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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나무대문 앞 키 큰 나무 한 그루 /(시) 우산 4 [김주완]

김주완 2015. 5. 8. 22:51

 

 

 

 

서울:스타북스, 2015. 5. 10. 초판발행

 

                 197쪽

           

우산 4 / 김주완

 

나무의 가지가 되고 잎이 되어

말없는 산속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머니

봄이면 철쭉 저린 꽃을 피우며 애간장이 마르더니

장맛비 철철 퍼붓는 진날이 되자

잿물 들인 치맛자락 활짝 펴시어

저 비 피해가라

궂은 날을 받쳐주는 느타리버섯

      

              196쪽

낡은 나무대문 앞 키 큰 나무 한 그루 / 김주완

 

 

어머니라는 표제의 시집을 낸 적이 있다. 19881월의 일이다. 한 해 전에 작고하신 어머니를 추모하며 일 년 동안 쓴 시 스물세 편을 한 권의 얇은 시집으로 묶어 탈상제에 바쳤다. 내표지에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올렸다. 완성도가 높은 시편들이 아닌데도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운명의 시간부터 장례, 사십구재, 탈상의 시간대까지를 순서에 따라 그림 그리듯이 써 내려간 시가 읽는 이의 공감을 끌어냈던 것 같다. 나는 이 일을 내가 시인이 되고 난 뒤의 가장 큰 보람으로 삼는다. 그 후 내 시의 소재에 있어서 종요로운 한 축으로 어머니는 언제나 자리 잡고 있다.

 

어머니의 표상은 기다림이다. 옛집 대문 앞에 서 있는 어머니. 돌쩌귀가 닳아 삐걱거리는 나무 대문 앞에 서서 어머니는 늘 기다렸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 아들을 기다렸고 중요한 시험에서 떨어져 고개 숙이고 돌아오는 청년이 된 아들을 기다렸고 손녀들을 데리고 다니러 오는 중년의 아들을 기다렸다. 아들만 기다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기다렸다. 유림의 행사나 중시조의 춘추 전()에서 돌아오는 아버지의 점잖은 발걸음 소리를 기다렸고 오랜 출장에서 개화한 서울 여자를 데리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렸다.

 

어머니는 자식을 외모로 사랑하지 않는다. 지위와 능력이 보잘 것 없을수록 어머니의 자정(慈情)은 더욱 깊어지고 기도는 절실해진다. 자식이 탈선하면 할수록, 곤경에 처하면 처할수록 어머니의 신앙은 더욱 공고해진다. 중학교 2학년 아들의 방에서 나오는 담배꽁초를 말없이 치우고 그 자리에 잘 씻은 유리 재떨이를 넌지시 가져다 놓으시는 어머니, 십이지장 천공의 때 놓친 수술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자식의 병상에서 소생을 철석같이 믿고 기도하는 어머니, 어머니의 신앙은 자식이다. 신앙이란 무조건적인 믿음이다. 세상의 어머니라면 누구든 자식을 끝까지 믿는다. 무조건적으로 믿는다. 그녀의 배 속에서 자라 이 세상에 나온 그녀의 분신이기에 그녀는 신앙한다. 회의가 생길 때도 있겠지만 그때마다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한다. 끝까지 믿고 기다린다. 기도하며 기다린다.

 

오늘날의 어머니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다. 대학 입시나 입사시험에 제출해야 할 아들의 자기소개서를 꼼꼼히 챙겨 주어야 하고, 야간자율학습과 학원, 그리고 집 사이를 운행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운전기사가 되어야 한다. 영양가를 계산하여 간식과 주식을 준비하는 어머니, 기쁨의 원천이 자식이고 슬픔의 진원지가 자식인 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다.

 

자식에게는 어머니가 고향이다. 고향은 모성이고 모성은 대지이다. 크고 너른 품이 그러하고 만물의 생장을 떠받치는 터전이 그러하고 가장 낮은 곳에 처하고 있음이 그러하다. 힘들거나 어려울 때 사람들은 언제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고 어머니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식을 감싸 안는다. 한 번도 내치지를 않는다. 삶에 지친 자가 문득 돌아보면 어디든지 말없이 거기 있는 이가 어머니이고 고향이다. 시집 어머니에 실은 시 처음이며 끝인 어머니의 일부를 옮겨본다. “뒤란을 돌아가면 거기/어머니가 있네/굴뚝대 뒤켠에도 장독대에도/어머니가 있네/잔잔한 어머니의 웃음이/보오얀 목련으로 벙글고 있네/눈 오는 날은 눈이 오는 대로/비 오는 날은 비가 오는 대로/어머니는 사방에 있네/사방에서 지켜보며/소그소근 달래고 있네

 

어머니를 만나려면 구시가지의 낡은 나무대문이 있는 집 앞으로 가야 한다. 거기 마른 가지를 뻗고 있는 키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을 것이다.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있을 것이다. 골목 끝으로 세상을 내다보며 간구하는 눈길이 있을 것이다. 믿음이 삶이 되는 세상이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거기 있고 그렇게 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할 수 없는 어머니의 초상, 어머니의 풍경이 거기 그렇게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