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논문/문학 논문

[발표문] 모암, 일휴정 양 선생의 시 정신이 갖는 현대적 의미_김주완

김주완 2023. 9. 29. 08:50

2023.09.15.금.14:00~17:00/칠곡문화원 3층 대강당
제29회 경북역사인물학술발표회
발표자 김주완(전, 대구한의대 교수)
발표자 김주완(전, 대구한의대 교수)
종합토론
종합토론

모암일휴정 양 선생의 시 정신이 갖는 현대적 의미

김주완[각주:1]

 

<목차>
 
1. 들어가며

2. 모암 이충민 선생의 시 해명
   2-1. 모암 시의 분류
      2-1-1. 모암 시의 주제별 분류
      2-1-2. 모암 시의 형식별 분류
    2-2. 모암의 시 정신
      2-2-1. 근본가치로서의 효(孝)
      2-2-2. 특수가치로서의 진선미도교(眞善美道敎)
        가) 자연주의를 지향하는 철학적 시 정신 - 진(眞)
        나) 북창으로 향하는 시 정신 : 절의와 청백의 궁구 - 선(善)
        다) 달과 꽃의 상징성 : 서정적 미의식 - 미(美)
        라) 도를 찾아 주유하는 시 정신 - 도(道)
        마) 인재의 숭상과 교육 - 교(敎)
   2-3. 모암의 학문과 삶의 근원으로서의 거창

3. 일휴정 이영세 선생의 시 해명
   3-1.일휴정 시의 분류
      3-1-1. 일휴정 시의 주제별 분류
      3-1-2. 일휴정 시의 형식별 분류
   3-2. 일휴정의 시 정신
      3-2-1. 효와 시의 계승
        가) 효의 계승
        나) 시의 계승과 모암 시의 개작
      3-2-2. 성균관 유학과 학문적 성취
        가) 성균관 유학과 면학정신
        나) 교유시(交遊詩)의 완성
        다) 출사와 귀향
        라) 철학적 사유의 궁구
   3-3. 달오 이주와 자연 회귀

4. 맺으며

참고문헌

 

들어가며

 

역사와 시간의 공통점은 흐름이다. 되돌아갈 수는 없고 오직 앞으로 나가는 것만이 허용된 흐름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에는 운동의 한 방향성만이 있고 반대방향으로의 역진(逆進)은 없다.”[각주:2] 흐름 위에서의 위치계인 지금이라는 시점(時點)은 어느 순간도 멈추어 있지 않고 순간마다 이미 다른 지금이다.” [각주:3] 따라서 21세기를 사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17세기로 되돌아 갈 수 없다. 17세기를 산 사람의 생은 이미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은 산 채로 문헌 속에 보존되어서 21세기로 전해지고 있다. 21세기에 살아있는 사람의 산 정신은 바로 그 문헌을 통하여 17세기 사람의 산 정신을 만날 수 있다. 여기에 <역사성>이 성립한다. “역사성이란 바로 과거의 것이 없어지지 않고 지금 살아있는 정신 속으로 뚫고 들어와서 이 정신 자체 속에 임현(臨現)해 있다는 데에 성립하는 것[각주:4] 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러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하여 400년의 시공을 건너서 이루어지는 시적(詩的) 만남을 시도한다.

 

이 글은 17세기 칠곡 지역 [각주:5] 에서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떨쳤던 유학자 모암(慕巖) 이충민(李忠民: 1588.6.7.~1673.9.19./향년 85)과 그의 아들 일휴정(日休亭) 이영세(李榮世:1618.10.6.~1698.10.10./향년 80) 양 선생의 시 정신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조명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의미란 <우리에게 대하여>(fűr uns) 성립하는 어떤 것이다.” [각주:6] 여기서 <우리>는 그때그때의 작업에 임하는 연구자이다. 따라서 조명된 의미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근원적 한계를 가진다.

 

논의의 대상으로는 현전(現傳)하는 모암의 시 14편과 일휴정의 시 101(문집 69, 속집 32)이 되겠는데 이 글의 전개에 필요한 시편들을 가려 뽑아서 분석하기로 한다.

 

이 글에서 인용하는 시편은 문집과 국역집에 수록된 한시 원문과 번역문을 기초로 하되 가능하면 현대적 언어로 의역하여 사용할 것이며, 논의의 방향은 현대 시문학적 철학적 입장에서의 접근이 될 것이다. 논의의 세부 방향은 존재론적 입장에서의 윤리학과 가치철학, 미학과 예술철학이 될 것이며 이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상도 덧붙여 논구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종은 역시 모암과 일휴정의 학문과 사상을 담고 있는 시 정신의 해명이다. 학문과 풍류의 요체로서의 시 세계도 논의 과정에서 논구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에서는 한시의 운이나 완성도 평가는 하지 않을 것이며 의역을 통한 번역의 유연화를 기함으로써 시의 내용을 통한 시 정신의 분석에 주력하겠다는 말이다. ‘의역을 통한 번역의 유연화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에 매달려서 직접적으로 번역(직역)해서는 시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이데거가 일의적 의미만을 추구하는 무딘 감각을 가지고 시를 대하는 한, 우리는 시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각주:7] 고 단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를 읽을 때 오직 필요한 것은 냉정하게 사유하면서 시가 언표한 것 속에서 언표하지 않은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각주:8]

 

2. 모암 이충민 선생의 시 해명

2-1. 모암 시의 분류

2-1-1. 모암 시의 주제별 분류

 

모암선생문집에 수록된 시 14편을 주제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분류 시 제목 편수 비율
효도시 수모가(어머니가 오래 사시기를 비는 노래)
과안동연원(안동 제비원을 지나며)
2 14
자전적
(自傳的)
학시
우음(우연히 읊음)
양정도중(양정 가는 길)
별성천상인(성천 스님과 헤어지며)
3 21
서정시 대월(달을 바라보며)
추재야좌(가을 집에 밤새워 앉아 있네)
2 14
기행시 과해인사(해인사를 지나며)
호서도중(계룡산을 바라보며)
과두류산(지리산을 지나며)
과금원유감(황금 원숭이를 바라보며)
4 30
만시
(挽詩)
만조좌윤기(좌윤 조기를 애도하며)
만송동추광택(동추 송광택을 애도하며)
만이백천천봉(백천 이천봉을 애도하며)
3 21
  14 100%
* 시 제목 앞의 번호는 모암 선생 문집원본에 수록된 순서임

 

전해지는 모암의 시 14편은 아들인 일휴정의 시 101편 보다는 월등히 적은 편수이다. 그러나 당대 산림처사의 삶의 모습과 위기지학에 매진한 선비의 시 정신을 살피는 데는 부족하지 않은 편수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암 시 14편은 앞의 분류와 같이 최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는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모암 시 정신의 다양성을 우리가 추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전적 철학시 3편 중에서 <성천 스님과 헤어지며>는 영주 부석사(영천 초천)에서 재회한[각주:9] 성천상인(性天上人)에 대한 시[각주:10]로서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성천상인은 스님으로서 1607년에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그려서 한강 정구에게 올린 사람이다. 이때 모암의 나이[각주:11]19세였는데 성천 스님과 만나 수일 간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이로부터 22년 후인 나이 41세에 모암은 치료 차 출행한 풍기약수터에서 목욕 치료를 하며 체류하다가 출행 15일째 되는 날(1629.07.19.)에 영주 부석사를 가게 되는데 바로 거기서 늙은 성천 스님을 다시 만난다. 이때는 이미 한강 사후 9년이 지난 시점이다. 두 사람은 1607년의 만남을 회상하며 서로의 백발을 개탄하였다. [각주:12] 바로 이 출행길에서 13일 전인 76일에 안동 연자루에서 말을 먹이며 지은 오언시가 안동 제비원을 지나며였으니[각주:13] 모암은 영천 초천길(영주 풍기약수터 출행길)에서 안동 제비원을 지나며성천상인과 헤어지며라는 두 편의 시를 쓴 것이 된다.

 

2-1-2. 모암 시의 형식별 분류

 

모암의 시 14편을 형식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분류 시 제목 편수 비율
고체시
(古體詩)
수모가(어머니가 오래 사시기를 비는 노래) 1 7%







오언절구 과안동연원(안동 제비원을 지나며)
별성천상인(성천 스님과 헤어지며)
양정도중(양정 가는 길)
과해인사(해인사를 지나며)
대월(달을 바라보며)
추재야좌(가을 집에 밤새워 앉아 있네)
6 43%
칠언절구 호서도중(계룡산을 바라보며)
만송동추광택(동추 송광택을 애도하며)
만이백천천봉(백천 이천봉을 애도하며)
3 22
칠언율시 과두류산(지리산을 지나며)
만조좌윤기(좌윤 조기를 애도하며)
2 14
오언배율시
(五言排律詩)
우음(우연히 읊음)
과금원유감(황금 원숭이를 바라보며)
2 14
  14 100%
* 시 제목 앞의 번호는 모암 선생 문집원본에 수록된 순서임

 

모암이 남긴 한시 열네 편은 한시의 압권이라고 일컬어지는 오언절구가 가장 많고 고체시, 칠언시, 배율시 등도 있다. 따라서 모암은 한시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시작(詩作) 자체를 즐겼다고 할 수 있다.

 

2-2. 모암의 시 정신

2-2-1. 근본가치로서의 효()

 

모암을 기리는 글(만사, 행장, 묘표, 묘지명, 묘갈명, 모암재기 등)에서는 한결같이 모암의 효성과 효도를 칭송하고 있다. 모암의 남다른 효성은 타고난 성품에서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그의 출생 4년 후에 시작된 왜란 가운데의 힘든 트라우마와 성장기의 고된 환경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어머니에 대한 효성으로 수렴된다.

 

모암은 1588.06.07. 제창현(현 경남 거창군)에서에서 출생했다.[각주:14] 제창(거창)은 모암의 할아버지 졸암부군(拙庵府君) 이창국(李昌國, 1541~1593)의 빙장의 고향[각주:15] 이었다.[각주:16] 4세가 되던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같은 해 모암의 할아버지는 가솔을 이끌고 모암이 있는 제창현으로 피난을 온다.[각주:17] 다음해인 모암 5(1593)에 할아버지 졸암부군이 피난지에서 병환으로 객사(향년 52)하여 임시로 제창현 웅곡(熊谷) 아림(鹅林)에 장례를 지낸다.[각주:18] 같은 해 뒤이어 아버지 공조참의 탁이(卓爾)가 전염병으로 타향에서 객사한다.[각주:19] 임진왜란 중에 제창현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은 모암은 다음 해인 1594, 6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선산군 인동(仁洞)(현 구미시 인동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된다.[각주:20] 모암은 이곳 외가에서 8(1596)에 외할아버지의 스승에게 취학한다.[각주:21] 이와 같이 홀어머니 아래 자라게 되는 모암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효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祝之復祝之(축지복축지)
祝之于皇天(축지우황천)
富貴功名(부귀공명) 非所祝(비소축)
但祝北堂(단축북당) 鶴髮千萬年(학발천만년)
- 慕巖, 詩「壽母歌」全文[각주:22]

빌고 또 빌어
하느님께 비오니
재산이나 지위나 이름을 떨치기를 비는 것이 아니라
학의 머리털 같은 흰 머리로 다만 어머니께서 천만년을 사시기를 빕니다
- 모암, 시「어머니가 오래 사시기를 비는 노래」전문

 

이 시는 학업 초기인 모암의 소년기에 쓰인 시로 보인다. ‘빈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반복(동어 반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고체시로 쓰인 시이기 때문이다. 차츰 학업이 쌓이면서 풍부하고 폭 넓은 한자말을 구사하게 되었을 것이고 형식적인 한시(오언절구, 칠언절구, 칠언율시, 오언배율시)에 익숙해져서 능수능란하게 작시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시에서 모암은 재산이나 지위나 이름을 떨치기를바라지도 않고 빌지도 않는다. 다만 어머니의 장수만을 빌고 또 빈다. 모암 스스로 전쟁을 만나 떠돌아다니며 엎어지고 자빠지며 머무를 곳이 없었다[각주:23] 고 회고하는데 여기서 엎어지고 자빠진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객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떠돌아다닌것은 출생지인 거창에서 구미 인동으로 이사를 하고 다시 왜관읍 매원리에 자리 잡게 된 것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서 모암은 일찍 부친을 잃고 부친의 얼굴을 알지 못함으로써 지극히 슬프게 여겼고 사람들이 부친을 부르는 소리를 듣거나 다른 사람들이 양친의 그늘에서 사는 것을 보면 문득 슬퍼하며 부러워했다[각주:24] 고 한다. 또한 천하에 궁색한 사람이 나와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며 애통해 했다[각주:25] 고 하고 모친의 섬김에 전념하지 못할까 하여 평생토록 과거공부의 학업은 하지 않았다[각주:26] 고 하니 위기지학을 하면서 산림처사의 길을 걸어간 모암의 일생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라는 근본태도에서 연유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행위에 있어서의 결정적 요소는 도덕적 근본태도에 있다.” [각주:27] 요컨대 효성이라는 모암의 근본태도가 산림처사라는 그의 일생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담긴 모암 시는 한 편이 더 전해진다. 나이 41(1629)의 모암은 치료(병명 미상)를 위해 74일에 출발하여 영천 초천(지금의 영주 풍기)의 온천으로 가는데 이때 써서 남긴 일기가 영천 초천일기이다. 이 출행길에서 출발 이틀 후인 74일에 말을 먹이러 안동 제비원에 잠시 머물게 되는데 그때 눈앞의 커다란 미륵 석불을 보면서 오언시 한 편을 짓는다. 바로 그 시가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비는 안동 제비원을 지나며이다.

 

鷰子樓中佛(연자루중불)
由來閱幾年(유래열기년)
停驂無限意(정참무한의)
惟祝老親年(유축노친년)
- 慕巖, 詩「過安東鷰院」全文 [각주:28]

연자루에서 바라보는 마애석불은
그 유래가 몇 년인지 셀 수가 없는데
머물러 말을 먹이며 끝없이 젖어드는 생각은
늙으신 어머님의 만수무강을 오로지 비는 것이네
- 모암, 시「안동 제비원을 지나며」전문

 

서쪽을 향한 높은 암벽에 조각된 고려시대 양식의 거대한 마애석불을 보면서 드는 감회 역시 늙은 어머니의 만수무강이다.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오랜 세월을 늠름하게 지켜내고 있는 마애석불처럼 어머니도 그렇게 만수무강 하시기를 모암은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효도(孝道)는 효의 도리이며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이다. 그것은 근원에 대한 존중이며 인간이 자기 자신을 높이는 일이다. 공자는 효도를 <만덕(萬德)의 근원이요, 백행(百行)의 원천이다>라고 하였다. 모든 가치가 효에서 나오고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의 출발점이 효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효도가 자연상태에서는 원()에 해당하며 자연법칙인 천명(天命)이 사람에게 들어온 인성(人性)에서는 인()에 해당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정신과 행위는 자연의 일부이니까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하고 인간의 생명은 부모로부터 나왔으니까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려야 하는데 그 출발점이 바로 효도라는 것이다. ()에 대한 이러한 사고는 서양철학의 효 개념과도 연결된다. 인간은 부모로부터 생명만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양육과 교육, 결혼비용 등 여러 가지를 받게 되는데 이는 바로 채무에 해당한다는 것이 <채무이론> [각주:29] 이며 그 채무를 갚는 것이 효도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자식이 부모로부터 생명을 받은 것을 되갚는 것이 효라고 보았다. [각주:30]효를 채무 의무의 변제라고 생각하는 이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효의 기본적인 의미로 간주되었다.” [각주:31] 요컨대 인간이 따라야 할 도덕법칙은 자연법칙에서 나오는 것(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이고 그것의 근본이 효도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도덕법칙의 근본이 효도에 있다는 말은 효도가 도덕적 근본가치라는 말과 같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도덕적 선()과 같은 성질을 가진다. 선은 근본가치이기에 개별적인 도덕적 가치 전체를 포괄한다. 도덕적 여러 가치의 최고 유개념이자 맨 밑바탕의 토대가 선이라는 말과 같다. 정의, 지혜, 절제, 용기 등의 개별 가치 속에 이미 선이 내포되어 있다. 선하지 않은 지혜는 지혜가 아니며 선하지 않은 용기는 용기가 아니다. 효도도 마찬가지이다. 효도가 근본가치인 한에 있어서, 효도를 해치는 학문은 학문이 아니며 효도를 해치는 절약은 절약이 아니고 효도를 해치는 우애는 우애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가치감각이 당대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은 조선이라는 사회가 효도의 가치를 얼마나 절대적으로 설정해 놓았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치감각은 중립적인 파악을 알지 못한다. 한 가지의 가치를 파악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생활 속에서 그 가치를 실현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을 뜻하며, 또 우리들이 만약에 이 강압에 복종하지 않거나 또는 더 나아가 그 가치를 손상시킬 때는 양심의 소리(가책)를 느낀다는 것을 뜻한다.” [각주:32]

 

효도의 전제조건은 효도할 수 있는 능력이다. 능력은 환경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에 뿌리박고 있다.” [각주:33] 모암이 효도를 위해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효도를 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이며 효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아무리 모암이 효도를 하고 싶어도(모암에게 강렬한 효도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벼슬길에 나아가 객지를 전전하면서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효도를 할 수는 없다. 효도는 모시는 일이자 헌신이기에 바치는 자와 받는 자가 일단은 지근거리에 있어야만 한다. 물론 벼슬길에 나가 어머니를 객지의 여기저기로 모시고 다닐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동시에 어머니를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이며 따라서 불효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효도는 근원에 대한 자기 사랑이다. 부모는 나의 근원이기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는 스스로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효도는 사랑의 하위 가치이기도 하다. 사랑을 서양적으로 분류하면 필로스(Philos, 지혜사랑), 에로스(Eros, 인간적 사랑), 아가페(Agape, 신적 사랑)로 나누어진다. 동양에서는 7(七情)의 하나로 분류할 뿐 그 하위 개념에 대한 언급은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동아시아적 사고를 근원으로 하고 있는 우리는 사람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지식에 대한 사랑, 권력에 대한 사랑, 재물에 대한 사랑 등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 대한 사랑의 하위 개념으로 부모나 조상에 대한 사랑’, ‘자식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이성(동성)에 대한 사랑등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현대적 개념으로서 <효도는 사랑이다>라는 명제를 도출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발견된다. “부모는 자기 생명의 원인이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를 사랑한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1161b300).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1165a22~24), 자신의 신체를 보존해야 하며(플라톤 향연208b), (자녀를 잘 두었다는) 명예를 받쳐 드려야 한다. 효는 받기보다 섬기는 것이며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부모를 사랑하며 아끼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1167b32~33) [각주:34]

 

2-2-2. 특수가치로서의 진선미도교(眞善美道敎)

 

) 자연주의를 지향하는 철학적 시 정신 - ()

 

군수 정기철은 모암을 철인(哲人)이라고 명명한다. [각주:35] <학문과 수행에 정진하면서 도리에 밝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짐작된다. 17세기의 조선에서는 <철학자>라는 의미에서의 <철인>이라는 말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 [각주:36] 은 글자의 의미가 밝게 배운다는 뜻이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고 배울 수가 없다. 하다못해 여름밤의 반딧불이나 겨울 마당의 눈빛이라도 있어야 형설지공(螢雪之功)이 가능할 것이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을 까막눈이라고 한다. 밝음은 진리의 전제조건이고 어둠은 무지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므로 배워서 안다는 것은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일이다. 하이데거는 철인은 명확성에 필요한 빛과 밝음을 갈망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밝은 불은 어둠보다도 더 어둡다.”고 한다. [각주:37] 그러니까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밝은 곳으로 나와야 하지만 너무 밝은 빛은 눈이 부시어 도리어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이리하여 하이데거는 밝은 낮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어둠의 의미도 인정한다. “밤은 낮의 결여다. 그러나 밤은 낮의 어머니다. 낮의 어머니인 밤은 성스럽다[각주:38]

 

철인으로서 모암의 높은 학식을 살필 수 있는 시가 있다.

乾坤浩無垠(건곤호무은)
萬物各自得(만물각자득)
而我獨何爲(이아독하위)
- 慕巖, 詩「偶吟」部分 [각주:39]

하늘과 땅은 넓고 넓어 끝이 없고
만물은 하나하나 스스로 알아서 이루어지는데
그런데 나는 홀로 어떻게 살아왔나?
- 모암, 시「우연히 읊음」부분

 

모암 나이 49(1637)에 작시된 이 시는 모암이 스스로 세운 목표에 그의 학문의 경지가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자탄(自歎)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암의 겸양지덕이거나 학문적 열정의 끝없는 충일에서 나온 자기 격려라 하겠다. 이 시에서 인용한 앞부분 중 둘째 행은 서양철학의 큰 봉우리인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자연의 합목적성> 이론과 직결된다. 첫째 행에서 하늘과 땅을 시적 상징으로 본다면 그것은 곧 우주나 세상이 될 것이며, 우주나 세상이 넓고 넓어 끝이 없다는 것은 과학적 지식이기도 하지만 존재론적 해명의 대상으로서 그 논리 전개나 사유의 전개가 끝이 없다는 말로 이해됨직 하다. 둘째 행의 <만물은 하나하나 스스로 알아서 이루어진다>는 통찰은 모암 보다 136년 뒤에 태어나 서양철학사의 최고봉을 이룬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설파한 <자연의 합목적성>과 등치된다고 볼 수 있다. ‘합목적성이란 목적에 적합함’, ‘목적에 알맞음의 의미를 가진다. 칸트가 말하는 자연의 합목적성이란 자연은 그 자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동(목적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지만(목적성은 없지만),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자연은 목적을 가지고 행동(활동)하는 것처럼(합목적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자연은 목적이 없지만 합목적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보다 엄밀하게 규정하기 위해서 칸트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모암이 말하는 <만물은 하나하나 스스로 알아서 이루어진다>는 표현은 자연의 순환과정인 원형이정(元亨利貞)을 풀어 쓴 말이라 할 수 있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 성장하고 가을에 열매(씨앗)를 거두어들이며 그것을 다음해를 위하여 저장해 두는 과정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연의 순환과정이다. 그러한 과정을 사람의 눈으로 보았을 때 스스로 알아서 이루어지는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자연의 합목적성에 대한 통찰을 칸트보다 136년이나 먼저 가졌던 모암의 철학적 시 정신을 우리는 철학적 <진리>의 궁구로 규정짓는다.

 

) 북창으로 향하는 시 정신 : 절의와 청백의 궁구 - ()

 

모암은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잔 듯하다. 따라서 우리는 모암의 시 정신을 <북창으로 향하는 시 정신>으로 명명한다.

 

乾坤浩無垠(건곤호무은)
萬物各自得(만물각자득)
而我獨何爲(이아독하위)
暮道多顚踣(모도다전복)
疾病累侵尋(질병누침심)
湖海少相識(호해소상식)
省躬良可咍(성궁양가해)
半世弄觚墨(반세농고묵)
歲晏孰華予(세안숙화여)
河淸俟未極(하청사미극)
隨分老漁樵(수분노어초)
淸風臥窓北(청풍와창북)
- 慕巖, 詩「偶吟」全文 [각주:40]

하늘과 땅은 넓고 넓어 끝이 없고
만물은 하나하나 스스로 알아서 이루어지는데
그런데 나는 홀로 어떻게 살아왔나?
저무는 나이가 되도록 자주 엎어지고 넘어졌네
병이 여러 번 몸에 들었고
시골에 묻혀 사니 친분 있는 사람이 적네
스스로 돌이켜보니 참으로 나 자신을 비웃을 수밖에 없네
나이 오십이 되도록 홀로 먹만 가지고 놀았으니
저무는 세월에 누가 나를 화려하다 하리오
황하의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려도 아직도 멀기만 하구나
분수에 따라 물고기 잡고 나무하며 늙었고
맑은 바람에 북쪽 창가에 누웠노라
- 모암, 시「우연히 읊음」전문

 

나이 49세에 모암은 자신을 되돌아본다. 우연히 읊음은 모암의 자기 고백시이자 자전시이다. 일찍이 피난지인 제창현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손에서 자라며 공부를 했다. 몸에 드는 병과 여러 번 싸웠고 시골에 묻혀 살았다.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은 저물고 있는데 모암 자신은 초라하기만 하다. 시의 마무리 부분에서의 <황하의 물>은 한 생에 걸쳐서 붙들고 가는 모암 자신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황하는 중국 서부에서 동북부로 흐르는 강이며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강으로서 세계 5위이다. 황토와 뒤섞인 누런 강물로 이루어져 있다. 길고 누런 그 강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려도 아직 맑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평생 학문에 정진하며 마음공부를 했지만 세상 이치가 환하게 보이는 그러한 마음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말이다.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평생을 산림처사로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다. “맑은 바람에 북쪽 창가에 누웠노라고 하면서 모암은 시를 마무리한다. 북쪽은 현무의 방향이다. 그곳은 어둡다. 그러나 밝음으로 나가기 위한 출발 지점이다. 북쪽은 잠자는 방향이다. 잠은 휴식이고 안식이다. 깨어나서 활동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방향이 북쪽이다. 북쪽은 임금이 있는 곳이고 조상이 있는 곳이며 스승이 있는 곳이고 부모가 있는 곳이다. 따라서 북쪽은 섬기는 방향이며 머리를 두는 방향이다. 북쪽이 머리를 두는 방향인 이유는 그곳에 정신의 거처가 있으며 한 생을 살고난 정신이 돌아가야 할 곳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맑은 바람에 북쪽 창가에 눕는> 것은 맑은 바람처럼 한 생을 청정하게 살아온 모암 자신이 생의 끝 지점에서 이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돌아가야 할 그 방향에 머리를 둔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모암은 산림처사의 초탈한 삶을 살았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썼는데 이는 학구 지향의 한강과 여헌의 영향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암이 궁구하였던 삶의 목표는 절의(節義)와 청백이었다. 이는 범방이 수양산 곁에 묻히기를 소원함을 논함이라는 다음의 글에서 알 수 있다.

내가 뒤에 태어나서 비록 백이와 세상을 함께 하지는 못하였으나 수양산이 저곳에 있으니 죽어서 가히 백이의 혼을 따를 수 있고 사람들은 비록 알지 못하나 백이는 알 것이니 나의 청백함을 청백하다고 여기는 자는 백이일 것이고 세상은 비록 살피지 못하나 백이는 살필 것이니 나의 절의를 절의로 여길 자는 백이이리라. 백이의 혼에 의귀(依歸)하여 그곳 백이의 무덤에서 주선(周旋)하며 오르내리고 좌우에서 모시는 것이 어찌 맹박(孟博, 범방의 字)의 지극한 소원이 아니겠느냐? [각주:41]

 

모암은 마음을 다스리려면 성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각주:42] 고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성실은 진실이나 진리와는 다르다. 하르트만은 진리는 <생각과 존재의 일치>이고 진실은 <생각과 말의 일치>인데 성실은 <말과 행위의 일치>라고 한다. 말한 것을 행동(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불성실하고 말한 것을 행동에 옮기면 성실한 것이 된다. 말한 대로 실천하면 지행합일이 되는 것이고 그럴 때는 마음에 가책이 생기지 않는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마음을 고요하고 편안하게 유지한다는 말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심의 가책이 생기지 않아야 하고, 양심의 가책이 생기지 않으려면 말한 것을 반드시 행동에 옮기는 성실이 필요하다는 것이 모암의 논지라고 하겠다. 모암의 다음 시는 모암의 평정심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長夜何時曉(장야하시효)
幽人獨不眠(유인독불면)
開窓天宇靜(개창천우정)
明月滿前川(명월만전천)
- 慕巖, 詩「秋齋夜坐」全文 [각주:43]

긴 밤은 언제 밝아 오려나
속세를 피해 조용히 사는 이가 홀로 잠을 이루지 못하네
창문(지게문)을 여니 온 세상이 고요하고
밝은 달빛은 앞내에 가득하네
- 모암, 시「서재에 앉아 가을밤을 새우네」전문

 

여기서 앞내(前川)는 지금의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의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인 동정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각주:44] 모암은 자신을 가리켜서 속세를 떠나 조용히 사는 이라고 한다. 세상이 고요하고 달빛도 고요하다고 하니 이보다 더한 평정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평정심은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성실한 삶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두징은 모암에 대하여 ()을 좋아하고 성실하였다[각주:45] 고 기억하고 있다. 속세를 떠나 조용하게 살면서 절의와 청백을 궁구한 모암의 시 정신을 선()을 추구한 시 정신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 달과 꽃의 상징성 : 서정적 미의식 - ()

 

산림처사로서 안빈낙도하면서 모암이 쓴 시 가운데서 문학성이 가장 두드러진 시를 찾는다면 서정적 미의식을 완숙하게 풀어내고 있는 달을 바라보며양정 가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양정 가는 길은 시에 언급된 바와 같이 모암의 나이 49(1637)에 쓴 시이며 달을 바라보며는 오언절구라는 형식과 시적 술회의 활달함과 초연함으로 보아 그 나이 이후에 쓴 시로 보인다. 달을 바라보며를 먼저 살핀다.

 

把酒千愁豁(파주천수활)
論文一夕閒(논문일석한)
今夕知何夕(금석지하석)
中秋月正彎(중추월정만)
- 慕巖, 詩「對月」全文 [각주:46]

술잔을 잡으니 천 가지 근심이 시원하게 사라지고
학문과 예술을 논하니 하루 저녁이 한가롭네
오늘 저녁이 어떤 저녁인지 아는가?
팔월의 달이 똑바로 이지러져 있네
- 모암, 시「달을 바라보며」전문

 

한가위가 있는 팔월 어느 날 밤, 지음지교(知音之交)의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면서 한가롭게 학문과 예술을 논하는 정경을 읊은 시다. 400년 전 조선조 선비들의 운치와 향기가 물씬 풍겨지는 격조 높은 시다. 여기서 우리는 <왜 달인가?>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일상적으로 해()는 부성을 상징하고 달()은 모성을 상징한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모암이 지극한 효성을 가진 것이 당연하듯이 그 심성이나 의식 또한 모성 지향적인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모성의 세계 속에서 모암은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학문과 예술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모암은 편하면서도 편하지 않다. 그래서 <오늘 저녁이 어떤 저녁인지 아는가?>라고 묻고 <팔월의 달이 똑바로 이지러져 있다>고 답한다. 팔월은 풍요의 계절이며 한가위가 있는 달이다. 한가위 날에는 커다란 보름달이 뜰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바르게 굽은(正彎)’ 달인데 아마 상현달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현달은 음력 매달 7~8일경 초저녁에 남쪽 하늘에서 떠서 자정에 서쪽 하늘로 진다. 그러면서 차츰 차올라서 보름달이 된다. ‘달이 뜨는 밤모성의 세계를 상징하고 차오르는 달모암 자신을 상징한다. 똑바르게 굽은 상현달이 차츰 차올라서 보름달이 되는 인격적학문적 경지를 모암은 스스로의 목표로 삼은 듯하다. 또한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팔월의 달이 똑바로 이지러져 있다>는 묘사이다. <똑바름()><이지러짐()>은 반대개념이다. 이와 같이 양립할 수 없는 말을 함께 구사하는 것을 수사학에서는 모순어법이라고 한다. 유치환의 시 깃발에서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모암은 현대시의 모순어법을 이미 400년 전에 구사할 만큼 심미감과 언어 감각이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정만(正彎)의 정()<바르다>는 뜻 외에도 <때마침>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을 만월(彎月)로 본다면 초승달이나 그믐달로 읽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다른 의미를 적용한다면 <팔월의 달이 똑바로 이지러져 있네><팔월의 달이 때마침 이지러져 있네>로 읽을 수도 있으며 그 달은 상현달이 아니라 초승달이나 그믐달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읽었을 때 <풍요한 한가위가 있는 팔월에도 보름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만월(彎月, 초승달이나 보름달)도 있다>는 열린 시각의 통찰을 모암의 식견은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來時躑躅紅(래시척촉홍)
去日野棠白(거일야당백)
歲月此中催(세월차중최)
生年已半百(생년이반백)
- 慕巖, 詩「暘亭途中」全文 [각주:47]

올 때에는 철쭉꽃이 붉더니
가는 날에는 들녘 해당화가 하얗구나
세월이 이 가운데를 재촉하니
태어난 나이가 이미 오십이네
- 모암, 시「양정 가는 길」전문

 

이 시는 모암 나이 49(1637)에 양정 가는 길에서 품은 감회를 노래한 시다. 이 시에는 모암이 처음 양정을 찾은 1602년 이후의 35년이라는 시간과 그에 해당하는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양정은 현재의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각주:48]의 조선 후기 이름이다. 양정은 한강(寒江) 정구(鄭逑,1543~1620)가 강학을 하던 학당 백매원(百梅園)이 있던 곳이며 모암이 한강으로부터 수학했던 곳이다. 글자의 뜻 그대로 양정(暘亭)<해가 돋아 환하게 머무는 곳의 정자>이다. 환한 곳에서는 사물의 분별이 분명하고 세상이 흐르는 기운이 생생하게 보인다. 모암의 면학이 지향하는 곳이 바로 양정인 것이다. 양정 가는 길은 철쭉꽃도 피고 해당화도 핀다. 올 때(1602)는 철쭉꽃이 붉었다고 하고 갈 때(1637)는 해당화가 희다고 한다. 철쭉꽃은 봄에 피고 해당화는 여름에서 겨울 초입의 서리가 내릴 때까지 핀다. 모암이 학문을 시작한 청춘의 봄은 철쭉꽃처럼 붉은 열정이 있었고 학문을 완성한 오십 나이에는 해당화의 흰 꽃처럼 회한이 피고 있다. 지학(志學)10대 후반의 뜨거운 열정이 붉은 철쭉이고 지천명(知天命)의 오십이 되어 돌아보는 회한이 들녘에 희게 핀 해당화이다.

 

빼어난 은유가 구사되고 압축과 비약이 장치되어 있는 오언절구의 이 시는 걸출한 수작이다.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현대시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모암은 기---결 어느 하나에서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각주:49] 는 현대시의 법칙을 지키고 있다. “세월이 이 가운데를 재촉하니에서의 <이 가운데><붉은 색과 흰색의 가운데>라는 심미적 공간을 의미하면서 <모암이 백리 길을 걸어서 [각주:50] 한강 정구를 알현하고 수학을 시작한 14(1602) [각주:51] 의 청춘에서부터 이 시를 지은 49(1637)까지의> 시간적 공간을 의미한다. <세월이 재촉한다>는 말은 세월에 쫓겨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는 의미이다. 수신과 학문에 치열하게 정진한 일생을 보내고 난 뒤에 스스로 내리는 솔직한 자기규정이다. 모암의 나이가 49세가 된 1637년은 스승 한강이 세상을 떠난 뒤 벌써 17년이 되는 해이다. 스승 한강에 대한 그리움과 부족한 자신에 대한 책망이 행간에 숨어 있다. 스승 한강은 여전히 높은 산으로 저만치 있고 모암 자신은 갈 길이 멀다는 자책이 스며있는 시이기도 하다.

 

요컨대 시 양정 가는 길는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이 시는 소년이노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을 설파한 노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금방 늙는데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 세월은 빠르고 일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 명제를 모암은 관념적이거나 개념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시적으로 이야기한다. 시적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설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미지와 직관을 통해서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또한 꽃의 상징성과 감각적 대비의 구사는 모암 시의 탁월성을 증거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중기의 근엄한 선비의 한시에서 이와 같이 적극적이면서 감각적으로 꽃을 보조관념으로 취하는 것은 당대로서는 파격이며 어쩌면 일탈일 수도 있다. 그만큼 모암은 자유분방했고 현실을 초월하는 미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모암은 나이 사십구 세가 되어 바야흐로 학문과 시가 만개했다고 할 수 있다.

 

계룡산을 바라보며 쓴 다음과 같은 모암 시도 묘사가 빼어난 수작이다.

 

鷄龍山外日初昇(계룡산외일초승)
萬壑蒼茫宿霧蒸(만학창망숙무증)
遙望馬韓何處是(요망마한하처시)
錦江朝雨浪千層(금강조우낭천층)
- 慕巖, 詩「湖西途中」全文 [각주:52]

계룡산 밖에 해가 처음 떠오르니
만 개의 골짜기는 푸르고 아득한데 잠든 안개가 피어오르네
멀리 바라보니 마한이 어느 곳이던가?
금강에 아침 비 내리는데 물결이 천 개의 층계를 이루네
- 모암, 시「계룡산을 바라보며」전문

 

<금강에 아침 비 내리는데 물결이 천 개의 층계를 이루네> 이 구절은 정말 절창이 아닌가. 아침 비가 내리는 가운데 물결이 천 개의 층계를 만들며 인다. 세밀한 묘사이며 감각적인 묘사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 도를 찾아 주유하는 시 정신 - ()

 

모암은 출세나 명성을 얻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을 멀리 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인격을 갈고 닦기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평생 동안 매진한 사람이다. 성인의 도를 배우고 군자의 도를 찾아서 해맨 그의 일생을 우리는 <세상을 주유하는 시 정신>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길을 찾기 위해서 모암은 세상을 주유하고 길 위에서 길을 잃고 또한 길 위에서 길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도로 사정과 교통편이 매우 열악했던 조선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모암은 실제로 많은 여행을 하였다.

 

전해지는 모암 시 14편 중에서 기행시가 4편으로서 전체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행선지는 해인사(경남 합천), 계룡산(충남 공주), 지리산(경남 하동), 금원산(경남 거창) 등이다. 이 외에도 자전시로 분류한 양정 가는 길은 현재의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를 지리적 배경으로 하고 있고 효도시로 분류한 안동 제비원을 지나며는 안동시 이천동 석불상을 바라보면서 쓴 시이며, 서정시로 분류한 성천상인과 헤어지며는 초천 길(현재의 영주 풍기온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모암이 여행한 곳은 모암에게 있어서 출생지이자 임진왜란의 피란지이면서 환란의 땅이었던 거창과 6세에 이사해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외가 곳 인동군과 그 후 그가 34(1622)에 이주하여 일생을 보낸 경북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를 중심으로 하여 한강 이남의 한반도 전역에 해당하는 원형을 이루고 있다. 치료를 위해서 지금의 영주 풍기온천을 다녀온 20일 간의 여행 일지 <영천 초천일기> [각주:53] 를 통해서 살펴보면, 말을 타고 일행을 거느리면서 모암은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갈 때는 풍기 약수터까지 3일이 걸렸고, 돌아올 때는 영주(부석사)에서 칠곡 매원까지 4일이 걸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루어 보면 교통이 불편한 당시로서는 여행(출행)이 그 경비는 물론, 열악한 도로 사정과 시간적 측면에서 매우 힘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암은 먼 거리의 여행을 여러 번 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기행시 중에서 지리산을 지나며를 살펴본다.

 

瞻仰頭流山屹屹(첨앙두류산흘흘)
維持東服幾層層(유지동복기층층)
堪輿假氣穹赦得(감여가기궁사득)
丘垤歸功厚重凝(구질귀공후중응)
洞僻靑田餘㥘燼(동벽청전여겁신)
峯危黃道剩暾昇(봉위황도잉돈승)
閒屐懶飛神嚮久(한극라비신향구)
英靈庭价海珠僧(영령정개해주승)
- 慕巖, 詩「過頭流山」全文 [각주:54]

우뚝 솟은 지리산을 우러러 바라보니
흰 옷을 몇 겹이나 입고 있는지
하늘과 땅의 기운을 빌려 높이 솟을 수 있었고
작은 언덕의 노력이 모여서 두텁고 무겁게 산정이 이루어졌네
후미진 골짜기의 고요한 밭에는 겁나게 불탄 흔적만 남았고
위태로운 봉우리의 해길에는 더구나 아침 해가 솟아 있네
한가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올라서 불가사의를 오래 바라보는데
빼어난 정기가 곧고 커서 넓고 붉은 정경에 마음이 편해지네
- 모암, 시「지리산을 지나며」전문

 

이 시에서는 지리산 준령들을 휘감고 있는 운해를 몇 겹이나 걸쳐 입은 흰옷으로 묘사하고 있다.(한시 본문에서는 동방의 의복(東服)’이라고 함으로서 백의민족의 흰 옷을 지칭하고 있다.) 전체적인 시의 흐름에서 산과 인간을 동일시한 물활론적 사고가 드러나면서 광대한 조망을 하는 모암의 시적 시각의 광활성도 느껴지는 시이다. “하늘과 땅의 기운을 빌려 높이 솟을 수 있었고/작은 언덕의 노력이 모여서 두텁고 무겁게 이루어졌네라는 부분은 지리산의 신령한 고산준령들을 묘사한 것으로서, 앞에서 말한 <자연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이고 또한 모이면 커진다는 힘의 논리를 말한 것으로도 보인다. 후미진 골짜기의 밭에 있는 불탄 흔적은 화전민의 흔적일 것이다. 아침 해가 솟아나서 신령한 지리산의 장대한 전모를 보여준다. 지리산은 한국의 산 중에서도 썩 드물게도 산신이 여성(노고)인 산이다. 모암이 이것을 알았는지는 몰라도 모암이 지리산의 신비에 매료되는 것이 어쩌면 그의 생래적 모성지향성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모암은 천천히 올라서 불가사의를 오래 바라보는데/빼어난 정기가 곧고 커서 넓고 붉은 정경에 마음이 편해지네라고 노래한다(‘英靈庭价빼어난 정기가 곧고 커서로 옮기고, ‘海珠넓고 붉은 정경으로, ‘마음이 편한 모양으로 옮긴다 [각주:55] ). 모암은 아마 가을철에 올라 붉게 물든 단풍의 절경을 보았던 것 같다. 아니면 다른 계절에 올라 아침노을의 붉은 빛으로 물든 지리산의 장엄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편해졌을 수도 있다. 어쨌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안온한 모성에 감싸여 있을 때 가능해지는 일이다. 모암에게 있어서 지리산은 모성의 산이었다. 모암의 삶과 학문의 근원인 거창에서 바라보면 지리산 준령들이 멀리 원경으로 떠오른다. 모암이 지극정성으로 효성을 다 받쳤던 어머니와 지리산은 모암의 의식 속에서는 어쩌면 하나의 동일체였을 수도 있다.

 

모암은 그 마음이 산과 비슷하여 산을 좋아했던 것 같다. 모암의 기행시는 모두 산을 노래하고 있을 뿐이지 강이나 바다를 노래한 시는 없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말처럼 모암은 몸가짐이 무겁고 덕이 두터워 산과 같이 인()을 갖춘 사람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시 정신을 도()를 찾아 주유하는 시 정신으로 규정하고 도()를 통하여 실현되는 인()을 모암은 궁구하였다고 보고자 한다. “천지의 도()는 인()이란 형태로 나타난다는 주역 계사전의 가르침 [각주:56] 을 모암은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장윤수는 유가철학의 목표는 진리의 발견보다는 진리를 실행하는 길이다[각주:57] 라고 한다. 또한 유학적 세계관에 있어서 결과나 목표보다는 노력하는 과정이 중시된다.” [각주:58] 고 한다. 따라서 모암은 위기지학과 효와 도를 얻기 위한 실천으로서의 주유를 삶의 의미로 삼고 실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사람의 삶을 길 위에서의 삶으로 규정하면서 삶은 길이고 흐름이다라고 한 들뢰즈와 자크 아탈리의 개념인 호모 노마드(Homo Nomad)에 맥이 닿는 것이기도 하다.

 

) 인재의 숭상과 교육 - ()

 

인재가 인재를 아끼고, 인재가 인재를 숭상하며, 인재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교육이 이루어진다. 인간은 교육을 통하여 정신을 습득하고 습득한 정신으로 새로운 정신을 만들고 남기며 물려준다. 바로 그러한 정신의 전승(傳承)이 역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 없는 역사는 없고 따라서 교육 없는 역사도 없다. 교육은 먼저 배운 자가 다음에 배우는 자에게 넘겨주는 과정이고 행위이다. 조선 시대의 관리나 지식인층이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교육을 우선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또한 그것이 조선조 500년을 지탱해 낸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모암은 일찍이 교육의 중요성을 알았다. 아니 모암 이전에 모암의 홀어머니가 멸문 직전인 절손의 위기에서 모암 하나를 붙들고 교육에 매달림으로서 가문을 다시 번성케 한 것이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한 발 앞선 인식이며 헌신이었다.

 

모암이 학문과 수행을 닦은 발자취는 다음과 같다.

 

8세(1596)에 외가 곳인 선산 인동에서 외부의 스승에게 취학하고 [각주:59]

13세(1601)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을 찾아가 배알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각주:60]

14세(1602)에 백리 길을 걸어서 무흘서재(武屹書齋)에 가서 한강(寒江) 정구(鄭逑, 1543~1620)를 알현하고 수학하였다. [각주:61]

19세(1607) 이른 봄에는 스승 한강(당시 65세), 여헌(당시 54세) 양 선생을 모시고 곽망우당의 창암정사를 방문하였다. [각주:62] 한강, 여헌과 양 선생을 수행한 젊은 선비 4명(모암 포함)이 왜관 돌밭나루 건너편의 성주 강정나루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을 내려가 지금의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에 있는 요강원 나루에 내려서 창암정사로 갔다. 다음날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용화산 절경 아래 뱃놀이를 하는데 2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사람들이 함께 했다. 한강의 제안으로 남긴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에 참석자 명단이 실렸는데 23문중의 35명이다. 35명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이 모암이었다. [각주:63]

22세(161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장현광의 강학처로서 선산군 인동에 부지암정사(현 동락서원)를 창건하고 대들보 속에 「부지암정사양복문(不知巖精舍樑腹文)」을 비치하면서 대들보 바닥에 15현(十五賢)의 이름을 써 놓았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모암이다.[각주:64]

22세(1610, 광해군 2년)에 성주사람 박이립이 한강 정구를 무고하자 한강은 성주 관아에 나아가 거적자리를 깔고 앉아 죄를 청하였고 모암은 김두봉, 박도곡 등과 더불어 천리 길을 걸어서 대궐에 나아가 부르짖으며 상소를 올렸으며 7일 만에 임금의 비지가 내려옴으로서 한강은 무고를 벗어났다. [각주:65]

34세(1622)에 20세 연상이자 족조인 완석정(浣石亭) 이언영(李彦英: 1568∼1639) [각주:66] 과 함께 홈실을 다녀온다. 완석정이 칠곡군 왜관읍 석전동에서 성주군 초전면 명곡동으로 이거 [각주:67] 하기 위한 사전 답사길이다.

35세(1623)에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가 바른 말을 구하는 교지를 내림에 따라, 모암은 나라 다스리는 길을 상소하여 말하기를 첫째 인재의 등용이요, 둘째 치안이요, 셋째 백성을 풍족하게 함이라 했다. [각주:68]

38세(1626)에 경상도 관찰사 하담 김시양이 모암을 수석 현량(賢良)으로 조정에 천거하여 주학의 교수가 되어 생도들을 가르쳤다. [각주:69]

이후 중년의 모암은 계속해서 주학(州學)의 직책을 맡아 [각주:70] 생도들을 모아놓고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각주:71]

녹봉서숙의 전교를 사양 [각주:72] 하기도 하면서

노년에는 군학(郡學)의 책임을 맡아 [각주:73] 경영하는 한편, 교수로서 여러 생도들을 가르쳤다. [각주:74]

 

이처럼 배우고 가르치면서 가문을 번성케 하는데 일생 동안 진력한 모암은 인재를 숭상하면서 인재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모암이 남긴 만시 3편에는 그러한 모암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물론 상소, 서신, 논문, 책문, 잡저, 제문 등의 저술에서도 모암이 인재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가 군데군데 나타난다.

 

만시(挽詩)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시이다. 산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시를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또한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의 삶과 죽음은 살아가는 과정이며 일상사이다. 새 생명이 태어났을 때 기뻐하고 축하하지만 죽었을 때는 슬퍼하고 가슴 아파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생기는 일이기에 시일이 지나면 곧 잊힌다. 그런데 특별한 생명이 태어났을 때 더 크게 기뻐하여 감동하고 특별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슬픔이 극에 달해서 더 애통해 한다. 그러한 감정의 고조 상태에서 그러한 기쁨이나 슬픔을 잊지 않고 남기고 싶을 때 시는 작시되는 것이다. 아무리 전문적인 시인이라고 하더라도 주변의 모든 생명의 출생에 하나하나 축시를 쓸 수가 없고 일상적으로 생기는 주변의 모든 죽음에 만시를 쓸 수는 없다. 모암이 쓴 세 편의 만시는 그들에 대한 모암의 특별한 애정과 관심과 슬픔을 표상한 것이다. 모암이 남긴 만시 세 편은 가족이나 친지 등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특별히 교분을 나눈 선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洛上閒居六十春(낙상한거육십춘)
無思無慮任天眞(무사무려임천진)
雙親終孝今何憾(쌍친종효금하감)
四子傳家亦愛倫(사자전가역애륜)
玉韞重淵誰識寶(옥온중연수식보)
蘭生空谷少知人(난생공곡소지인)
一朝乘化歸如急(일조승화귀여급)
餞祖何堪淚滿巾(전조하감루만건)
- 慕巖, 詩「挽趙左尹玘」全文 [각주:75]

낙동강 위쪽에서 여유로이 육십 년을 살며
그리움도 버리고 근심도 버리며 자연으로 살았네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였으니 어찌 이제 아쉬움이 있겠는가
네 아들을 두어 가문을 넓혔으니 인륜을 소중히 한 것이네
겹겹한 연못에 감추어진 옥(玉)을 누가 보배로 알 것인가
빈 계곡에 태어난 난초를 아는 사람이 적네
하루아침에 상여에 오르게 되니 돌아감이 그리 급했던가
길제사를 지내며 작별하니 수건을 넘치는 눈물을 어찌하랴
- 모암, 시「좌윤 조기를 애도하며」전문

 

모암은 좌윤 조기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면서도 <그리움도 버리고 근심도 버리며 자연으로 살았다>고 한다. <겹겹한 연못에 감추어진 옥()>이며 <빈 계곡에 태어난 난초>라고 한다.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이보다 더 곡진한 예찬이 있겠는가? 좌윤 조기가 나라에 크게 쓰임을 받지 못한 것을 모암이 못내 아쉬워하는 것은 좌윤 조기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襟懷沖澹任天然(금회충담임천연)
八十年來地上仙(팝십년래지상선)
兩世從遊敦分義(양세종유돈분의)
可堪臨訣淚如泉(가감임결루여천)
- 慕巖, 詩「挽宋同樞光宅」全文 [각주:76]

마음속의 생각이 맑고 깨끗하여 천연이었고
팔십 년 내내 땅 위의 신선이셨네
두 세대에 걸쳐 함께 지낸 친분과 의리가 도탑고 성실하였는데
영원한 이별을 맞아 샘처럼 솟는 눈물을 어쩌랴
- 모암, 시「동추 송광택을 애도하며」전문

 

동추 송광택을 기리켜 <마음속의 생각이 맑고 깨끗하여> <팔십 년 내내 신선이셨네>라고 한다. 모암은 인격이 가진 덕성 중에서 순결의 가치를 노래하고 있다. 마음의 순결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통한다. 순결은 때 묻지 않음이며 때 묻은 모든 것을 배척한다. 백로는 까마귀 우는 골짜기에 가지 않고 신선은 지옥의 불구덩이에 발 딛지 않는다. 순결은 소극적으로 회피하는 덕으로서 힘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극히 적극적이면서도 창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순결의 존재 그 자체에 있다. 순결은 불순한 사람에 대하여 보행하는 양심이다. 악행을 일삼던 범죄자도 어린아이의 순진한 눈동자를 보면 무력해진다. 완전한 순결은 신성에 접한다. [각주:77]

 

백천 이천봉을 애도하는 만시를 살펴보자.

 

庚申餘淚尙靡晞(경신여루상미희)
豈意今朝更自揮(기의금조갱자휘)
日落寒山人已遠(일락한산인이원)
不知何處可同歸(부지하처가동귀)
- 慕巖, 詩「挽李白川天封」全文 [각주:78]

경신(1620)년에 남은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에 다시 뿌릴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해 떨어진 차가운 산에 사람들은 이미 사라졌는데
어디로 함께 돌아갈지 알지를 못하네
- 모암, 시「백천 이천봉을 애도하며」전문

 

산역(山役)이 끝난 장지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슬픈 장면을 노래하는 것이다. 뫼를 다 만들고 상주와 조문객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해는 떨어지고 산자락은 차가워졌다. 이제 죽은 자는 누구와 함께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근원적 질문 앞에서 우리는 말을 잃는다. 산 자는 산 자와 더불어 이승의 살던 곳으로 돌아가 버렸고 죽은 자는 이제 홀로 저승으로 가야 한다.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길이고 아무리 큰 힘이라도 멈추게 할 수 없는 길이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은 망각해야 한다. 산 자는 죽은 자를 잊어야 하고 죽은 자도 산 자를 잊어야 한다. 그러나 잊지 않으려 산 자는 죽은 자를 애도하고 추모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그리워하며 어디선가 배회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의 섭리는 그것마저 퇴색하게 한다. 산 자는 마침내 죽은 자를 잊고 죽은 자도 산 자를 잊었을 것이다. 영원한 망각 속에 그들은 영원히 존재한다. 존재는 망각이고 망각이 존재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것이 자연이고 순리이다.

 

2-3. 모암의 학문과 삶의 근원으로서의 거창

 

모암의 글에서 자주 나타나는 말이 <저문 길에 엎어지고 쓰러짐이 많았네(暮道多顚踣)>이다. 전쟁(임진왜란) 속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해야 했던 일이 그러하고, 자주 몸을 침노하는 질병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는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서서 향년 85세를 살았다. 85세는 현대의 기준으로도 장수라 할 수 있는데 당시로서는 아주 드문 장수였을 것이다. 환란과 질병을 모두 이겨내고 모암은 삶의 승리자가 된 것이다. 병이 오지 않는 삶은 없다. 병을 이겨내면 살아남고 병에 굴복하면 죽음을 맞는다. 살아남아 천수를 다한 자가 승리자이다.

 

모암이 만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시 황금 원숭이를 바라보며는 지난 생을 바라보는 모암의 회포를 가감 없이 노래한 시이다. 이 시는 어쩌면 모암의 일생이라는 대장정의 서사시가 마무리되는 종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모암은 그의 출생지이자 비운의 땅인 거창을 찾아간다. 거기 금원산이 있다.

 

雷首薇歌遠(뇌수미가원)
靑海竹露垂(청해죽로수)
猗歟金猿老(의여금원노)
千載同心期(천재동심기)
晩生高景切(만생고경절)
曾躡寒巖陬(증섭한암추)
申申佩拳誨(신신패권회)
再夕淸風帷(재석청풍유)
今來已歷世(금래이역세)
悵望勞遐思(창망노하사)
- 慕巖, 詩「過金猿有感」全文 [각주:79]

수양산 고사리의 우레 같은 교훈은 먼 이야기이고
대나무에 맺힌 이슬이 푸른 바다에 떨어지네
아! 황금 원숭이가 늙었으니 아름답지 아니한가
천 년이 가도 같은 마음이기를 기약하네
보잘 것 없는 내가 내리쬐는 햇살과는 인연이 끊어지고
일찍이 차가운 바위 구석에 올랐네
가르침을 거듭거듭 마음에 품고 정성껏 새기니
맑은 바람이 이틀 저녁에 걸쳐 휘장을 치네
지금 와 보니 시대는 이미 지나갔는데
고달팠던 날들을 먼 그리움으로 하염없이 바라만 보네
- 모암, 시「황금 원숭이를 바라보며」전문

 

황금 원숭이를 바라보며(과금원유감)는 현재의 거창군 위천면에 있는 금원산을 지나며 생긴 감회를 작시한 것인데 그 내용으로 보아 모암 만년의 작품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시는 한반도 남쪽을 한 생에 걸쳐서 주유하다가 노년이 되어 비로소 힘들었던 한 생의 출발점인 거창을 찾아와 옛날을 되돌아보고 스승 한강 정구의 가르침을 다짐하면서 모암 자신의 학문적 현실 좌표를 점검하는 자전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모암은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여 담담하게 바라보고 평가하면서 시적 화자로서 시 속에 슬쩍 넣어 둔다.

 

오언배율시인 황금 원숭이를 바라보며를 구절별로 살펴본다.

 

雷首薇歌遠(뇌수미가원)
靑海竹露垂(청해죽로수)

수양산 고사리의 우레 같은 교훈은 먼 이야기이고
대나무에 맺힌 이슬이 푸른 바다에 떨어지네

 

1~2구는 백이의 수양산 고사리를 소환한다. 전술(3-2-2 )한 바와 같이 모암은 <백이(伯夷)의 청백함을 사모하고 백이의 절의를 숭상하였다.> [각주:80] 불의한 왕을 섬기지 않고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동생 숙제와 함께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먹으며 살다가 나중에는 그 마저도 거부하며 굶어 죽은 자가 백이이다. 모암은 백이처럼 한 평생을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모암 주변의 현실은 도()가 쇠퇴하여 청빈보다는 부패가 성하고 절의보다는 불의가 판을 치고 있었다. <수양산 고사리의 우레 같은 교훈은 먼 이야기>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백이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한들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음을 모암은 한탄한다. <대나무에 맺힌 이슬이 푸른 바다에 떨어지네>라는 한탄은 미미한 절의자의 미약함을 말하는 것이다. 대나무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은 맑겠지만 그 한 방울의 이슬이 바다에 떨어져서 바닷물을 정화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모암은 알고 있는 것이다.

 

猗歟 [각주:81] 金猿老(의여금원노)
千載同心期(천재동심기)

아! 황금 원숭이가 늙었으니 아름답지 아니한가
천 년이 가도 같은 마음이기를 기약하네

 

3~4구에서, 모암은 느닷없이 늙은 황금 원숭이를 소환한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에 있는 금원산(金猿山)은 글자 그대로 <황금 원숭이 산>이다. 옛날에 재주가 많은 황금 원숭이가 기고만장 날뛰는데 그 힘을 당할 수가 없어서 한 도승이 그를 잡아 바위 속에 가두었다는 전설 속의 바위인 원암(猿岩)이 이 산에 있다. 모암은 자기 자신을 황금 원숭이로 보고 있는 듯하다. 재주는 남들보다 뛰어났지만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가문을 지탱해야 하는 자기 자신의 사정을 환경과 여건이라는 바위 속에 갇혀 사는 신세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도 이곳 거창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모암이기에 자기 자신을 바위 속에 갇힌 신세로 본 것 같다. 그러나 모암은 <! 황금 원숭이가 늙었으니 아름답지 아니한가>라고 하면서 찬사를 보낸다. 완숙한 경지의 자기긍정이다. 늙은 황금 원숭이가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인가? 늙은 황금 원숭이는 금빛 털도 아름답겠지만 방약무인하지 않는 원숙한 성품과 지혜 또한 아름다울 것이다. 여기서의 황금 원숭이는 중국 명나라의 장편소설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과 동일시된 존재로 보인다. 그리하여 모암은 장수(長壽)하는 자신의 수명과 불사(不死)하는 손오공의 수명을 동일시하고 자신의 경륜과 손오공의 경지를 동일시하는 것 같다. <천 년이 가도 같은 마음이기를 기약하네>라는 바램은 이룬 도()가 내내 이어지기를 염원하는 자기다짐이라 할 수 있다.

 

晩生高景切(만생고경절)
曾躡寒巖陬(증섭한암추)

보잘 것 없는 내가 내리쬐는 햇살과는 인연이 끊어지고
일찍이 차가운 바위 구석에 올랐네

 

5~6구는, 이 시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이다. 당대 유행했던 한시의 관용적 표현이 등장하고 있고 상징과 은유가 보다 멀리 구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생(晩生)>은 말하는 이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로 보아 <보잘 것 없는 나>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 만생은 겸손하는 표현이다. 겸손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높이 평가되는 가치이다. 겸손은 높은 곳을 바라보는 자의 덕목이다. 그의 시선은 위로 향하므로 자신은 저절로 낮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자는 비굴하지 않고 자기 긍지심을 가진다. 오만한 자는 아래를 내려다보기 때문에 퇴보하지만 겸손한 자는 위를 바라보기 때문에 발전한다. 성경에서도 겸손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높이려 나를 낮추어”(고린도후서 11:7),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야고보서 4:10)라는 구절이 그러하다. 만생을 보잘 것 없는 나로 옮기는 것은 해결되었다. 이제 문제는 고경(高景)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이다. 먼저, ()의 뜻 가운데서 햇살을 취하면 <고경절(高景切)><높은 햇살을 자르고>가 되는데, 모암이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것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뒷배가 끊어지고라는 내용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럴 때 5구 만생고경절(晩生高景切)<보잘 것 없는 내가 내리쬐는 햇살과는 인연이 끊어지고>로 의역해도 될 것이다. [각주:82] 여기서는 이 번역을 따르기로 한다. 이와는 달리, 고경(高景)을 고산경행(高山景行)의 줄임말로 보면 높은 산과 큰 길이라는 뜻이 된다. 높은 산은 만인이 우러러보고 큰 길은 편하기에 모든 사람이 가고 싶어 한다. 높은 산으로 가는 큰 길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나 모든 사람이 가고 싶어 하는 길이 고경이라 할 수 있다. 그랬을 때 <고경절(高景切)><높은 산 밝은 길을 포기하고>가 된다. ()에는 밝다는 뜻도 있으며 큰 길은 곧 밝을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모암이 위기지학에 힘쓰며 과거(科擧) 공부에 매달리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높은 산 밝은 길을 포기하고><벼슬길에 나가지 않고>를 의미한다. 한암(寒巖)은 고경(高景)의 대구(對句)로서 <차가운 바위>인데 모암의 스승인 정구의 호인 한강(寒岡, 차가운 산등성이)과도 통하는 유사개념이다. 한강은 모암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항상 내재하고 있었기에 은연중에 한강의 이미지가 시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모암에게 있어서 스승 한강은 가치이고 고경은 무가치인 것이다. 모암은 스승 한강을 참으로 경외하고 사모했다. 한암추(寒巖陬)<차가운 바위 기슭>인데 이 또한 두 가지 의미로 풀어볼 수 있다. 하나는 <한강 문인이라는 강학의 산기슭>이고, 다른 하나는 <위기지학을 하는 산림처사의 산기슭>이 된다. 두 개념을 전자는 전자끼리, 후자는 후자끼리 연결시키면 5~6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

 

① 보잘 것 없는 내가 내리쬐는 햇살과는 인연이 끊어지고
              (못난 나는 아버지를 여의어 뒷배가 사라지고)
    일찍이 차가운 바위 구석에 올랐네
             (일찍이 한강 문인이라는 강학의 산기슭에 올랐네)

② 보잘 것 없는 내가 높은 산, 밝은 길을 포기하고
             (보잘 것 없는 내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일찍이 차가운 바위 구석에 올랐네
             (일찍이 위기지학을 하는 산림처사의 산기슭에 올랐네)

 

이어서 7~8구를 보자.

 

申申佩拳誨(신신패권회)
再夕淸風帷(재석청풍유)

가르침을 거듭거듭 마음에 품고 정성껏 새기니
맑은 바람이 이틀 저녁에 걸쳐 휘장을 치네

 

7~8구에서, 모암은 성현의 가르침과 스승 한강과 여헌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정성껏 새겼다고 한다. ‘거듭거듭은 가슴에 품고 또 품는 것이며 새기고 또 새기는 것이다. 그것은 모암 혼자만의 정진이나 노력을 말함은 물론이고, 이미 가학이 되어 모암의 아들들도 각자가 승계하고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맑은 바람이 이틀 저녁에 걸쳐 휘장을 치네>에서 이틀 저녁은 모암과 아들들의 두 세대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고 맑은 바람(청풍)은 청백과 우아가 이미 가풍으로 정착되고 있음을 뜻한다. 모암은 스스로 걸어온 위기지학의 길과 산림처사의 길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자기평가로서 스스로에게 후한 점수를 주면서 긍지를 가진 것 같다.

 

今來已歷世(금래이역세)
悵望勞遐思(창망노하사)

지금 와 보니 시대는 이미 지나갔는데
고달팠던 날들을 먼 그리움으로 하염없이 바라만 보네

 

결구인 9~10구는, 만년의 모암이 거창 금원산에 와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먼 그리움에 젖어드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대미를 장식한다. 돌아보면 이미 지나간 시대인데 그때의 고달픔이 지금은 그리움으로 눈앞에 떠오른다. 인간은 과거는 회상하고 미래는 상상한다. 상상은 설레고 회상은 처연하다. 음악적으로 말하면 상상은 벨로체(veloce)이고 회상은 라르고(largo)이다. 아련한 지난날을 흰 머리 휘날리는 모암이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황금 원숭이인 모암은 거창에서 넘어지고 거창에서 일어섰다.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가문을 붙들어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면서 그가 세운 목표인 어머니에 대한 효도에 온몸을 바쳤다. 모암의 가문에는 그때 맑은 바람이 이틀 저녁에 걸쳐 휘장을 쳤다. 날이 갈수록 번성하게 될 징조가 이미 그때 나타났던 것이다.

 

3. 일휴정 이영세 선생의 시 해명

 

일휴정(日休亭) 이영세(李榮世:1618.10.6.~1698.10.10./향년 80) 선생의 저작은 일휴정 선생 문집(), 일휴정 선생 문집(), 국역 일휴정 속집, 일휴정 선생 반궁일기)등이 있는데 문집 (), () 2권은 아직 완역(完譯)이 되지 않았다. 이 글에서 인용하는 문집()의 시편은 일휴정 선생의 11세손 삼원(三元) 이인수(李仁洙, 1926~ ) 선생의 발췌 번역본 [각주:83] 을 토대로 한다.

 

3-1. 일휴정 시의 분류

 

 3-1-1. 일휴정 시의 주제별 분류

 

일휴정 시를 주제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분류 편수 비율
문집 속집
효도시 1 1 2 2%
자전적(自傳的) 철학시 2 1 3 3%
서정시 10 2 12 12%
기행시 6 2 8 8%


전별시
(餞別詩)
9 4 13 12%
만시(挽詩) 33 17 50 50%
절의시
(節義詩)
0 2 2 2%
찬시(讚詩) 3 1 4 4%
축시 2 0 2 2%
차운시
(次韻詩)
3 2 5 5%
69 32 101 100%

 

아버지 모암에 비해 아들 일휴정은 만시가 월등히 많아졌다. 그만큼 사회적 교류가 넓어졌다는 것을 반증한다. 새로운 주제로서 전별시, 절의시, 찬시, 축시, 차운시 등이 일휴정에게서 나타난다. 시의 전 장르를 거침없이 넘나드는 활발함을 보이는 것이다. 작품의 전체 편수도 아들 일휴정이 아버지 모암보다 7배나 많아졌다. 그러나 일휴정의 경우 문집과 속집에 중복 수록된 시가 두 편 [각주:84] 발견되었다.

 

3-1-2. 일휴정 시의 형식별 분류

 

일휴정 시를 형식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분류 편수 비율
문집 속집
고체시(古體詩) 0 0 0 0%







오언절구 13 4 17 17%
칠언절구 14 2 16 16%
오언율시 17 11 28 27.5%
칠언율시 19 9 28 27.5%
오언배율시
(五言排律詩)
5 4 9 9%
칠언배율시 0 1 1 1%
혼합시(五言+七言) 1 1 2 2%
69 32 101 100%

 

모암은 절구시가 많았는데 일휴정은 율시가 많다. 그만큼 호흡이 길어졌다는 것이다. 모암에게는 고체시가 한 편 있었는데 일휴정에게는 없다. 처음부터 전문적으로 한시에 입문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모암에게는 없었는데 일휴정에게 새로이 나타는 분야는 오언율시, 칠언배율시, 오언과 칠언이 혼합된 혼합시 등이다.

 

3-2. 일휴정의 시[각주:85] 정신

3-2-1. 효와 시의 계승

 

) 효의 계승

 

왕대밭에 왕대 난다는 속담과 같이 효자인 아버지 모암의 뒤를 이어 아들인 일휴정도 효성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휴정은 아버지 모암과는 달리 특별히 효를 주제로 하는 시를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 가운데 부모님의 안부를 걱정하면서 타고난 효심을 자연스레 표출하고 있다. “어버이 생각에 눈물 외곬으로 뿌리네[각주:86] , “양친께서 천수를 누리시기를[각주:87] , “남쪽 고향의 소식이 끊어졌으니/구름 낀 먼 산이 몇 겹이나 막혔는가[각주:88] 등이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휴정 35세인 16539월부터 37세인 165510월까지 성균관 유학 생활 기간인 22개월 동안 집으로 편지를 무려 23회나 보낸다. [각주:89] 어림잡아 한 달에 한 번꼴로 집에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집에서 오는 편지를 보름 이상 받지 못하면 일휴정은 집 소식을 듣지 못하여 답답하고 난감하다[각주:90] 고 하면서 다음날은 고향 꿈을 꾸는데 고향 꿈이 심히 번거로우니 혹 아이들이 아파서 그런지 얻어 들을 수 없어 답답하고 난감하다[각주:91] 고 기록한다. 세심하면서도 섬세한 일휴정의 성품이 보이는 대목이다. `37세의 일휴정이 성균관 상경 도중에 꾼 어머니의 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기를 보면 그의 효심이 얼마나 간곡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길을 떠난 후 꿈에 자모를 뵙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오늘밤에는 더욱 상세하여서 생각하니 애세(愛) [각주:92] 께 보낸 편지가 도달하여 그런가, 또는 비가 오니 멀리서 염려하셔서 이런 꿈을 꾸는 것인지
- 일휴정,『반궁일기』, 1655.2.7. [각주:93]

 

일휴정은 아버지 모암과는 달리 <충과 효>에 관한 논문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선비는 집안에 들면 부모님을 섬기고 나가면 임금을 섬기되, 신하가 되어서는 마땅히 충성하고 자식이 되어서는 마땅히 효도하여야 한다[각주:94] 고 한다. 충효를 해야 하는 이유는 임금의 영토에서 나온 것을 입고 먹으므로 충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고, 부모는 나를 낳고 길러 한 몸이 나누어진 것이니 효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각주:95] 는 것이다. 요컨대 신하는 임금에게 받았기 때문에 충성해야 하고 자식 또한 부모에게 받았기 때문에 효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일휴정의 입장은 현대적인 효의 개념으로서 <채무이론>과 유사하다. 채무이론이란 자식은 부모에게 채무를 졌으니까 그 채무를 갚아야 하는데 바로 그와 같이 빚을 갚는 것이 효라는 이론이다. 일휴정은 효는 (부모를 섬기는것이기에) 곧 임금을 섬기는마음으로 옮길 수 있으므로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구할 수 있다[각주:96] 고 한다. 이는 효도 충도 내면화가 중요하며 인륜 교육을 통하여 <섬기는 데> 적합한 인격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또한 일휴정은 효는 만세에 어려운 바[각주:97] 라고 하는데 이는 효를 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효가 높은 가치가 될 수밖에 없다는 현대의 가치윤리학 이론과 연결될 수 있다. 일휴정은 또 충과 효 중에서 하나가 우세하면 다른 하나는 열등하게 된다[각주:98] 고 하는데 이는 현대 윤리학에서 말하는 가치 갈등 관계를 이미 일휴정이 파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휴정은 효 없이 충이 없고 충은 효에 근본하니 둘 다 온전히 하지 못한다면 차리리 왕부(王裒)처럼 효를 온전히 함이 낫다[각주:99] 고 한다. 충과 효 중에서 효의 우선권을 말하는 대목이다. <충은 효에 근본한다>는 말은 바로 <효가 먼저이고 충이 다음이다>라는 말과 같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자연적 관계이고 임금과 백성이 관계는 인위적 관계라고 본다면 효가 먼저이고 다음이 충이라는 <효 우선권 이론>은 타당하다고 하겠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인위는 바꿀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휴정은 물욕에 덮혀서 본연의 선()을 잃더라도 본체(本體)의 밝음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니 진실로 능히 그 착한 성품으로 인하여 어둡고 미혹함을 제거한다면 착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각주:100] 고 한다. 이는 성선설을 취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다른 맥락에서는 이법적 존재로서 선이라는 가치 자체와 실사적 존재로서 행위하여 실현되는 현실적 선이 있는데, 실사적 선이 모두 사라지더라도 이법적 선은 자체존재하고 있으며, 실사적 인격의 선택으로 다시 실현될 수 있다는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가치윤리학 이론과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효의 구체적 실행 기준을 일휴정은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부모님의 따뜻함과 서늘함을 살피고, 부드러운 음식을 권하여 마음이 닿는 바를 극진히 하고 (중략) 온갖 방법으로 어버이를 즐겁게 하고 (중략) 출세하여 바른 도를 행하는 것이 효도이다 [각주:101]

 

) 시의 계승과 모암 시의 개작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시란 뜻이 가는 처소이다. 마음속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詩者, 志之所之也. 在心爲志, 發言爲詩)” [각주:102] 고 한다. 그렇다면 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역시 자하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직이면 이것이 말로 표현된다(情動於中而形於言)” [각주:103] 고 한다. 시는 뜻의 처소이고, 감정이 움직여서 발화된 뜻이 말이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감정의 움직임을 따라 말로 표현되어 나와서 담기는 처소(공간)가 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각이 감정의 흐름에 실려서 입 밖으로 나온 말이 거주하는 공간이 시라는 말과 같다. 이것은 생각(감정)--시로 이어지는 연관구조이다. 생각과 말과 시는 정신의 작용이며 그것은 일정한 문화적 환경(객관적 정신의 세계)의 산물이다. 최소한이면서 제1차적인 문화적 환경은 가정이다. 요컨대 고상한 문화적 환경에서는 고상한 생각과 말이 주류가 되고 저속한 문화적 환경에서는 저속한 생각과 말이 기본이 된다. 이러한 논리 위에서 일휴정의 시는 아버지 모암의 시에 영향을 받은 것은 물론 모암 시를 계승하여 성장했을 것이라고 생각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먼저 전해지는 시의 총 편수가 아버지 모암은 14편인데 비해 아들 일휴정은 101편으로서 일곱 배가 넘는다. 주제에 있어서 모암 시는 효도시, 자전적 철학시, 서정시, 기행시, 만시 등 다섯 가지로 분류되는데 비해 일휴정은 모암과 같은 다섯 가지 주제 외에 전별시, 절의시, 찬시, 축시, 차운시 등 다섯 가지나 더 많아서 두 배가 된다. 시의 형식에 있어서 모암은 고체시, 오언절구, 칠언절구, 칠언율시, 오언배율시 등 다섯 가지로 분류되는데 일휴정은 고체시가 없는 반면에 모암과 같은 오언절구, 칠언절구, 칠언율시, 오언배율시 외에 오언율시, 칠언배율시, 혼합시(오언+칠언) 등 세 가지 형식의 시가 더 있음으로서 일휴정은 한시의 거의 전 장르를 작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주제나 형식면에서 아들 일휴정이 아버지 모암을 훨씬 능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언배율시의 분량에 있어서 모암은 10(황금 원숭이를 바라보며) ~ 12(우연히 읊음)에 그치고 있는데 일휴정은 226(운장 이창진의 시에 화답하여)에 달하는 장시를 구사함으로서 긴 호흡과 웅장한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아버지 모암의 작품을 아들 일휴정이 개작한 것으로 보이는 시가 세 편이 있다. 그렇게 된 연유를 몇 가지 경우로 미리 추정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아버지 모암 시의 부족한 부분을 아들 일휴정이 보완하여 완성도를 높인 경우

2) 아들 일휴정이 아버지 모암 시에 심취하여 본보기로 삼아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일휴정 자신의 취향에 맞게 개작한 경우

3) 누군가가 모암 시의 편수를 늘리기 위하여 일휴정의 시에 약간의 내용을 첨삭하여 모암 문집에 포함시킨 경우

4) 후대의 편집자가 가필 또는 첨삭하여 모암 또는 일휴정의 문집에 포함시킨 경우

5) 후대의 편집자가 분류와 확인상의 오류로 모암일휴정 부자간의 시를 중복 수록한 경우

 

모암 시와 일휴정 시가 중복되는 3편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수록 국역 모암선생문집(2003) 20 국역 일휴정속집(2019) 41~42
원문 秋齋夜坐(추재야좌) 偶吟(우음)
長夜何時曉(장야하시효)
幽人獨不眠(유인독불면)
開窓天宇靜(개창천우정)
明月滿前川(명월만전천)
(왼쪽과 같음)
번역 서재에 앉아 가을밤을 새우네 우연히 읊다
긴 밤은 언제 밝아 오려나
속세를 피해 조용히 사는 이가 홀로 잠을 이루지 못하네
창문(지게문)을 여니 온 세상이 고요하고
밝은 달빛은 앞내에 가득하네
(왼쪽과 같음)

 

제목만 추재야좌(秋齋夜坐)에서 우음(偶吟)으로 바뀌었지 내용은 글자 한 자 바뀌지 않았다. 이 시의 지역적 배경은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로 보인다. 앞내(前川)는 매원 마을 앞을 흐르는 동정천이다. 실제로 아버지 모암이나 아들 일휴정 두 사람 모두 매원에서 살았다 그렇게 보면 이 시는 모암의 시일 수도 있고 일휴정의 시일 수도 있다.

 

수록 국역 모암선생문집(2003) 15~16 국역 일휴정속집(2019) 17~18
원문 過海印寺(과해인사) 過海印(과해인) 辛卯(1651)
曉發暘亭(효발양정)
尋海印來(심해인래)
孤雲千古跡(고운천고적)
惟有一荒臺(유유일황대)
曉發羊腸(효발양장로)
尋海印來(심해인래)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번역 해인사를 지나며 해인을 지나며
새벽에 양정 길을 떠나
멀리 해인사를 찾아왔네
고운(최치원)의 먼 옛적 발자취에
오로지 황량한 누대 하나만 있구나
새벽에 구불구불한 길을 떠나
다시 해인사를 찾아왔네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이 시는 왼쪽의 모암 시가 원작이고 오른쪽의 일휴정 시가 개작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양정은 한강 정구의 강학소 무흘서재(武屹書齋)가 있던 현재의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이고 여기서 성주군 백운리를 지나 해인사까지 가는 데는 걸어서 한 나절 정도 걸린다. 따라서 모암이 한강 문하에서 수학하던 어느 날 유생 몇몇이 어울려 해인사를 찾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휴정의 시에서는 <양정(暘亭)><양장(羊腸)>으로 바꾸어 놓았다. 일휴정 출생 2년 후에 이미 한강은 작고하였으므로 일휴정과 한강의 연결고리는 없을 것이며 일휴정이 양정에 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양정(暘亭)>지명인데 <양장(羊腸)>양의 창자란 뜻으로 구불구불한 길을 의미한다. 해인사로 가기 위하여 오르는 가야산 길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로에서 해인사 입구인 가야면 치인리까지가 골짜기의 개울을 따라 낸 매우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 구불구불한 길을 새벽에 떠났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거기는 해인사에 이르는 막바지 길이고 인가라고는 전혀 없는 곳으로서 해인사에 도착하기 직전의 길이지 새벽에 떠날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멀리()><다시()>로 바꾸고 있다. 이 시는 다시 해인사를 찾으며쓴 시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 이전의 어느 시점에 일휴정이 해인사를 먼저 찾았어야 하는데 그 시기는 문집이나 속집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왼쪽의 모암 시의 문맥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원작이라 할 수 있겠다.

 

수록 국역 모암선생문집(2003) 14~15 국역 일휴정속집(2019) 45~46
원문 偶吟(우음) 有感(유감) 甲子(1684)
乾坤浩無垠(건곤호무은)
萬物各自得(만물각자득)
而我獨何爲(이아독하위)
暮道多顚踣(모도다전복)
疾病累侵尋(질병누침심)
湖海少相識(호해소상식)
(추가)
(추가)
省躬良可咍(성궁양가해)
半世弄觚墨(반세농고묵)
(추가)
(추가)
(추가)
(추가)
(추가)
(추가)
歲晏孰華予(세안숙화여)
河淸俟未極(하청사미극)
隨分老漁樵(수분노어초)
淸風臥窓北(청풍와창북)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天寒體無衣(천한체무의)
秋稔口無食(추임구무식)
腐儒良可咍(부유양가해)
(왼쪽과 같음)
徒勞入文圍(도로입문위)
坐令勍自剋(좌령경자극)
有室不肯構(유실부긍구)
有田不力穡(유전부력색)
傍人笑拙計(방인소졸계)
妻子恒 (처자항온색)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번역 우연히 읊음 느낌이 있어
하늘과 땅은 넓고 넓어 끝이 없고
만물은 하나하나 스스로 알아서 이루어지는데
그런데 나는 홀로 어떻게 살아왔나?
저무는 나이가 되도록 자주 엎어지고 넘어졌네
병이 여러 번 몸에 들었고
시골에 묻혀 사니 친분 있는 사람이 적네
(추가)
(추가)
스스로 돌이켜보니 참으로 나 자신을 비웃을 수밖에 없네
나이 오십이 되도록 홀로 먹만 가지고 놀았으니
(
추가)

(추가)
(추가)
(추가)
(추가)
(추가)
저무는 세월에 누가 나를 화려하다 하리오
황하의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려도 아직도 멀기만 하구나
분수에 따라 물고기 잡고 나무하며 늙었고
맑은 바람에 북쪽 창가에 누웠노라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추운 날에도 몸에는 옷이 없고
가을 곡식이 여물어도 입에는 먹을 것이 없네
쓸모없는 선비라고 비웃어도 좋고
(왼쪽과 같음)
학문을 시작하여 문장에 둘러싸여 헛되이 노력하니
앉아서 명령하여 강하게 이기려 하였네
집이 있으나 옳게 이루지 못하고
전답이 있으나 힘써 농사짓지 못하니
곁의 사람이 나의 서툰 경영을 비웃고
처와 자식은 항상 불만이었네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왼쪽과 같음)

 

오른쪽의 일휴정의 시 느낌이 있어(有感)는 작시 년도가 갑자(甲子)로 명기되어 있는데 이때는 1684년으로 일휴정의 나이가 66세이던 때이다. 그런데 시의 내용에서는 나이 오십이 되도록 홀로 먹만 가지고 놀았으니라고 한다. 내용으로 보면 50세에 쓴 시이고 오른쪽의 기록으로 보면 66세에 쓴 시가 된다. 이는 모순이다. 따라서 좌측의 모암 시가 원작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오른쪽의 개작한 시는 조선조 선비의 문제점으로 지적받고 있는 내용을 첨가하고 있다. 그러니까 선비라는 존재는 고담준론과 음풍농월만 하면서 현실적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능력이 없음을 자인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일휴정의 아내 포산 곽씨는 17(1635) 중춘에 일휴정과 혼인하여 30(1648)에 병사하는데 결혼생활 13년 간 일휴정과의 사이에 22녀를 두었다. 그 기간은, 신혼 초부터 남편의 투병 생활을 뒷바라지하면서 자신도 질병을 앓아가면서 자녀 출산과 양육에 전심전력한 기간으로 보인다. 일휴정은 <죽은 아내 제문>에서 그대의 타고난 자질은 진실로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일찍 가정의 교육을 받아 이미 큰 뜻을 대략 알았네[각주:104] 라고 하면서 죽은 아내의 부덕을 칭송하고 있다. 그런 아내가 남편의 서툰 경영을 비웃을 수는 없는 것이다. “후취 연안 이씨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각주:105] 고 하니 처와 자식은 항상 불만이었네라는 구절도 성립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오른쪽의 개작은 후대의 편집자의 가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2-2. 성균관 유학과 학문적 성취

 

) 성균관 유학과 면학정신

 

아버지 모암은 시골에 묻혀 사니 친분 있는 사람이 적네[각주:106] 라고 하면서 자신의 고적함을 노래한다.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꺾어 먹으며 살던 백이를 사표로 삼고자 했던 [각주:107] 모암은 청백과 절의로 한평생을 살면서 비교적 한적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아들 일휴정은 14(1632)에 완정 이언영(李彦英, 1568~1639)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함으로서 [각주:108] 일찍이 학문적 토대를 굳건히 하였고 특히 성균관 유학을 통하여 학문과 견문을 광활하게 넓혔다. 일휴정 66(1684)에 두 조카 예갑, 형갑에게 면학을 독려하는 내용으로 쓴 서간문에서 일휴정은 자신에 대한 언급을 다음과 같이 한다.

 

내가 어릴 때 기억력이 좋아 12세에 경서를 읽고 14세에 문장과 시를 익혀 장차 큰일을 할 것 같았는데, 불행히도 병에 걸려 청년 시절을 침과 약으로 허송했으니 이것도 운명이라 어찌 하겠는가? 다행히 병이 차도가 있고 나아져서 성균관 생활을 약간 했으나 갯버들처럼 빨리 늙어 의지가 축 늘어져서 지금 나이 예순여섯에 늙은 머리카락이 많으니 삶이 세상에 무익하고 이름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니 천지를 부앙함에 어찌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중략)
내가 비록 쇠약하고 시들었지만 아직도 서책의 공부를 그만 두지 않았으니 시서(詩書)와 육예(六藝)의 글과 제자백가의 글에 어찌 바르게 나아가서 유익함을 구하지 않겠는가?
- 일휴정, 서간문「예갑 형갑 두 조카는 보아라」부분 [각주:109]

일휴정은 17(1635) 중춘에 부인 포산 곽씨와 결혼하여 만춘에 우귀(于歸)한다. 그러나 과거 준비에 집중하느라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지냈는데 18(1636) 봄에 병에 걸려 고질병이 된다. 20(1638) 3월부터 의원을 찾아 침과 약으로 버티었으나 21(1639) 1월에는 죽음 직전까지 이른다. 그해 여름 약간의 차도가 생겨 5월 초에 부인과 합방한 이후 계속 함께 지내게 된다. [각주:110] <불행히도 병에 걸려 청년 시절을 침과 약으로 허송했>다는 것이 바로 이 내용이다.

 

이 서간문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성균관 생활을 약간 했으나>이다. 겸손하게 말하고 있지만 성균관 생활에 대한 자부심이 언뜻 엿보인다. 조선의 수도인 한성에 가서, 국가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니 전국의 인재들과 교류하였을 것이고 그들과 학문과 경륜을 겨루고 경쟁하면서 교분을 쌓았을 것이다. 아버지 모암이 궁벽한 생활을 한 것에 비하면 획기적이면서 엄청난 세계의 확장이고 발전이다.

 

일휴정은 나이 35(1653) 되던 해의 917일에 집을 떠나 925일에 유생들의 기숙사가 있는 한성 반촌에 도착하고 다음날부터 성균관에 나가 공부를 한다. [각주:111] 이때는 부인 포산 곽씨와 사별(1648.07.16.)한 후 5년이 지난 때이다. 성균관 수학 기간에 남긴 반궁일기에 따르면 일휴정은 세 차례에 걸쳐 성균관 수학을 한다. 35(1653)50, 36(1654)55, 37(1655)238일을 성균관에서 면학한다. 매원 집에 돌아와 쉬던 기간을 빼고 성균관에서 면학한 3년을 통산하면 총 343일이 된다. 이 기간 중에 일휴정은 활발한 교유를 하면서 학문에 정진한다. 공부를 마치고 최종적으로 매원 집으로 돌아온 날은 37세인 1655106일이다.

 

다음은 성균관에 들어간 첫해인 1653년 섣달 그믐밤에 일휴정이 쓴 시다.

 

객지에서 살면서 무엇을 이루었는가?
멀리 떠나 있으니 하루가 일 년 같구나
칠곡 나루터는 꿈속에서나 돌아가고
소학산은 구름 밖 먼 곳에 있네
소식 전하는 사람은 자주 오지 않고
집 편지는 잠잠하게 도착하지 않네
고향 생각 간절함을 어찌 감당하리오
홀연히 한 해가 바뀜을 깨달았네
(중략)
동생을 생각하니 구름 보기 괴롭고
어버이 생각에 눈물 외곬으로 뿌리네
(중략)
오랜 객지 생활로 담비 털옷 구멍 났네
공적은 진실로 세우기 어렵고
오르고 정체됨이 참으로 연분이 있네
(중략)
세상의 맛을 일찍이 편력했으니
나를 알아주는 그대 아직은 건재하다네
(중략)
끈으로 붙들어 매어도 해는 지연시키기 어려워
홀로 소나무 아래 길에서 읊조리니
부질없이 눈(雪) 속에서 어깨를 치켜세우네
교분에 의탁하니 나의 졸렬함이 부끄럽고
마음을 논하니 그대 현명함 깨달았네
고상한 자태는 구름 밖 학이요
맑은 가락은 비온 뒤의 매미 소리로다
붓을 들어 쓰니 용과 뱀이 꿈틀거리고
시를 지으니 수놓은 비단 같이 곱구나
담백한 마음은 맑은 물과 같고
웅변은 은하수를 걸친 듯하네
성균관에 머물며 함께 지낸지
달이 몇 번이나 이지러지고 찼던가
(중략)
애석하다 이 해의 밤도 다 가니
나의 회포를 써서 주네
고향으로 돌아감이 어찌 늦었는가
벗들이 연기처럼 흩어짐을 알겠노라
산초나무 반석에는 차가운 꽃망울 맺히니
봄날의 서광이 아름답구나
(중략)
유교는 바른 정치를 추구하고
문장의 대가는 정중하고 경건함을 생각하네
(중략)
날개는 붕새가 되어 남명으로 치솟길 기다리고
이름은 응당 계적의 명부에 엮어 있네
훗날에는 골몰에서 벗어날 것이니
오늘에 구애받지 말자
땅이 치우치니 산을 맞이하기 아득하고
누대 높으니 달을 먼저 맞이하네
(중략)
오늘밤 한없이 비오니
양친께서 천수를 누리시기를
- 일휴정, 시「섣달 그믐밤의 회포를 읊다」부분 [각주:112]

 

일휴정은 성균관이 있는 반촌에 들어간 바로 첫날(1653.09.25.)부터 선산인 이면여와 같은 숙소를 정함으로써 친분을 쌓기 시작한다. 그해 연말에 이면여가 섣달 그믐밤(除夕)의 회포시를 짓고 친구들에게 화운(和韻)을 청함으로써 일휴정은 1226일 이만여의 시를 차운하여 이 시를 지었다. [각주:113] 이 시는 오언배율시로서 오언으로 이루어진 구의 수가 자그마치 84구에 이른다. 호흡이 긴 장시이다. 일휴정은 나이 35(1653)이던 이때 이미 시의 높은 경지를 넘어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균관 유학을 하면서도 일휴정은 늘 고향을 그리워한다. 칠곡나루터와 소학산이 눈앞에 선하다. 기다리는 집 편지는 오지 않고 어느새 한 해가 저문다. 동생과 어버이 생각으로 눈물이 솟는데 섣달 그믐밤이 다 가고 있으니 애석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에는 골몰에서 벗어날 것이니/오늘에 구애받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누대 높으니 달을 먼저 맞이하네>라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양친께서 천수를 누리시기를> 손 모아 빈다. 이 시는 물론, 반궁일기전편을 통하여 접할 수 있는 일휴정은 병약한 체질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감성적이어서 정이 많은 성품이면서도 고독을 이겨내는 극기력과 차가운 이성으로 학문에 정진하는 강인한 선비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성균관 유학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의 다음과 같은 일정과 상황을 보면 일휴정 가정의 법도와 우애 또한 짐작할 수 있다.

 

일휴정은 성균관 유학을 끝내고

1655년 9월 17일 성균관이 있는 반촌을 출발하여 환향길에 나선다.

5일째인 21일에 단동(丹洞)을 지나다가 비를 만나 한질(감기)에 걸린다.

22일에 조령(경북 문경 새재)을 보행으로 넘으면서 한질이 더 심해졌다.

23일에 유곡(幽谷)에 도착하여 스스로 밥을 지으려고 하니 마침 이웃 여자가 와서 방아를 찧으려고 하기에 부탁하여 밥을 지어 먹은 후 재를 넘어 지촌(枝村)에서 투숙하였다. 한기로 떨면서 괴로워서 술을 사서 마셨으나 다탕만 못하였다

24일에 일찍 출발하여 상산(경북 상주)을 지날 때는 한질이 더욱 심해졌다. 선산(善山) 초곡 북쪽 10리 지점에 있는 공암촌(貢岩村)에서 유숙하였다.

26일에 안세(安世) 아우가 매원에서 거기(공암촌)까지 마중을 나오니 놀랍고 반가워서 망연하였다. 집안이 모두 편안한 것을 알고 즐겁기 그지없다.

27일에 안세 아우가 노장(盧丈)을 가 뵈었는데 함열(咸悅)장이 또 와서 보며 그의 손자가 별도로 지은 글을 보이고 또 그의 아이를 일휴정에게 배우게 하여 일휴정은 아이에게 통감(通鑑) 몇 장을 가르쳤다.

28일 아침에 안세 아우와 같이 낙동강을 건너서 구만(九萬)의 우소인 신풍정(新豊亭)에 이르고 인근 마을에서 유숙하다

29일에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를 맡겨서 동생 안세를 먼저 돌려보내고

10월 1일에서 3일까지 거기(신풍정 인근 마을)에서 머물다가

4일 조반 후에 귀로에 올라 선산군 해평에 도착한다. 여기에도 안세 아우가 미리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어서 함께 유숙하였다

5일에 옥산 황상동(지금의 구미시 황상동)의 작은 누이 집을 방문한 뒤, 저녁에 길을 떠나 청계(淸溪)에 도착하여 안세 아우와 함께 교우 유태선의 집에서 잤다.

6일 아침에 안세 아우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교우 조박술의 집을 방문한 뒤 박곡(칠곡군 석적읍 아곡리)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양아(兩兒)[각주:114]를 먼저 보고 매원으로 달려가 북당을 배알하니 즐겁기 그지없었다.[각주:115]

 

한성 반궁에서 칠곡 매원 집으로 돌아오는데 19일이 걸렸다. 도중에 한질(감기)에 걸려 병석에 누운 날이 있기는 하지만 귀향 행차도 하나의 행사로 길목 길목에서 지인들과 교분을 나누고 인사를 차리며 돌아오기에 그러했던 것 같다. 동생 안세가 두 번이나 미리 마중을 나왔다가 함께 유숙하기도 하면서, 한발 앞서 출발하여 형의 귀향 일정을 부모님께 고해 올리는 모습이나 두 자녀가 미리 길가에 나와 마중하는 모습을 보면 법도와 절차가 다정하면서도 삼엄하다. 오는 도중에 지인의 손자에게 통감(通鑑) 몇 장을 가르치는 모습이 정겨우면서도 새롭다.

 

) 교유시(交遊詩)의 완성

 

교유를 나눈 사람들을 주제로 한 시<교유시>로 부르기로 한다. 전별시, 만시, 절의시, 찬시, 축시, 차운시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고 하겠다. (3-1-1)에서 본 바와 같이, 일휴정이 쓴 이 분야의 시는 모두 76편으로서 전체의 75%에 해당한다. 그러나 교유시의 정점은 역시 만시이다. 한 사람이 일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참된 가치를 아는 자가 진심으로 그를 추모하고 애도하면서 마지막으로 그의 일생을 규정한 시이기 때문이다. 일휴정은 그가 남긴 시편의 절반에 해당하는 50편의 만시를 남겼다. 이것은 교유시의 66%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어느 한 편이 애절하지 않은 시가 없으며 어느 한 사람이 빛나지 않는 일생을 산 사람이 없다. 가히 일휴정의 시 세계는 교유시의 세계이며, 따라서 일휴정을 교유시의 완성자로 규정해도 좋을 것이다. 이 외에도 가족과 친척을 제외한 인사들에게 쓴 제문이 30여 편이 넘는데 문학적 표현이 많아 이 또한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대대로 벼슬을 한 칠곡 지역의 명문가 출신인 귀암 이원정에 대하여 일휴정이 쓴 만시 한 편을 보자

 

嶠人文物擅吾東(교인문물천오동)
第一推君世所同(제일추군세소동)
醞藉聲名傳八路(온자성명전팔로)
經綸才望合三公(경륜재망합삼공)
承宣冢宰恩波溢(승선총재은파일)
柏府鑾坡逝水空(백부난파서수공)
門巷寂寥梅蘂落(문항적요매예락)
白頭吟挽淚盈瞳(백두음만누영동)
- 日休亭, 詩「挽 李判書 名元禎」全文[각주:116]
 
영남 사람의 문물(정치, 학문, 예술 등)이 온 나라에 드날리니
그를 제일로 미는 것은 세상이 모두 다 같았네
온화하고 인자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명성이 팔도에 널리 퍼졌고
경륜과 재주와 명성이 삼정승에 적합하였네
도승지와 이조판서로 뽑히니 임금의 은혜가 넘치고
사헌부와 한림원을 물 흐르듯 통하게 하였네
매화꽃 떨어지니 거리가 적적하고 고요한데
흰 머리로 만시를 노래하니 눈물만 가득하네
- 일휴정, 시「판서 이원정을 애도하며」전문.

 

이원정(李元禎, 1622~1680.08.21.)은 칠곡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외교관, 작가, 서예가, 시인이다. 그의 종가가 현재의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 있으며 13대 종손 이필주가 명문가의 명예를 지키고 있다. 이원정은 1652년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호조판서, 공조판서, 이조판서, 한성부판윤, 홍문관제학 등을 지냈다. 1680년 경신환국에서 고문으로 숨을 거두는데 왕권강화와 당파싸움의 소용돌이에서 희생된 것이다. 장례는 간소하게 치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16892월에 영의정으로 증직하여 복관되는데 복관 바로 두 달 뒤인 같은 해(1689) 3월에 71세의 일휴정이 위의 만시를 썼다. 이원정은 그 후 정국의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추탈과 복관을 반복하다가 1871(고종 8)에 최종 복권이 되어 문익(文翼)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일휴정이 쓴 이원정에 대한 만시는 한 편 더 있는데 이 시 [각주:117] 는 위의 시를 작시한 이후인 1690년에서 일휴정이 세상을 떠난 1698년 사이에 작시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시에서 일휴정은 자신보다 네 살 아래인 귀암 이원정의 학문과 인격을 높이 칭송하면서 그의 억울한 죽음을 <떨어진 매화꽃>으로 비유하며 애통해 한다. 매화는 겨울을 이겨내고 눈 속에서 꽃을 피운다. 그러므로 다른 꽃보다 일찍 피어 봄을 여는 꽃이 매화이다. 매화는 고결을 상징한다. “고결한 사람은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위대한 것을 위해 몸 바친다. 목적뿐 아니라 수단도 선택한다. 이 점은 고결의 약점이다. 수단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힘에 대해서는 고결한 자가 무력하며 패배한다. 패배하면서도 굴복하지 않으며 고결한 자는 긍지심을 가지고 겸손하다. 고결한 자는 자기보다 위에 있는 것만을 우러러 보며 살기에 타인의 탁월함에 질투심 없이 경외를 느낀다.” [각주:118]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일휴정이 쓴 위의 만시에서, 비열한 자들에게 희생된 귀암 이원정의 고결한 죽음을 슬퍼하는 동시에 일휴정이 이원정에게 보내는 사심 없는 경외를 바라보면서 일휴정의 고결한 인격 또한 느끼는 것이다.

 

이원정에 대하여 위의 만시를 쓴 같은 해인 1689년에 일휴정은 지난날의 친교를 회상하며 구구절절한 제문을 지었으나 노쇠하여 이원정의 제사에 직접 참사하지 못하고 아들을 대신 보내 제상에 올린다.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상략)
눈과 달처럼 맑고 흰 기운 간직하고 가을 물처럼 깨끗한 정신 지녔네
삼청궁의 학이 울고 구포 색의 봉황이 비상하였네
일찍이 사마시에 장원하여 그 명성이 서울에 자자하였네
(중략)
참소하는 쉬파리들이 울타리에 앉았으니 임금의 지혜가 빛을 옮겼도다
금과 같은 형은 원통함을 품고 옥과 같은 동생은 꽃다움을 버렸으니
깊은 궁궐 깃발로 막혔으니 누가 임금 계시는 곳에 전달하겠는가?
피눈물 흘리며 울음을 삼키니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았구나
(중략)
하늘은 어찌하여 바람과는 다르게 우리의 기둥을 빼앗아 갔는가?
임금의 보심이 밝지 않아서 앞서간 어진 이가 가련하네
(중략)
향기 나는 훌륭한 인품과 이웃이 되니 일찍이 다행히도 내 뜻을 이루었지
과거 공부 반평생에 사마시(司馬試)에 함께 합격했네 [각주:119]
시험장에서 서로 무릎을 맞대었고 쓸쓸한 절간에서 학문을 논했네
한강의 배를 함께 건너고 성균관에서는 함께 등잔 기름을 태웠네
마음은 서로 금슬처럼 조화로웠으니 성이 다른 형제였네
(중략)
운장(雲長) 창주(滄洲) [각주:120] 는 흰 구름이 되었고
공 또한 천상의 옥루에 갔으니
나는 외로운 기러기처럼 하늘을 나니 만사가 뜬 구름이로다
(중략)
병과 더불어 나이만 더하니 힘이 뜻을 따르지 못하여
잠시 변변하지 못한 제수를 갖추어 아이를 대신 보내어 잔을 올리네
(하략)
- 일휴정,「이판서 제문」1689년 부분 [각주:121]

일휴정은 제문에서도 시적 묘사와 비유를 구사하고 있다. 그만큼 문학적 소양과 시적 사유가 풍부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조선 선비의 사유 구조나 학문적 방법이 묘사와 비유에 익숙해져 있었던 탓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부분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접근의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일휴정이 쓴 시 중에서 가장 긴 시가 있다. 교유시로 분류되는 오언배율시로서 무려 그 길이가 226구에 달한다. 일휴정 50(1668)에 작시한 운장 이창진의 시에 화답하여(酬李雲長昌鎭)[각주:122] 라는 제목의 수창시이다. 상대방을 찬양하고 칭송한 찬시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일휴정은 나이 50세에 이미 가장 높이 절륜한 시적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일휴정이 14(1632)에 문중 어른인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 1568~1639)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제자로서 학문에 임하던[각주:123] 이때 스승 이언영의 둘째 아들 이창진(李昌鎭, 1619~1684) [각주:124] 과 함께 공부방에 기거하면서 수학하였다. 이창진은 일휴정보다 한 살이 적었지만 두 사람은 극진한 교분을 나누었으며 일휴정이 이창진의 학문적 경지를 자신보다 윗 단계로 치부하고 있다. 시의 군데군데에서 이때의 동문수학하던 시기를 회상하면서 이창진을 숭상하는 표현이 나타난다.

 

옛날에 그대가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크게 되리라고 말했네
나도 그때에 글짓기를 배웠는데
스스로 소중히 여겼으나 나는 옥석(玉石)이 아니었네
(중략)
갈대 같은 내가 아름다운 나무에 기대어
우러러 보았으나 미칠 수 없었네
함께 스승님께 나아가 배웠으니
네 번이나 봄풀이 푸르렀네
살갗을 갈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밤낮으로 함께 먹고 잤네
비록 부모님을 뵈러 가긴 했지만
열흘 이상 떨어진 적이 없었네
을해년(1635)에 각각 결혼하여
나는 남쪽에 그대는 서울에 있게 되었네
(중략)
아 나의 운수 기구하여
10년토록 병이 그치지 않았네
(중략)
궁벽한 초려에서 나는 약을 복용하고
그대는 중앙 문단에서 절차탁마 하였네
오로지 정진함에 걸상이 여러 번 헐고
책을 읽음에 책 끈이 여러 번 끊어졌네
(중략)
산이 깊으니 좋은 재목 빼어났고
마을이 궁벽하니 지초와 난초가 무성하네
큰 강은 가히 물을 댈 만한데
누가 능히 물 대어 적실 것인가
거북과 용 같이 마땅히 종묘에 쓸 만하건만
진흙탕에 끌려 들어가도 달게 마음먹었네
(중략)
부귀는 뜬구름처럼 가볍게 여기고
자연 속에서 그윽하고 심오함에 독실했네
주공과 공자의 교훈을 마주하고
좌우에 도서를 붙여 두었네
문장은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을 배웠고
유학은 동중서(董仲舒)와 가의(賈誼)를 법으로 삼았네
(중략)
세상사람 모두가 눈이 흐리어도
공의 생각은 심오하여 얼음 녹이듯 의문을 풀어내었네
자치통감 강목을 몹시 좋아하여
꼼짝하지 않고 종일 읽었으며
또 포은(圃隱) 선생의 가르침을 좋아하여
그 절의를 평생토록 본받았다네
(중략)
복희씨의 역(易)의 경계를 점점 살피어
홀로 있을 때 항상 최선을 다하였네
높이 낙동강 가에 누우니
그 마음 강물처럼 깊이가 천 길이더니
우리 스승님 일찍이 정자를 지어
완석정(浣石亭) [각주:125] 이라고 편액을 걸었으니
그대 능히 그 사업 계승하여
항상 조심하고 공경하였도다
큰 재주는 마땅히 늦게 이루어지나니
어느 때 한 번 싸워 크게 이길 것인가
(중략)
그대가 세상에 뜻을 품음은
해를 향하는 해바라기의 마음 같았네
빠른 바람이라야 풀의 굳셈을 알고
뒤얽힌 나무뿌리라야 날카로운 연장이 구별되네
(중략)
돌아보니 오직 우리 두 사람은
동국의 관중과 포숙아였거늘
궁벽한 산골짜기에서 비탄하며 지났네
20년 함께 같이 칼을 갈고
아홉 길 우물도 함께 같이 팠다네
모습을 살피면서 서로의 마음을 알고
흐르는 물에 거문고 가락 헤아렸네
두 집안의 정과 의리 깊음을
듣기를 머리 땋고부터였네
부모끼리는 친하게 지내며 함께 늙으셨으니
서산에 해는 이미 저물었네
집이 가난하여 제대로 봉양 못하고
소탐귤(蘇眈橘) [각주:126] 이 간절하였네
과거를 버리고 어버이를 봉양하려다
수레를 북쪽으로 하여 넘어갔네
(중략)
다시 옛날의 완석정 누대에 오르니
마치 신선 사는 곳에 오르는 듯하네
(중략)
마음이 태평하니 이는 인(仁)의 넓은 처소요
정신이 기쁜즉 인(仁)의 편안한 집이라
100리 모래사장 [각주:127] 을 굽어보니
팔공산 성가퀴를 쉬이 퍼올리 듯
해는 길어 나무 그늘 짙고
하늘은 좋은 시절을 빌려 주었네
우리들이 어찌 한갓 이러하리오
마땅히 앞 사람의 자취 이으리라
도도하게 글이 마르지 않으니
이 강이 곧 우리의 법도일세
입신양명에 그윽한 교목 있으니
바로 스승 완정(浣亭)께서 장원급제하심이네
(중략)
우리나라는 과거급제 중시하여
가문의 명성이 이에 힘입어 선다네
(중략)
몸을 다하여 청운에 오르고자 하였으나
 
전시(殿試)에서는 백지를 내고 말았네
(중략)
시험 삼아 지금 천하를 살펴보면
왕도의 자취는 꺼진지 오래 되네
고래 같은 파도가 회수(淮水)의 세 강에 솟구치고
어지러운 안개가 오악(五岳)에 피어 오르네
다행히 천에 한번 기회를 만나
성군(聖君)이 바야흐로 곁에 자리했네
(중략)
대장부 능히 일이 끝나며
살아서 순조롭고 죽어서 편안하리
내 벗이 실로 마음을 얻어
사람으로 하여금 깊이 성찰함을 일으키네
낭랑하게 읊으며 부쳐온 시(詩)에
나도 모르게 갑자기 옛 병이 나아졌다네
- 일휴정, 시「운장 이창진의 시에 화답하여」부분 [각주:128]

 

이 시의 결구에서 <낭랑하게 읊으며 부쳐온 시에/나도 모르게 갑자기 옛 병이 나아졌다네>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창진이 먼저 보내온 시에 일휴정이 화답하는 시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시에서 일휴정은 이창진과 함께 기숙하면서 완정 이언영에게 수학한 기간이 4(‘네 번이나 봄풀이 푸르렀네’)이라고 한다. 일휴정이 14(1632)에 완정 문하에 들어갔으니까 18(1635)까지 집을 떠나 공부한 것이 된다. 완정 이언영이 1639년에 세상을 떠난 것을 감안하면 일휴정은 완정 이언영의 마지막 제자가 된다. 시의 내용에서 완정 문하에서의 4년 수학 기간과 그 이후의 20년간의 교유를 회상하는 가운데 일휴정의 일대기가 사이사이 드러나고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시가 일휴정의 자전시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시에서 일휴정은 이창진을 묘사하기를, <아름다운 나무>, <큰 강>, <거북>, <>, <해바라기의 마음> 등으로 묘사하면서 나라에 크게 쓰임을 받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일휴정은 이창진에게 문장과 유학이 뛰어난 이창진은 자치통감 강목을 좋아하였고 포은 정몽주의 절의를 본받고자 하였다고 회상하면서 그대 이창진은 아버지 완석정의 사업(교육)을 계승하시라고 덕담을 한다. 이와 같이 이창진에 대한 일휴정의 우정은 각별하여 이창진이 살았을 때는 우리 둘의 우정은 관중과 포석아였네라고 찬미하고, 이창진이 세상을 떠난 후 5년이 되는 해인 1689년에는 71세가 된 일휴정이 이창진을 애도하여 만시 [각주:129] 를 쓴다. 이 시에서도 일휴정은 <스승님의 제자 중에서 제일 빼어난 사람>, <문체는 만길 높이의 봉황이 다투듯 하네> 등으로 이창진을 칭송하고 있다.

 

) 출사와 귀향

 

일휴정은 61(1679)의 늦은 나이에 사직서 참봉을 제수 받고 초겨울에 상경하여 부임하는데 다음해(1680) 봄에 직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각주:130] 사직서에서 당직을 서면서 쓴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投竿辭洛水(투간사낙수)
社署趂初冬(사서진초동)
階繞千叢菊(계요천총국)
墻圍萬樹松(장위만수송)
齋心看夜燧(재심간야수)
愓慮聽晨鐘(척려청신종)
南國音書斷(남국음서단)
雲山隔幾重(운산격기중)
- 日休亭, 詩「社稷署直中」全文 [각주:131]
 
낙동강의 낚시를 그만 두고
초겨울에 사직서에 부임했네
천 무더기 국화가 섬돌을 둘러싸고
만 그루 소나무가 담장을 에워싸고 있네
마음을 가다듬고 밤 경계의 번을 서는데
새벽 종소리 들리면 어쩌나 근심하네
남쪽 고향의 소식이 끊어졌으니
구름 낀 먼 산이 몇 겹이나 막혔는가
- 일휴정, 시「사직서에서 번을 서며」전문

 

사직서에서 번을 서며 일휴정은 적막한 밤의 풍경에 젖어든다. 섬돌을 둘러싸고 있는 천 무더기의 국화와 담장을 에워싸고 있는 만 그루 소나무는 대궐이 아닌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다. 그것도 깊은 밤의 은은한 풍경이다. 번을 서면서도 그림 같은 밤 풍경에 젖어드는 일휴정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심미감을 가졌다. 그래서 새벽 종소리가 들릴까봐 근심한다. 새벽 종소리가 들리면 날이 새고 이 풍경이 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국화, 소나무, 섬돌, 담장의 평화롭고 교교한 밤 분위기가 사라질 것을 일휴정은 걱정하는 것이다.

 

또 다르게 보면 <새벽 종소리 들리면 어쩌나 근심하는> 것은 진지하고 성실하게 근무하는 일휴정의 마음 자세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남들 같으면 빨리 새벽 종소리가 들리고 근무가 끝나기를 바랄 텐데 일휴정은 조금이라도 날이 늦게 새서 그때까지 자기가 충실하게 근무함으로써 임금과 왕실이 편안한 숙면을 취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이 61(1679)에 짧은 벼슬길에 나선 일휴정의 곧은 선비상과 충직한 인격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소식이 끊긴 고향집의 가족을 걱정하며 멀고 먼 거리를 애태우고 있다.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온 일휴정은 이후 칠곡군 매원에서 노후 생활을 하면서 학문에 심취하고 강학에 매진한다. 그런 가운데 가문의 앞날을 걱정하여 노심초사한다. 일휴정은 그의 나이 66세인 1684년에 조카들에게 보내는 서간문에서 가문의 번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우리 가문의 크게 바라는 것이 모두 자질(子姪)에게 있었으나 자질들이 대부분 일찍 죽고 지금 살아남아 기대하는 자가 오직 너희 두 사람이다. [각주:132]
- 일휴정, 서간문「예갑 형갑 두 조카는 보아라」부분

 

짧은 출사를 제외하면 한 평생을 고향에서 산림처사의 길을 걸으면서 학문과 실천적 인격 수양에 힘써 온 일휴정은 만년에 이르러 가문의 번성을 이와 같이 간절하게 소망하는 것이다.

 

) 철학적 사유의 궁구

 

조선조 선비들은 주역 연구에 진지했던 것 같다. 학문의 완성 단계에서 주역을 공부했으며 또한 그 공부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의 섭리와 변화의 원리를 밝게 봄은 물론, 미래에 발생할 일을 미리 예측하고 그에 가장 적합한 행동양식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선비들의 학문적 자기목표였을 것이다.

 

한강 정구와 선조의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는 주역 공부에 대한 한강의 방법론이 나타난다.

(한강은) 만력 22년(1594, 선조27)에 동부승지로 들어와 여러 번 전직하여 우승지에 이르렀다. 언젠가 경연에서 선조가, “《주역》의 정전(程傳)과 본의(本義) 가운데 무엇을 먼저 익혀야 하느냐”고 묻자, 선생은 대답하기를, “역(易)의 도(道)는 오직 소장(消長)의 이치를 밝혀 시의적절한 조처를 잃지 않는 것이니, 한갓 점을 쳐서 미래의 일을 예견하는 것은 역의 말단입니다. 그러니 정전을 먼저 익혀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한강 정구 선생 묘지명(허목 찬) 부분 [각주:133]

 

한강의 입장은 명료하다. 주역이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부분, 즉 점서(占書, 본의)와 철학서(哲學書, 정전) 중에서 철학서 부분을 먼저 읽어서 존재와 당위의 원리를 터득함으로서 쇠하여 사라짐과 성하여 자라남(消長)’의 이치를 알고 적절한 조처를 찾는 단계에서 점서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점서에 현혹되거나 괘상에 맹종 또는 맹신하는 폐단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괘상은 보조 자료 정도로 삼아서 읽는 이가 참고로만 하고 역과 그에 대한 대처는 보다 높은 단계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한국현대철학의 제1세대 철학자 중에서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하기락은 역()의 철학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면서 <()와 역()은 동의어>라고 한다.

 

주역 계사전은 이 경전이 지닌바 철학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역은 천지를 본보기로 삼아 기록된 것이어서 고로 천지의 도를 능히 두루 드러낸다(易與天地準 故能彌綸天地之道). 천지의 도는 무엇인가? 음이 되었다가 양이 되었다가 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一陰一陽之謂道). 일음일양(一陰一陽)하여 만물이 태어나는 법칙이 도이다. 천지의 기운이 가득 차서 만물이 진하게 변화하는 것(天地絪縕 萬物化醇)이 도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낳고 낳는 것을 일러 역(生生之謂易)이라 한다. 따라서 도(道)와 역(易)은 곧 동의어라 하겠다. [각주:134]

 

이어서 하기락은 <존재법칙><도덕법칙>이라는 두 개의 강목을 내세워서 유가윤리학의 제 특성을 정치하게 해명한다.

 

한강은 위에서 <()의 도()>를 말하고, 하기락은 여기서 <()은 도()>라고 말한다. 나는 이 두 명제가 같은 것이라고 본다. <바뀌는 것의 길>이나 <바뀌는 길>이 결국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 따라 만물이 생성변화하고 그러한 변화가 반복적으로 생기는 것이 역()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의 도()><()은 도()>로 귀결될 것이다. 한강의 <()의 도()>를 하기락의 논지에 따라 바꾸면 <길의 길>쯤이 될 것이다. <길의 길><길은 길>은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긴 하지만, 그러나 느낌의 차이가 반드시 본질적 차이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일휴정은 35(1653)에 성균관에 들어가면서부터 주역 공부에 박차를 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남긴 반궁일기에 따르면 일휴정의 나이 37세인 “1655218일 성균관 정록청에 가서 주역을 보며 강론했다[각주:135]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주역을 읽거나 암송하거나 역해(易解)를 베끼거나 주석을 첨가했다는 내용을 일기에 기록한 날자 수가 36일이며 같은 해 94일에는 역경의 첨주가 끝났다[각주:136]고 적고 있다. 이외에도 매일매일 읽은 서책의 책명을 일휴정은 꼼꼼하게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주역을 읽다라는 제목으로 쓴 일휴정의 시다.

 

焚香默坐度朝曛(분향묵좌탁조훈)
千古遺經四聖言(천고유경사성언)
蓬戶不開山寂寂(봉호불개산적적)
夜㴱寒月滿前軒(야심한월만전헌)
- 日休亭, 詩「讀易」全文 [각주:137]
 
향을 사르고 묵묵히 앉아 아침 어스름까지 헤아리니
아주 먼 옛적부터 전하는 글에 복희씨ㆍ문왕ㆍ주공ㆍ공자 네 분 성인의 말씀이 계시네
사립문은 아직 열리지 않고 산은 조용하고 쓸쓸한데
밤 깊어 차가운 겨울 달은 처마 앞에 가득하네
- 일휴정, 시「주역을 읽다」전문

 

시의 분위기가 맑고 차분하다. 밤의 적막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도입부에서는 주역을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향을 사르고 읽는다고 한다. 향은 주로 제사 때 쓴다. 향의 연기가 명계를 넘나들며 이승과 저승의 통로를 만든다는 의미일 것이다. 경전을 읽는 일은 고대의 성인을 만나는 일이다. 아무렇게나 만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만난다는 말일 것이다. 이어서 아주 먼 옛적부터 전하는 글에 복희씨문왕주공공자 네 분 성인의 말씀이 계시네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글과 말씀이다. 말씀은 진리이고 글은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이다. 도구는 사용자의 숙련 정도에 따라 그 쓰임의 높낮이가 달라진다. 다 같이 성인의 말씀을 들어도 듣는 자의 준비도에 따라서 말씀의 내용을 지득하는 정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진리를 얻기 위하여 향을 사르는 것일 게다.

 

공자는 글로써 말을 다 적을 수 없고 말로써 생각을 모두 전할 수는 없다(書不盡言 言不盡意)” [각주:138] 고 한다. 말과 글과 생각의 부등가(不等價) 관계에 대한 이 명제는 언어의 한계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얻을 수 있는가? 공자는 성인이 상(, 이미지)을 세워서 말과 글이 다 전하지 못하는 본래의 뜻을 다 전할 수 있다(聖人立象而盡意)” [각주:139] 고 한다. 물론 여기서의 성인은 하느님으로 환치시킬 수 있을 것이고, 상은 주역의 괘상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뜻을 살핀다면 <(, 이미지)은 전체이다>가 된다. 말과 글은 나무이고 뜻은 숲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아야 전체를 볼 수 있으니 숲의 모양을 보라는 말이 된다. <(, 이미지)은 전체이다>라는 명제는 헤겔의 <진리는 전체이다(Die Wahrheit ist das Ganze)> [각주:140] 라는 명제와도 통한다고 하겠다.

 

<사립문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것은 주역의 진리를 아직 온전히 통하지 못했다는 말로 보이고 <산이 조용하고 쓸쓸하다>는 것은 주역이라는 경전은 읽는 이가 터득할 때까지 산처럼 조용하고 쓸쓸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말일 수 있다. <밤 깊어>는 학문의 미명(未明) 상태를 말하고, <차가운 겨울달>은 자체 존재하는 진리를 의미하며, <처마 앞에 가득하다>는 것은 목표 지향성이나 목적 활동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결구는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향해 가는 인간 정신의 정진은 끝이 없다>는 뜻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나는 7년 전인 2016년에 조선조 선비의 모습을 그린 시 주역 서문을 읽다[각주:141] 를 쓴 적이 있다. 2012.09.03. 한국국학진흥원에서는 일기자료총서 [3]으로 17세기 안동지역의 대표적 산림처사이자 도학자인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경당일기[각주:142] 를 발행하면서 동시에 국역 경당일기[각주:143] 도 함께 발행하였다. <경당일기를 통해서 본 장흥효 학단의 지형도와 성리학적 사유> [각주:144] 라는 제목으로 해제를 쓴 장윤수가 이 귀한 책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나는 이 일기를 읽으며 조선조 선비의 사유와 일상적 생활상을 접하게 되었으며 많은 감동을 받았다. 바로 이 감동을 바탕으로 하여 쓴 시, 주역 서문을 읽다2017.12.20. 대한민국예술인센터 파코아트홀에서 나는 제54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주역 서문을 읽다 [각주:145]
 ― 경당일기 을묘년乙卯年(1615년) 7월 병오丙午(1일)
 
김주완
 
400세 조선 경당敬堂이 900세 송나라 정이程頤를 만나는 아침,
 
어제는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굵은 비의 혀가 만 가지 단서를 일으켜 참과 거짓의 경계를 가르니 지극히 큰 밝음이 어둠을 밀어냈다, 꿈속에서 서애 류 선생을 뵈었다
 
닭이 울어 새벽에 깨었다, 다시 잠들 수 없어 주역 서문을 읽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걸어 묻는다, 선생의 선생은 말을 콩처럼 골라서 답변을 하는데 분별이 어렵다, 하늘과 땅의 정적이 둥글게 부풀어 일어서고 있다
 
오래도록 가물다가 비가 내리니 모든 백성이 모를 옮겨 심는데 검은 머리 아이와 흰머리 늙은이가 논길에서 기뻐하며 함께 손뼉을 쳤다, 지난봄의 일이다
 
마음은 계란과 같으므로 인仁은 곧 생生하는 성性이다, 마음이 살면 길吉과 흉凶이 한 몸 안에 있어 천하의 걱정이 앞을 향하니
 
주역 서문을 삼독三讀하면 둔갑을 한다고 미욱한 자들이 믿고 있다, 싸리 울타리 너머가 숲이고 어둠이다, 아 두려운지고 깜깜한 내일이여, 대업을 내는 사람이여
 
머리를 빗지 않았다, 마음만 가지런히 빗고 족인族人의 초대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 취해서 돌아왔다, 일전의 일이다, 때는 처음부터 하나만 있지 않으니
 
주역의 말은 질문이고 대답이다, 만물은 변하기에 변하지 않음에 붙어 있다, 변화의 근본은 간단하다, 다음인 지금이 변화이다, 앞과 뒤가 없어야 불변이다
 
듣고 말하는 서책書冊은 사람이다, 소리가 없는 데서도 듣는 듯이 하며 얼굴이 없는 데서도 보는 듯이 해야 하느니, 삼천 년이 지나도 하늘에서 비 오고 해 진다, 달 뜨고 새 난다, 뿌리 있는 자만이 꽃을 피우느니, 피지 않은 꽃은 꽃이 아닌지라  

 

경당 장흥효(1564~1633)는 모암 이충민(1588~1673)보다 24년 연상인 자이다. 장윤수는 장흥효에 대하여 이황의 고제(高弟)인 김성일과 유성룡을 사사했고, 뒤에 다시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퇴계학의 적전(嫡傳)을 계승했다. 일찍부터 관직 진출을 단념하고 후진 양성과 존심양성의 공부에 열중하였는데, 문하에 제자가 무려 수백 명에 달했다. 특히 역학을 깊이 연구하여 호방평(胡方平)역학계몽통석(易學啓蒙通釋)의 분배절기도(分配節氣圖)를 보고 오류된 것을 의심, 이를 고증, 연구하여 20년 만에 십이권도(十二圈圖)를 추연(推演)해냈다. 장현광은 이것을 보고 <참으로 앞 시대 사람들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했다>라고 극찬했다. 특히 그는 평생토로 지경(持經)을 행하며, 유학과 성리학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했다[각주:146] 고 한다. 여기서 지경(持經)이란 경전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읽고 욈. 또는 그런 일을 의미한다. 공부에 임하는 자세와 공부의 깊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역 서문을 읽다에 대한 자작시 해설은 하지 않는다. 읽는 이가 읽히는 대로 읽으면 될 것이다. 어떤 이는 당시의 농촌 풍경이 그려질 것이고 또 다른 어떤 이는 주역의 근본원리가 읽힐 것이다. “시적 언어는 다의적이면서도 일의적이다.” [각주:147] 일의적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그렇게 보는 사람은 그렇게 본다는 의미이고, 다의적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읽는 이는 느낌으로서 주어지는[각주:148] 시의 내용과 시적 분위기를 자기 방식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예술철학에서는 감상의 자유라고 하며, 바로 이 근원적인 자유에 연원하여 감상자는 예술작품에서 주어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각주:149] 그러나 감상의 자유 또한 무제한적인 자유는 아니다.” [각주:150] 보는 이는 예술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강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3-3. 달오 이주와 자연 회귀

 

일휴정 74(1692)에 매원에서 달오로 이주하여 작은 정자를 짓고 일휴(日休)라고 편액하였다. [각주:151] 이주는 단순하게 사는 곳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집을 옮길 때는 직장, 학교, 병원, 시장과 편의시설, 문화적 여건, 자연환경 등 다양한 조건을 검토하고 이것이 충족될 때 비로소 이주를 하게 된다. 하물며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는 오죽하였겠는가? 농토와 농기구, 가축까지 함께 옮겨야 하는데 교통 여건이 열악하니까 그 운송 또한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는 가능하면 한 고장에서 대대로 사는 것을 선호했을 것이며 이주를 하려면 아주 큰 결단을 내려야만 했을 것이다. 일휴정이 달오로 이주하여 일휴정((日休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또한 호를 일휴정이라고 쓴 데는 어떤 연유가 있을까? 전해지는 바를 찾지 못했으니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고, 우리는 다만 글자의 뜻으로 일휴정의 의도를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일휴(日休)>는 단순히 낮에 쉰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태양이라는 뜻 외에도 햇빛이나 매일이라는 뜻이 있다. ‘()’에는 편하다’, ‘아름답다’, ‘너그럽다의 뜻이 있다. 이러한 의미를 결합해 보면 <일휴정((日休亭)>햇빛이 아름다운 집’, 또는 매일 편한 집정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가 곧 <안빈낙도>가 아니겠는가. 일휴정은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도를 지키며 살고 싶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음의 시가 그러한 일휴정의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梅園居士月村遷(매원거사월촌천)
新構茅茨八九椽(신구모자팔구연)
千里江流圍檻外(천리강류위함외)
四山松翠八庭前(사산송취팔정전)
老妻拾草燃朝粥(노처습초연조죽)
稺子擕竿釣晩鮽(치자휴간조만여)
門巷寂寥輪鞅寡(문항적요륜앙과)
晴窓坐閱百家編(청창좌열백가편)
- 日休亭, 詩「閒居謾詠」全文 [각주:152]
 
매원에 살다가 달오로 옮겨와서
초가지붕 새로 얽어 여덟 아홉 서까래를 얹었네
천릿길 낙동강은 난간 밖을 휘감아 흐르고
사방 산의 푸른 솔은 여덟 아들의 번성하는 뜰 앞에 섰네
늙은 아내 불 지펴 아침 죽 끓이고
어린 자식은 낚싯대로 물고기 잡아 저물녘에 돌아오네
문밖 거리는 적막하고 쓸쓸하여 찾는 이가 드문데
맑은 창가에 앉아 많은 책을 읽는다
- 일휴정, 시「한가하게 살며 느긋하게 노래하다」전문

 

일휴정이 달오로 이주한 것은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가문의 번성을 위한 고민의 산물이었을 수 있다. 매원은 전통적으로 학문과 양반의 고을로서 좋은 곳이지만 반면에 영고성쇠의 무상함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달오는 남서쪽으로 낙동강이 인접해서 흐르는 동네이다. 강에서 조금 떨어져 앉은 전형적인 강마을이라 할 수 있다 아늑하고 따뜻한 소쿠리 지형이다. 해발 178미터인 파산의 서쪽 기슭에 앉아 발 앞으로는 작은 언덕을 두고 있어서 낙동강이 범람하여도 홍수 위험이 없는 곳이다. 시에서 말하는 <여덟 아홉 서까래>에서 숫자 ‘8’의 의미는 태극팔괘에서 보듯 우주적 반복 및 재생의 상징수이며, ‘9’는 가장 큰 수로서 최상의 완전수이다. 초가집 한 채를 짓는데 서까래는 실제로 수십 개가 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휴정이 여기서 굳이 <여덟 아홉 서까래>라고 하는 것은 체질적인 겸손의 뜻인 담긴 표현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가계의 번성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팔정(八庭)아들 여덟의 집의 마당으로 해석하면 가문이 번성하는 집을 상징하는 말이 된다. 일휴정은 실제로 22녀를 두었지만 여기서의 <8(여덟 아들의 집의 마당)>은 그의 소망을 담은 시적 표현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일휴정은 한 편의 시에서 ‘8’이라는 숫자를 두 번이나 등장시킨다. 가문의 번성을 바라는 그의 간곡함이 읽히는 대목이다. 그랬을 때 <사방 산의 푸른 솔은 여덟 아들의 번성하는 뜰 앞에 섰네>는 사방 산에 서 있는 싱싱한 소나무들이 자신의 아들 여덟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문밖 거리는 적막하고 쓸쓸하여 수레와 마차가 드물다>는 것은 한적한 산림처사의 생활상을 그린 것이다. 일휴정은 달오로 이주하여 자연에 회귀함으로써 안빈낙도하는 생활을 영위하였고 <맑은 창가에 앉아 많은 책을 읽는다>고 스스로를 묘사하는 것을 보면 자족한 노후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맑은 창가에 앉아서 읽는 책에서는 책속의 길들이 등불처럼 환하게 불 밝히고 드러날 것이다.

 

달오는 현재 속칭으로 사용되는 지명이다. 공식적으로는 월오(月塢)이다. '월오(月塢)'달이 뜨는 후미진 곳' 또는 '달마을'이란 뜻이다. 정감이 가는 마을 이름이면서 여성적이고 모성 지향적인 이름이다. 모성은 생산과 양육, 물과 번영을 상징한다.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칠곡군에서 비교적 인재가 많이 나오는 곳이 이곳 월오이다. 일휴정은 달오의 이러한 지리적 특성을 미리 보았던 것 같다. 그 후 모암일휴정 양 선생의 가문은 파()를 이루어 번성하였다. 일휴정의 이주가 옳았다고 할 수 있다. 물가로 와서 물같이 흐르면서 번성하는 것을 일휴정이 꿈꾸었다면 그가 옳았던 것이다. 적극적으로 물가에 가야 물로서 물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에 회귀하여 안빈낙도를 하더라도 노쇠와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삶과 죽음,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친척과 친구는 모두 흘러가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다. 삶의 입장에서 보면 삶은 전유(全有)이고 죽음은 전무(全無)이다. 반대로 죽음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전유(全有)이고 삶은 전무(全無)가 된다. 죽음은 정적이고 삶은 소음이다. 삶에서 죽음에로의 일방통행로는 있는데 죽음에서 삶에로의 행로가 있는지 어떤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후자의 해명은 종교적 생사관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생의 끝 지점에 서 있는 일휴정의 모습을 살펴보자.

 

峽裹多寒雨(협과다한우)
湆濱臥病翁(읍빈와병옹)
誰憐雙髸雪(수연쌍공설)
自覺百憂叢(자각백우총)
弟妹嗟相隔(제매차상격)
兒孫恨不同(아손한부동)
春㴱山寂寂(춘심산적적)
花發萬枝紅(화발만지홍)
- 日休亭, 詩「月村書懷」全文 [각주:153]
 
골짜기를 싸돌아 차가운 비가 많이도 내리는데
눅눅한 물가에 병든 늙은이가 누워 있네
겹겹이 흩날리는 눈을 누가 가련하다 했던가
백가지 근심이 모여드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네
남동생과 여동생이 서로 멀어지는 차이가 있는데
아이와 손자의 한이 같지 않네
봄 깊은 산이 조용하고 쓸쓸한데
꽃은 가지마다 붉게 피네
- 일휴정, 시「달오의 회포를 쓰다」전문

 

한 편의 시 속에 두세 개의 계절이 등장한다. <찬 비>가 내리고 <눈발>이 흩날린다. <> 깊은 산에 붉은 꽃이 가지마다 핀다. 적어도 늦가을, 겨울, 봄의 이어짐이 시 속에 있다. 그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병든 늙은이가 와병 중에 세 계절을 건너고 있다. 때마다 수심과 상심과 근심에 젖어든다. 가문의 번성과 우애로운 정분을 나누면서 오순도순 사는 자손들이기를 바랐는데 세대가 이어질수록 현실적인 사정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돌아보면 모두에게는 모두에게의 이유가 있고 그것은 그들에게는 타당하다. 이해는 되지만 수용하기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흘러간다. 계절이 저절로 바뀌듯 세상일도 그렇게 흘러간다. 이러한 순리를 늙은 일휴정은 조용하고 쓸쓸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달오의 회포>를 작시한 이 시의 분위기는 이리하여 사뭇 쓸쓸한 풍경이다. 그러나 끝까지 쓸쓸한 것은 아니다. 부정을 통한 긍정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이 거기 있다. 찬비가 내리고 병든 늙은이가 누워 있지만, 눈발이 수심처럼 날리고 있지만, 형제자매가 흘러가고 조손이 흘러가고 계절과 삶과 자연이 흘러가고 있지만, 봄 깊은 산은 적막하지만, 적막한 거기에 가지마다 붉은 꽃이 핀다. 병석의 노인인 일휴정이 그것을 본다. 그것이 세상이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며 정겹다. 우리는 이러한 시적 분위기를 노경에 보는 자연주의적인 초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긍정과 부정이 대립하다가 지양하여 마침내 종합되는 변증법적 완성이 바로 초탈이다. 초탈은 <가지마다 붉게 피는 꽃>으로 형상화되어 결구를 이룬다. 덕과 도를 찾아가는 일생 동안 때마다 붓을 들고 시()를 쓰고, ()도 쓰고, (), 통문(通文), 서신(書信), 만사(輓詞), 제문(祭文), 비문(碑文), 묘갈명(墓碣銘), 묘지명(墓誌銘), 묘표(墓標)를 쓰던 일휴정은 가지마다 붉은 꽃이 피는 길을 따라서 적막한 노구를 조금씩 더 편하게 눕히고 있는 것이다.

 

4. 맺으며

 

아버지 모암 이충민(李忠民:1588~1673,/향년 85)과 아들 일휴정 이영세(李榮世:1618.10.6.~1698.10.10./향년 80) 양 선생의 시 세계는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버지 모암이 문학적이라면 아들 일휴정은 철학적이다. 모암은 서정적이고 일휴정은 주지적이다. 모암이 직관적이라면 일휴정은 반성적이다. 모암이 긴장과 압축을 구사한다면 일휴정은 해방과 이완을 구사한다. 모암이 비교적 짧은 호흡을 유지한다면 일휴정은 보다 긴 호흡을 선호한다. 발전이라면 발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향성의 차이라고 보고 싶다. 예술성과 학문성의 근원적 차이라고 보고 싶다.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일휴정의 시는 보다 산문시 쪽으로 경도되어 있다.

 

모암이나 일휴정이나 그들의 시적 성취의 수준을 그들 각각의 학문의 발전 정도에 따라 진보의 상승방향으로의 일관된 흐름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는 관념론적 비례 논리의 오해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 정신이나 시적 성취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할 때마다 형성되는 것이다. 제제나 주제, 시대적 상황이나 환경, 작가의 실존적 현실 등이 종합적으로 녹아들어 작품으로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 창작이다. 따라서 시 정신과 학문의 수준, 시적 성취와 작품의 완성도 등은 상호 순환적 관계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창작은 예술이지 학문이 아니고, 또한 창작자의 창작 정신의 결정이지, 정치경제사회 등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아들인 일휴정이 아버지인 모암의 영향을 받았고 모암보다 더 많은 작품들을 남기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학문적 발전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라도 시적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취지이다. 시는 한 편, 한 편이 독립된 세계이며 그 세계 안에서 그만의 의미(시 정신)를 가지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감동이나 감화를 받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나 감상자의 몫이고 자유이다.

 

홀어머니의 봉양과 효도를 위하여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포기하고 한 평생 산림처사의 길을 걸으며 위기지학에 정진했던 모암은 외로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유림에서는 우뚝한 지위를 지키면서 만년에는 주학의 책임을 맡아 지역 교육에 힘씀으로써 가문의 명성을 만회[각주:154] 하였다. 또한 41녀를 두어 [각주:155]가업을 거듭 회복[각주:156] 하였는데 특히 장남 일휴정(日休亭) 영세(榮世)는 성균관 유생으로서 큰 활약을 하였을 뿐 아니라 벼슬이 참봉에 이르렀으며 그 학문의 높이가 선친을 능가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문의 번성을 기원했던 일휴정의 간곡한 마음이 그가 남기 저작의 전편에 담겨 있다.

 

일휴정은 가고 세월은 흘러 이제 325년이 지남에 따라 일휴정의 가문은 크게 번성하여 그 자손들이 곳곳에서 나라와 지역을 이끌고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2023년 현재 칠곡문화원 제19대 원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일휴정의 11세손 이형수(李炯洙, 1949~ )이다. 그는 일휴정의 후손답게 한평생을 고향을 지키며 살았으며, 막내아들이면서도 홀어머니를 모셨는데 작고할 때까지 노인병원에 모시는 것은 생각조차 않으면서 정성껏 가정에서 봉양함으로써 모친이 고향집에서 천수를 누리도록 한 효자이다. 선조의 고고한 정신과 학문적 업적을 계승하고 현창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한 그는 또한 고향에서 청빈과 절의를 바탕으로 공직생활을 하였으며 지방 서기관으로 정년퇴임을 하면서 대통령 훈장(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만년인 2022228일 선거를 통하여 제19대 칠곡문화원장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46일 취임식을 거행한 후, 선조 일휴정처럼 맑고 높은 정신으로 지역 문화를 이끌고 있다.

 

330(모암)에서 360(일휴정)의 시공을 초월하여 나와 모암과 일휴정의 만남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그들이 남긴 문집과 문집 속의 작품들의 덕분이다. 그러므로 문집과 문집 속에 수록된 작품들이 시공을 초월한 우리들의 만남을 매개한 것이다. 나는 그 매개라는 다리를 건너가고 건너오면서 조선 후기 칠곡 지역(당시는 성주 지역) 선비들의 빛나는 정신의 결정체들을 만났고 꼬장꼬장한 정신 속에 녹아든 끈끈한 삶의 현장을 만났다.

 

모암과 일휴정의 자손들에게는 조상의 붉은 피가 전해져 흐를 것이다. 문집과 작품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만나는 후대인들의 정신세계 속에는 모암과 일휴정의 푸른 정신이 알게 모르게 녹아 흐를 것이다. 인간의 위대성은 바로 그가 가진 정신에서 연유하며 바로 그 정신의 계승과 현창에 있다. 온고지신이 또한 그것이다. 종중이나 종회에서는 조상의 빛나는 정신을 다시 읽는 독회의 기회를 폭 넓게 만들어서 붉고 푸르렀던 그 정신이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는 기회를 늘려야 할 것이다. 우선은 자손들부터 희망자를 모아 년 1, 12일 정도의 독회 캠프 운영도 출발에 있어서의 하나의 방편이 될 것 같다.

 

 

 

참고문헌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일휴정선생문집()

일휴정선생문집()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일휴정회중, 일휴정선생 반궁일기, 2006.10.1.

 

시경(詩經)

주역(周易)

 

김주완, 미와 예술, 서울:형설출판사, 1994.01.01.

김주완,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서울:형설출판사, 1998.02.25.

김주완, 시집 주역 서문을 읽다, 서울:북인, 2016,04.07.

장윤수, , 길을 가며 길을 묻다. 한국국학진흥원 기획, )글항아리, 2018.9.10.

장윤수, 대구권 성리학의 지형도, 서울:심산출판사, 2021.03.31.

장흥효 지음, 경당일기(일가자료총서 [3]), 한국국학진흥원, 2012.09.03.

장흥효 지음, 강정서김영옥남춘우전백찬 옮김, 국역 경당일기, 한국국학진흥원, 2012.09.03.

N. 하르트만 원저, 하기락 편술, 자연철학, 부산:도서출판 신명, 1993.5.1.

 

장미성, 현대적 의미의 효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친애(Philia)로서의 효의 의미, 한국동서철학회, 동서철학연구VOL. 107, MARCH 2023,

하기락, 이기론의 전망, 자주인연맹, 하기락 논문집 제4, 1987.

 

김현우 지음, 모현계 2022. 7. 24., <낙강선유(洛江船遊)> 참조.(https://blog.naver.com/pkg119/222826999465)

성주군>지역별 소개 https://www.sj.go.kr/page.do?mnu_uid=2325&#

여헌팔대서원 https://cafe.daum.net/hamyanghak/rxVI/200?q=%EB%AA%A8%EC%95%94%20%EC%9D%B4%EC%B6%A9%EB%AF%BC%20%EB%B0%B0%ED%96%A5&re=1

한강 정구 선생 묘지명(허목 찬) https://009448.tistory.com/16145869

홈실(일명: 명곡)의 자연환경과 유래 https://cafe.daum.net/uoojae/4iNI/9?q=%EB%AA%A8%EC%95%94%20%EC%9D%B4%EC%B6%A9%EB%AF%BC&re=1

 

Martin Heidegger, 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1944), Gesamtausgabe 2:Vittorio Klostermann · Frankfurt a. M. 1977.

Martin. Heidegger, Holzwege(1950), Gesamtausgabe 6:Vittorio Klostermann·Frankfurt a. M. 1950.("Wozu Dichter")

Martin. Heidegger, Unterwegs zur Sprache(1959), Gesamtausgabe 12:Vittorio Klostermann · Frankfurt a. M. 1985.("Die Sprache im Gedicht")

Nicolai Hartmann, Das Problem des geistigen Seins,Untersuchungen zur Grundlegung der Geschichtsphilosophie und der Geisteswissenschaften(1933),3 Aufl.Berlin 1962.

Nicolai Hartmann, Einführung in die Philosophie. Überarbeitete, vom Verfasser genehmigte Nachschrift der Vorlesung im Sommersemester 1949 in Göttingen(Bearbeitung:Karl Auerbach), 5.Aufl.

Nicolai Hartmann, Ethik(1926), 4.Aufl. Berlin 1962.(이하 E.로 약기함) S. 371.

Nicolai Hartmann, Philosophie Der Natur, Abriss der Speziellen Kategorienlehre(1950), 2, Unveränderte Auflage. WALTER DE GRUYTERBERLINNEW YORK 1980.

 

[논문]-(김주완)-모암ㆍ일휴정 양 선생의 시 정신이 갖는 현대적 의미[2023.09.15-칠곡문화원]-[최종].hwp
0.15MB
제29회 경북역사인물학술발표회 PDF (최종)-2023 칠곡문화원.pdf
8.69MB

  1. 김주완(金柱完, 1949~ ) : 경북 왜관 출생, 1984현대시학추천완료(구상 시인 추천). 철학박사(예술철학 전공) 대구한의대 교수(대학원장, 교육대학원장, 국학대학장, 교무처장, 기획처장, 행정처장, 홍보실장, 제한의료원 기획관리실장) 역임, 대구교육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대한철학회장, 한국동서철학회장, 새한철학회장 역임, 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그늘의 정체, 주역 서문을 읽다외 다수. 카툰 에세이집 짧으면서도 긴 사랑 이야기. 저서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미와 예술외 다수. 논문 시와 언어, 시의 정신 치료적 기능에 대한 철학적 정초외 다수. 한국문학상경북문학상경북예술대상 수상. 2015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한국문협 이사경북문협 회장 역임. ) 운제철학상 운영위원장. [본문으로]
  2. Nicolai Hartmann, Philosophie Der Natur, Abriss der Speziellen Kategorienlehre(1950), 2, Unveränderte Auflage. WALTER DE GRUYTERBERLINNEW YORK 1980.(이하 PdN.으로 약기함) S.149. [본문으로]
  3. N. 하르트만 원저, 하기락 편술, 자연철학, 부산:도서출판 신명, 1993.5.1., 126. [본문으로]
  4. Nicolai Hartmann, Das Problem des geistigen Seins, Untersuchungen zur Grundlegung der Geschichtsphilosophie und der Geisteswissenschaften(1933),3 Aufl.Berlin 1962.(이하 PdgS.로 약기함) S.417. [본문으로]
  5. 모암과 일휴정이 살았던 현재의 경북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와 달오리는 17세기 당시에는 현재의 성주군에 속해 있었다.(왜관향토사학회, 왜관 100년사, 2011.11., 8~9.) 이러한 사정을 장윤수는 지금은 군세가 칠곡이 성주보다 압도적으로 왕성하지만, 근대화 이전 시대에는 오랫동안 칠곡지역이 성주의 직접적인 관할구역 안에 있었다”(장윤수, 대구권 성리학의 지형도, 서울:심산출판사, 2021.03.31., 317)고 말한다. [본문으로]
  6. N. 하르트만 원저, 하기락 편술, 자연철학, 부산:도서출판 신명, 1993.5.1., 24. [본문으로]
  7. Martin. Heidegger, Unterwegs zur Sprache(1959), Gesamtausgabe 12:Vittorio Klostermann · Frankfurt a. M. 1985.(이하 US.로 약기함) S.74~75.("Die Sprache im Gedicht") [본문으로]
  8. Martin. Heidegger, Holzwege(1950), Gesamtausgabe 6:Vittorio Klostermann·Frankfurt a. M. 1950.(이하 Hw.로 약기함) S.252.("Wozu Dichter") [본문으로]
  9.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05~106.(잡저, 영천 초천일기) [본문으로]
  10.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8~19.(성천 스님과 헤어지며) [본문으로]
  11. 이 글에서의 연령 표기는 연나이로 통일한다. [본문으로]
  12.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05.(잡저, 영천 초천일기) [본문으로]
  13.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02.(잡저, 영천 초천일기) [본문으로]
  14.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15.(행장) [본문으로]
  15. 환언하면 제창은 모암의 할머니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으로 보인다. “당시의 상속제도로 보아 모암의 할머니가 친정 농토를 상속 받았을 수 있고, 그랬을 때 제창으로 가서 영농을 하여야 하는데 직접 가지 못하고 아들 내외(모암의 부모)를 거기로 보내어 그 일을 시켰을 수 있으며 그때 거기서 손자인 모암이 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장윤수는 해석한다. 그렇다고 했을 때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에는 칠곡 석전에 살던 모암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처가 곳이자 아들 내외(모암의 부모)가 살고 있는 제창현으로 피란을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16.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36.(모암의 조고인 졸암부군의 묘표) [본문으로]
  17.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36.(조부 졸암부군 묘표) [본문으로]
  18.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36.(조부 졸암부군 묘표) [본문으로]
  19.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87(사위 장경최의 제문), 216,(행장) 243.(묘지명) [본문으로]
  20.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16.(행장) [본문으로]
  21.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16.(행장) [본문으로]
  22.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3쪽.(시, 「어머니가 오래 사시기를 비는 노래」) [본문으로]
  23.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52.(서신, 군학의 여러 제군들에게 주는 글) [본문으로]
  24.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18(행장) [본문으로]
  25.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90(사위 장경최의 제문) [본문으로]
  26.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52(묘갈명) [본문으로]
  27. Nicolai Hartmann, Ethik(1926), 4.Aufl. Berlin 1962.(이하 E.로 약기함) S.371. [본문으로]
  28.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3쪽.(시, 「안동 제비원을 지나며」) [본문으로]
  29. 서양현대철학에서는 효 개념을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채무이론, 둘째 감사 이론, 셋째 특별한 재화(goods) 이론, 넷째 우정이론, 다섯째 사회역할이론이다.(이에 대해서는 장미성, 현대적 의미의 효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친애(Philia)로서의 효의 의미, 한국동서철학회, 동서철학연구VOL. 107, MARCH 2023, 123~133쪽을 참고할 것) [본문으로]
  30. 장미성, 현대적 의미의 효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친애(Philia)로서의 효의 의미, 한국동서철학회, 동서철학연구VOL. 107, MARCH 2023, 141. [본문으로]
  31. 장미성, 현대적 의미의 효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친애(Philia)로서의 효의 의미, 한국동서철학회, 동서철학연구VOL. 107, MARCH 2023, 127. [본문으로]
  32. Nicolai Hartmann, Einführung in die Philosophie. Überarbeitete, vom Verfasser genehmigte Nachschrift der Vorlesung im Sommersemester 1949 in Göttingen(Bearbeitung:Karl Auerbach), 5.Aufl.(이하 EiP.로 약칭함) S.177. [본문으로]
  33. Nicolai Hartmann, EiP.160. 참조. [본문으로]
  34. 장미성, 현대적 의미의 효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친애(Philia)로서의 효의 의미, 한국동서철학회, 동서철학연구VOL. 107, MARCH 2023, 141~143. [본문으로]
  35.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05.(군수 정기철의 제문) [본문으로]
  36. 일본의 계몽 사상가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1867년에 처음으로 philosophy를 철학이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본문으로]
  37. Martin Heidegger, 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1944), Gesamtausgabe 2:Vittorio Klostermann · Frankfurt a. M. 1977.(이하 EHD로 약기함) S. 112. [본문으로]
  38. Martin Heidegger, EHD.104. [본문으로]
  39.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4쪽.(시, 「우연히 읊음」) [본문으로]
  40.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4쪽.(시, 「우연히 읊음」) [본문으로]
  41.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 2003.10., 73쪽.(논, 「범방이 수양산 곁에 묻히기를 소원함을 논함」) [본문으로]
  42.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02.(군수 정기철의 제문) [본문으로]
  43.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0쪽.(시, 「서재에 앉아 가을밤을 새우네」) [본문으로]
  44. 모암이 홀어머니를 따라 임진왜란 중인 6(1594)에 거창에서 구미 인동으로 이사 온 기록은 있으나 그 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로 이사온 기록은 찾지 못했다. 낙촌 이도장(洛村 李道長, 1604~1644)을 애도하여 모암(1588~1673)이 쓴 제문에는 이도장과 모암이 같은 우물을 20년이나 먹었다”(국역 모암선생문집, 127)고 하는 언급이 있다. 이도장은 매원 마을에 살았고 작고 전 20년이면 1625년 경이 되는데 이때 낙촌 이도장의 나이는 21, 모암의 나이는 37세이다. 낙촌 이도장의 동생으로서 직장을 역임한 감호당 이도장(鑑湖堂 李道章, 16071677)이 모암을 애도하여 쓴 제문에는 임술(1622)년에 같은 매원 마을에 살았고 이웃에 주택을 지어 이후 50년간 내왕하였다”(국역 모암선생문집, 177.)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감호당 이도장의 나이는 15, 모암의 나이는 34세이다. 이 두 가지 기록을 종합하면 모암은 외가 곳인 인동에 살다가 그 후 34(1622)에 매원 마을로 와서 평생을 산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사이(1594~1622)의 어느 기간을 모암의 재소(齋所)가 있는 왜관읍 석전리에서 살았을 수 있다. 그 후 모암의 아들인 일휴정 이영세가 74(1692)에 왜관읍 매원리에서 달오리로 이주해 나오게 된다. [본문으로]
  45.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97`.(이두징의 제문) [본문으로]
  46.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6쪽.(시, 「달을 바라보며」) [본문으로]
  47.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5쪽.(시, 「양정 가는 길」) [본문으로]
  48. 이곳은 고려 때부터 양창(糧倉)이 있었으므로 창평(倉坪)이라고 하였다. 조선 초 염소를 길러서 양장(羊場)이라고도 했다. 또 조선 후기 양지바르고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양정(陽亭)이라고 칭했다.(https://www.sj.go.kr/page.do?mnu_uid=2325&# 성주군>지역별 소개) [본문으로]
  49. Nicolai Hartmann, Pdgs.442. [본문으로]
  50. 모암이 칠곡 매원에서 양정까지 걸어간 노정은, 칠곡 매원 돌밭나루 강정나루 기산 월항 성주 양정으로 짐작된다. [본문으로]
  51.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16.(행장) [본문으로]
  52.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6~17쪽.(시, 「계룡산을 바라보며」) [본문으로]
  53.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02~108.(잡저, 영천 초천일기) 이 일기에는 모암이 날마다 목욕한 횟수가 기록되어 있다.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출발 5일째에는 데리고 간 큰 아들을 시켜서 집으로 보내고 7일째에는 둘째 아들을 시켜서 집으로 보냈다. 14일째 되는 날에는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서 모암이 절을 올렸다. 15일째 되는 날에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부석사로 가서 시를 지어 창하고 답을 하였다. 20일째에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의 기력이 출행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어 마음을 놓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54.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7쪽.(시, 「지리산을 지나며」) [본문으로]
  55. 이 부분을 국역 모암선생문집18쪽에서는 꽃다운 영혼과 뜰에 하인은 바다에 구슬 같은 스님이네라고 직역하고 있는데 이렇게 번역하게 되면 시의 전체적 흐름과는 문맥이나 뜻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56. 장윤수, , 길을 가며 길을 묻다. 한국국학진흥원 기획, )글항아리, 2018.9.10., 38. [본문으로]
  57. 장윤수, , 길을 가며 길을 묻다. 한국국학진흥원 기획, )글항아리, 2018.9.10., 47. [본문으로]
  58. 장윤수, , 길을 가며 길을 묻다. 한국국학진흥원 기획, )글항아리, 2018.9.10., 48. [본문으로]
  59.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16쪽.(행장) [본문으로]
  60.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16쪽.(행장) [본문으로]
  61.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16쪽.(행장) [본문으로]
  62.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08~111쪽.(잡저, 「용화산 아래 함께 배를 탄 기록의 뒤에 씀」) [본문으로]
  63. 김현우 지음, 모현계 2022. 7. 24., <낙강선유(洛江船遊)> 참조.(https://blog.naver.com/pkg119/222826999465) 참조. [본문으로]
  64.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51쪽.(묘갈명) [본문으로]
  65.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35~37쪽.(한강 선생에게 올린 서신) [본문으로]
  66. 모암은 완석 이언영을 추모하는 제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난날을 회상하며 감사한다. “생각하니 나는 못생긴 사람으로 아버지를 잃은 고로여생이요. 끝내 형제도 적었고 또한 사우도 없어 혼자 다니며 체두(고독)가 있었더니 공은 오직 가엽게 여기시며 <나와 같은 종친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이끌어 함께 돌아가며 혼미함을 두드리고 몽매함을 열어주시니 문정(門庭)을 출입함이 삼기(三紀)를 내려오며 금일에 이를 수 있었으니 이것은 누가 주셨을까?”(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19쪽.(족조 완석 선생의 제문) [본문으로]
  67.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1리 속칭 홈실(椧谷)마을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900여 년 전인 고려 인종때 벽진장군 이총언(李悤言:858∼938)의 7세손인 이방화(李芳華 :광록대부 상호군)가 당풍(唐風)의 명당을 찾아 이곳 곡성산(穀城山) 아래 터를 잡았다. 당풍(唐風)이「이 마을에는 대대로 경상(卿相)이 나고 장래에는 오형제(五兄弟)의 고관이 태어날 곳이라」고 하면서 만약 중세에 운이 쇠약하면「천지(天池) 북(北)쪽에 있는 달마산록에 큰비가 내려 천지(天池)가 붕괴 매몰되고 마을의 닭과 개, 다음에는 소와 말이 죽고, 이어 그 화가 장차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타 지역(他地域)으로 이거(移居)하지 않으면 그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 예언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방화의 고손 이견간(李堅幹)은 호가 국헌(菊軒)또는 산화(山花)이고 시호는 문안(文安), 문장과 덕행으로 세상에 산화이선생(山花李先生)으로 널리 알려졌다. 1317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원순제(元順帝)가 선생의 문장과 풍채에 탄복하여, 살고 있는 곳을 물었는데 그때 호음곡(好音谷)이라하여 고향을 그림으로 그려 보이니 원순제가 이를 보고 이 마을에는 산이 많고 물이 적어 걸수산(乞水山)의 물을 당겨와야 하므로 명(椧) 자(字)를 지어서 마을 이름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전해지며 이때부터 명곡(椧谷)으로 불리워졌다. 산화 이선생의 자손들도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는데 증손(曾孫) 희경(希慶: 1343∼1377)은 경상도 병마도원수(慶尙道兵馬都元帥)로 왜구 아기발도(阿其拔都)를 격퇴하여 증 병조판서가 되었는데, 그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고관대작이 되어「오지다(五之) :가득차다」란 말이 생겼다고도 한다. 즉 도원수공의 1남 건지(建之: 1357∼1415)는 조선조(朝鮮朝)의 이조판서(吏曹判書),시호는 정헌(正獻)이다, 2남 심지(審之)는 증(贈) 병조판서(兵曹判書), 3남 수지(粹之: 1418년졸)는 운봉감무(雲峰監務), 4남 신지(愼之)는 조판서, 5남 사지(思之)는 중랑장(中郞將)으로, 이들 5형제 모두가 문중을 빛나게 하고 나라의 갑족(甲族)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말년에 과연 당풍이 말한 바와 같이 천지(天池)가 매몰되고 명곡의 닭, 개, 소와 말이 죽곤 하는 천재지변이 일어나 마을은 폐허가 되고 자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즉 희경(希慶)의 1남 건지(建之)와 3남 수지(粹之)는 칠곡으로, 2남 심지(審之)는 선산으로, 4남 신지(愼之)는 창령으로, 5남 사지(思之)는 밀양으로 그 일가(一家)를 데리고 흩어져 지금 영남의 여러 군으로 이거(移居)하게 되었으니, 이들 5형제의 후손들은 명곡이 실질적으로 제이발원지(第二發源地)라 할 수 있다. 이 때가 1450∼1500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후 150여 년이 지난 임술년(1622: 광해14년)정월에 완정 이언영(李彦英: 1568∼1639)과 모암(慕巖) 이충민(李忠民: 1588∼1673) 양공(兩公)이 술사(術士) 두사충(杜思忠)을 대동하고 산화선생고기(山花先生故基)인 명곡(椧谷)을 방문했는데 두(杜)씨가 동네 입구에서 재배(再拜)를 하면서「이 곳은 횡기(橫旗)가 앞에 펄럭이고 있는 장군패검형(將軍佩劍形)으로 실로 희귀한 명당이다」하면서 성주의 5명기(名基)중 마땅히 제1이라 했다. 벽리(碧李)가 명곡(椧谷)을 떠난지 약200여년이 훨씬 지나 칠곡에 거주하고 있던 위 양공(兩公)의 후손들이 페허가 된 명곡마을에 다시 터를 닦고 가문을 일으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문으로]
  68.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44쪽.(묘지명). 23~34쪽(상소문) [본문으로]
  69.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44쪽(묘지명), 253쪽(묘갈명) [본문으로]
  70.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00쪽.(이두징의 제문) [본문으로]
  71.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04쪽.(군수 정기철의 제문) [본문으로]
  72. 1561년에 성주목사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스승 퇴계의 뜻을 좇아 칠곡군 지천면에 녹봉서숙(鹿峰書塾, 지금의 녹봉정사)을 짓고 교육의 장으로 삼았는데 모암의 조부 졸암부군(拙庵府君) 이창국(李昌國, 1541~1593)을 녹봉동주((鹿峰洞主)로 임명하여 그 책임을 맡김으로서 운영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전쟁(임진왜란)의 화재로 소실되고 그 후 고을 사람들이 경비를 모아 재건하였으나 규모가 당초보다는 매우 작았다. 모암은 큰 병을 앓은 후라 재건한 녹봉서숙의 전교를 사양하였다.(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48~49쪽, 서간문, 「참봉 이의에게 답함」) [본문으로]
  73.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52쪽.(서간문, 「군학의 여러 제자에게 주는 글」) [본문으로]
  74.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35쪽.(묘표) [본문으로]
  75.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9쪽.(시, 「좌윤 조기를 애도하며」) [본문으로]
  76.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0~21쪽.(시, 「동추 송광택을 애도하며」) [본문으로]
  77. Nicolai Hartmann, E.408~410. 참조. [본문으로]
  78.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1~22쪽.(시, 「백천 이천봉을 애도하며」) [본문으로]
  79.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2~23쪽.(시, 「황금 원숭이를 바라보며」) [본문으로]
  80.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71.(, 범방이 수양산 그늘에 묻히기를 소원함을 논함) [본문으로]
  81. <猗歟>는 한시 번역의 일반적인 관례에 따라 <아! 아름답도다>로 옮긴다. [본문으로]
  82. <만생고경절(晩生高景切)>을 국역 모암선생문집22쪽에서는 <늦은 후생(後生)이 높이 경앙(景仰)하여>로 번역하고 있는데 우선 <()>이 번역에 반영되지 않은 듯하다. 또한 <경앙(景仰)하다><덕망이나 인품을 사모하여 우러러보다>라는 의미인데 앞뒤 문맥에서 우러러볼 대상이 나타나 있지 않다. 어쨌든 <높이 경앙(景仰)하여>라는 번역은 앞뒤 문맥에서 어떻게 연결시켜도 뜻이 통하지 않는 번역이다. [본문으로]
  83. 삼원(三元) 이인수(李仁洙, 1926~ ) 선생은, 2023915() 칠곡문화원에서 개최하는 <모암(慕巖) 이충민(李忠民)선생과 일휴정(日休亭) 이영세(李榮世)선생의 성리사상 학술대회>를 위하여 일휴정 선생 문집(), 일휴정 선생 문집()두 권의 내용 일부를 특별히 번역하였다. [본문으로]
  84. 일휴정문집()泮宮除夕和贈李勉餘(12)와 일휴정속집의 섣달 그믐밤의 회포를 풀다(18~21)가 동일한 시편이고, 일휴정문집()酬李察訪雲長(13~15)은 일휴정속집의 운장 이창진과 수창하다(27~37)의 초고로 보이는 시편이다. [본문으로]
  85. 일휴정의 작품 중에서 장시 또는 산문에 해당하는 글은, 이 글의 분량을 조절하기 위하여 한자 원문을 인용하지 않는다. 번역문의 경우도 전문(全文)의 인용은 배제하고 필요한 부분만 인용한다. [본문으로]
  86.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18.(, 섣달 그믐밤의 회포를 풀다) [본문으로]
  87.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21.(, 섣달 그믐밤의 회포를 풀다) [본문으로]
  88. 일휴정선생문집()9, (, 사직서에서 번을 서며) [본문으로]
  89. 일휴정이 성균관 유학 생활을 한 기간이 가장 긴 1655년에는, 237일을 성균관이 있는 반촌에 머물며 일기를 쓰는데, 이 기간 중에 고향 꿈을 꾼 날이 21일이고 꿈자리가 어지러웠던 날이 2일이며 크고 작은 질병으로 앓은 날은 41일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일휴정은 유학 일정을 소화했다. [본문으로]
  90. 일휴정회중, 일휴정선생 반궁일기, 2006.10.1., 66.(1655.6.21. 일기) [본문으로]
  91. 일휴정회중, 일휴정선생 반궁일기, 2006.10.1., 66.(1655.6.22. 일기) [본문으로]
  92. 일휴정에게는 4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안세(安世), 봉세(奉世), 신세(愼世), 여동생(남편 장경최)이 있었다.(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55쪽.(묘갈명)) <애세(愛世)>는 이들 중의 한 사람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동생 전부를 가리키는 애칭이 아닌가 한다. 일휴정의 아버지인 모암을 애도하는 다음과 같은 이도장(李道章, 1607~1677)의 회상으로 보아 남동생 3명 중 1명은 일찍 별세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해 봄에 내가 막내 아들의 상(喪)을 당하였더니 공(公)이 곧장 급히 달려와서 위로하며 달래고 정성스럽게 슬퍼하시더니 일찍이 수개월이 아니 되어 공(公)도 또 나와 같은 슬픔을 만났으니”-(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78쪽.(모암(1588~1673)을 애도하는 이도장(李道章, 1607~1677)의 「제문」) [본문으로]
  93. 일휴정회중, 『일휴정선생 반궁일기』, 2006.10.1., 23쪽.(1655.2.7. 일기) [본문으로]
  94.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181.(, 충과 효의 물음에 답함) [본문으로]
  95.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181.(, 충과 효의 물음에 답함) [본문으로]
  96.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182.(, 충과 효의 물음에 답함) [본문으로]
  97.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182.(, 충과 효의 물음에 답함) [본문으로]
  98.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183.(, 충과 효의 물음에 답함) [본문으로]
  99.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184.(, 충과 효의 물음에 답함) [본문으로]
  100.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185.(, 충과 효의 물음에 답함) [본문으로]
  101.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187쪽.(논, 「충과 효의 물음에 답함」) [본문으로]
  102. 시경(詩經) 모시 서(毛詩序) [본문으로]
  103. 시경(詩經) 모시 서(毛詩序) [본문으로]
  104.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61. (죽은 아내 제문) [본문으로]
  105.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355.(묘갈명) [본문으로]
  106.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14.(우연히 읊음) [본문으로]
  107.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73.(, 범방이 수양산 곁에 묻히기를 소원함을 논함) [본문으로]
  108.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28.(운장 이창진과 수창하다)/347(행장) [본문으로]
  109.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52~53쪽. [본문으로]
  110.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58~59. (죽은 아내 제문) [본문으로]
  111. 일휴정회중, 일휴정 선생 반궁일기, 2006.10.1., 명금당, 3.(1653917, 25, 26일 일기) [본문으로]
  112. 『일휴정선생문집(건)』 12쪽,(시, 「반궁제석화증이면여(泮宮除夕和贈李勉餘)」) /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18~21쪽.(시, 「섣달 그믐밤의 회포를 읊다(除夕詠懷)」) [본문으로]
  113. 일휴정회중, 일휴정 선생 반궁일기, 2006.10.1., 명금당, 8. [본문으로]
  114. 일휴정은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여기서의 양아(兩兒)는 두 아들을 일컫는 것으로 보이며, 이름은 명갑(名甲), 용갑(龍甲)이다.(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350쪽.(행장)) 딸 2명은 이주정(李周禎)과 이경(李炅)에게 출가하였다.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355~356쪽.(묘갈명)). [본문으로]
  115. 일휴정회중, 『일휴정 선생 반궁일기』, 2006.10.1., 명금당, 102~111쪽. 발췌 요약. [본문으로]
  116.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46쪽.(시, 「이 판서를 애도하며」) [본문으로]
  117. 일휴정선생문집()6.(, 挽李判書元禎) [본문으로]
  118. Nicolai Hartmann, E.398~400 참조. [본문으로]
  119. 1650년 7월 16일에 치러진 사마시(司馬試)에서 32세의 일휴정은 3등으로 급제하고, 28세인 이원정은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날은 아내의 대상일이었는데 일휴정은 “천리땅 남쪽을 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과거 시험장에 있었다.(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65쪽.(망실묘제문)) [본문으로]
  120. 창주(滄洲)는 이창진(李昌鎭, 1619~1684)의 호. [본문으로]
  121.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100~103쪽.(이판서 제문) [본문으로]
  122.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27~37. 수이운장창진이 시의 초고로 보이는 시가 일휴정선생문집()13~15酬李察訪雲長이란 제목으로 102구가 실려 있는데 몇 자는 바꾸고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이 초고 그대로 옮겨져서 일휴정속집에 수록된 이 시 수이운장창진226구에 포함되었다. [본문으로]
  123.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347.(행장) [본문으로]
  124. 이창진(李昌鎭, 1619~1684) : 조선후기의 학자, 자는 운장(雲長), 호는 창주(滄洲), 본관은 벽진(碧珍), 언영(彦英)의 아들이며 칠곡(漆谷)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행동을 바로 하고 학문에 힘썼다. 1650(효종 1) 과거에 응하려고 할 때 성균관 유생이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승무를 청한 것을 영남유생이 반대하다가 소를 올린 우두머리가 유벌(儒罰)을 받는 것을 보고 과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어 과거에 나가지 않을 것을 결의하고 독서와 수양에 힘썼으며, 만년에 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125. 완석정 정자는 현재의 경북 칠곡군 왜관읍 자고산길 흥국사 아래쪽에 있으며, 나는 1963~1964 여름방학 기간에 동쪽 방을 빌려 공부방으로 쓴 적이 있다. [본문으로]
  126. 소탐(蘇眈)은 옛 선인(仙人). 봉모지효(奉母之孝)를 하였는데, 끝까지 봉양하지 못하고 신선이 되어 올라가며 명년에 역병이 있을 것을 알고 귤나무 잎과 우물의 물로 치유 방법을 전하였다 함. [본문으로]
  127. <100리 모래사장>은 완석정 정자에서 지금의 왜관 철교 쪽을 내려다 본 정경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28.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27~37쪽.(시, 「운장 이창진과 시를 주고받으며」) / 전체 226구의 시를 여기서는 절반 정도로 발췌하였다. [본문으로]
  129.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39~40.(, 이찰방을 애도하며(挽李察訪)) [본문으로]
  130.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360.(묘지명) [본문으로]
  131. 『일휴정선생문집(건)』 8~9,(시, 「사직서에서 번을 서며(社稷署直中)」) [본문으로]
  132.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52~53쪽(서간문, 「예갑 형갑 두 조카는 보아라」 1684.04.17.) [본문으로]
  133. 한강 정구 선생 묘지명(허목 찬) https://009448.tistory.com/16145869 [본문으로]
  134. 자주인연맹, 『하기락 논문집 제4권』, 1987. 168쪽.(「이기론의 전망」-1981년 한국철학회 주최 국제학술대회 기조발표) [본문으로]
  135. 일휴정회중, 일휴정 선생 반궁일기, 2006.10.1., 명금당, 27. [본문으로]
  136. 일휴정회중, 일휴정 선생 반궁일기, 2006.10.1., 명금당, 96. [본문으로]
  137. 『일휴정선생문집(건)』 2쪽,(시, 「주역을 읽다(讀易)」) [본문으로]
  138. 주역계사상전 12. [본문으로]
  139. 주역계사상전 12. [본문으로]
  140. Nicolai Hartmann, Pdgs.7. [본문으로]
  141. 김주완 시집, 주역 서문을 읽다, 서울:북인, 2016,04.07., 40~41. [본문으로]
  142. 장흥효 지음, 경당일기(일가자료총서 [3]), 한국국학진흥원, 2012.09.03. [본문으로]
  143. 장흥효 지음, 강정서김영옥남춘우전백찬 옮김, 국역 경당일기, 한국국학진흥원, 2012.09.03. [본문으로]
  144. 장흥효 지음, 경당일기(일가자료총서 [3]), 한국국학진흥원, 2012.09.03. 11~19장흥효 지음, 강정서김영옥남춘우전백찬 옮김, 국역 경당일기, 한국국학진흥원, 2012.09.03. 29~76. [본문으로]
  145. 이 시는 『경당일기』 을묘년乙卯年(1615년) 7월 병오丙午(1일) “주역 서문을 읽다(讀易序)”의 기록을 전후하여 재구성하였음. [본문으로]
  146. 장윤수, , 길을 가며 길을 묻다. 한국국학진흥원 기획, )글항아리, 2018.9.10., 348. [본문으로]
  147. 김주완,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서울:형설출판사, 1998.02.25., 390. [본문으로]
  148. 김주완,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서울:형설출판사, 1998.02.25., 384. [본문으로]
  149. 김주완,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서울:형설출판사, 1998.02.25., 299~300. [본문으로]
  150. 김주완, 미와 예술, 서울:형설출판사, 1994.01.01., 344. [본문으로]
  151. 일휴정회중, 국역 일휴정속집, 2019.4., 349(행장), 355(묘갈명) [본문으로]
  152. 『일휴정선생문집(건)』 5~6쪽.(시, 「한거만영(閒居謾詠)」) [본문으로]
  153. 『일휴정선생문집(건)』 2쪽.(시, 「월촌서회(月村書懷)」) [본문으로]
  154.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28.(행장) [본문으로]
  155.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46~247(묘지명) / 255.(묘갈명) [본문으로]
  156. 벽진이씨모암파종중, 국역 모암선생문집, 2003.10., 228.(행장)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