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들
김주완
나는 의성김씨 33세손, 의성군 25세손, 문절공 21세손, 관란재공 14세손, 노회당 6세손이다.
나는 몇 개의 이름을 가지고 한 생을 살았다.
관명은 김주완(金柱完)이다. 1949년 출생과 함께 불린 이름으로 호적과 주민등록 등 공부상에 등재된 공식적인 이름이다. 주로 이 이름으로 나는 한 생을 살아왔다. 글자의 뜻은 <쇠 금(金)>, <기둥 주(柱)>, <완전할 완(完)>이다. 풀어 쓰면 <쇠기둥은 완전하다> 정도의 뜻이 된다. 또는 <쇠기둥으로 완성한다>의 뜻도 된다. 강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쇠기둥처럼 완전하게 살지는 못한 것 같다. 그렇게 살고 싶었겠지만 때로는 뒤뚱거리거나 넘어지면서 살았다.
자(字)는 대산(大山)이다. 아버지께서 족보에 그렇게 올려놓으셨다. 시대가 바뀌면서 자를 부르는 문화가 사라짐으로써 단 한 번도 남으로부터 불린 일이 없는 이름이다. 아버지는 내가 큰 산처럼 듬직하고 우뚝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소시민의 일생을 살았다. 기껏 대학 강단에 서는 교수로서 한 생을 살았다.
아명(兒名)은 태호(太浩)이다. <크고 넓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나의 이 아명을 자주 부르셨다. 아버지가 5대 독자셨으니까 할머니는 손자들이 번성할 것을 바라서 나를 태호라고 부르셨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키가 크게 자라지를 못했고 마음도 그리 넓어지지 못했다. 본질적으로 인물이 크고 넓어지지 못했다. 어릴 때 아명이 불릴 때는 태호라는 이름이 촌스럽고 무식하게 들리기도 했다.
스스로 지은 최초의 이름이 양수재(暘櫢齋)이다. 아호 겸 당호로 사용하였다. 1979년 9월 14일 반양옥 주택을 신축하여 입주하면서 현판을 만들어 현관 위에 걸었다. <해 돋아나는 곳의 나무 우거진 집>이라는 뜻이다. 나의 소망을 담은 이름이다. 출발, 상서로움, 풍요, 번성 등의 의미를 담았다. 이때 만든 목각 현판을 그 후 대구로, 왜관으로 이사할 때마다 가지고 와서 평생 동안 거실에 걸었다. 2017년 이후에는 개인 명함에도 이 이름을 병기하였다.
검도를 하면서 40대 이후에 사용한 아호가 영선당(泠蟬堂)이다. 나보다 나이가 조금 아래인 검도 사부가 지어준 이름이다. 좀 거창하게 얘기하면 무림에서 사용한 나의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가진 수련용과 소장용 진검 3자루의 칼날에 이 아호 영선당이 각자되어 있다. 글자의 뜻은 <깨우칠 영(泠)>, <매미 선(蟬)>, <집 당(堂)>이다. 풀어 쓰면 <깨우친 매미의 집> 정도의 뜻이 된다. 매미는 땅속에서 애벌레 상태로 7년이 넘는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 세상에 나와서는 한 달 정도 산 후에 짧은 생을 마감하는 곤충이다. <깨우칠 영(泠)> 자에는 <맑다>라는 뜻도 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영선당은 <맑은 매미의 집>이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오랜 준비 끝에 잠시 맑게 살다 가는 매미-그러니까 사부는 나에게,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로 오래 검도 수련을 하고 완성이 된 후에는 매미처럼 맑게 살라고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현직에서 물러나면 검도 도장을 열겠다고 다짐하던 때도 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체력과 의욕은 떨어지고 제대로 된 운동은 차츰 멀어졌다. 노년인 지금은 기껏 걷는 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영선당이 각자된 진검 3자루는 거실의 장식품이 되어 있다.
2008년 이후 인터넷 카페의 닉네임으로 초와(草窩)를 쓴 적이 있다. <풀로 만든 움집>이란 뜻이다. 고향인 왜관의 낙동강가에 조그마한 서재를 내고 주로 집필실로 사용하면서 스스로 무슨 은자(隱者)나 된 것처럼 한껏 멋을 부려 만든 이름이다. 객기와 허세가 잔뜩 묻어 있는 이름이다. 돌이켜 보면 훗날 나를 경계하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2024년 5월 14일 이후의 아호가 청고(靑皐)이다. 철학자 장윤수 박사가 지어준 이름으로 <푸른 언덕>이란 뜻이다. 장 박사는 작호 배경으로 <청고료확(靑皐廖廓)>-<푸른 언덕 확 트인 곳>이라는 휘호도 써 주었다. <푸른 언덕, 넓고 큰 하늘>, <푸른 언덕, 쓸쓸한 둘레>라는 두 가지 의미로서 철학적 자아와 시적 자아를 포괄하는 이름이라 규정하면서 나는 스스로 아주 만족하고 있다. 나의 마지막 이름이 될 것 같다. 이 이름에 대해서는 따로 쓴 산문 <아호 청고>가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름 지어 부르는 것(命名)이 존재를 건설한다>고 하였다. 은사인 시인 구상 선생은 ‘말에는 신령한 힘이 있다’고 하여 <언령(言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은사인 철학자 하기락 박사는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정신적 존재의 문제』를 번역하면서 ‘Geist der Sprache(언어의 정신)'를 <언령>이라고 옮겼다.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언어는 의미의 의상>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름을 지으면서 의미를 담는다. 의미 속에는 소망과 염원과 기원이 딤긴다. 사람이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불리는 이름에는 다가올 미래가 담기고 마지막으로 불리는 이름에는 지나온 과거가 담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이름이 의미하는 바에 따라 사는 것이 최선이겠으나 누구도 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기원은 크고 현실적으로 이루는 것은 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이름대로 모두 이루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루려고 노력하면서 사는 삶이 의미 있는 삶이고 참된 삶일 것이다. 삶의 현장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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