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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 쓴 부모님의 자서전] _ 엄마의 시간 _ 이하림

김주완 2014. 5. 30. 18:16

 

중학생이 쓴 부모님의 자서전_엄마의 시간_이하림.hwp

 

대구광역시교육청 책쓰기 프로젝트 책쓰기와 사랑에 빠지다

중학생이 쓴 부모님의 인생 이야기

가지 못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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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 쓴 부모님의 인생 이야기 / 가지 못한 길 / 2014526일 출간 / 도서출판 한티재 / 정가 13,000/ ISBN 978-89-97090-32-7 / 바코드 9788997090327

 

 

 

[167~186]

 

엄마의 시간

 

 

 

 

  이하림(대구북중학교 3학년)

 

 

저는 조용한 듯 보이지만 전교부회장도 해본, 나름 리더십 있는 이하림입니다. 바둑을 좋아하고 축구나 농구 같은 운동도 매우 좋아한답니다. 책 읽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 감정을 넣어서 읽어주는 것을 듣는 것은 그럭저럭 좋아하는 편입니다. (작년에 제 국어성적이 좋지 않아서 엄마가 교과서를 재미있게 읽어주시곤 하셨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글쓰기와 책에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프롤로그]

 

..

 

내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내 옆에 항상 있는 존재였다. 내가 엄마를 기억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항상 나의 엄마였다.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아기인 나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있고, 나를 목마 태우고 있는 아빠의 옆에서 내 손을 잡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엄마가 있다. 나에게 밥을 해 주는 엄마, 급식소 공사 때 도시락을 싸 주는 엄마, 내가 열이 날 때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는 엄마, 내가 입원했을 때 나를 간호해 주는 엄마, 내 공부를 봐 주는 엄마, 나를 학원에 태워주는 엄마. 이렇게 엄마는 나에게 그냥 나의 엄.였다.

 

나를 낳기 전의 엄마는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내 엄마로서가 아닌 엄마 자신으로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엄마는 그냥 나의 엄마였을 뿐 그 외의 다른 모습이 궁금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엄마로서가 아닌 당신의 이름 석 자로서 살아 온 시간을 들어보려고 한다.

 

 

 

[개나리 피는 봄날, 엄마의 생일]

 

19733월 개나리가 피기 시작하던 어느 봄날, 대구 호산나산부인과에서 울지 못하는 한 아기가 태어났다.

 

아이가 역아라서 이대로는 산모와 아이가 다 위험합니다. 산모와 아기 중 하나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선생님, 둘 다 살려주세요. 꼭 둘 다를 살려주세요. 꼭이요, .”

아기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이대로 두면 산 채로 분만할 수가 없고, 산모는 산모대로 너무 위험합니다.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럼 선생님…… 산모를, 산모를 살려주세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000, 1607분에 딸을 출산하셨습니다.”

산모는요?”

산모도 무사하고 아기는 2.8킬로그램입니다. 아기가 고생을 너무 해서 울지도 못하네요. 의사선생님이 조치하셔서 지금은 괜찮습니다. 축하드려요.”

 

아기 아빠의 간절한 바람이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고 한 여자아기가 그렇게 울지도 못한 채 이 세상에 태어났다.

 

  

[코스모스 같은 초등학교 시절]

 

이렇게 허약하게 태어난 엄마는 잦은 병치레를 해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놀라게 하곤 하셨다 한다. 태어날 때 역아로 태어난 탓에 목에 사경(斜頸)이 생겨 생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수술을 하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갓난아기에게 마취를 하는 것이 위험하다 하여 마취를 하지 않고 수술을 해 엄마는 목소리가 다 쉬도록 울었고, 엄마가 우는 소리를 듣고 할머니도 같이 우셨다고 한다. 수술 이후 엄마는 하얀 가운 같은 옷을 입은 사람만 봐도 울어댔다고 한다. 중국음식점 주방장, 이발소 아저씨가 하얀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엄마는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엄마가 너무 똑똑해서 그렇다고 하신다(믿거나 말거나). 이 외에도 엄마는 자주 아파서 새벽에 할아버지가 엄마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가시기도 하고, 참 여러 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마음을 졸이시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약한 우리 엄마는 자라는 동안 동생인 이모보다도 키가 작아서 사람들은 엄마가 이모의 동생인 줄 알았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맨 앞줄에 앉으셨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키가 크기 시작해 대학교에 가서까지도 키가 자랐다고 하신다. (그래도 아직도 우리 엄마는 이모보다 키가 작으시다.) 여하튼 엄마는 늦게 키가 크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리가 길고 몸매가 좋다고 가끔 자랑을 하시는데 신빙성 있는 주장인지는 잘 모르겠다.

 

약하고 조그만 엄마를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몸에 좋다는 것은 무조건 먹이셨다고 한다. 녹용은 봄, 가을로 일 년에 두 번씩 먹이셨고, 내가 들은 것 중에 가장 놀라운 약은…… 놀라지 마시라. 바로 사슴피. 엄마가 사슴피라는 듣기만 해도 속이 거북해지는 약을 드신 건 1979, 엄마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엄마의 외할아버지(나의 외외증조할아버지가 되시나?)께서 사슴농장을 하고 계셨고, 녹용을 위해 사슴 뿔을 자르는 날이 되면 그 뿔에서 나오는 피를 마시려고 여러 명의 아저씨들이 미리 예약을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렇게 좋은 것을 많이 먹였기 때문에 엄마가 지금까지 이 정도라도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도 어쨌거나, 나는 사슴이 조금은 불쌍하다. 그래도 그 덕분에 엄마가 지금 내 옆에 계시니 사슴에게 고맙기도 하다.)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엄마를 기르셨지만, 사실 엄마는 지금도 체력이 약하고 자주 편찮으시다. 지난주에는 대상포진에 걸리셔서 고생을 하셨는데 엄청 아픈 병이라고 한다. 병원에서는 무조건 쉬고 잘 먹어야 하는 병이라고 하는데 엄마는 출근을 하셨다. 그것이 책임감이라고 하셨다.

 

 

 

[좌절과 극기의 학창 시절]

 

행복하게 어린 시절을 보낸 엄마의 인생에 첫 위기가 찾아왔다. 경북의 초등학교 선생님이신 외할머니 때문에 엄마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시골에서 자랐다고 한다. 엄마가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엄마를 대구로 전학시키기로 결정하셨고 온 가족이 대구로 이사 오기까지의 몇 달간, 엄마는 대구에 계신 엄마의 외삼촌댁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엄마는 그 당시 막 신설된 수성구의 어느 여자중학교에 배정이 되셨다고 한다. 엄마가 외숙모의 손을 잡고 그 학교에 처음 간 날은 공교롭게도 모의고사를 치는 날이었다고 한다. 전입 담당 선생님께 시골학교에서 받은 서류 봉투를 전해 드리자 선생님은 아주 우수한 학생이 전학을 왔네. 따라 오너라하시며 엄마를 반으로 이끄셨는데, 학교가 워낙 커서 복도가 미로 같다는 느낌을 받으셨다고 한다. 교실에 도착한 선생님께서는 교실 문을 여시고, “ 2반아, 1등짜리가 전학왔대이. 느그들 긴장해야겠다. 전학생아, 니는 66번이다. 저기 맨 끝에 가서 앉아라하셨고, 반 학생들은 힐끔 엄마를 쳐다보고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자기들이 하던 일을 그냥 계속 했다고 한다.

 

전학 온 첫날, 그렇게 예상하지도 못한 시험을 치며 엄마는 그대로 벌떡 일어나 시골 학교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엄마에게 말을 걸어주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고 엄마가 먼저 다가가기에는 대구, 그것도 수성구 여학생들이 너무 까칠해 보였다고 한다. 전학 첫 날 치렀던 시험에서 엄마는 부끄러운 결과를 얻었다고 하신다. 한 반 66명 중에 28.

 

엄마에게는 대구 학생들이 다른 세상 사람들 같았다고 한다. 일단 이름부터가 시골 친구들과는 달랐다. 시골 친구들은 윤정이, 소영이 같은 다소 예쁜 이름을 가진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영순이, 갑숙이, 순복이, 길남이 같은 이름을 가졌다. 그런데 대구 학생들은 기은이, 은진이, 민정이, 심지어 파랑이라는 세련되고 사랑스런 이름을 가진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엄마는 자신의 이름이 어느 누구의 이름보다도 예쁘고 좋은 이름이라고 자부하신다.)

 

그리고 시골에서는 문장 끝을 “~로 끝냈는데, 대구 사람들은 “~로 끝내서 똑똑하지만 매정하게 들렸다고 한다. 시골 친구들은 숙제 다 해가여?” 라고 물으면 , 다 해가여라고 대답하는데, 대구 학생들은 숙제 다 해가나?” 하면 그래, 다 해 간다하고 딱딱하게 대답을 해서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어려웠다고 하신다.

 

학교에서 우유를 받아먹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 귀한 우유를 학교에서 매일 받아먹다니……. 게다가 초코우유와 딸기우유까지 학교에서 먹을 수 있더라는 것이다. 초코우유를 세 개나 받아먹는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초코우유를 먹으면 얼굴이 까매진다고 들었는데 역시 대구애구나. 초코우유를 하루에 세 개나 먹으면서 얼굴이 어떻게 저렇게 하얗지?’ 하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점심시간의 풍경도 참 놀라웠다고 한다. 그때는 도시락을 싸서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시골에서는 김치와 멸치 같은 마른 반찬이 주를 이루고 가끔 분홍 소시지를 구워 오면 서로 먹으려고 난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대구에서는 맛살에 계란을 입혀 구워 온 반찬도 거의 매일 등장하고 거기에 방울토마토 같은 과일도 조그만 통에 예쁘게 담아 오더라는 것이다.

 

이런 문화충격과 28등이라는 성적에 엄마의 자존감은 완전히 떨어졌고, 아침마다 학교 앞 공중전화에서 시골집으로 전화를 걸어 돌아가고 싶다며 울었다고 한다.

 

엄마에게 그것은 첫 시련이었고,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열등감에 빠져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를 가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하신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외할아버지 가족은 모두 대구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엄마는 이사 온 집에서 가까운 달서구의 한 여고에 배정을 받게 되셨다고 한다. 고등학생이 되어 가장 좋았던 점은 가족들이 다 같이 한 집에 살게 된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배정받은 학교에 아는 학생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그 누구도 엄마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너무나 큰 위안을 받았다. ‘28등이라는 내 성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한다. 3월 첫 모의고사에서 55명의 학생 중 엄마의 성적은 8. 성적표를 받던 날 엄마는 뛸 듯이 기뻤다고 하신다. 자신감을 회복한 엄마는 학교생활이 시골에서처럼 다시금 즐거워졌고 대구 아이들도 시골 아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며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고등학교 내내 열심히 공부했고, 마침내 학과 수석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억척 영어 선생님, 엄마의 사랑]

 

엄마는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 되셨다. 어릴 때부터 동생들에게 노래 가르쳐주는 걸 좋아하고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공부 가르치는 걸 좋아하신 엄마는 교사라는 직업이 적성에 딱 맞는다고 하신다. 올해가 교직에 들어선 지 20년이 되는 해라고 하신다. 지금까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긴 시간을 교사로 보내고 계신데, 돌아보면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났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처음 가르친 제자들은 지금 30대 후반이 되어 초등학교 학부모가 되어 있기도 하고, 제자들 중 한 명은 지금 엄마와 같은 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교사를 하시며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을 낳으셨고 우리를 기르며 많이 힘드셨다고 한다. 엄마는 내가 돌이 되기 전에 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하셨다. 낮에는 학교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며 나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어떤 때는 나를 포대기로 업은 채로 걸어 다니며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또 동생은 태어나자마자 신생아 장염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해서 엄마는 산후 조리도 하지 못하고 매일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동생이 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셔서 엄마는 그때 정말 많이 우셨다고 한다. 다행히 동생은 지금 우리 가족의 귀염둥이로 아주 잘 자라고 있다. 성실하게 공부를 하지 않아서 엄마에게 야단을 맞기도 하지만, 엄마는 예전 얘기를 할 때면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하냐는 말씀을 하신다.

 

지금도 엄마는 고3담임이셔서 많이 바쁘시다. 아침에도 일찍 출근하시고 밤에도 늦으시는 때가 많다. 몸도 약하신데 학교에서 수업하시고 집에서는 나와 동생의 공부를 봐 주시고. 이런 것을 생각하면 엄마의 잔소리를 조금 더 참아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매일이 비슷한 날들이고 돌아보면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났나 싶어 놀란다고 하신다. 똑같은 날들 속에서 엄마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엄마가 사람을 기르고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집에서는 나와 내 동생이 착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이 보람이고, 학교에서는 엄마가 가르친 많은 학생들이 멋지게 자기 일을 하며 사는 것이 보람이라고 하신다.

 

나와 동생이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엄마가 교사로서 반성이 더 많이 된다고 하신다. 처음 선생님이 되어서는 학생들의 잘못된 점을 고쳐주는 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나와 동생에게 선생님들이 이렇게 해주시면 좋겠다 싶은 대로 엄마도 학생들에게 해주려고 노력하신다고 한다. 그래서 학생들을 많이 칭찬하고 용기를 주려고 애쓰신다고 한다.(가끔 아이스크림도 사 주신다고 한다.)

 

엄마의 꿈은 나와 내 동생, 그리고 엄마가 가르치는 제자들을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 자기 몫을 잘 해내는 사람이 되도록 기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엄마는 나와 동생이 어른이 될 때까지, 그리고 퇴직을 하실 때까지 계속 공부하고 성장하는 엄마와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하신다.

 

   

[에필로그]

 

학교, , 학교 그리고 다시 집.

내가 보는 엄마의 생활은 이랬다. 그런데 엄마의 인생에 관한 얘기를 난생 처음 들으며 엄마에게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 많은 이야기를 가진 우리 엄마가 지금은 학교와 집만을 왔다 갔다 하며 단조롭게 사신다는 것이 조금 마음 아프기도 하다. 엄마가 나와 동생에게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엄마 스스로에게 들인다면 우리 엄마는 더 훌륭한 일도 하실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엄마의 보람과 꿈이 바로 우리들이라고 하시니 나와 동생이 잘 자라서 엄마에게 보람과 기쁨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야 잘 자라는 것일까? 나도 나중에 내 아이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 줄 때 내 아이가 신기해 할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면, 그래서 내 아이가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 엄마에게도 보람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가 하림에게 보내는 편지]

 

나의 첫사랑 우리 하림이에게

 

하림아.

 

엄마와 아빠는 하림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너를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너를 기다렸단다. 좋은 것만 먹고 좋은 생각만 하며 건강하고 예쁜 아가가 엄마 아빠에게 오기를 기도했단다. 맨 처음 초음파 사진을 통해 너를 만났을 때, 이제 겨우 몇 주밖에 되지 않은 네가 팔 다리를 쉼 없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하고 얼마나 신기했는지……. 다시 생각해도 입가에 웃음이 떠오른다.

 

스물한 시간의 진통 끝에 너를 낳았을 때, 네 우렁찬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엄마는 너무 감사했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단다. 엄마는 이전에도 지금도 우리 하림이만큼 예쁜 아기를 본 적이 없단다.

 

네가 태어난 그 때를 생각하면, 너를 뱃속에 품고 너와의 만남을 고대하던 그 때를 생각하면, 착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너에게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구나.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잘 알면서도 요즘은 엄마가 우리 하림이에게 자꾸 욕심을 내게 되니 말이다. 네가 착하고 잘 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조금 부족한 부분만 자꾸 지적하고 야단치고 그러고 있구나.

 

우리 하림이는 어렸을 때부터 참 착했던 것 같다. 동생을 잘 돌보고 준비물이나 숙제도 스스로 잘 챙기고. 네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가 가루비누가 다 떨어졌네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는 다음날 가게를 지나갈 때 엄마, 가루비누 샀어요?”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이 편지를 쓰며 네가 어렸을 때를 떠올려보니 넌 참 기르기가 수월한 아이였다는 생각이 들어서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드는구나.

 

엄마가 조금 걱정이 되는 건 하림이가 공부 때문에 바빠서 우리가 함께 만들 추억이 줄어드는 건 아닌가 하는 것이란다. 엄마가 하림이를 품고 있을 시간은 짧게는 일 년, 길어도 십 년 전후가 될 것 같구나. 이 시간동안 하림이가 평생을 간직할 많은 추억들을 함께 쌓아야 할텐데…….

 

하림아.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할 땐 엄마가 잔소리장이가 된 것 같았는데 이렇게 편지로 네게 이야기하니 조금 더 깊은 얘기를 할 수가 있어 좋구나. 그리고 나중에 하림이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엄마의 이 편지를 읽으며 젊은 시절의 엄마를 추억할 수 있을 테니, 이 기회가 엄마에게도, 하림이에게도 참 좋은 선물이 된 것 같다.

 

엄마의 첫사랑 하림아. 너는 엄마의 첫 아기이고 그래서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첫 사랑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엄마는 하림이가 그 일을 즐기면서 하면 좋겠다. 그리고 새로운 아침을 맞을 때마다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하는 오늘을 살겠다는 다짐을 하면 좋겠구나. 엄마는 세상 끝 날까지 나의 아들 하림이를 믿고 응원한다.

 

언제나 너의 편인 엄마가.

 

 

 

[하림이가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엄마

 

학년 초에 담임선생님께서 나눠 준 자기소개서를 쓰던 날이었죠. 엄마와 아빠의 좋은 점과 조금 불만인 점을 적는 부분이 있었어요. 별 생각 없던 저에게 엄마가 물으셨죠. “하림아, 엄마의 좋은 점이 뭐야? 불만인 점은?” 그 때 저는 별 뜻 없이 좋은 점은 없고 불만인 점은 잘 모르겠어요하고 얘기 했었죠. 저보다 더 생각 없는 동생이 옆에서 좋은 점은 잘 모르겠고 나쁜 점은 가끔 빡친다는 거요하고 거들었죠. 엄마는 처음에는 어이없어 하셨고 이어 화를 내시고 그 다음은 우셨죠. 저와 동생은 당황했어요. ‘엄마는 엄마인데, 엄마의 좋은 점과 불만인 점을 꼭 생각하고 있어야 하나?’ 제 마음은 이런 것이었답니다.

 

하지만 자서전 때문에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날의 일이 엄마에게 많이 미안했어요. 엄마는 저를 참 많이 사랑하고 계시고 엄마의 생활과 시간을 저에게 맞추고 계신데, 저는 그냥 엄마들은 원래 다 저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엄마는 다른 엄마들보다 더 저와 동생을 위해 희생하고 애쓰며 살아오신 것 같아요. 저는 엄마가 자랑스럽고 감사해요.

 

엄마. 지금 다시 말해도 될까요? 엄마의 좋은 점은요.

1. 나를 위해 희생하신다.

2. 똑똑하셔서 나의 공부와 숙제를 잘 도와주실 수 있다.

3. 예쁘시다.

그리고 엄마의 나쁜 점은요.

…… 없어요.

 

전 엄마는 늘 무엇이든 잘하기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엄마도 대구에 처음 왔을 때 열등감에 빠져 있던 때가 있었다니, 엄마가 좀 다르게 보였답니다. 엄마도 공부를 못 할 때의 기분을 느껴보셨으니까 제 성적이 만족할 만큼 나오지 않더라도 조금만 믿고 기다려주시면 좋겠어요. 나쁜 점은 없고 바라는 점은 이거랍니다.

 

엄마는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하여 교수가 되거나 이모처럼 변호사가 되면 좋겠다고 하시지만, 요즘 저는 입국심사요원이 되고 싶답니다. 공항에서 근엄한 표정으로 여권에 도장을 쾅! 찍는 모습이 정말 정말 멋져보여서요. 영문학과 교수가 되든, 입국심사요원이 되든, 어쨌든 영어공부는 더욱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요.

 

엄마. 어느 고등학교, 어느 대학교를 가든, 무슨 직업을 가지든 꼭 엄마의 보람이 되는 아들이 될게요. 그러니까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마지막으로 엄마, 제가 부끄러워서 절대 하지 않는 말을 오늘은 할게요.

사랑해요, 엄마.

 

장남 하림 올림

 

중학생이 쓴 부모님의 자서전_엄마의 시간_이하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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