얻고 청녀를 두려워하는 자는 복이 있으나 어리석은 자는 웃을 때를 몰라 가시에 찔리고 그의 혀에는 형벌의 검정 바늘이 돋는다.
청녀는 깊은 밤에 온다. 칠흑같이 어두워 한 치 앞도 분간이 되지 않는 바람도 잠든 자정 넘어 골 깊은 한밤중에 온다. 소리 없이 오는 청녀의 발걸음 소리는 이승의 누구도 듣지 못하는 침묵의 소리이다. 악보와 같이 소리가 잠든 옷자락을 끌며 아무도 몰래 온 청녀의 낯빛을 보면서 신새벽은 선경의 신비를 영접한다. 빈 벌판에 내려앉은 눈부신 서릿발은 차라리 삼엄하여 천지를 압도한다. 된서리가 내리면 풀잎들은 선 채로 얼어서 일제히 누울 시간을 기다린다.
청녀는 늙지 않는다. 처음을 처음으로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청녀는 얼음 서린 표정을 보전한다. 싸늘하여 잡인의 범접을 허용하지 않는 청녀는 한결같이 엄숙하다. 풀 먹여 갓 다린 모시 치마처럼 구김살 없는 청녀의 지조와 결기는 죽지 않는다.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청녀는 그러나 살아있지 않다. 살아 있지 않은 자는 살아 있지 않으므로 잠자지 않고 유리창 위 꽃잎으로 쩍쩍 피면서 청녀는 살아있는 주검으로 꼿꼿하다. 그러나 청녀가 어디에 살고 어디서 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청녀는 산지사방에 있다. 청녀는 겨울에만 오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그녀가 내린다. 주름 고운 얼굴의 노부부 머리 위에도 백발로 내려앉는다. 떠나가는 시간을 얼리고 사람들을 얼리지만, 눈처럼 덮거나 눕히는 것이 아니라 선 채로 하얀 서슬로 돋쳐 있다.
청녀는 녹고 싶다. 그러나 녹여 주는 자가 없어 간혹 한여름 냉동고 인부의 눈썹 위에도 앉는다. 곳간 홍시의 아늘아늘한 껍질 위에도 앉는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또 잊어버리면서 날마다 변하고 바꾸면서 사는데 청녀는 녹지 못하므로 얼리기만 한다. 천지 만물을 새하얀 얼음으로 얼리고 얼린다. 그러나 청녀의 눈부신 얼굴에는 해동의 따뜻한 봄기운이 하얀 살갗 밑으로 흐르고 있다.
청녀는 햇볕을 만났을 때 승화한다. 청녀가 하늘로 오를 때는 한 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뿐히 가느니 그가 앉은 자리를 찾지 말지어다. 녹여 주는 자가 올 때 사방으로 도망치지 않으며 절대자를 영접하는 청녀는 모든 곳에 있고 모든 곳에 없으니 생명 있는 모두가 영원히 그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 ♤
- 경북 고령 출생으로. 201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꼬리』 『소금을 꾸러 갔다』 『내가 붕어빵이 되고 싶은 이유』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는 방식』이 있고, 논문으로 「구상 시인의 생애와 왜관 낙동강」이 있다. 〈신라문학대상〉, 〈한국문학예술상〉, 〈농어촌문학상 대상>, 〈경북작가상〉, 〈경상북도문학상〉, 〈석정촛불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예천생태원에 2016년 예천군에서 세운 시비가 있다.. 현재 낙동강문학관 운영위원,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지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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