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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약속/김주완

김주완 2024. 12. 25. 08:49

書 : 石菴 金榮淑(1947~2021)교수 / 刻 : 姜孫根(1946~ ) 교수

 

 

동의대학교 명예교수인 강손근 박사가 귀목(貴木)에 양각으로 새긴 서각 현판 <居敬窮理(거경궁리)>를 보내왔다. 서로 소식이 막힌 지가 오래되었는데 무려 16년 만의 연락이다. 허허 웃으면서 강 교수는 "아마 잊었을 것 같은데 오래전에 한 선물 약속을 이제야 지킨다"라고 했다. 내용을 풀어 달라고, 동양철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한국 현대철학을 대표하는 대구교육대의 장윤수 박사에게 현판을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좋은 선물을 받았다며 축하해 주면서 작품이 아주 좋다고 높이 평가했다.

 

까마득한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오른다. 2010년에 치러질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나는 고향 마을로 돌아가 칠곡군수에 출마하기로 마음먹고 사전 준비를 위하여 재직하던 대학에서 선거 1년 전에 미리 명예퇴직하였다. 나로부터 박사 학위 논문을 지도받은 제자들이 마련한 기념 오찬이 퇴직일보다 일주일 앞선 2009221일에 대구 수성구 범어네거리의 그랜드호텔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인사 중에서 대구한의대 한문학과 교수인 석암 김영숙 박사가 <거경궁리>라는 휘호를 써와서 내게 선물하였다. 옆에 있던 강손근 박사가 "이즈음 여가 시간에 틈틈이 통도사에 가서 서각을 배우고 있는데 휘호 거경궁리를 서각으로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나는 고맙다고 했고 그러고는 잊었다. 강손근 교수는 2005~2006년에 제36대 대한철학회장을 역임한 사람으로서 학회 일로 막역하게 지내던 사이인데 이때의 만남이 끝이 되어 20093월 이후에는 소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약속은 미래를 묶어 매는 일이다. 그것은 타인과의 일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과의 일이다. 약속의 당사자는 너와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는 확정되지 않은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가능적인 것일 뿐이다. 가능성은 그 속에 불가능성을 언제나 동시에 내포한다. 그러므로 모든 약속은 지켜질 수도 있고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본질로 가진다. 강 교수도 나와 나눈 16년 전의 지나가며 했던 약속을 잊을 수가 있다. 아니 잊어도 충분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 누구도 그를 나무라지 않을 일이다. 그런데도 그는 202412월인 지금에 와서 끝내 그 약속을 지켰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 않은가. <거경궁리>를 실천하고 체화한 선비적 개결성을 그에게서 느낀다. 강손근 교수는 곧다. 신의(信義)가 사라지고 가치란 가치는 모두 다 전도된 현대사회에서 마지막 남은 무결성의, 신독(愼獨), 순수한 본원적 인격체가 바로 그이다.

 

<거경궁리, 居敬窮理><공경하는 마음을 흩트리지 않고 삶으로써 세상의 이치를 궁구하라>라는 뜻으로 나는 읽는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공경이며 왜 공경인가?'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공경의 반대는 오만방자이다. 오만방자는 건방지고 거만한 것이며 그것은 본래의 자기를 내쫓고 헛된 자기를 들이는 것이다. 본래의 자기는 자아와 타아를 동등하게 바라보며 다 같이 높이 받드는 범물 공경이다. 인간에 대한 공경은 인간을 있게 한 자연에 대한 공경과 다름이 없다. 따라서 공경의 대상은 자연의 이치인 천명(天命)이며, 그것이 우리 속에 들어온 인성(人性)이며, 인성의 본향인 자유(自由)이다. 논리적 비약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겠지만 자연과 인간과 자유를 공경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미숙하지만 나름대로 세상의 이치를 궁구하면서 말이다. 나보다 3년 연상의 철학박사이며 대학교수 출신의 서각가인 강손근 사백에게 감동하면서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